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6. 밥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6. 밥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6.20 12: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흰 쌀밥을 좋아한다
뜨거워서 밥을 사탕 굴리듯 굴리면서도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 향을 알 수 있다

아버진 물 말은 밥을 좋아했다
그저 밥을 말기를 좋아한다.
때론 막걸리에 말아 먹기도 한다.
나도 물 말은 밥을
짭쪼름하게 조린 갈치가 있으면
좋아한다.
물론 뜨거운 흰 쌀밥을 더 좋아한다.
 

엄만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
마시다시피 했다
그러다 언젠가 쉰 밥을 찬물에
헹궈 드시는 걸 봤다
치아가 없어 씹지도 못하는 김장 김치를 쭉 찢어
쉰 밥 위에 얹어 드시던 엄마


언제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들 따로 딸 따로
때론 각자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배터리 충전하듯 한 끼를 때운다


그래서 쉰 밥을 드시던 엄마도
막걸리에 밥 말아 드시던 아빠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티브이도 없던 그날이 생각난다.
 

#작가의 변
밥을 하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면 그 기다림이 더 오래고 더 거친 자갈길 같은 기다림일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것은 엄마가 김치 장사를 하러 강원도 현재 태백시에 포함된 고한 땅으로 가고 나서 아버지가 들일로 바빠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밥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밥을 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환경이다. 밥솥에 쌀을 씻어 올리면 밥솥이 알아서 해 주는 고급 전기밥솥도 없고 가스렌지에 올릴 프라이팬이나 포트는 더더욱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석유 곤로(풍로)에 찌개를 끓이는 등의 요리는 하던 때였지만 전기 곤로를 쓸 줄도 잘 몰랐을 뿐더라 곤로에 석유도 없었다. 부엌에는 검은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었다. 물론 불을 때어서 하는 가마솥이다. 불을 지피는 것은 장작이면 좋겠지만 산에서 긁어 온 갈비라고 부르던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잎과 가랑잎 등이면 아주 좋은 땔감이고 죽은 나무를 잘라 오거나 그것도 없으면 가지치기를 해서 가져오기도 했다. 물론 고추 농사하고 남은 고춧대는 화력 좋은 땔감이기도 했고, 볏짚, 보릿짚 그것도 없으면 벼를 도정하고 나온 벼의 껍질을 태우기도 했는데 그땐 풍로를 땔감 안에 넣어 풍로를 돌려 바람을 넣어 가면서 불을 피워야 했다. 요즘 가끔 몽고의 목장에서 땔감으로 양들의 배설물을 말려서 쓰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외양간의 소똥을 치우느라 고생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가마솥에 밭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당연히 삼층밥을 했다. 아래는 태우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고. 그리고 국을 끓여야 밥을 먹으니 있는 김치를 썰어 넣어 김칫국을 끓였지만, 당연히 맛이 없었다. 남의 살인 고기도 안 들어가고 야채도 안 들어간 데다 두부조차 안 들어갔으니 맛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반찬이라고는 시어 터진 김치밖에 없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당연히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요리’(?)는 시작이 되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조리사로 일을 할 때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시장을 보고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든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어설펐다. 주방에서 일하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는 집에서의 음식은 내가 나에게 실망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집에서 기르던 닭을 죽이는 일을 시켰는데 영화에서 같이 닭의 목을 자를까 하다 차마 하지 못하고, 목을 발로 꾹 밟고 있으면 퍼덕퍼덕하던 닭이 죽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닭고기를 먹질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동태가 들어간 제사 탕이었는데 무와 두부 그리고 소고기나 동태가 들어간 조합이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르던 토끼를 잡아서 토끼탕을 가족에게 해 주겠다고 토끼를 잡아 가죽을 벗겨 잘라서 토끼탕을 끓인 적이 있지만 그때도 당연히 토끼탕을 먹질 못했다. 그 후에 직업에 방황이 수 차례 있고 공군 정비병으로 제대 후에 늦게 서야 조리사의 길로 들어서서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 있는 요리는 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대답도 잘못한다. ‘30년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살았니’하는 자책이 앞선다. 2년 전 뇌경색이 있기 6개월 전부터 냄새를 맡지 못했다. 요리하면서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조리는 내가 조리를 즐기면서 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올 수 있다. 조리사가 힘든 상황에 조리를 하면 음식이 짜진다.

