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7 신춘문예] 소설당선작 '요요' 유응오씨
[한국일보 2007 신춘문예] 소설당선작 '요요' 유응오씨
  • 불교닷컴
  • 승인 2007.01.0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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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 춤 동작 보고 생의 양면 떠올려"

5년째 도전이었다. 올해도 안 되는구나 싶어 이제 술, 담배 끊고 본격적으로 전념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당선 소식이었다.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가장 바라던 소식을 들은 그는 전화기 너머로 거듭 말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고.

유응오(34)씨는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가입한 대전대 새울문학회를 통해 문학을 접했다. 스스로 문학 문외한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이 술도 많이 사주고 하길래" 꾸준히 모임에 나가다 소설가의 꿈을 꾸게 됐다. 먼저 소설가가 된 김도언ㆍ김숨 부부, 2년 전 등단한 아내 우승미씨 등이 그의 문학회 동지들이다.

시(詩)로 연거푸 세 차례나 대학문학상을 받았고, 그후 불교신문에 소설이 당선된 경력이 있지만 대학 졸업 후엔 기자 생활을 하느라 소설을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러다 불현듯 소설이 다시 찾아왔다. "왜 그렇게 소설을 쓰려고 했나 생각해보면 기질이나 성정인 듯해요. 어릴 때부터 슬픔, 분노, 화 같은 감정이 많았습니다.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작고하셨고, 엄마는 일하시느라 외갓집에 절 맡기셨죠. 부성과 모성의 동시 부재, 그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공백이 절 문학으로 이끈 것 같습니다."

2003년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1년에 두세 편씩 습작을 시작한 그는 사변적이고 전통적인,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주로 써왔다. <요요>는 스스로 억압해온 그 안의 가벼움이 본색을 드러낸 첫 작품이다. "취재를 위해 비보이들의 춤 동작을 보면서 춤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도 떠나고 싶은 마음과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요요>를 썼어요."

그는 문학이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그 안에 침전된 욕망이자, 그걸 뛰어넘는 도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어차피 삶은 유한한데, 뭘 남긴다는 건 정말 해볼 만한 일이지 않느냐고 되레 묻는다. "이제 운전면허증을 갓 받은 거니까 열심히 여기저기 다녀보겠습니다. 도중에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겠지만, 샛길로 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열심히 쓰겠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심사평] 신인다움 폐기·서사의 에너지 인상적

단편소설 부문은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1차 심사를 거쳐 10편의 작품이 추려졌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김옥선 씨의 <엄마야, 엄마야>, 김의경 씨의 <주름 버섯>, 김덕희 씨의 <혈>, 이대연 씨의 <패닉 크리스탈>, 유응오 씨의 <요요> 등 다섯 편은 어떤 작품이 당선작이 된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급의 작품들이었다. <엄마야, 엄마야> <주름 버섯> <요요>는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힘이 강력했고, <혈>과 <패닉 크리스탈>은 정련된 문장과 세련된 감각이 돋보였다. 우리는,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작품의 질적 차이라기보다는 취향의 문제일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그래도 이 중에서 좀더 흠이 적고 장점이 많은 작품을 뽑아내고자 했다.

결국 서사성이 돋보이는 작품 중에서는 <요요>가,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 중에서는 <패닉 크리스탈>이 남아 마지막으로 경합을 하게 되었다. <요요>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하이틴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를 시원시원하게 뽑아내는 에너제틱한 모습이 돋보였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또 하나의 상투형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그런 상투성으로부터 이 작품이 자유로우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했다. 상대적으로 <패닉 크리스탈>은 수준급 단편소설의 전형이라 할 만큼 서사적 안정감과 세련성을 보여주었다. 신춘문예용으로 만들어진 상투적인 작품이 아니겠냐는 비판도 있었고, 소설의 초입부에 나타나는 감도 낮은 문장들이 있어, 전체적으로 균질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불만스럽게 지적되기도 했다.

