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9. 나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너에게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9. 나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너에게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7.1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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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 나비가 날갯짓하듯
꽃 속에 묻혀 꽃가루 뒤집어쓴 벌처럼
내 젊은 날엔 사랑 뒤에 찾아올 만남이 이쁜 만남일 거란 기대뿐이었다

봄날 나비처럼 한 쌍 나의 분신이 왔고
수 없는 밤을 잠 못들던 아기 울음소리에도
수 없는 날마다 병원 수술실 앞에 서성이던 날도 건강만 해다오
공부 같은 건 못해도 괜찮아 말해 놓고

날이 갈수록 욕심을 마음에 쌓아
네가 날지 못해도 순한 양처럼 내 못다 한 일을 대신해주길 바랐다

나의 육신은 시든 꽃나무처럼
날이 갈수록 깜부기병 든 고추처럼 병들어 가고 너의 꽃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날 네가 말했지

이젠 바람 따라 떠나겠노라
언젠가 떠날 줄 알았던 연인처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맴돌다 주룩 눈물로 흘러내린다
이렇게 널 떠나보내기 싫었는데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섭섭함이 가을 서릿발처럼 안으로부터 내 모든 육신을 얼리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풀썩 주저앉을지도 모르지만 입으론 모진 말로 까마귀 참새 잡듯 너를 쪼고 있구나

우리에게 올 때처럼
삶은 순간순간이 아픔투성일 테지만
부디 훨훨 날아
아프지 말고.
 







#작가의 변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자녀들의 분가. 그것이 내게도 닥쳤다. 아파서 겨우 죽만 먹는 내게 태워다 달라는 말뿐이었던 널 태우고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신축 아파트 일찍 도착해서 기다림이 길었던 탓일까? 아님, 멀건 죽만 먹은 탓일까. 배고픔과 아픔이 한데 뒤섞여 고통으로 찾아 올 때에도 넌 나오지 않았고 그냥 보고만 올 줄 알았던 네가 늦으니 혹시 계약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와서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아 문자로 아빠 배고파 죽겠다고 문자를 보냈지. 그럼에도 너는 한참 후에야 나와서 계약을 했다고 말했고 예상했던 말인데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결혼을 하자 마자 찾아온 너희들은 엄마 아빠에게 기쁨이었던 순간도, 위기였던 순간도, 아픔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임신 중독증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데리고 인천 길 병원에 찾아간, 그날 밤에 산부인과 과장이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불러내서 말했지. 지금 상황에선 아이들이든 아이들 엄마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물론 엄마를 택했지만 뒤따라오던 말이 더 마음 아팠다. 더는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과 한 달의 입원 기간은 내겐 정말 아주 긴 시간이었고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는 병원 수술 스케줄과 통원 치료에 지칠만한 시기였다.

아, 이민하고 나서도 쇼핑몰에서 딸을 잃어버려서 하늘이 샛노래지던 날도 있었고, 생선 가시가 아들 목에 걸려서 어린이 병원에 가서도 못 빼고 결국 집에 돌아와서 빼내게 된 기억, 현관 쇠문에 딸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뼈가 으스러졌을 때 아픔은 내게도 그대로 전율처럼 아픔이 전해져 왔었다.

때론 말 안 듣는다고 체벌하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던 너의 당차고 황당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엄마를 다신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너의 검은 눈동자.

우리 델리 숍을 할 때 캐셔 일을 가르쳐 주니 곧 잘해서 그걸로 이곳저곳 취직을 해서 일하면서 학교 다니던 네가 그리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남들같이 좀 더 맛난 거 먹이고 이쁜 집에서 키우지 못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고 싶었다. 난 네가 진심으로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뇌경색이 온 몇 년 전부터 직장은 수시로 바뀌고 불안정한 직장으로 인해 나도 불안하고 가족 모두가 불안할 때 너의 도움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아파 일하지 못하는 아빠와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고 갑작스레 선언한 네가 조금은 서운하고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부모 마음이란 늘 자식에게 쉼터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남들처럼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하는 일상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네가 좋다면 결혼이야 안 해도 좋고 세상에 속지 말고 친구 말에 속지 말고 부모 말을 듣기를 바라지만 부모의 말은 늘 쓰고 친구의 말은 달콤하지.