음식을 할 때 물론 눈으로도 먹기 때문에 보기에 좋으면 정말 좋다. 하지만 시각적인 것에만 치중하면 정말 화려한 작품이 나오지만 맛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급 요리일수록 아주 조금만 담아내는 경우가 많은데 고급 요리를 먹고 배가 고파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는 일이 있어 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희생하여 주문을 통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음식에 자기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햄버거에 난 토마토 빼달라, 치즈버거에 치즈 빼고, 마요네즈 안 먹는다는 등 일괄적으로 요리하기 힘든 구조다. 4명이 주문을 하면 4가지 음식은 기본이고 그 4가지도 가지가지 요구가 덧붙여진다. 캐나다에서 양식을 요리하면서 캐나다를 대표하는 요리가 과연 있느냐의 논쟁은 늘 해왔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감자에 치즈와 그레비를 올린 푸틴이다. 개인적으로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감자는 크리스피해야 하는데 그 크리스피가 살아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외식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은 많지 않다. 많은 한국 식당이 생기고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많은 메뉴로 다양한 손님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다양한 손님을 놓칠 수 있다. 전문점의 이름을 내걸어도 메뉴가 많은 곳도 많아서 먹기 힘든 곳도 많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한국의 치킨 전문점이 밴쿠버에 많이 진출하는 경향이다. 음식을 만드는 대부분의 식당이 바빠서 정성을 넣을 시간이 없다. 모양만 음식인 경우가 많다. 많은 식당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번 주에 지인이 집으로 초대를 해서 집밥을 해줬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정성이 한 아름 들어갔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도 밥을 하는 것처럼 시간에 쫓겨 일하다 보면 늘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악수를 두게 되지만 음식을 하던, 제품을 만들던 영혼이 이탈된 손만 움직이는 행동으로 만든 것은 명품이 되지 못한다. 살기 위해 밥을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느낀 감정은 우린 하루종일 다음에 먹을 음식을 무엇을 먹을지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도 자주 먹으면 맛이 없다. 고기가 없어도 짭짤하기만 하고 조미료가 안 들어가 감칠맛이 없어도 뒷맛이 개운한 음식이 기억에 많이 남게 된다. 상업용으로는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와 각종 향신료로 치장을 한 음식이 고객의 사랑을 받지만, 본질적으로는 음식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는 음식이 최고의 음식이 아닐까 한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흰 쌀밥을 좋아한다
뜨거워서 밥을 사탕 굴리듯 굴리면서도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 향을 알 수 있다

아버진 물 말은 밥을 좋아했다
그저 밥을 말기를 좋아한다.
때론 막걸리에 말아 먹기도 한다.
나도 물 말은 밥을
짭쪼름하게 조린 갈치가 있으면
좋아한다.
물론 뜨거운 흰 쌀밥을 더 좋아한다.
 

엄만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
마시다시피 했다
그러다 언젠가 쉰 밥을 찬물에
헹궈 드시는 걸 봤다
치아가 없어 씹지도 못하는 김장 김치를 쭉 찢어
쉰 밥 위에 얹어 드시던 엄마

언제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들 따로 딸 따로
때론 각자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배터리 충전하듯 한 끼를 때운다

그래서 쉰 밥을 드시던 엄마도
막걸리에 밥 말아 드시던 아빠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티브이도 없던 그날이 생각난다.
 