4명의 심사위원들이 장시간의 논의 끝에 <요요>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한 것은 세련성보다는 신인다운 패기와 서사의 에너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당선자에게 축하하며, 아깝게 낙선한 네 사람의 예비 작가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좀더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이순원 이승우 성석제(소설가), 서영채(문학평론가)

[당선소감] 그 끝이 벼랑일지라도 문학의 길 갈터

응모작을 우체국에 부치고 돌아온 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의상을 걸친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는 어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여자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언어가 되기 전의원어(原語)로 귓속말을 했다. 피가 역류했다. 나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뒹굴었다. 여자와 누운 자리의 주변에 꽃들이 만발했다.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하늘에서 가릉빈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성역처럼 굳게 닫힌 그녀의 몸이 활짝 열렸다. 사랑을 나누고 보니 사위가 어두웠다. 여자의 몸이 푸석푸석했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내려다봤다. 얼굴이 미라처럼 늙어있었다. 깡마른 여자의 귀에 모래가 쓸렸다. 형형색색의 꽃들은 자취가 없었고, 누웠던 자리는 사구(砂丘)로 변해 있었다. 가슴에서 썰물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한낱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설령 그 끝이 벼랑일지라도 나는 고혹적인 손짓을 하는 문학의 길을 갈 것이다.

<요요>처럼 나를 끌어들이고 내밀었던 수많은 인연에게 감사드린다. 먼저 반푼이 작품을 보듬어 세상에 내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절을 올린다. 대학시절 산문정신을 일깨워준 권혁범 교수님, 다시 글을 쓰도록 이끌어주신 장영우 교수님, 취재차 전화드릴 때마다 "기사만 쓰지 말고 소설도 열심히 쓰라"고 당부하신 한승원 선생님,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주례사를 해주신 청화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새울문학회와 동대미문의 문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세상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라고 했던가. 내 어머니와 두 형,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 유응오(柳應吾) 1972년 충남 부여 출생 대전대 정외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현재 주간불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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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를 던진다. 요요는 번지점프를 하듯 축에 감긴 실을 타고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요요를 당긴다. 요요는 스파이더맨처럼 줄을 타고 재빨리 기어올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요요는 떠났다가 돌아온다. 요요는 오빠를 닮았고, 킹콩을 닮았다.

아저씨는 금세 나를 알아볼 것이다.

손에 요요를 들고 서 있을 게요.

요요?

실을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장난감 말이에요.

아하!

KFC 하얀 양복을 입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배불뚝이 할아버지 동상 앞에서 나는 계속 요요를 돌린다. 사위가 어두워진다. 멀리 빌딩숲 사이로 스러져가는 태양이 보인다. 섹스를 끝마친 남자 성기 같다. 요요는 도르래를 타고 상하운동을 할 때마다 형광불빛을 발한다. 붉게 달아올랐다가 파랗게 질렸다가를 반복하는 요요. 오늘 만나는 아저씨는 사정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변태일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나는 아저씨와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섹스를 하는 것이다.

몇 달 전에 학교를 잘려서 한동안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급히 돈이 쓸 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정숙이한테 다리를 놔달라고 했다.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하는데 정숙이를 보면 말짱 헛소리다. 정숙이의 얼굴 어디에서도 '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오죽하면 별명이 마대걸레일까. 정숙이는 돈만 주면 누구에게든 준다. 꼰대든 중삘이든 상관없다. 언젠가는 다섯 명의 남자를 한 번에 상대한 적도 있다.

양복을 입은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계속해서 주변을 맴돈다. 쳐다보면 고갤 숙이고 얼굴을 붉힌다. 만나기로 한 아저씨가 맞는 것 같다. 저렇게 숫기가 없는 놈일수록 SM이 많다.

아저씨, 정숙이 소개로 왔어요?

아저씨가 요요를 바라보며 고갤 주억거린다.

옷을 벗고 이 교복을 입어.

아니나 다를까. 여관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저씨의 태도는 180도 바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안심 스테이크를 썰어주던 사내가 벗어놓은 팬티의 냄새를 맡고 있다.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교복을 입는다. 학교까지 잘린 마당에 교복을 입어야 하다니. 교복까지 챙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저씨는 분명 변태가 맞다. 교복을 갈아입는 동안 아저씨의 시선이 뜨겁다. 교복을 입자마자 아저씨가 성급하게 내 몸을 덮친다. 아저씨가 뒷치기 자세를 요구한다. 체위를 바꾸자마자 갑자기 성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으으- 절정에 도달한 아저씨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아저씨는 떠나고 없다. 교복 치마 위에 10만원 수표 세 장이 흩어져 있다. 돈을 집어 지갑에 넣다가 보니 치마 군데군데 정액이 묻어 있다.