우리가 물질적으로 무엇을 해주지 못한다고 마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싶지만, 물질이 우선이 되어 버린 세상에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물질이고 보니 표현하기조차 막막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진다고 연락처를 지우듯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에 부모들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고 교통사고에 뛰어들어 자식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 된 본능일지 모른다. 촛불을 태우듯 자신을 태워 자녀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 부모다. 그 초의 빛이 희미해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더라도 말이다.

다 장성한 자녀의 독립은 부모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요즘은 주거 환경이 비싼 임대료는 물론 매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가격이라 부모인 나조차 집이 없는 형편이다 보니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이 아니란 생각조차 든다. 다 장성했다고 해도 부모와 함께 살면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사회는 핵가족 사회이지만 핵가족을 거부하고 사촌에 팔촌까지 한집에서 사는 인도 가정은 대저택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경향이 강하다. 동물의 세계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많은 위험에 노출되듯이 인간 세상에서도 가족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면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언제까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독립한다고 해도 부모가 남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함께 살 때보다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필요할 때 아이를 나아 기르면서 아이를 볼 사람이 없으면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손주의 재롱을 보고 자녀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자가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셈이다. 독립을 한다고 해도 수시로 전화하고 안부 묻고,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모의 말이 모두 잔소리로 들리는 청년의 시기 독립은 부모와의 연락조차 끊어 버리는 완전 독립을 꿈꾸는 청년도 많다. 그럼에도 만약에 어떤 일이 생기면 돌아갈 곳은 부모의 품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을 원하지만 부모는 늘 나의 삶에 배경이 되어 주길 바란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독립하고 가끔 만나 식사를 함께하는 관계이거나 안부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는 사람과 같은 관계로 남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함께 성장한 가족과 따로 분리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는 상황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을 간접적으로 책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는 것 같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안아 기를 땐 방바닥이나 침대에 놓는 것도 싫어서 안아서 흔들어 주고 얼러 달라고 울고불고하지만, 혼자 이것저것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부모보다 수입도 훨씬 나아지고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부모가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을 향해 인생의 시계는 쉼 없이 달리지만 부모가 내가 떠난 둥지에서 날 기다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삶을 살아 자신이 촛농처럼 녹아 없어지는 줄조차 모르고 자녀만 바라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하는 자녀를 떠나보낼 때는 부모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별은 늘 갑작스레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이다. 꽃을 피우고 씨앗이 맺으면 삶을 마감하는 식물이 많고 자녀를 낳고 그만큼 늙고 병들어 젊은 무리에게 무리의 수장 자리를 내어 주는 동물도 많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많은 일들 가득이지만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만큼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후회가 많은 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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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 나비가 날갯짓하듯
꽃 속에 묻혀 꽃가루 뒤집어쓴 벌처럼
내 젊은 날엔 사랑 뒤에 찾아올 만남이 이쁜 만남일 거란 기대뿐이었다

봄날 나비처럼 한 쌍 나의 분신이 왔고
수 없는 밤을 잠 못들던 아기 울음소리에도
수 없는 날마다 병원 수술실 앞에 서성이던 날도 건강만 해다오
공부 같은 건 못해도 괜찮아 말해 놓고

날이 갈수록 욕심을 마음에 쌓아
네가 날지 못해도 순한 양처럼 내 못다 한 일을 대신해주길 바랐다

나의 육신은 시든 꽃나무처럼
날이 갈수록 깜부기병 든 고추처럼 병들어 가고 너의 꽃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날 네가 말했지

이젠 바람 따라 떠나겠노라
언젠가 떠날 줄 알았던 연인처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맴돌다 주룩 눈물로 흘러내린다
이렇게 널 떠나보내기 싫었는데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섭섭함이 가을 서릿발처럼 안으로부터 내 모든 육신을 얼리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풀썩 주저앉을지도 모르지만 입으론 모진 말로 까마귀 참새 잡듯 너를 쪼고 있구나

우리에게 올 때처럼
삶은 순간순간이 아픔투성일 테지만
부디 훨훨 날아
아프지 말고.
 





