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과자를”, 마리 앙투아네트는 억울하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마리 앙투아네트는 억울하다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10.0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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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갑자기 마리 앙투아네트가 우리 사회에서 대 유행이군요. 불행했던 시대를 살다 간 프랑스의 한 왕비가 왜 한국사회에서 갑자기, 그것도 21세기에 유행을 타게 됐는지 굳이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억울합니다. 최소한 억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에도 한 번 인용했습니다만 독일 작가 헬게 헤세가 쓴 <천마디를 이긴 한마디>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이하 인용 부분은 이 책 pp.257-266에서 발췌했습니다.)

▲ 헬게 헤세, 박종대 역, <천마디를 이긴 한마디> (북스코프, 2007).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그런 마음을 키울 수 있는 교육도 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그냥 앙투아네트라고 불렀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공주는 애당초 합스부르크 왕가에 걸맞은 권력과 사치 외에는 다른 길을 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여, 전쟁은 남에게 맡기고, 그대는 결혼이나 하라!’ 이것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표어였다...
...이제 갓 열네 살밖에 안 된 앙투아네트가 간택되자 오스트리아 궁정은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프랑스 왕비에 오르고 베르사유 궁의 안방마님이 될 사람의 교육을 그간 너무 등한시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두드러진 결점이라도 감추기 위해 부랴부랴 단기 집중 교육이 실시되었다. 궁중 예법과 절차 면에서 모든 궁전의 표본이 되는 베르사유 궁의 명성을 생각하면 나중에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부 수업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타고난 품성이었다. 예쁘장한 공주는 고집이 세고, 변덕스러운 성격에다 외모에 집착하고 산만했다. 가끔 음악을 들을 때만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번은 어린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앙투아네트가 왕비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너무 거만하게 군 것도 적을 만든 요인이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굴욕감을 안겨줄 때가 많았다. 자신이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 다른 사람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왕의 고모와 이모들은 그녀를 가리켜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업신여겼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왕비에 대한 평판이 안 좋은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왕위를 이을 후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손을 보기까지는 결혼 후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야 했다. 문제는 젊은 국왕에게 있었다. 음경 포피가 귀두에 너무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성행위를 할 때 고통이 심했던 것이다. 왕비는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욕구를 다른 남자들로 대신 채웠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사이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에게 가족들과 함께 왕의 충직한 군대가 있는 프랑스 북동부의 메스로 피신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왕은 거부했다. 그 뒤 몇 주 동안 왕이 계속해서 봉건제 철폐를 거부하자 군중들은 왕비가 루이의 이런 완강한 태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때부터 그 경망스러운 ‘오스트리아 여자’가 증오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앙투아네트의 냉소적이고 채신머리없고 냉혹한 인간성에 대한 갖가지 소문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중에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어느 날 마차를 타고 산책을 하던 왕비가 백성들이 모두 생기가 없고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왜 저러냐고 물었다. “마마, 그건 저들이 먹을 빵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신하가 대답했다. 실제로 1789년에는 기근이 들어 빵 값이 폭등하면서 곳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이 말은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루소<고백록>에 나오는 말을 누군가 왕비를 비난하기 위해 차용했을 개연성이 훨씬 더 높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에 가장 각광을 받았던 루소는 이 책에서(1766~1770년 사이에 집필되었다),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한 공주가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그런 말을 던졌다고 썼다. 일각에서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마리 테레즈(1638~1683)가 이 말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루소가 이 사건을 기술할 당시 앙투아네트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1789년의 프랑스에서는 오직 마리 앙투아네트만이 그런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을 것이라고 모두가 철석같이 믿었다. ‘오스트리아 여자’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책자와 연극이 방방곡곡에서 줄을 이었다.”

“1791년 6월 루이16세의 가족은 도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발각되어 다시 파리로 송환되었다. 앙투아네트는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고 한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수감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지막까지 품위와 용기와 경건함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2,500명이 넘는 다른 죄수들을 감동시켰다. 당국에선 그녀의 감옥 창문을 벽돌로 막아버렸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간수의 눈을 피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789년 6월 큰아들의 죽음 이후 왕세자로 승격된 둘째 아들도 곁에 없었다. 당국에서 강제로 빼앗아 성전기사단의 탑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이 아이도 1795년에 겨우 열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것도 모자라 혁명 과정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 앙투아네트의 품에서 앗아가버렸다.”

“사형 판결은 이미 오래전에 확정되어 있었다. 앙투아네트는 오랜 세월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엘리자베트 시누이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막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그러나 이것은 범죄자에게나 해당되는 치욕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계신 폐하를 뵈러 가는 행복한 길이에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나도 모르게 고통을 주었다면 모두 용서해주실 것을 빌어요... 아듀, 그동안 고마웠어요! ...온 마음으로 당신을 껴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도!”“

이제 역사적 사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 거센 누명으로부터 복권시켜야하지 않을까요. 최근 들어 하도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가 대유행이라서 한 번 적어보았습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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