오빠가 몹시 술에 취해서 불렀던 노래가 떠오른다. 그 노래는 군바리를 대상으로 한 TV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에 나오는 곡을 패러디한 것이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 놓고 똘똘이를 흔들면 좆물이 납니다. 먹고도 싶어요. 하고도 싶어요. 어머니. 새어머니.

오빠는 새엄마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세 번째 새엄마한테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오빠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세 번째 새엄마는 문화초대석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자 예술가처럼 혀를 살짝 굴려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게 오빠의 성질을 돋웠던 모양이다.

너 오늘도 학교 안 갔니. 도대체 너는 뭐가 되려고 그러니. 정말이지 너라는 애는 막무가내구나.

새엄마가 오빠에게 일장 훈시를 늘어놨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는 며칠째 학교에도 가질 않은 채 방안에서 담배만 피워댔다. 때마침 오빠는 우유를 꺼내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다. 오빠가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를 꺼내 새엄마에게 집어던졌다.

시팔 년아.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학교에 가든 말든.

하얗게 질린 낯으로 두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새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거실 벽에는 오빠가 던진 달걀이 터져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욕설을 퍼붓고 오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갔다. 그리고 조금은 색다른 학교엘 갔다. 죄명은 절도. 오빠의 말에 따르면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택시를 털다가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오빠는 드라이버로 택시 문을 따고 동전 통을 훔쳤다. 택시 문을 닫고 나올 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오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오빠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욕심껏 사탕을 넣은 아이의 볼처럼 불룩해진 오빠의 바지 주머니를 떠올렸다. 오빠의 바지주머니에서는 찰그랑 찰그랑 경쾌한 동전소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소년원에서 나온 오빠의 머리는 막 심은 잔디 같았다. 머리가 길어질 동안 오빠는 매일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보호관찰 판결을 받은 오빠는 정기적으로 가정법원에 들러야 했다. 그때마다 오빠는 일기와 그림을 들고 가 검사를 받았다.

그림은 우리 가족을 그린 것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회 앞에서 우리 가족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손에 성경책을 들고 있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오빠의 그림에는 태양이 없었다. 대신 교회 첨탑 너머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이 있었다.

오빠가 머리가 길어질 때쯤 새엄마가 바뀌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엄마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세 번째 새엄마는 단발이었고, 네 번째 새엄마는 커트 머리였는데, 그림 속의 엄마는 파마머리였다.

오빠. 그림 속의 엄마는 새엄마가 아니잖아.

깡통 같은 년. 이게 진짜 우리 엄마의 얼굴이야.

오빠는 네 번째 새엄마와 사이가 좋았다. 새엄마는 오빠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기타를 사줬고, 키보드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키보드를 사줬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오빠는 손재주가 좋았다. 금세 기타와 키보드를 익혔다. 오빠는 자신이 지은 곡이라며 내게 노래를 들려줬다.

대개 컴퓨터로 대충 리믹스한 난삽하기 짝이 없는 하우스뮤직이었다.

오빠의 손재주 중 가장 빛을 발한 것은 뭐니 뭐니 도둑질이었다. 오빠의 손에서 기타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짭새한테 달려갔다.

아무래도 오빠의 손에는 드라이버가 제격인 모양이다.

네 번째 새엄마와 사이가 너무 좋았던 게 화근이었다. 어버이날 선물로 오빠가 새엄마에게 금팔찌를 선물했다. 금팔찌를 받은 새엄마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팔찌는 장물이었다. 팔찌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새엄마는 금은방에 금팔찌를 들고 갔다. 팔찌를 받은 금은방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새엄마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아들이 선물로 사왔어요.

금은방 아저씨가 팔찌를 유심히 살펴봤다.

이건 쌀집 아줌마건데……. 내가 맞춰줘서 알죠. 여기 아주머니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LJJ. 이정자.

오빠는 다시 감옥에 갔고, 성인이 되어 돌아왔다. 오빠는 출소 후 단 하루도 집에서 머물지 않았다. 오빠의 방은 먼지가 쌓여갔지만 오빠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가족은 없었다. 오빠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지방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였다. 죄명이 제법 거창했다. 특수절도. 이번에는 단독범행이 아니었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오빠 일당은 어느 소도시의 가정집을 털었다. 재수가 터지게 좋은 날이었는지 그 집에는 현금이 많았다. 현금을 들고 나온 오빠 일당은 너무 기쁜 나머지 골목길에서 하염없이 돈을 세었다. 하나 둘……이백이십삼. 그때 순찰 중이던 경찰이 오빠 일당을 불러 세웠다.