 

뜨거운 태양 아래 나비가 날갯짓하듯
꽃 속에 묻혀 꽃가루 뒤집어쓴 벌처럼
내 젊은 날엔 사랑 뒤에 찾아올 만남이 이쁜 만남일 거란 기대뿐이었다

봄날 나비처럼 한 쌍 나의 분신이 왔고
수 없는 밤을 잠 못들던 아기 울음소리에도
수 없는 날마다 병원 수술실 앞에 서성이던 날도 건강만 해다오
공부 같은 건 못해도 괜찮아 말해 놓고

날이 갈수록 욕심을 마음에 쌓아
네가 날지 못해도 순한 양처럼 내 못다 한 일을 대신해주길 바랐다

나의 육신은 시든 꽃나무처럼
날이 갈수록 깜부기병 든 고추처럼 병들어 가고 너의 꽃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날 네가 말했지

이젠 바람 따라 떠나겠노라
언젠가 떠날 줄 알았던 연인처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맴돌다 주룩 눈물로 흘러내린다
이렇게 널 떠나보내기 싫었는데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섭섭함이 가을 서릿발처럼 안으로부터 내 모든 육신을 얼리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풀썩 주저앉을지도 모르지만 입으론 모진 말로 까마귀 참새 잡듯 너를 쪼고 있구나

우리에게 올 때처럼
삶은 순간순간이 아픔투성일 테지만
부디 훨훨 날아
아프지 말고.
 







#작가의 변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자녀들의 분가. 그것이 내게도 닥쳤다. 아파서 겨우 죽만 먹는 내게 태워다 달라는 말뿐이었던 널 태우고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신축 아파트 일찍 도착해서 기다림이 길었던 탓일까? 아님, 멀건 죽만 먹은 탓일까. 배고픔과 아픔이 한데 뒤섞여 고통으로 찾아 올 때에도 넌 나오지 않았고 그냥 보고만 올 줄 알았던 네가 늦으니 혹시 계약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와서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아 문자로 아빠 배고파 죽겠다고 문자를 보냈지. 그럼에도 너는 한참 후에야 나와서 계약을 했다고 말했고 예상했던 말인데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결혼을 하자 마자 찾아온 너희들은 엄마 아빠에게 기쁨이었던 순간도, 위기였던 순간도, 아픔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임신 중독증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데리고 인천 길 병원에 찾아간, 그날 밤에 산부인과 과장이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불러내서 말했지. 지금 상황에선 아이들이든 아이들 엄마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물론 엄마를 택했지만 뒤따라오던 말이 더 마음 아팠다. 더는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과 한 달의 입원 기간은 내겐 정말 아주 긴 시간이었고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는 병원 수술 스케줄과 통원 치료에 지칠만한 시기였다.

아, 이민하고 나서도 쇼핑몰에서 딸을 잃어버려서 하늘이 샛노래지던 날도 있었고, 생선 가시가 아들 목에 걸려서 어린이 병원에 가서도 못 빼고 결국 집에 돌아와서 빼내게 된 기억, 현관 쇠문에 딸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뼈가 으스러졌을 때 아픔은 내게도 그대로 전율처럼 아픔이 전해져 왔었다.

때론 말 안 듣는다고 체벌하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던 너의 당차고 황당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엄마를 다신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너의 검은 눈동자.

