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0. 팔베개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0. 팔베개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7.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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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는 왕겨로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좁쌀 베개 베고 자는 천사들 보면서
좁쌀로 베개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평생 거친 왕겨로 만든 베개만 베고
살다 가신 어머니

솜으로 만든 베개도 베어 보고
이젠 폼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자지만
때때로 깊은 밤 깨어
어머니 팔베개
그리움을 느낍니다.

어머니 체취가 밴
왕겨 베개 그 풋풋한
팔베개가 그립습니다.

 

#작가의 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어머니도 떠나고 장모님, 손위 처남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게도 믿고 싶은 일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다니던 직장에서 9.11사태로 인해 해고 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고가 전화로 주말에 전해졌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달려갈 수 없었다. 항공기 편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이야 항공사에 전화하면 비상 상황에 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리치몬드 센터에 가서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니 월요일 오후에 시애틀로 돌아가는 아시아나 편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알래스카 항공을 타고 시애틀에 가서 다시 2시간 이상을 기다리다 한국행을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시애틀에서 한국 가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밴쿠버에서 기다리고 시애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서 시골인 제천에 내려가니 이미 장례는 치르고 사모제 전날이었다. 상주로 건을 쓰고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짚으니 눈물이 절로 나고 가슴속 깊은 곳부터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슬픔은 어쩌면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다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집을 도망치듯 청주 직업 훈련원 시험 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집을 다니러 갔다 오는 외출이 있긴 했지만, 내 가족과 이별 즉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과 군 생활 중 집에 외출 외박 휴가 등이 있긴 했지만, 붙박이 가족이 아닌 뜨내기 가족이었던 셈이다.

언제나 날 믿어 주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슬픔에 힘들어할 때도 늘 가족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비빌 언덕일 것만 같던 가족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치매에 걸려 동네 사람들이 방송으로 밤늦게까지 찾아 나서는 날도 많았고 결국은 그 치매로 청주 오근장역 인근 철로에서 기차에 치여 사망하셨다는 아버지는 이민 후에 내 삶이 버거워 잊고 지내던 가족의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지만 우린 만날 때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 그 가족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한때 나도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나는 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일까? 동네 공무원 집 아이들처럼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부모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7명의 아이를 잃고 겨우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천재도 아니고, 노래를 잘 부르지도, 재능이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가족이 되었다. 어릴 땐 병치레도 많이 해서 혹시나 또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물에 빠져 죽을뻔하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이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툭하면 시름시름 앓고 학교를 2주 이상 결석하고, 그러면서도 쓰는 냄비를 엿 바꿔 먹고, 집에서 쓰는 체바퀴로 개울에서 고기를 잡고, 서리를 하다 걸려 목화밭 주인이 찾아오고 그 말썽 많던 아이가 결혼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기 원했지만, 객지로 떠돌다 결혼하고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내가 나이 들고 아이들이 자라서 내가 장가간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씩 이해되는 많은 일이 있다. 삶에는 연습이 없이 늘 좌충우돌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에 익숙한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내 가족은 없고 캐나다에서 자라서 캐나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가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도 이해관계가 많이 작용하는 요즘 그래도 부모는 늘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자녀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내가 정말 살기 힘들어도 말이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 모든 투정을 받아 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힘들다고 때로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 부모님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힘이 되던 때가 있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힘도, 건강도, 경제력도 근육 빠지듯이 빠져 사는 것이 정말 힘들다. 생각과 마음은 젊은 시절처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런 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자꾸만 삐걱거리고 툭하면 병원에 입원하고 한 끼라도 거르게 되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세상 모두가 욕을 해도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감싼다. 그런 것이 가족이다. 세상에 가장 나를 믿고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겐 그런 부모가 이제 없다. 때론 남남 같아서 찬바람이 도는 캐나다에서 자란 자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 서먹한 형제와 조카들이 있을 뿐이다.