오빠가 의연하게 허리춤에서 무엇을 끄집어냈다. 드라이버였다.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고 오빠 일당은 경찰서로 호송됐다.

오빠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오빠가 세 번째 별을 다는 동안 네 번째 새엄마는 헌 엄마가 됐고, 다섯 번째 새엄마가 안방을 차지했다.

나이키 매장에 들러 킹콩에게 줄 선물을 고른다. 내일은 킹콩의 생일이자 킹콩이 출전하는 배틀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나이키 마크가 붙은 하얀색 런닝화를 집어 든다. 승리의 여신을 상징한다는 나이키. 이 신발을 신으면 승리의 여신이 킹콩을 지켜줄 것이다. 신발을 고른 후 트레이닝복이 걸려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벨벳소재의 하얀색 트레이닝복이 눈에 들어온다. 조명을 받은 하얀색 벨벳은 사금처럼 눈부실 것이다. 사이키 조명을 받으면 역광이 나는 킹콩의 검은 피부와 대조를 이룬다. 벨벳 트레이닝복을 입고 춤을 추는 킹콩을 상상해본다.

스테이지에 서면 그는 그야말로 킹콩이 된다. 고층 빌딩으로 올라가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한 손에 부숴버리는가 하면, 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화 속 킹콩처럼 그는 열정과 순정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의 춤을 보면 알 수 있다. 킹콩의 브레이크 댄스는 때로는 보드카처럼 화끈하고 때로는 비엔나커피처럼 감미롭다.

내가 킹콩을 만난 것은 한 달 전이다. 잘 가는 클럽에서였다. 클럽에서는 여느 날처럼 비보이 크루(Crew)가 배틀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한 팀이 유난히 실력이 뛰어났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팀이었다. 팀은 파워무브며 프리스타일이며 마무리 프리즈까지 기술은 물론이고 레퍼토리도 훌륭했다.

사이키 조명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크루의 동작은 날개를 팔랑거려 짝짓기를 하는 나비떼와 같았다. 크루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놈이 있었다. 짧은 목. 두툼한 입술. 툭 불거진 광대뼈. 움푹 파인 눈동자. 게다가 놈은 팔이 비정상으로 길어서 침팬지나 고릴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원시적인 외모가 내게는 외려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크루가 배틀을 벌일 동안 무대 아래에서는 크루 멤버를 차지하기 위한 여자들의 배틀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처음 보는 팀이 나와서인지 여자들의 기싸움은 치열했다. 끝까지 기를 꺾지 않은 것은 근처 대학생년들이었다.

나는 클럽을 기웃거리는 대학생들을 보면 뚜껑이 열린다.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도서관에서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이런 데를 기웃거려.

나미가 애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한 애한테 귓속말을 했다. 머지않아 나미가 애들을 화장실로 데리고 왔다.

우리가 찍은 애들한테 찝쩍대지 말고 꺼져.

내가 쏘아붙이자 애들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두 년이 고갤 숙였고, 키 큰 한 년만이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키 큰 년의 낯짝에다 침을 찍, 뱉었다. 키 큰 년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계집애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킹콩의 춤은 황홀했다. 그는 발기술보다는 손기술이 뛰어났다.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풍차처럼 돌릴 때는 그의 몸 중심이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고,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서 통통, 몸을 튀길 때면 그의 몸이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배틀을 끝내고 무대를 내려오는 킹콩의 걸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춤을 출 때는 원체 동작이 현란해서 몰駭쨉?분명히 한쪽 발이 짧았다. 그의 왼발은 걷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것 같았다.

괜찮다. 절름발이든 하반신 불구든 상관없다.

무대를 내려오는 킹콩에게 내가 다가갔다. 오늘밤 어때? 킹콩이 잇몸이 환히 드러나게 웃었다. 레게 머리를 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니 킹콩은 흑인계 혼혈이었다.

괜찮다. 혼혈이든 깜둥이든 다 괜찮다.

나이가 몇 살이야, 오빠?

킹콩이 랩을 하듯 영어로 주절거리며 검지와 중지를 세워 V자를 만들었다. 스무 살이라는 뜻이다.