#작가의 변
밥을 하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면 그 기다림이 더 오래고 더 거친 자갈길 같은 기다림일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것은 엄마가 김치 장사를 하러 강원도 현재 태백시에 포함된 고한 땅으로 가고 나서 아버지가 들일로 바빠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밥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밥을 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환경이다. 밥솥에 쌀을 씻어 올리면 밥솥이 알아서 해 주는 고급 전기밥솥도 없고 가스렌지에 올릴 프라이팬이나 포트는 더더욱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석유 곤로(풍로)에 찌개를 끓이는 등의 요리는 하던 때였지만 전기 곤로를 쓸 줄도 잘 몰랐을 뿐더라 곤로에 석유도 없었다. 부엌에는 검은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었다. 물론 불을 때어서 하는 가마솥이다. 불을 지피는 것은 장작이면 좋겠지만 산에서 긁어 온 갈비라고 부르던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잎과 가랑잎 등이면 아주 좋은 땔감이고 죽은 나무를 잘라 오거나 그것도 없으면 가지치기를 해서 가져오기도 했다. 물론 고추 농사하고 남은 고춧대는 화력 좋은 땔감이기도 했고, 볏짚, 보릿짚 그것도 없으면 벼를 도정하고 나온 벼의 껍질을 태우기도 했는데 그땐 풍로를 땔감 안에 넣어 풍로를 돌려 바람을 넣어 가면서 불을 피워야 했다. 요즘 가끔 몽고의 목장에서 땔감으로 양들의 배설물을 말려서 쓰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외양간의 소똥을 치우느라 고생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가마솥에 밭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당연히 삼층밥을 했다. 아래는 태우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고. 그리고 국을 끓여야 밥을 먹으니 있는 김치를 썰어 넣어 김칫국을 끓였지만, 당연히 맛이 없었다. 남의 살인 고기도 안 들어가고 야채도 안 들어간 데다 두부조차 안 들어갔으니 맛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반찬이라고는 시어 터진 김치밖에 없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당연히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요리’(?)는 시작이 되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조리사로 일을 할 때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시장을 보고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든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어설펐다. 주방에서 일하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는 집에서의 음식은 내가 나에게 실망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집에서 기르던 닭을 죽이는 일을 시켰는데 영화에서 같이 닭의 목을 자를까 하다 차마 하지 못하고, 목을 발로 꾹 밟고 있으면 퍼덕퍼덕하던 닭이 죽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닭고기를 먹질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동태가 들어간 제사 탕이었는데 무와 두부 그리고 소고기나 동태가 들어간 조합이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르던 토끼를 잡아서 토끼탕을 가족에게 해 주겠다고 토끼를 잡아 가죽을 벗겨 잘라서 토끼탕을 끓인 적이 있지만 그때도 당연히 토끼탕을 먹질 못했다. 그 후에 직업에 방황이 수 차례 있고 공군 정비병으로 제대 후에 늦게 서야 조리사의 길로 들어서서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 있는 요리는 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대답도 잘못한다. ‘30년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살았니’하는 자책이 앞선다. 2년 전 뇌경색이 있기 6개월 전부터 냄새를 맡지 못했다. 요리하면서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조리는 내가 조리를 즐기면서 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올 수 있다. 조리사가 힘든 상황에 조리를 하면 음식이 짜진다.

