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이상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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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국진
  • 승인 2022.08.07 13:46
  •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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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개인전 '月印-墨言'

지난달 3일부터 범어사 성보 박물관에서 경선 스님의 선서화(禪書畵) 개인전 ‘월인-묵언(月印-墨言)’이 열렸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달은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고, 먹[墨]으로 말을 한다”니 얼마나 멋진가? 세상에 있는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님의 공덕을 그림으로 드러내겠다는 뜻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림을 차근차근 보는 중에 이상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시기에 사용하는 선(線)이나 묵(墨)의 기법은 비슷해야 하는 법인데, 아주 탁월한 선과 발묵법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냥 아무렇게나 그렸다는 느낌을 가진 그림이 섞여있다. 제법 격조가 있고 수준이 높은 작품부터 수준이 되지 않은 작가의 그림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한 사람의 전시회였는데 말이다.

정선이 그린 10여 점의 금강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위를 표현하면 골격미(骨格美) 또는 암골미(岩骨美)라 부르는 중첩된 암골의 준엄한 모습을 나타내는 거센 필선이 어디서나 보여야 하는 법이다. 성근 솔잎과 늙은 줄기의 거친 표현 그리고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율동감이 있는 송린(松鱗)을 그린 김홍도의 소나무 표현은 “송하선인취생도(松下仙人吹笙圖)”뿐만 아니라 다른 소나무 그림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정상이다.

예를 들어 전시회에 걸려 있는 작품 중에 바위를 표현한 세 작품 “불회(不會)”와 “산산수수(山山水水)”, “불식(不識)” 등을 보면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처럼 바위를 묘사하는 선이 너무 다르다. 괴이한 일이다.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불회 46*46cm [月印-墨言 도록]





산산수수 46.4*46.4cm [月印-墨言 도록]





불식 46*45.8cm [月印-墨言 도록]



해를 그린 발묵법 또한 “안양암 일출(安養庵 日出)”과 “한산습득가가소(寒山拾得呵呵笑)”의 묘사가 너무 다르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전시회에 내어놓은 그림 속에서 덧칠한 화실 선생의 필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안양암 일출 45.2*45.4cm [月印-墨言 도록]





한산습득가가소 46*69.7cm[月印-墨言 도록]



더하여 대부분의 그림에 임인(壬寅)년에 그렸다고 써놓았는데, 그림 하나하나의 스타일이 너무나 다르다. 거친 최북(崔北, 1712~1760?)에서 얌전한 신명연(申命衍, 1808~1886)까지 다 들어있다. 어떤 그림은 규방의 부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해에 한 화가가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정신세계는 어떤 세계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그림을 보고 그림이 “월인삼매(月印三昧)로 이끈다”거나 “전통문인화적 필치” 운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으로만 그리면 전통문인화가 되는지? 뭐가 달이 비추는 삼매의 경지인지 모르겠다. 전시회 제목은 월인(月印)인데 달 그림은 하나도 없고 해 그림만 있는데 말이다.

“정진도량에서 주지소임을 맡으며 예불 울력 공양을 철저히 지켜왔던 스님의 원력시간 가운데 관조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찬사도 있었다. 뭔가 마구 섞인 그림들 속에 들어 있는 관조적 내면세계가 어떤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불가에서 관조(觀照)란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하는 자들까지 잔뜩 불러 모으고, “겁외의 불연(佛緣)을 맺기”를 기원하는 전시회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겁외의 불연이 무엇인지 무지몽매한 나를 탓하며 돌아왔다. 어떤 겁 밖에 있는 어떤 불연을 말 함인지?

도록의 인사말에는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귀도, 말도, 미혹한 중생도, 부처도 건너게 해주는 다리”라며 “조주석교(趙州石橋)”를 인용했다. 화가 스님이 스스로가 부처라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부처인지, 부처님이 자신의 요사채를 비추는 바람에 부처의 뜻을 깨달았는지 호를 월인(月印)이라 쓰는 화가 스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속가의 중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통 화가나 서예가는 원래 큰 작품을 잘하는 사람이 대가(大家)이고, 음악가는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대가다. 10호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만 채워진 전시회에서 “한창 그림을 배우던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3일을 쉬면 붓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해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소임을 지내는 동안에도 붓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화가 스님의 이야기는 허황되게 들린다. 정말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려왔던 그림이 맞는가 모르겠다.

