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 엄연한데 뉴라이트 '굿판을 걷어라'
화쟁사상 엄연한데 뉴라이트 '굿판을 걷어라'
  • 불교닷컴
  • 승인 2006.12.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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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해스님] 또 다른 좌우대립 부추기는 정치단체 웬 말

한국 불교의 1,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대승적인 파계(?)를 하면서까지 스님들은 신명을 다 바쳐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계급적인 학대를 받아가면서 까지도 호국의 일념으로 승군을 조직하여 칼과 창을 들고 전장에 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제의 강점기에도 왜색 불교를 배격하고 당당히 맞서기도 했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군단을 조직하여 남북의 대치에 맞서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 선지자들의 각고를 뒤로한 채, 편견을 버리고 양극단을 타파하고자 하는 불교의 중도적 특성을 배우는 스님들이 ‘불교뉴라이트’라는 정치색 짙은 단체를 구성하는 것을 보고 참담함을 느낍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뉴라이트’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성직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율장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 불교계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도 아니 됩니다. 종단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승가의 화합을 추구해야할 때 웬 정치적(?) 발상에 동참해야하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계마저 양극화하려는 발상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1961년에 제정된 조계종 종법인 ‘승려법’에 보면 분명히 ‘정치운동에 관여하거나 불법적인 단체에 관여한 자’는 체탈도첩이나 제적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법이 1994년 개정 이후 갑자기 사라집니다. 1962년에 제정된 ‘종무원법’에도 ‘종무원은 정치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며 종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하며 1994년까지 정치운동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종무원법도 1994년 이후에는 스님들이 정치에 관여하도록 종법의 이 조항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여 불교계에도 어떤 스님들은 사회정치의 장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그 후보로 출마까지 했습니다. 급기야 정치색이 짙은 단체인 ‘불교뉴라이트’가 만들어졌습니다. ‘불교뉴라이트’의 취지문에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공존 ․ 공생 ․ 공영 그리고 평화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세계적 추세와 달리 극단의 좌우가 대립하고, 갈등과 국론분열이 심히 국가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뜻을 같이하는 불교도가 하나로 뭉쳐 자유․ 평화․ 번영에 입각한 통일국가․ 선진한국 건설의 희망과 꿈을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헌신할 것이며, 나아가 인류애가 넘치는 지구촌 건설을 위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개를 드높이고자 범불교차원의 불교-뉴라이트 운동연합을 결성합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취지대로라면 좋지요. 그런데 그 뜻의 뒤에 숨어 있는 세력들이 문제지요. 이런 세력들을 이용하여 정권을 바꾸겠다는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은 보도된 바와 같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뉴라이트 창립준비위원장 장산 스님은 모 언론에 “내년 대선에서 보수 우익의 승리를 위해 비록 종교 편향적인 인사라도 당선을 위해 노력 하겠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발상은 오히려 ‘불교뉴라이트’는 크게는 공존과 공생, 공영이 아닌 독존과 분열을 통한 또 다른 좌우대립을 낳게 하는 시대적 산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관심을 져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안위를 걱정하는 많은 스님들이나 불자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객관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종교인으로서는 정말 무의미한 동참일 뿐 아니라, 자비와 관용을 미덕으로 삼는 불교라는 관점에서도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편향을 전제로 한 종교적 무감각을 드러낸 새로운 집단을 불교의 진정성과 혼동하면서까지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일전 어떤 스님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스님! 나라가 시끄럽고 어지러운데, 그리고 북한의 핵인가 뭔가, 시국이 이렇고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계 뉴라이트를 만들어 뉴라이트 세력에 동참하여 그 뜻을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스님 어제 오늘 우리 스님들은 지금껏 종단이 어지럽고 시끄러울 때 많은 불자들과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아직 참회하면서 지내야지요. 뭐가 그리 답답해서 스님들까지 동참하여 정치색 짙은 ‘불교뉴라이트’에 동참해야 하나요? 더구나 보스가 기독교 목사라면서요? 혹시 라이트(우익)와 레프트(좌익)의 본뜻을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흔히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사회의 혼란을 야기한다고 합니다.