우리 델리 숍을 할 때 캐셔 일을 가르쳐 주니 곧 잘해서 그걸로 이곳저곳 취직을 해서 일하면서 학교 다니던 네가 그리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남들같이 좀 더 맛난 거 먹이고 이쁜 집에서 키우지 못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고 싶었다. 난 네가 진심으로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뇌경색이 온 몇 년 전부터 직장은 수시로 바뀌고 불안정한 직장으로 인해 나도 불안하고 가족 모두가 불안할 때 너의 도움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아파 일하지 못하는 아빠와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고 갑작스레 선언한 네가 조금은 서운하고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부모 마음이란 늘 자식에게 쉼터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남들처럼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하는 일상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네가 좋다면 결혼이야 안 해도 좋고 세상에 속지 말고 친구 말에 속지 말고 부모 말을 듣기를 바라지만 부모의 말은 늘 쓰고 친구의 말은 달콤하지.

우리가 물질적으로 무엇을 해주지 못한다고 마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싶지만, 물질이 우선이 되어 버린 세상에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물질이고 보니 표현하기조차 막막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진다고 연락처를 지우듯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에 부모들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고 교통사고에 뛰어들어 자식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 된 본능일지 모른다. 촛불을 태우듯 자신을 태워 자녀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 부모다. 그 초의 빛이 희미해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더라도 말이다.

다 장성한 자녀의 독립은 부모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요즘은 주거 환경이 비싼 임대료는 물론 매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가격이라 부모인 나조차 집이 없는 형편이다 보니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이 아니란 생각조차 든다. 다 장성했다고 해도 부모와 함께 살면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사회는 핵가족 사회이지만 핵가족을 거부하고 사촌에 팔촌까지 한집에서 사는 인도 가정은 대저택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경향이 강하다. 동물의 세계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많은 위험에 노출되듯이 인간 세상에서도 가족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면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언제까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독립한다고 해도 부모가 남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함께 살 때보다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필요할 때 아이를 나아 기르면서 아이를 볼 사람이 없으면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손주의 재롱을 보고 자녀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자가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셈이다. 독립을 한다고 해도 수시로 전화하고 안부 묻고,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모의 말이 모두 잔소리로 들리는 청년의 시기 독립은 부모와의 연락조차 끊어 버리는 완전 독립을 꿈꾸는 청년도 많다. 그럼에도 만약에 어떤 일이 생기면 돌아갈 곳은 부모의 품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을 원하지만 부모는 늘 나의 삶에 배경이 되어 주길 바란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독립하고 가끔 만나 식사를 함께하는 관계이거나 안부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는 사람과 같은 관계로 남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함께 성장한 가족과 따로 분리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는 상황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을 간접적으로 책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는 것 같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안아 기를 땐 방바닥이나 침대에 놓는 것도 싫어서 안아서 흔들어 주고 얼러 달라고 울고불고하지만, 혼자 이것저것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부모보다 수입도 훨씬 나아지고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부모가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을 향해 인생의 시계는 쉼 없이 달리지만 부모가 내가 떠난 둥지에서 날 기다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삶을 살아 자신이 촛농처럼 녹아 없어지는 줄조차 모르고 자녀만 바라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하는 자녀를 떠나보낼 때는 부모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별은 늘 갑작스레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이다. 꽃을 피우고 씨앗이 맺으면 삶을 마감하는 식물이 많고 자녀를 낳고 그만큼 늙고 병들어 젊은 무리에게 무리의 수장 자리를 내어 주는 동물도 많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많은 일들 가득이지만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만큼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후회가 많은 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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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자녀들의 분가. 그것이 내게도 닥쳤다. 아파서 겨우 죽만 먹는 내게 태워다 달라는 말뿐이었던 널 태우고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신축 아파트 일찍 도착해서 기다림이 길었던 탓일까? 아님, 멀건 죽만 먹은 탓일까. 배고픔과 아픔이 한데 뒤섞여 고통으로 찾아 올 때에도 넌 나오지 않았고 그냥 보고만 올 줄 알았던 네가 늦으니 혹시 계약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와서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아 문자로 아빠 배고파 죽겠다고 문자를 보냈지. 그럼에도 너는 한참 후에야 나와서 계약을 했다고 말했고 예상했던 말인데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결혼을 하자 마자 찾아온 너희들은 엄마 아빠에게 기쁨이었던 순간도, 위기였던 순간도, 아픔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임신 중독증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데리고 인천 길 병원에 찾아간, 그날 밤에 산부인과 과장이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불러내서 말했지. 지금 상황에선 아이들이든 아이들 엄마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물론 엄마를 택했지만 뒤따라오던 말이 더 마음 아팠다. 더는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과 한 달의 입원 기간은 내겐 정말 아주 긴 시간이었고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는 병원 수술 스케줄과 통원 치료에 지칠만한 시기였다.