젖먹이일 때 쓰던 메밀 베개를 버리지 못하는 아들처럼, 나도 어머니의 팔베개를 하고 덩치는 산만한 아이가 축 늘어진 엄마의 찌찌를 만지며 어머니 품을 파고들던 추억이 있다. 사는 것이 힘들 때는 그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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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는 왕겨로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좁쌀 베개 베고 자는 천사들 보면서
좁쌀로 베개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평생 거친 왕겨로 만든 베개만 베고
살다 가신 어머니

솜으로 만든 베개도 베어 보고
이젠 폼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자지만
때때로 깊은 밤 깨어
어머니 팔베개
그리움을 느낍니다.

어머니 체취가 밴
왕겨 베개 그 풋풋한
팔베개가 그립습니다.

 

#작가의 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어머니도 떠나고 장모님, 손위 처남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게도 믿고 싶은 일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다니던 직장에서 9.11사태로 인해 해고 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고가 전화로 주말에 전해졌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달려갈 수 없었다. 항공기 편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이야 항공사에 전화하면 비상 상황에 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리치몬드 센터에 가서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니 월요일 오후에 시애틀로 돌아가는 아시아나 편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알래스카 항공을 타고 시애틀에 가서 다시 2시간 이상을 기다리다 한국행을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시애틀에서 한국 가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밴쿠버에서 기다리고 시애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서 시골인 제천에 내려가니 이미 장례는 치르고 사모제 전날이었다. 상주로 건을 쓰고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짚으니 눈물이 절로 나고 가슴속 깊은 곳부터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슬픔은 어쩌면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다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집을 도망치듯 청주 직업 훈련원 시험 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집을 다니러 갔다 오는 외출이 있긴 했지만, 내 가족과 이별 즉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과 군 생활 중 집에 외출 외박 휴가 등이 있긴 했지만, 붙박이 가족이 아닌 뜨내기 가족이었던 셈이다.

언제나 날 믿어 주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슬픔에 힘들어할 때도 늘 가족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비빌 언덕일 것만 같던 가족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치매에 걸려 동네 사람들이 방송으로 밤늦게까지 찾아 나서는 날도 많았고 결국은 그 치매로 청주 오근장역 인근 철로에서 기차에 치여 사망하셨다는 아버지는 이민 후에 내 삶이 버거워 잊고 지내던 가족의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지만 우린 만날 때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 그 가족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한때 나도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나는 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일까? 동네 공무원 집 아이들처럼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부모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7명의 아이를 잃고 겨우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천재도 아니고, 노래를 잘 부르지도, 재능이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가족이 되었다. 어릴 땐 병치레도 많이 해서 혹시나 또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물에 빠져 죽을뻔하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이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툭하면 시름시름 앓고 학교를 2주 이상 결석하고, 그러면서도 쓰는 냄비를 엿 바꿔 먹고, 집에서 쓰는 체바퀴로 개울에서 고기를 잡고, 서리를 하다 걸려 목화밭 주인이 찾아오고 그 말썽 많던 아이가 결혼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기 원했지만, 객지로 떠돌다 결혼하고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베개는 왕겨로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좁쌀 베개 베고 자는 천사들 보면서
좁쌀로 베개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평생 거친 왕겨로 만든 베개만 베고
살다 가신 어머니

솜으로 만든 베개도 베어 보고
이젠 폼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자지만
때때로 깊은 밤 깨어
어머니 팔베개
그리움을 느낍니다.

어머니 체취가 밴
왕겨 베개 그 풋풋한
팔베개가 그립습니다.

 

#작가의 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어머니도 떠나고 장모님, 손위 처남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게도 믿고 싶은 일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다니던 직장에서 9.11사태로 인해 해고 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고가 전화로 주말에 전해졌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달려갈 수 없었다. 항공기 편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이야 항공사에 전화하면 비상 상황에 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리치몬드 센터에 가서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니 월요일 오후에 시애틀로 돌아가는 아시아나 편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알래스카 항공을 타고 시애틀에 가서 다시 2시간 이상을 기다리다 한국행을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시애틀에서 한국 가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밴쿠버에서 기다리고 시애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서 시골인 제천에 내려가니 이미 장례는 치르고 사모제 전날이었다. 상주로 건을 쓰고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짚으니 눈물이 절로 나고 가슴속 깊은 곳부터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슬픔은 어쩌면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다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집을 도망치듯 청주 직업 훈련원 시험 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집을 다니러 갔다 오는 외출이 있긴 했지만, 내 가족과 이별 즉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과 군 생활 중 집에 외출 외박 휴가 등이 있긴 했지만, 붙박이 가족이 아닌 뜨내기 가족이었던 셈이다.

