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걸으며
가을을 걸으며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10.11 09: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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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무척이나 아끼셨는데 그 구성원을 선발하던 방법이 재미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을 앞에 불러 놓고 사계절 가운데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가를 물어보신 뒤, 가을을 좋아한다는 선비만을 뽑아 집현전 학사로 등용했다는 것이다.

가을은 독서하기에 좋은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니, 그러한 계절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평소 책을 가까이 하는 선비라고 해석하셨던 것이다.

책읽기를 중히 여기는 풍토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대단한 독서예찬론자였다.

그가 대통령에 입후보했을 때 선거참모가 재력가 한 사람을 데려와 링컨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이 선거자금을 대겠다고 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요직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나 링컨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의 얼굴에는 책 한 구절도 들어있지 않군. 책을 멀리하는 사람을 요직에 앉히느니 차라리 내가 대통령을 그만 두겠네.”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1970년대 초,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하숙집부터 찾아간 필자에게 집주인이 이렇게 물었다.
“청년은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나?”

퍽이나 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내 처지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형편도 아니었지만, 하숙을 청하러온 사람에게 다짜고짜 독서량을 묻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그가 이렇게 제의했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려면 조건이 있네. 적어도 일주일에 책 한 권 정도는 읽겠다고 약속을 하게.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당신의 나라 책도 얼마든지 구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별 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그가 알려준 서점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번화가에 자리한 9층짜리 대형건물 전체가 책만 파는 매장이었다. 그리고 층층마다 장르별 또는 국가별로 구분을 해 놓았는데 어느 곳이든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일본인들의 독서열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별 볼일 없는 하숙집 주인영감도 일주일에 단행본 한 권 정도는 반듯이 읽는다고 했다. 도서구입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마을마다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마을도서관 역시 다른 도서관과 유기적으로 책을 교환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경비로 다양한 책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학벌주의 사회다.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출세가 보장된다. 그 정도가 오죽해야 ‘일본의 아이들은 두 번 태어난다.’고 했겠는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이에 비로소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사회의 사교육열풍은 우리보다 거셌다. 오늘의 일본경제가 어려워진 원인도 소위 ‘게이오 보이’열풍 때문이라고 한다.

그랬던 일본사회가 변하고 있다.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는 대신 주부들이 책을 많이 읽고 그 지식을 자녀들에게 전수함으로써 사교육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역시 그 하숙집 영감의 권유에 의해 독서의 맛을 깨달은 뒤부터 꼬박꼬박 한 달에 두 세 권의 책을 읽어야 머리가 개운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일본에 비해 책 읽는 비용이 비싸다. 우선 도서관이 턱없이 부족해서 찾아가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찾아보기 힘든 것은 서점도 마찬가지다.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인터넷 게임중독에 빠져드는 청소년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사교육문제도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국민이나 정부나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독서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공자께서도 ‘한 권의 양서를 읽으면 한 명의 스승을 얻는 것이고, 만 권의 양서를 읽으면 만 명의 스승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일본사회가 독서환경 개선으로 사교육문제와 청소년문제를 극복해가고 있듯 우리도 책 읽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보다 많은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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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영 2010-10-14 17:50:48
부산에서 제법 큰 서점이었던 서면 동보서적이 문을 닫았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을 닫은 이유는 요즘 젊은층이 서점에서 책을 직접 구매하기 보다는 인터넷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들을 꼼꼼이 살피고 구매하는 것이 상식일텐데 말입니다. 정말 책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사회적 병폐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사회가 지식사회가 되어야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올 가을엔 책을 많이 읽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책 읽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책 읽는 소중함을 가르쳐 주신 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명수 2010-10-14 11:03:31
필자의 글에 공감한다.독서는 삶의 폭을 넓혀준다.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하고 고민에 빠져있는 어려움에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선악을 구분하는 지침을 보여주기도 한다.따라서 삶의 양을 풍부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헌데 요즘 양상은 너무 판이하게 변했다.버스에서나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의 손에 쥐어진것은 스마트폰을 이용한 게임이나 드라마가 주를 이룬다.이 좋은 계절에 우리 모두의 손에 양서 한두권 쥐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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