나는 에잇틴. 시팔 좆같은 에잇틴.

나도 그를 따라서 손가락을 세워 나이를 표시했다.

오빠는 별명이 뭐야?

내 질문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명. 어렸을 때는 연탄이나 철수세미라고 불렸지. 지금은 없어.

연탄?

얼굴이 까맣다고.

그럼 수세미는?

머리털이 철 수세미처럼 생겼다고.

대충 알 것 같았다. 그가 양주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는 술을 따르면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오빠 별명 하나 지어줄까?

그가 호기심을 보였다.

킹콩.

그가 고갤 갸우뚱거렸다.

킹콩?

나는 그의 두툼한 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섹시하잖아. 내가 오빠의 미녀가 되어줄게.

킹콩이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는 분명 킹콩이었다. 춤판에서 만큼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졌지만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킹콩.

우리는 클럽을 나와 모텔로 향했다. 킹콩의 알몸을 보니 어릴 적 별명이 왜 연탄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성기는 너무 새까매서 김밥 같았다.

김밥 같네.

김밥이면 잘라 먹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내 몸을 올라탔는데, 웬일인지 그의 몸집이 작게 느껴졌다. 그 순간 그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성난 킹콩이 아니라 비에 젖은 한 마리 새였다. 그날 밤 작은 새는 내 몸 위에서 쉴 새 없이 푸득거렸고, 나는 나느라 지친 그 새가 날개를 접고 쉴 수 있도록 작은 둥지를 만들어줬다.

신발과 트레이닝복을 고른 후 나는 킹콩이 있는 비보이 연습장으로 향한다. 택시 안에서 킹콩에게 선물할 신발과 트레이닝복을 꺼내보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문필이 새끼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 하는 일일 나이트에서 만난 놈이다. 강남 출신이라 스타일이 괜찮은 녀석인데 웬일인지 놈에게는 정이 안 간다. 우선 문필이란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든다. 삐리하게 문필이가 뭐람. 녀석은 만날 때마다 알마니라든지 구찌라든지 명품 선물을 해준다. 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돈을 처바르는 새끼들이라면 질색이다.

돈으로 섹스는 할 수는 있어도 연애를 할 수는 없다. 연애를 하려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은 문필이는 본 척도 않고 킹콩만 해바라기하는 날 보고 대가리 총 맞은 년이라고 놀려댄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간다. 까짓 거, 눈 딱 감고 한 번 줘도 되는 거 문필이한테는 안 된다.

한 달 전에는 문필이가 제 아빠의 차를 몰고 나온 적이 있다. 그날 문필이는 한강 고수부지로 가서 어떻게든 내 속옷을 벗기려고 애를 썼다. 나는 문필이의 입술이 얼굴로 다가오면 고개를 돌렸고, 문필이의 손이 가슴으로 다가오면 손을 철썩 내리쳤다. 한 시간 가량 실랑이를 벌이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중지를 봉긋 세우면서 급하면 딸딸이나 치라고 했다.

내일 만나자는 문필이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는다. 내가 문필이를 싫어하는 만큼이나 엄마도 아빠가 싫었던 것일까? 내 마음이 저절로 킹콩을 향해 기우는 것처럼 엄마의 마음도 그렇게 김씨 아저씨에게로 흘러간 것일까?

엄마가 집을 나간 이튿날 오빠와 나는 마을 공터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오빠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오빠의 연은 방패연이었고, 내 연은 가오리연이었다.

엄마는 어딜 간 거야.

오빠가 신경질적으로 실패의 실을 잡아당겼다. 방패연이 허공 위에서 흔들렸다. 나도 따라서 실을 잡아당겼다. 가오리연의 긴 꼬리가 실제 가오리의 지느러미처럼 유영했다.

엄마는 바람이 났어.

바람이 난 게 뭐야?

나도 잘 몰라.

드센 겨울바람을 타고 연들이 몸살을 앓듯 온몸을 흔들었다. 오빠가 느닷없이 실패의 실을 해찰하듯 풀어댔다. 웬일인지 모르게 오빠를 따라해야 할 것 같아 나도 실패의 실을 풀었다. 실패를 벗어난 실들이 하늘 위에 긴 선을 그리면서 풀어졌다. 끝내 연은 자신을 옥죄던 실패에서 벗어났다. 연들은 끝 간 데 없이 날아가서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연들을 오빠와 나는 우두커니 바라봤다.