아, 이민하고 나서도 쇼핑몰에서 딸을 잃어버려서 하늘이 샛노래지던 날도 있었고, 생선 가시가 아들 목에 걸려서 어린이 병원에 가서도 못 빼고 결국 집에 돌아와서 빼내게 된 기억, 현관 쇠문에 딸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뼈가 으스러졌을 때 아픔은 내게도 그대로 전율처럼 아픔이 전해져 왔었다.

때론 말 안 듣는다고 체벌하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던 너의 당차고 황당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엄마를 다신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너의 검은 눈동자.

우리 델리 숍을 할 때 캐셔 일을 가르쳐 주니 곧 잘해서 그걸로 이곳저곳 취직을 해서 일하면서 학교 다니던 네가 그리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남들같이 좀 더 맛난 거 먹이고 이쁜 집에서 키우지 못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고 싶었다. 난 네가 진심으로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뇌경색이 온 몇 년 전부터 직장은 수시로 바뀌고 불안정한 직장으로 인해 나도 불안하고 가족 모두가 불안할 때 너의 도움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아파 일하지 못하는 아빠와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고 갑작스레 선언한 네가 조금은 서운하고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부모 마음이란 늘 자식에게 쉼터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남들처럼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하는 일상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네가 좋다면 결혼이야 안 해도 좋고 세상에 속지 말고 친구 말에 속지 말고 부모 말을 듣기를 바라지만 부모의 말은 늘 쓰고 친구의 말은 달콤하지.

우리가 물질적으로 무엇을 해주지 못한다고 마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싶지만, 물질이 우선이 되어 버린 세상에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물질이고 보니 표현하기조차 막막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진다고 연락처를 지우듯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에 부모들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고 교통사고에 뛰어들어 자식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 된 본능일지 모른다. 촛불을 태우듯 자신을 태워 자녀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 부모다. 그 초의 빛이 희미해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더라도 말이다.

다 장성한 자녀의 독립은 부모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요즘은 주거 환경이 비싼 임대료는 물론 매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가격이라 부모인 나조차 집이 없는 형편이다 보니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이 아니란 생각조차 든다. 다 장성했다고 해도 부모와 함께 살면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사회는 핵가족 사회이지만 핵가족을 거부하고 사촌에 팔촌까지 한집에서 사는 인도 가정은 대저택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경향이 강하다. 동물의 세계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많은 위험에 노출되듯이 인간 세상에서도 가족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면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언제까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독립한다고 해도 부모가 남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함께 살 때보다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필요할 때 아이를 나아 기르면서 아이를 볼 사람이 없으면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손주의 재롱을 보고 자녀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자가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셈이다. 독립을 한다고 해도 수시로 전화하고 안부 묻고,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모의 말이 모두 잔소리로 들리는 청년의 시기 독립은 부모와의 연락조차 끊어 버리는 완전 독립을 꿈꾸는 청년도 많다. 그럼에도 만약에 어떤 일이 생기면 돌아갈 곳은 부모의 품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을 원하지만 부모는 늘 나의 삶에 배경이 되어 주길 바란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독립하고 가끔 만나 식사를 함께하는 관계이거나 안부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는 사람과 같은 관계로 남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함께 성장한 가족과 따로 분리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는 상황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을 간접적으로 책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는 것 같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안아 기를 땐 방바닥이나 침대에 놓는 것도 싫어서 안아서 흔들어 주고 얼러 달라고 울고불고하지만, 혼자 이것저것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부모보다 수입도 훨씬 나아지고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부모가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을 향해 인생의 시계는 쉼 없이 달리지만 부모가 내가 떠난 둥지에서 날 기다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삶을 살아 자신이 촛농처럼 녹아 없어지는 줄조차 모르고 자녀만 바라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하는 자녀를 떠나보낼 때는 부모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별은 늘 갑작스레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이다. 꽃을 피우고 씨앗이 맺으면 삶을 마감하는 식물이 많고 자녀를 낳고 그만큼 늙고 병들어 젊은 무리에게 무리의 수장 자리를 내어 주는 동물도 많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많은 일들 가득이지만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만큼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후회가 많은 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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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 나비가 날갯짓하듯
꽃 속에 묻혀 꽃가루 뒤집어쓴 벌처럼
내 젊은 날엔 사랑 뒤에 찾아올 만남이 이쁜 만남일 거란 기대뿐이었다