언제나 날 믿어 주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슬픔에 힘들어할 때도 늘 가족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비빌 언덕일 것만 같던 가족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치매에 걸려 동네 사람들이 방송으로 밤늦게까지 찾아 나서는 날도 많았고 결국은 그 치매로 청주 오근장역 인근 철로에서 기차에 치여 사망하셨다는 아버지는 이민 후에 내 삶이 버거워 잊고 지내던 가족의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지만 우린 만날 때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 그 가족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한때 나도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나는 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일까? 동네 공무원 집 아이들처럼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부모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7명의 아이를 잃고 겨우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천재도 아니고, 노래를 잘 부르지도, 재능이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가족이 되었다. 어릴 땐 병치레도 많이 해서 혹시나 또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물에 빠져 죽을뻔하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이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툭하면 시름시름 앓고 학교를 2주 이상 결석하고, 그러면서도 쓰는 냄비를 엿 바꿔 먹고, 집에서 쓰는 체바퀴로 개울에서 고기를 잡고, 서리를 하다 걸려 목화밭 주인이 찾아오고 그 말썽 많던 아이가 결혼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기 원했지만, 객지로 떠돌다 결혼하고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내가 나이 들고 아이들이 자라서 내가 장가간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씩 이해되는 많은 일이 있다. 삶에는 연습이 없이 늘 좌충우돌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에 익숙한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내 가족은 없고 캐나다에서 자라서 캐나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가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도 이해관계가 많이 작용하는 요즘 그래도 부모는 늘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자녀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내가 정말 살기 힘들어도 말이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 모든 투정을 받아 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힘들다고 때로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 부모님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힘이 되던 때가 있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힘도, 건강도, 경제력도 근육 빠지듯이 빠져 사는 것이 정말 힘들다. 생각과 마음은 젊은 시절처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런 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자꾸만 삐걱거리고 툭하면 병원에 입원하고 한 끼라도 거르게 되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세상 모두가 욕을 해도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감싼다. 그런 것이 가족이다. 세상에 가장 나를 믿고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겐 그런 부모가 이제 없다. 때론 남남 같아서 찬바람이 도는 캐나다에서 자란 자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 서먹한 형제와 조카들이 있을 뿐이다.

젖먹이일 때 쓰던 메밀 베개를 버리지 못하는 아들처럼, 나도 어머니의 팔베개를 하고 덩치는 산만한 아이가 축 늘어진 엄마의 찌찌를 만지며 어머니 품을 파고들던 추억이 있다. 사는 것이 힘들 때는 그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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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 들고 아이들이 자라서 내가 장가간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씩 이해되는 많은 일이 있다. 삶에는 연습이 없이 늘 좌충우돌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에 익숙한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내 가족은 없고 캐나다에서 자라서 캐나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가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도 이해관계가 많이 작용하는 요즘 그래도 부모는 늘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자녀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내가 정말 살기 힘들어도 말이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 모든 투정을 받아 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힘들다고 때로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 부모님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힘이 되던 때가 있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힘도, 건강도, 경제력도 근육 빠지듯이 빠져 사는 것이 정말 힘들다. 생각과 마음은 젊은 시절처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런 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자꾸만 삐걱거리고 툭하면 병원에 입원하고 한 끼라도 거르게 되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세상 모두가 욕을 해도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감싼다. 그런 것이 가족이다. 세상에 가장 나를 믿고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겐 그런 부모가 이제 없다. 때론 남남 같아서 찬바람이 도는 캐나다에서 자란 자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 서먹한 형제와 조카들이 있을 뿐이다.

젖먹이일 때 쓰던 메밀 베개를 버리지 못하는 아들처럼, 나도 어머니의 팔베개를 하고 덩치는 산만한 아이가 축 늘어진 엄마의 찌찌를 만지며 어머니 품을 파고들던 추억이 있다. 사는 것이 힘들 때는 그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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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는 왕겨로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좁쌀 베개 베고 자는 천사들 보면서
좁쌀로 베개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평생 거친 왕겨로 만든 베개만 베고
살다 가신 어머니

솜으로 만든 베개도 베어 보고
이젠 폼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자지만
때때로 깊은 밤 깨어
어머니 팔베개
그리움을 느낍니다.