입구 왼쪽에 걸린 그림은 마치 명말 청초의 작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병에 꽂은 국화[甁鞠(병국)]”을 모방한 것 같다. 다만 팔대산인은 망한 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모든 그림에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그런 것을 따라 그렸는지 화분 위에서 난초가 복잡하고 말라버려 시든 느낌이 난다. 그런데 화제(畵題)는 “청향(淸香)”이라... 오묘한 느낌이다. 팔대산인을 좋아했는지 바위 위의 쥐(팔대산인은 고양이를 그렸다) 그림이나 오리 두 마리 그림은 많이 보던 모습이다.



청향 44.5*24cm [月印-墨言 도록]



두 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도 이상했다. 원효 스님의 도장에 새겨져 있던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漉人天之魚)”란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동산 스님께 드린 족자의 글씨와 거의 같고, 소식(蘇軾)의 “퇴포(退圃)” 시에서 따온 구절인 “원중초목춘무수(園中草木春無數)”란 글씨는 중화민국 개국 원훈(元勳) 중의 한 사람인 서예가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의 글씨와 거의 같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본 전시장이 아닌 영상 전시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걸어 두었더라만...

그림에 있어서 앞선 선배들의 그림과 같게 그리는 것은 ‘임모본(臨摹本)’이라 한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두고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摹)’는 종이를 위에 겹쳐 얹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따라서 '임모'란 넓게 말하면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연습하는 것이고 선배 화가들의 기교나 법칙 등을 배우는 연구 과정이다. 그러기에 형태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가진 뜻[畵意(화의)]’까지 베끼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에는 반드시 방(倣)이란 표시를 해야 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장대교망녹인천지어(왼쪽), 원중초목춘무수 [月印-墨言 도록]

그런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른 두 사람의 글씨와 닮은 두 편의 족자는 정말 생뚱맞아 보였다. 게다가 두 사람의 글씨체는 정말 다르기까지 한데 말이다. 2003년부터 2021년까지 범어사 성보박물관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저런 글씨를 보았다면 누구를 배우려고 썼다는 표현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표절(剽竊)이라 할 때, 표(剽)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폄자야'(砭刺也)라 했으니. ‘침을 놓고 찌른다’는 말이고, 절(竊)은 ‘도자중출왈절'(盜自中出曰竊)’이라 했으니 말 그대로 ‘훔친다’는 말이다. 즉 표절은 ‘다른 사람의 저작을 노략질하여 덥치며 훔쳐서 취한다’는 뜻이다. 물론 남의 것을 빌려올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서 빌려 왔는지 밝히지 않으면 바로 표절이다. 노략질이고 도적질이란 말이다. 

또한 범어사 주지 스님이란 분이 자신이 관할하는 성보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한 것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대통령이 된 자가 자신이 그림 좀 그린다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그림을 팔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설사 그게 자선을 위한 일이라도 말이다. 임기를 끝내고 했다면 아무런 잡음도 생기지 않았을 일인데...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것은 조선의 선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속가(俗家)의 사람이라 불가(佛家)의 관행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만, 주지라는 분이 유가(儒家)에서 경계를 삼으라고 한 말보다 못한 행동을 했다면 불가에 누(累)를 끼치는 일이 아닐까 싶다.

/ 안국진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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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씨 2022-08-22 22:37:24
부산 문수선원. 무비< 화엄경 번역>,,에게서 불보사님이 떠났습니다. 생명연장에서 떠나습니다. 법은 누구에게사. 공ㅈㅓㅇ 하게

아자씨 2022-08-16 03:01:40
일본ㅇㅔ 있는. 불교문화재 되돌렫주시길 바랍니다. 글고 참회바랍니다. 임진왜란때 ㅇㅑㄱ탈문화재도

아자씨 2022-08-16 02:56:52
불교문화재를. 불자니ㅁ 의 품으로되돌려주시길바랍니다. 당신들이 왜 불교미술푸을숨기고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저런조치힌ㅂ니다

아자씨 2022-08-11 21:39:36
통도 극락암신도님과 부석사 신도님께드린 모든광들이. 사라졌습니다

새벽종 2022-08-11 12:18:56
작품의 수준과 진위를 떠나..이 작품을 최하1000만원 이상에 파니..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국전에 등록한 미술인도 아니고..주지스님이라는 이유로..암묵적 위계에의한....입에 담기도 부끄럽다. 공찰주지들의 돈도 다..시주돈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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