봄날 나비처럼 한 쌍 나의 분신이 왔고
수 없는 밤을 잠 못들던 아기 울음소리에도
수 없는 날마다 병원 수술실 앞에 서성이던 날도 건강만 해다오
공부 같은 건 못해도 괜찮아 말해 놓고

날이 갈수록 욕심을 마음에 쌓아
네가 날지 못해도 순한 양처럼 내 못다 한 일을 대신해주길 바랐다

나의 육신은 시든 꽃나무처럼
날이 갈수록 깜부기병 든 고추처럼 병들어 가고 너의 꽃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날 네가 말했지

이젠 바람 따라 떠나겠노라
언젠가 떠날 줄 알았던 연인처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맴돌다 주룩 눈물로 흘러내린다
이렇게 널 떠나보내기 싫었는데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섭섭함이 가을 서릿발처럼 안으로부터 내 모든 육신을 얼리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풀썩 주저앉을지도 모르지만 입으론 모진 말로 까마귀 참새 잡듯 너를 쪼고 있구나

우리에게 올 때처럼
삶은 순간순간이 아픔투성일 테지만
부디 훨훨 날아
아프지 말고.
 







#작가의 변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자녀들의 분가. 그것이 내게도 닥쳤다. 아파서 겨우 죽만 먹는 내게 태워다 달라는 말뿐이었던 널 태우고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신축 아파트 일찍 도착해서 기다림이 길었던 탓일까? 아님, 멀건 죽만 먹은 탓일까. 배고픔과 아픔이 한데 뒤섞여 고통으로 찾아 올 때에도 넌 나오지 않았고 그냥 보고만 올 줄 알았던 네가 늦으니 혹시 계약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와서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아 문자로 아빠 배고파 죽겠다고 문자를 보냈지. 그럼에도 너는 한참 후에야 나와서 계약을 했다고 말했고 예상했던 말인데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결혼을 하자 마자 찾아온 너희들은 엄마 아빠에게 기쁨이었던 순간도, 위기였던 순간도, 아픔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임신 중독증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데리고 인천 길 병원에 찾아간, 그날 밤에 산부인과 과장이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불러내서 말했지. 지금 상황에선 아이들이든 아이들 엄마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물론 엄마를 택했지만 뒤따라오던 말이 더 마음 아팠다. 더는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과 한 달의 입원 기간은 내겐 정말 아주 긴 시간이었고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는 병원 수술 스케줄과 통원 치료에 지칠만한 시기였다.

아, 이민하고 나서도 쇼핑몰에서 딸을 잃어버려서 하늘이 샛노래지던 날도 있었고, 생선 가시가 아들 목에 걸려서 어린이 병원에 가서도 못 빼고 결국 집에 돌아와서 빼내게 된 기억, 현관 쇠문에 딸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뼈가 으스러졌을 때 아픔은 내게도 그대로 전율처럼 아픔이 전해져 왔었다.