한겨레의 시민편집인인 홍세화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던 터라 '좌파'와 '우파'의 개념을 설명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좌우’라는 말이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1789년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쳐부수면서 시작된 대혁명은 급기야 군주제를 지속한 것인가 아닌가로 치닫게 됩니다. 그 때 입헌군주제에 찬성했던 의원들이 의회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의원들이 의회 왼쪽에 모였던 일에서 좌우라는 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좌우의 차이는 그렇게 분명했는데, 결국 1792년에 공화국이 선포되고 루이16세는 ‘ 루이 카페’라는 평민의 이름으로 1793년 1월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프랑스의 군주제가 종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5년 권세 이후 몰락하면서 왕정은 복고되었고 1848년 2월 혁명까지 군주제는 지속됩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마침내 앙샹 레짐은 끝나는데,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모태인 자유주의가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 게 바로 이 때부터입니다. 구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은 신분질서와 토지의 지대에 바탕을 둔 귀족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때까지 구체제에 맞섰던 시민계급은 무산자계급과 유산자계급으로 나뉘어 전자는 사회주의(좌)를, 후자는 자유주의(우)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1848년에 나온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고 시대의 반영물이었지요.

좌우는 시대의 변화에 조응합니다. 구체제 아래 ‘좌’였던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그러자마자 곧 ‘우’에 자리를 잡습니다. 과거에 스스로 ‘좌’라고 했던 사람도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우’에 자리 잡으려는 경향이 강한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각 개인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재산을 축적하면 점차 우경화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철칙은 아닙니다만.

대개 사람은 사회 환경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스스로 바뀝니다. 천천히 바뀌기 때문에 바뀐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중략- ]

위의 홍세화씨의 글에서 보듯 다분히 ‘좌’와 ‘우’라는 개념은 정치적인 계산과 경제적인 분배 속에서 탄생되어진 단어들입니다. 이런 틀 속에 왜 탈세속화를 지향해야할 스님들이 그들의(불교계 뉴라이트)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합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신라의 원효스님도 특정한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 않고 비판과 분석을 통하여 보다 높은 가치를 이끌어 내어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논리에 근거하여 종합과 회통을 추구하는 화쟁(和諍)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용수보살도 ‘중론’을 통해 치우침의 걱정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런 원효스님의 화쟁적인 방법을 통하여 사회정서적으로 국가적 쟁론통합을 이끌어 내지 못할 바에는 종단을 먼저 생각한다는 차원에서, 1,300여년전에 논하였던 이 화쟁의 방법을 종단의 통합에 어떻게 처방을 할까? 또 이 사회가 그렇게 원효스님이 주장했던 화쟁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자기 능력을 상실한 많은 이들을 위한 복지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그 힘을 쏟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힘이 남아 있다면 한국 불교를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어떻게 노력을 할까를 다시 한 번 생각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괜한 정진에 쏟아야 할 힘을 그런 정치적인 장에 참여케 함으로서 세속적인 비난을 받는 것 보다 그냥 좌복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일 뿐 아니라 불조혜명을 증장시키는 일이 아닐까 감히 우려해봅니다.

끝으로 미래지향적인 가치판단이 요구되는 절실함을 담아 봅니다. 고려 때 스님인 진각 혜심스님의 선시를 소개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새벽같이,
입은 굳게 다물고
바보처럼 그렇게 가라.

송곳 끝은 날카롭게
그러나 밖으로 보이진 말라.
그래야 멋진 수행자니라.
心常了了口常默 且作伴痴方始得
師帒藏錐不露尖 是名好手眞消息

*석지현스님의 선시감상사전에 나온 시입니다.

/ 명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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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무심 2006-12-26 12:57:05
무심님! 좋은 지적이네요. 글자 한자 틀린 것까지 바로잡아주시니...위의 글 처럼 ----정치적인 장에 참여케 함으로서 세속적인 비난을 받는 것 보다 그냥 좌복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일 뿐 아니라 불조혜명을 증장시키는 일이 아닐까 감히 우려해봅니다.

무심 2006-12-26 09:57:55
정말무심님 "두두"가 아니고 "두드리다"가 맞습니다. 잘못된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것이라니 비유가 잘못된것 같군요.

정말무심 2006-12-23 20:33:28
이웃집 사람을 깨울려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워야 하나요?
무심님! 정말 무심하군요..
정중히 문을 두두리세요. 그러면 잠자던 사람은 답을 합니다. 이것이 불교적이 아닌가요?

무심 2006-12-22 11:08:26
어려운세상 힘든세상에 사는 중생구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조용히 침묵하고 있으며 깨달음을 얻고 내할일만 하면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나 ? 잘못된것은 바로잡고자하는 노력이 일을때 고쳐지는 것이다.

짝짝짝 2006-12-21 21:29:00
명해 스님이 누구신지는 몰것지만 옳으신 지적입니다 건데 뉴라이트니 머니 대략 현실감각없는 스님들이 문맥을 하나하나 이해하실지는 의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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