어머니 체취가 밴
왕겨 베개 그 풋풋한
팔베개가 그립습니다.

 

#작가의 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어머니도 떠나고 장모님, 손위 처남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정말로 신기하게도 믿고 싶은 일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난 다니던 직장에서 9.11사태로 인해 해고 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고가 전화로 주말에 전해졌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달려갈 수 없었다. 항공기 편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이야 항공사에 전화하면 비상 상황에 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리치몬드 센터에 가서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니 월요일 오후에 시애틀로 돌아가는 아시아나 편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알래스카 항공을 타고 시애틀에 가서 다시 2시간 이상을 기다리다 한국행을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시애틀에서 한국 가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밴쿠버에서 기다리고 시애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서 시골인 제천에 내려가니 이미 장례는 치르고 사모제 전날이었다. 상주로 건을 쓰고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지팡이까지 짚으니 눈물이 절로 나고 가슴속 깊은 곳부터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슬픔은 어쩌면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려다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집을 도망치듯 청주 직업 훈련원 시험 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집을 다니러 갔다 오는 외출이 있긴 했지만, 내 가족과 이별 즉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과 군 생활 중 집에 외출 외박 휴가 등이 있긴 했지만, 붙박이 가족이 아닌 뜨내기 가족이었던 셈이다.

언제나 날 믿어 주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슬픔에 힘들어할 때도 늘 가족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비빌 언덕일 것만 같던 가족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치매에 걸려 동네 사람들이 방송으로 밤늦게까지 찾아 나서는 날도 많았고 결국은 그 치매로 청주 오근장역 인근 철로에서 기차에 치여 사망하셨다는 아버지는 이민 후에 내 삶이 버거워 잊고 지내던 가족의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지만 우린 만날 때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내가 원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 그 가족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한때 나도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나는 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일까? 동네 공무원 집 아이들처럼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부모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7명의 아이를 잃고 겨우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천재도 아니고, 노래를 잘 부르지도, 재능이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가족이 되었다. 어릴 땐 병치레도 많이 해서 혹시나 또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물에 빠져 죽을뻔하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이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툭하면 시름시름 앓고 학교를 2주 이상 결석하고, 그러면서도 쓰는 냄비를 엿 바꿔 먹고, 집에서 쓰는 체바퀴로 개울에서 고기를 잡고, 서리를 하다 걸려 목화밭 주인이 찾아오고 그 말썽 많던 아이가 결혼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기 원했지만, 객지로 떠돌다 결혼하고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내가 나이 들고 아이들이 자라서 내가 장가간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씩 이해되는 많은 일이 있다. 삶에는 연습이 없이 늘 좌충우돌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에 익숙한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릴 적 내 가족은 없고 캐나다에서 자라서 캐나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가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도 이해관계가 많이 작용하는 요즘 그래도 부모는 늘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자녀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내가 정말 살기 힘들어도 말이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내 모든 투정을 받아 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힘들다고 때로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 부모님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힘이 되던 때가 있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힘도, 건강도, 경제력도 근육 빠지듯이 빠져 사는 것이 정말 힘들다. 생각과 마음은 젊은 시절처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런 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자꾸만 삐걱거리고 툭하면 병원에 입원하고 한 끼라도 거르게 되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세상 모두가 욕을 해도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감싼다. 그런 것이 가족이다. 세상에 가장 나를 믿고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겐 그런 부모가 이제 없다. 때론 남남 같아서 찬바람이 도는 캐나다에서 자란 자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 서먹한 형제와 조카들이 있을 뿐이다.

젖먹이일 때 쓰던 메밀 베개를 버리지 못하는 아들처럼, 나도 어머니의 팔베개를 하고 덩치는 산만한 아이가 축 늘어진 엄마의 찌찌를 만지며 어머니 품을 파고들던 추억이 있다. 사는 것이 힘들 때는 그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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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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