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불교공인시기의 사찰건립은 왕실이 주도했고, 통일신라 직전시기의 사찰건립은 자장(590-658)이 주도했다.
진골이었던 자장의 부모는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키겠다는 축원으로 천부관음을 조성하였고 그 영험으로 부처님 오신 날에 태어난 아기가 자장이었다. 그는 부모를 여의자마자 출가하였다. 자장은 636년(선덕여왕5) 제자 10여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갔으며 장안 공관사에 있었던 법상의 제자가 되었다.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643년 귀국하면서 불두골 조각과 대장경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선덕여왕은 난국을 타개하고자 불교 치국책을 세워 자장을 귀국하게 하였다. 자장은 645년 불국토의 상징인 황룡사9층목탑을 세웠으며, 신라왕실이 석가모니의 종족이라는 진종설(眞種說)을 만들어 진흥왕과 진평왕과 선덕왕을 전륜성왕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시험과 계율을 통하여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불교교단의 기강을 세웠다. 또한 보살주처신앙을 받아들여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설악산에 관음보살이 머문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등 신라불교의 기틀을 잡았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구역의 시대와 신역이 시대로 구분된다. 구역은 401년에 장안으로 입성한 인도인 구마라즙(350-409)의 의역이 강한 번역이었고, 신역은 중국승 현장(600-664)이 645년 인도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시작한 직역위주의 번역을 말한다. 자장은 당나라 유학시절 현장을 만나지 못한 구역불교의 마지막 세대로서 신라 초기불교에 종지부를 찍고 동시에 중기불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 다음 세대인 원효와 의상이 신역불교를 수용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이는 인도불교가 불교의 중국화로 새로운 종교로 탈바꿈하는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포항 오어사(631), 영덕 유금사(637), 평창 월정사(643), 양산 통도사(643), 김천 봉곡사(644) 등 자장이 창건한 사찰의 지형에서 일관된 지형적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을 기준으로 개천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간다.
둘째 좌청룡 기슭과 개천을 따라서 절의 좌측에 진입로를 만들었다.
셋째 능선이 중심사역의 우측에 치우쳐져 있어서 좌측으로 지형이 발달한 음의 지형이다. 따라서 전각도 좌우로 배치하면서 남향으로 지었다.
이런 지형은 이용후생적 측면에서 이해된다. 개천에 접해서 절터가 있는 것은 다수의 승려집단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물이 필요하고, 물을 건너지 않는 것은 접근의 용이성을 확보하려한 것이고, 능선을 피해 좌우가 넓은 산기슭을 선호한 것은 불교의 특징인 평등성과 다양성을 수용한 것이다.

자장이 선호한 사찰지형은 실용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신성성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선택이었다. 사찰 터의 정형화를 통해 불국토 건설에 한 획을 그었지만 풍수적 접근이 있었는지는 아직 묘연하다. 그 이유는 당나라의 풍수도 아직 유행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풍수를 유행시킨 사람으로 이순풍(602~670) 구연한(650경~713이후), 일행선사(683~727), 양균송(834~900)은 모두 자장이 당나라에 갔을 때 만날 수 없었던 후세대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신라 고유의 자생풍수를 바탕으로 그의 독특한 불교적 지리관을 구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