엄마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1년 후이다. 아빠가 수소문 끝에 엄마가 있는 곳을 알아냈던 것이다. 엄마가 있던 곳은 강원도 묵호였다. 엄마가 사는 곳은 우리 집 거실보다 작았으며 우리 집 창고보다 더러웠다. 엄마의 곁에는 아버지의 운전기사였던 김씨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 헛기침 소리를 내며 자리를 벗어났다.

왜 왔죠?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

엄마가 목젖이 보이게 웃었다. 실성한 사람으로 보일 만큼 과장된 웃음이었다. 나는 엄마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막연하게나마 그렇게 행동해야 엄마가 돌아올 것 같았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말 잘 들을 게요. 우리 같이 살아요.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만 돌아가요. 나는 이제 그 집 여자가 아녜요. 당신 아내도, 이 애들 엄마도 아녜요.

엄마의 말에 아빠의 얼굴이 불판처럼 시뻘겋게 달궈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바깥에서 다시금 김씨 아저씨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김씨 아저씨의 헛기침 소리는 마치 뻐꾸기 시계소리처럼 무엇을 해야 할 시간이란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방을 나갈 때도 엄마는 우리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멀리 밤바다 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것을 삼킬 듯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는 파도 소리. 바깥을 나와서야 오빠가 숨을 죽이고 울었다. 파도소리가 오빠의 울음소리마저 삼켰다.

킹콩은 내일 열릴 배틀을 준비하고 있다. 킹콩이 내일 배틀에서 선보일 춤은 '하얀 머리 독수리' 춤이다.

독수리가 몇 천 피트 상공까지 올라간다. 독수리가 허공에 원을 그리며 회전을 한다. 대지를 바라보다가 먹잇감을 발견한 독수리가 땅으로 쏜살같이 급강하를 한다. 먹잇감을 낚아챈 독수리가 크나큰 날개를 휘저으면서 둥지로 날아간다.

하얀 머리 독수리의 일상을 연속동작으로 표현하는 게 이번 킹콩 춤의 래퍼토리이다. 춤에 몰입하면 그의 팔은 날개가 된다.

킹콩의 몸은 물구나무선 상태다. 두 다리가 교차하는 동안 킹콩의 한 손이 바닥을 튕긴다. 손이 바닥을 칠 때마다 킹콩의 몸은 솟구쳐 오른다. 킹콩이 동작을 바꿔 머리를 바닥에 박고 두 다리와 허리를 곧추 세운다. 그의 머리를 구심점으로 몸이 돌아간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킹콩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끔씩 그가 있는 자리가 내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어느 공간인 것 같은, 그가 있는 시간이 아득한 저편의 과거나 미래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춤을 출 때 그의 몸은 모든 공간과 시간을 지운다. 그럼으로써 그의 몸은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두 다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춤출 때만큼은 궤도를 이탈한 혜성이 된다. 중력이라는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그의 몸은 손가락으로 쳐서 떨어뜨린 담배 불똥처럼 자유롭게 떨어지며 빛을 발한다. 그리고 끝내 그는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 몸부림쳤던 세상이라는 둥지로 다시 안착한다. 모든 춤이 끝날 때 그의 몸은 날개를 접고 둥지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의 춤을 보고 있으니 오빠의 문신이 생각난다.

오빠가 출소하는 날 아빠는 내게 말없이 돈을 건넸다. 돈 봉투는 제법 두둑했다. 나는 가족을 대표해 오빠를 맞았다. 교도소 앞에서 두부를 들고 서 있는 것은 열네 살짜리 여자애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창피한 일이었다. 많은 출소자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여자구경을 못해서 그랬는지 출소자들의 시선은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오빠가 뒤에서 불렀다. 오빠는 어른이 돼 있었다. 어깨가 쫙 벌어져 있었다. 우적우적 두부를 씹어 먹는 오빠의 팔뚝에는 성인의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큰 날개를 펼치고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새였다.

이게 뭐야?

오빠는 자신의 팔뚝 문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까치.

오빠는 문신이 까치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까마귀로 보였다.

문신을 파려면 좀 멋있는 걸 파지. 왜 까마귀를 팠어.

내 입에 왜 느닷없이 까마귀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조악한 문신 때문이었을까? 오빠가 나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까마귀가 아니고 까치라니까.