때론 말 안 듣는다고 체벌하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던 너의 당차고 황당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엄마를 다신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너의 검은 눈동자.

우리 델리 숍을 할 때 캐셔 일을 가르쳐 주니 곧 잘해서 그걸로 이곳저곳 취직을 해서 일하면서 학교 다니던 네가 그리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남들같이 좀 더 맛난 거 먹이고 이쁜 집에서 키우지 못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고 싶었다. 난 네가 진심으로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뇌경색이 온 몇 년 전부터 직장은 수시로 바뀌고 불안정한 직장으로 인해 나도 불안하고 가족 모두가 불안할 때 너의 도움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아파 일하지 못하는 아빠와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고 갑작스레 선언한 네가 조금은 서운하고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부모 마음이란 늘 자식에게 쉼터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남들처럼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하는 일상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네가 좋다면 결혼이야 안 해도 좋고 세상에 속지 말고 친구 말에 속지 말고 부모 말을 듣기를 바라지만 부모의 말은 늘 쓰고 친구의 말은 달콤하지.

우리가 물질적으로 무엇을 해주지 못한다고 마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싶지만, 물질이 우선이 되어 버린 세상에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물질이고 보니 표현하기조차 막막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진다고 연락처를 지우듯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에 부모들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고 교통사고에 뛰어들어 자식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 된 본능일지 모른다. 촛불을 태우듯 자신을 태워 자녀의 앞길을 밝히는 것이 부모다. 그 초의 빛이 희미해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더라도 말이다.

다 장성한 자녀의 독립은 부모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요즘은 주거 환경이 비싼 임대료는 물론 매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가격이라 부모인 나조차 집이 없는 형편이다 보니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이 아니란 생각조차 든다. 다 장성했다고 해도 부모와 함께 살면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사회는 핵가족 사회이지만 핵가족을 거부하고 사촌에 팔촌까지 한집에서 사는 인도 가정은 대저택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경향이 강하다. 동물의 세계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많은 위험에 노출되듯이 인간 세상에서도 가족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면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언제까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독립한다고 해도 부모가 남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함께 살 때보다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필요할 때 아이를 나아 기르면서 아이를 볼 사람이 없으면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손주의 재롱을 보고 자녀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자가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셈이다. 독립을 한다고 해도 수시로 전화하고 안부 묻고,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모의 말이 모두 잔소리로 들리는 청년의 시기 독립은 부모와의 연락조차 끊어 버리는 완전 독립을 꿈꾸는 청년도 많다. 그럼에도 만약에 어떤 일이 생기면 돌아갈 곳은 부모의 품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을 원하지만 부모는 늘 나의 삶에 배경이 되어 주길 바란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독립하고 가끔 만나 식사를 함께하는 관계이거나 안부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는 사람과 같은 관계로 남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함께 성장한 가족과 따로 분리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는 상황은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을 간접적으로 책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는 것 같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안아 기를 땐 방바닥이나 침대에 놓는 것도 싫어서 안아서 흔들어 주고 얼러 달라고 울고불고하지만, 혼자 이것저것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부모보다 수입도 훨씬 나아지고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부모가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을 향해 인생의 시계는 쉼 없이 달리지만 부모가 내가 떠난 둥지에서 날 기다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는 삶을 살아 자신이 촛농처럼 녹아 없어지는 줄조차 모르고 자녀만 바라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하는 자녀를 떠나보낼 때는 부모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별은 늘 갑작스레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이다. 꽃을 피우고 씨앗이 맺으면 삶을 마감하는 식물이 많고 자녀를 낳고 그만큼 늙고 병들어 젊은 무리에게 무리의 수장 자리를 내어 주는 동물도 많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많은 일들 가득이지만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만큼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후회가 많은 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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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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