음식을 할 때 물론 눈으로도 먹기 때문에 보기에 좋으면 정말 좋다. 하지만 시각적인 것에만 치중하면 정말 화려한 작품이 나오지만 맛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급 요리일수록 아주 조금만 담아내는 경우가 많은데 고급 요리를 먹고 배가 고파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는 일이 있어 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희생하여 주문을 통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음식에 자기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햄버거에 난 토마토 빼달라, 치즈버거에 치즈 빼고, 마요네즈 안 먹는다는 등 일괄적으로 요리하기 힘든 구조다. 4명이 주문을 하면 4가지 음식은 기본이고 그 4가지도 가지가지 요구가 덧붙여진다. 캐나다에서 양식을 요리하면서 캐나다를 대표하는 요리가 과연 있느냐의 논쟁은 늘 해왔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감자에 치즈와 그레비를 올린 푸틴이다. 개인적으로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감자는 크리스피해야 하는데 그 크리스피가 살아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외식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은 많지 않다. 많은 한국 식당이 생기고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많은 메뉴로 다양한 손님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다양한 손님을 놓칠 수 있다. 전문점의 이름을 내걸어도 메뉴가 많은 곳도 많아서 먹기 힘든 곳도 많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한국의 치킨 전문점이 밴쿠버에 많이 진출하는 경향이다. 음식을 만드는 대부분의 식당이 바빠서 정성을 넣을 시간이 없다. 모양만 음식인 경우가 많다. 많은 식당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번 주에 지인이 집으로 초대를 해서 집밥을 해줬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정성이 한 아름 들어갔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도 밥을 하는 것처럼 시간에 쫓겨 일하다 보면 늘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악수를 두게 되지만 음식을 하던, 제품을 만들던 영혼이 이탈된 손만 움직이는 행동으로 만든 것은 명품이 되지 못한다. 살기 위해 밥을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느낀 감정은 우린 하루종일 다음에 먹을 음식을 무엇을 먹을지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도 자주 먹으면 맛이 없다. 고기가 없어도 짭짤하기만 하고 조미료가 안 들어가 감칠맛이 없어도 뒷맛이 개운한 음식이 기억에 많이 남게 된다. 상업용으로는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와 각종 향신료로 치장을 한 음식이 고객의 사랑을 받지만, 본질적으로는 음식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는 음식이 최고의 음식이 아닐까 한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흰 쌀밥을 좋아한다
뜨거워서 밥을 사탕 굴리듯 굴리면서도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 향을 알 수 있다

아버진 물 말은 밥을 좋아했다
그저 밥을 말기를 좋아한다.
때론 막걸리에 말아 먹기도 한다.
나도 물 말은 밥을
짭쪼름하게 조린 갈치가 있으면
좋아한다.
물론 뜨거운 흰 쌀밥을 더 좋아한다.
 

엄만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
마시다시피 했다
그러다 언젠가 쉰 밥을 찬물에
헹궈 드시는 걸 봤다
치아가 없어 씹지도 못하는 김장 김치를 쭉 찢어
쉰 밥 위에 얹어 드시던 엄마


언제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들 따로 딸 따로
때론 각자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배터리 충전하듯 한 끼를 때운다


그래서 쉰 밥을 드시던 엄마도
막걸리에 밥 말아 드시던 아빠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티브이도 없던 그날이 생각난다.
 

#작가의 변
밥을 하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면 그 기다림이 더 오래고 더 거친 자갈길 같은 기다림일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것은 엄마가 김치 장사를 하러 강원도 현재 태백시에 포함된 고한 땅으로 가고 나서 아버지가 들일로 바빠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밥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밥을 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환경이다. 밥솥에 쌀을 씻어 올리면 밥솥이 알아서 해 주는 고급 전기밥솥도 없고 가스렌지에 올릴 프라이팬이나 포트는 더더욱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석유 곤로(풍로)에 찌개를 끓이는 등의 요리는 하던 때였지만 전기 곤로를 쓸 줄도 잘 몰랐을 뿐더라 곤로에 석유도 없었다. 부엌에는 검은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었다. 물론 불을 때어서 하는 가마솥이다. 불을 지피는 것은 장작이면 좋겠지만 산에서 긁어 온 갈비라고 부르던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잎과 가랑잎 등이면 아주 좋은 땔감이고 죽은 나무를 잘라 오거나 그것도 없으면 가지치기를 해서 가져오기도 했다. 물론 고추 농사하고 남은 고춧대는 화력 좋은 땔감이기도 했고, 볏짚, 보릿짚 그것도 없으면 벼를 도정하고 나온 벼의 껍질을 태우기도 했는데 그땐 풍로를 땔감 안에 넣어 풍로를 돌려 바람을 넣어 가면서 불을 피워야 했다. 요즘 가끔 몽고의 목장에서 땔감으로 양들의 배설물을 말려서 쓰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외양간의 소똥을 치우느라 고생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가마솥에 밭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당연히 삼층밥을 했다. 아래는 태우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고. 그리고 국을 끓여야 밥을 먹으니 있는 김치를 썰어 넣어 김칫국을 끓였지만, 당연히 맛이 없었다. 남의 살인 고기도 안 들어가고 야채도 안 들어간 데다 두부조차 안 들어갔으니 맛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반찬이라고는 시어 터진 김치밖에 없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당연히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요리’(?)는 시작이 되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조리사로 일을 할 때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시장을 보고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든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어설펐다. 주방에서 일하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는 집에서의 음식은 내가 나에게 실망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집에서 기르던 닭을 죽이는 일을 시켰는데 영화에서 같이 닭의 목을 자를까 하다 차마 하지 못하고, 목을 발로 꾹 밟고 있으면 퍼덕퍼덕하던 닭이 죽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닭고기를 먹질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동태가 들어간 제사 탕이었는데 무와 두부 그리고 소고기나 동태가 들어간 조합이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르던 토끼를 잡아서 토끼탕을 가족에게 해 주겠다고 토끼를 잡아 가죽을 벗겨 잘라서 토끼탕을 끓인 적이 있지만 그때도 당연히 토끼탕을 먹질 못했다. 그 후에 직업에 방황이 수 차례 있고 공군 정비병으로 제대 후에 늦게 서야 조리사의 길로 들어서서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 있는 요리는 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대답도 잘못한다. ‘30년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살았니’하는 자책이 앞선다. 2년 전 뇌경색이 있기 6개월 전부터 냄새를 맡지 못했다. 요리하면서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조리는 내가 조리를 즐기면서 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올 수 있다. 조리사가 힘든 상황에 조리를 하면 음식이 짜진다.