킹콩은 타고난 춤꾼이다. 헤드스핀을 아무리 몇 십 바퀴를 돌아도 리듬을 못 타면 춤꾼이 아니다. 킹콩의 몸은 움직이는 대로 리듬이 된다. 게다가 킹콩은 지독한 춤 벌레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춤추는 데 바친다. 킹콩은 춤을 출 때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소아마비라는 핸디캡을 벗고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춤꾼이 되기까지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나는 킹콩이 왜 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지 알고 있다. 킹콩이 춤을 배운 것은 열네 살 때이다. 팔년 동안 킹콩은 춤을 춰서 먹고 살았다. 그의 춤 솜씨는 미군부대에서 배운 것이어서 이 땅의 어느 춤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킹콩은 동두천을 벗어나기 위해 춤을 췄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몸담고 있는 이태원을 벗어나기 위해 춤을 춘다. 그는 세계최고의 비보이가 되어 미국으로 가길 꿈꾼다.

킹콩이 태어난 곳은 동두천이다. 미군 상사였던 아빠는 엄마가 만삭일 때 고향인 뉴올리언스로 날아갔다. 킹콩의 엄마는 산파 없이 킹콩을 낳아야 했다. 킹콩의 엄마가 산통을 느낀 것은 물주전자를 연탄불에 올릴 때였다. 급작스레 밀려오는 진통을 참지 못하고 킹콩의 엄마는 물주전자를 뒤엎고 말았다. 킹콩이 태어난 곳은 부엌의 더러운 바닥 위였다. 미처 준비치 못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은 킹콩의 엄마는 태를 이빨로 자르고 입술 위에 번진 시뻘건 피를 혀로 닦았다. 뜨거운 물을 엎지른 탓에 킹콩은 찬물에 씻겨 졌다. 킹콩이 태어날 때 울음을 터트리지 않아 엄마에게 엉덩이를 몇 차례 맞았는데, 뱃속에서 울지 않는 법을 배우고 태어났는지 살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킹콩의 엄마는 킹콩이 열 살 때 죽었다. 킹콩의 엄마는 소주에다 쥐약을 타 먹고 죽었는데, 죽기 직전 정말 쥐약 먹은 쥐처럼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쥐처럼 찍찍- 거리기도 했다. 킹콩의 엄마의 유언은 사랑해, 찢어죽일 놈, 보고 싶다, 퍼킹 유어 마마 등 종잡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그러다 킹콩의 엄마는 킹콩을 바라보고 눈물을 한 방울 툭 떨어뜨리면서 불쌍한 것, 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내가 킹콩에게 들은 킹콩의 족보이다. 우리 집만큼이나 콩가루 족보이다. 우리처럼 쿨한 애들도 가슴에는 뜨거운 불덩이 하나씩을 숨기고 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긴 냉장고도 차가움을 유지하기 위해 뒤편에서는 뜨거운 열을 발산하니까.

킹콩이 춤을 추는 동안 내내 나는 요요를 돌린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버려. 내가 잘 못했어, 다시 돌아와. 요요는 연애와 같다. 떠나고 돌아온다. 혹시 자신을 잊어버릴까봐 요요는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쉴 새 없이 온몸으로 빛을 발한다. 나를 잊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요요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떠나길 꿈꾼다.

요요를 돌리는 내 옆으로 킹콩이 다가온다.

요요를 늘 들고 다니네.

네가 사준 것이니까. 춤 출 때 기분이 어때?

요요와 같아. 춤을 출 때는 몸이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해. 그래야 필이 살지. 하지만 춤을 마무리할 때는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마음의 활주로에 몸의 바퀴를 안전하게 내려놔야해. 몸과 마음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것, 그게 바로 비보이야.

땀을 흘리는 킹콩에게 종이 가방을 내민다.

생일선물이야.

뭔데.

운동복과 신발.

킹콩의 눈이 당구공만큼 커진다. 내가 가방 속에서 운동복과 신발을 꺼내 보이자 킹콩의 입술이 휘면서 귀에 걸린다. 내가 운동복을 펼쳐 보이자 웬일인지 그의 낯빛이 창백해진다.

벨벳이네.

킹콩이 엄지손톱을 이빨로 깨문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 킹콩이 곧잘 하는 행동이다.

