1. 각기 다른 이해관계, 각기 다른 증언 ‘나생문’
나생문(羅生門)이 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1915년작 단편소설이지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비를 피해 무너져 가는 나생문(城門) 앞에 세 사내가 모입니다. 나무꾼과 스님,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은 그날 벌어진 한 괴이한 살인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이었고, 행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타조마루라는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이고 그의 부인을 강간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산적의 증언, 사무라이 부인의 증언, 무당의 입을 통해 증언되는 사무라이 혼백의 말이 완전히 다릅니다. 게다가 제3자인 나무꾼마저 이 세 사람의 증언이 다 거짓이라고 소리칩니다. 서로 다른 진술을 풀어놓을 때마다 사건은 달라집니다. 사건이 시작되는 위치도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기억이 재편되기 때문이지요.
남자답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용감했음을 강조하는 타조마루,
정숙한 여자의 이미지를 지키려 한 사무라이의 부인,
아내를 저주하고 자신의 행동은 무사로서 결단을 내린 것이라 포장하는 사무라이,
사건을 전모를 알지만 단도를 훔친 사실이 들킬까 사실을 숨긴 나무꾼.
2. 러시아의 쿠르스크호 침몰 사건(2000년)
※ 이 이야기는 시사IN 2010년 4월 24일 제136호 18면 신호철 기자의 기사를 그대로 요약한 것입니다. 신 기자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했음도 고백합니다.
2000년 8월 12일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를 지나다 원인 모를 사고를 맞아 침몰합니다. 잠수함은 해저 108m에 가라앉아 승조원 118명이 전원 사망했습니다. 침몰 원인을 놓고 논란이 시작됐습니다.
첫째, 러시아 군부 : 외부에 책임을 돌립니다.
발레리 마닐로프 러시아 해군 참모차장은 언론에다 대고 “침몰한 쿠르스크호로부터 50m 떨어진 해저에서 영국 또는 미국 핵잠수함의 선체 외부 난간으로 보이는 물체가 발견됐다”라고 말했습니다.
러시아 언론은 군부 소식통을 취재원 삼아 “사고 직후 사고 해역에서 영국 국적의 부표가 발견됐다가 가라앉았다” “사고 당시 외국 잠수함 3척이 부근 해역에 있었다”라는 보도를 연일 쏟아냈습니다.
둘째, 서방 언론과 정치인 : 오발사고에 책임을 묻습니다.
독일의 베를리너 자이퉁 등과 러시아 일부 정치인(전직 해군장교였다는 세르케이 주코프 등)들은 러시아 아군끼리 오발 사고로 침몰했다는 주장을 폅니다.
근해를 지나던 러시아 핵순양함 페테르대제호가 어뢰를 잘못 발사해 잠수함 쿠르스크호에 맞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미국정보당국 : 내부폭발설을 주장합니다.
사건 발생 6일 뒤인 8월 18일 미국 정보당국은 “우리는 쿠르스크호의 선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나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내부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며 언론에 얘기합니다.
넷째, 실체적 진실은 : 내부폭발이었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년 11개월이 지난 2002년 7월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잠수함 안에 있던 어뢰에서 연료가 유출돼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미국정부가 예측한 사고원인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6일 뒤의 사실이 1년 11개월 뒤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다섯째, 정치적 영향은 : 푸틴 대통령의 것이었습니다.
잠수함 침몰 직후에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습니다. 지지율이 10%나 하락했습니다. 사고 초기 흑해 연안의 휴양지, 앞으로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되는 소치에서 휴가를 즐겼다는 사실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푸틴은 유족들과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국민과 아픔을 나누는 지도자’ 이미지를 알리는 데 그 사건을 활용했습니다.
한 달 뒤인 2000년 9월 13일 푸틴은 ‘러시아판 유신’이라는 국익수호 독트린을 발표하며 국가 정보 통제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2002년 침몰 사고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책임을 묻기에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신호철 기자의 기사입니다.)
3. 천안함
나생문과 쿠르스크호는 천안함에 어떤 교훈으로 다가올까요?
한나라당이 다르고 민주당이 다릅니다. 대한민국이 다르고 북한이 다릅니다. 중국이 다르고 미국이 다른 듯합니다.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지정학적 상황만큼이나 복잡다지합니다.
위기관리 실패였고, 정보 실패였고, 경계 실패였고, 작전 실패였고, 구난 실패였고, 현재까지는 사고원인 조사도 난항인 것 같습니다. 거기다 6자회담을 둘러싼 남북과 중국과의 관계도 복잡계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실패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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