음식을 할 때 물론 눈으로도 먹기 때문에 보기에 좋으면 정말 좋다. 하지만 시각적인 것에만 치중하면 정말 화려한 작품이 나오지만 맛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고급 요리일수록 아주 조금만 담아내는 경우가 많은데 고급 요리를 먹고 배가 고파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는 일이 있어 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희생하여 주문을 통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음식에 자기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햄버거에 난 토마토 빼달라, 치즈버거에 치즈 빼고, 마요네즈 안 먹는다는 등 일괄적으로 요리하기 힘든 구조다. 4명이 주문을 하면 4가지 음식은 기본이고 그 4가지도 가지가지 요구가 덧붙여진다. 캐나다에서 양식을 요리하면서 캐나다를 대표하는 요리가 과연 있느냐의 논쟁은 늘 해왔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감자에 치즈와 그레비를 올린 푸틴이다. 개인적으로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감자는 크리스피해야 하는데 그 크리스피가 살아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외식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은 많지 않다. 많은 한국 식당이 생기고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많은 메뉴로 다양한 손님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다양한 손님을 놓칠 수 있다. 전문점의 이름을 내걸어도 메뉴가 많은 곳도 많아서 먹기 힘든 곳도 많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한국의 치킨 전문점이 밴쿠버에 많이 진출하는 경향이다. 음식을 만드는 대부분의 식당이 바빠서 정성을 넣을 시간이 없다. 모양만 음식인 경우가 많다. 많은 식당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번 주에 지인이 집으로 초대를 해서 집밥을 해줬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정성이 한 아름 들어갔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도 밥을 하는 것처럼 시간에 쫓겨 일하다 보면 늘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악수를 두게 되지만 음식을 하던, 제품을 만들던 영혼이 이탈된 손만 움직이는 행동으로 만든 것은 명품이 되지 못한다. 살기 위해 밥을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느낀 감정은 우린 하루종일 다음에 먹을 음식을 무엇을 먹을지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도 자주 먹으면 맛이 없다. 고기가 없어도 짭짤하기만 하고 조미료가 안 들어가 감칠맛이 없어도 뒷맛이 개운한 음식이 기억에 많이 남게 된다. 상업용으로는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와 각종 향신료로 치장을 한 음식이 고객의 사랑을 받지만, 본질적으로는 음식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는 음식이 최고의 음식이 아닐까 한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

#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