엄마가 죽을 때 유리구슬이 박힌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 사실 엄마는 늙어서 손님도 없었는데 말이야. 동두천을 가본 지도 오래됐네. 동두천에는 아직도 쎄리 이모랑 패티 이모가 살까. 이모들도 이제는 늙어서 팔 게 없을 텐데.

씁쓸하게 웃는 그의 눈에 그늘이 진다. 킹콩의 엄마는 자신의 가장 화려한 순간, 킹콩의 아빠와 만났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나이가 들면 인생의 봄날을 떠올릴까? 내게 벚꽃 난분분 흩날리는 시절은 언제일까? 지금일까? 이전일까? 이후일까?

킹콩과 나는 연습장을 나와 24시간 영업하는 감자탕 가게로 향한다. 시계바늘이 이미 자정을 넘어섰다. 어느덧 킹콩의 생일이 된 것이다. 가게는 남들의 술시중을 들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한 잔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서로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고 건배를 한다. 내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시팔 좆같이 축하해.

킹콩 역시 귓속말로 대꾸한다.

쌩유, 퍼킹 마이 달링.

우리는 입에 감자탕 국물이 묻은 채 프렌치 키스를 나눈다. 그의 입속에 고인 돼지 뼈다귀의 비린 맛과 내 입속에 고인 감자의 담박한 맛이 서로의 입속에서 범벅이 된다.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우리는 감자탕 가게를 나선다. 나올 때 보니 바로 선 소주병이 세 병이고 엎어진 소주병이 두 병이다. 우리는 서로의 의견도 묻지 않고 크라운모텔로 향한다. 그곳은 곧잘 우리가 투숙했던 곳이다. 모텔로 가는 내내 킹콩이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후지스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다. 킹콩이 곧잘 흥얼거리는 노래로 로버타 플랙의 노래를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킹콩의 노래는 흑인 특유의 소울 음색이 묻어 있다. 실리콘처럼 끈적끈적한 킹콩의 노래는 섧다. 가슴을 후비는 그의 노래. 아무리 버전을 바꿔도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은 슬프다. 술 취해서 부르는 그의 노래에 내가 비트 박스를 넣어준다. 어떤 놈은 비트박스가 '북치기 박치기'만 알면 된다고 하는데 뭣도 모르는 소리다. 북은 왜 치고 박은 왜 치나. 비트박스의 기본은 '부킹'과 '퍼킹'이다, 부킹, 퍼킹, 부킹, 퍼킹……. 만나고 섹스하고 만나고 섹스하고. 그게 세상의 기본이다.

모텔 앞에 멎으니 까치집이 눈에 들어온다. 왕관모양의 간판 위에는 까치 한 쌍의 둥지가 있다. 낮에 저 까치들을 본 적이 있다. 수컷이 나무삭정이를 물어오자 암컷이 부리로 수컷의 부리를 비벼댔다. 외로움이라든지. 쓸쓸함이라든지. 지상 위를 떠돌던 바람 같은 마음도 깃털 속에 파묻어 잠재우는 까치들.

내일 열리는 배틀에서 승리하면 킹콩은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위해서이다. 설령 내일 배틀에서 진다해도 그는 어떻게든 미국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킹콩은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라든지 LA라든지 조명꽃이 팡팡 터지는 도시를 거닐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우연히 보면, 그때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동두천의 후미진 골목이 미치도록 그리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킹콩의 입에서는 엄마라는 말이 맴돌 것이다.

오빠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오빠가 처분하지 않은 장물이 있었다. 수동식 니콘 FM2 카메라였다. 오빠가 감옥에 가고 오빠의 방에 있는 필름을 심심해서 현상한 적이 있었다. 사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골목을 찍은 것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늘 지나다니던 골목이 새롭게 보였다. 우리가 사는 골목이 그렇게 아늑한 곳이었다니. 오빠가 그토록 훔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까치들의 둥지를 무심히 바라본다. 허공 위에 지은 까치들의 집 옆에 두 마리의 새가 날아가 둥지를 트는 게 보인다. 한 마리는 오빠의 팔뚝에 새겨져 있는 것이고, 다른 한 마리는 춤추는 킹콩의 새이다.

<끝>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기사제공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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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에 2007-01-07 12:03:13
도...저런인재가있어나?...
축하드리고요...
불교계를위해 좋은글많이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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