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2.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 사태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2.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 사태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8.0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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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쓴 남북한 교류”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남측 민간단체를 비롯한 불교통일 단체에도 2008년 1월 23일 일명 ‘통일 방해부’란 오명을 쓴 통일부 폐지에 관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통일부 폐지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2008년 1월 17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외신기자회견에서 “과거 남북관계는 양쪽이 각각 특정 부서에서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협상했으나, 이제는 남북관계도 한 단계 더 올라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통일에 대비해야 하는데 전략적으로 어느 한 부서가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졌다.”라며,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협력이 적극적으로 되면, 모든 부서가 다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의 통일부 폐지 방침에 관한 1인 시위, 반대 성명 발표 등 각계의 반발이 확산하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차기 정부에서 확대될 남북간 교류를 대비하면서 그다음 통일단계까지 염두에 두고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백학순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세종논평》에서 “우리 스스로가 민족문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키우지 않으면서 국제사회가 우리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존중해 줄 것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견해도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한반도 관계와 통일문제를 한미 종속관계에서 취급하겠다는 기조는 2008년 MB정부 때로 되돌아가는 형국이다. 또 윤석열 정부의 통일부 방향은 다름의 인정이 아닌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2008년에도 일반 시민단체들은 민족이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남북관계를 모두 단절시켰던 MB정부 때로의 회귀는 곧 교류와 통일의 포기라 할 수 있다.

그때 발단은 북측의 해안 초병 사격으로 금강산 관광객 여성 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2008년 7월 11일 새벽에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인해 금강산관광은 7월 12일부터 잠정 중단된 다음, 2010년 3월 서해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한 대북 제재로 이명박 정부가 행정명령인 ‘5.24 조치’를 내림으로써 거의 멈췄다. 또 2004년 1월에 출범돼 남북관계의 마지막 보루였던 개성공단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10일 폐쇄 명령을 내림으로써 모든 교류와 협력사업이 중단됐다.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관광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2008년 11월 29일에 잠정 중단을 발표하면서 관광을 통한 남북교류에 ‘정치적 멍에’가 덧씌워졌다. 남북관계의 정치・군사적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한 번이라도 가 볼걸”이란 볼멘소리가 생겨났다. 관광이 멈추고 난 다음, 찾아온 후회 또는 미련이다. 10년 동안 총 193만여 명의 남측 관광객이 찾았던 금강산관광이 멈춘 그때의 현장을 살펴본다. 또한 관광과 함께 이루어진 금강산 성지순례의 이모저모를 정리했다.

금강산 육로관광 개설(2003.2.). 사진=현대아산 홈페이지(2004.2.16.)





1930년대 금강산 구룡연 일본인 수학여행단. 사진=강원도청 홈페이지(미디어한국학 제공)



금강산 관광 시작과 멈춤의 차이

그간 금강산관광의 시작과 멈춤을 보면, 시작은 민간의 힘으로 일구었다. 그 멈춤은 몇몇 정권에서 막아 버렸다. 열정을 가졌던 소수의 사람이 척박한 교류의 밭을 일구어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여러 사람이 누리던 즐거움은 일부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과 야욕으로 말미암아 제한되고 사라졌다.

관광객 200만 명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변수에 있어 남측의 진상규명・재발 방지・신변안전 보장 등 3대 조건이 부각하면서 금강산관광의 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관광사업 초기이던 1999년 6월, 여성 관광객 1명이 북측 안내원에게 귀순자 문제를 언급한 이유로 억류된 때에도 남측은 즉시 금강산관광을 중단하고 추가적인 신변안전 조치를 요구했다. 당시 억류되었던 관광객은 현대아산과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원회)의 협의로 6일 만에 풀려나 귀환했다. 한 달 후, 양측의 신변안전 등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45일 만에 금강산관광이 재개됐다.

2008년 상반기까지 금강산관광은 양적・질적으로 활성화됐다. 그해 2월 5일 개성에서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실무접촉을 갖고, 빠른 시일내 금강산 관광지구에 ‘금강산관리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3월 17일부터 개인 승용차로 금강산을 방문하고, 7월 중 금강산 비로봉 관광, 7월 말에는 금강산 골프장 정식 개장이 예정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8년 7월 갑자기 발생한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은 추진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남측의 주장과 달리 북측은 관광객의 개인 불찰로 일어난 일이라 규정하고, 피격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합동 조사를 거부했다. 관광사업이 중단된 가운데, 2009년 8월 16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관광에 필요한 모든 편의와 안전을 철저히 담보한다”는 내용의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또한 2009년 11월 금강산관광 11주년 기념식에도 북측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고, 또 남측 당국에 대해서도 당국 간 회담을 제의했다.

이때 이명박 정부는 그간 민간사업으로 분류했던 금강산관광에 대해 개입 의사를 드러냈다. “이 문제는 사업자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이 아닌 만큼, 당국 차원에서 공식적인 제의가 있어야 한다”는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민간사업자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변안전 보장 합의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규정했다. 또 남북당국 간 합의사항 위반이라는 점을 앞세워 사실상 금강산관광 사업에 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더욱이 관광객 피격사건에 이어 2009년 3월 30일 개성공단에서 현대아산 근로자 억류사건이 발생하면서 기존의 신변안전에 대한 합의로는 계속 증대하고, 다양화되는 남북 인적교류를 뒷받침하는 데 미흡하다는 남측의 문제 제기가 뒤따랐다. 북측은 2009년 현대아산・아태평화위원회 간 합의로 충분하다면서 민간 영역 부문의 교류에 무게를 두었다. 당시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약 40여 개에 이르는 남측 기업과 현대아산 협력업체들이 입주한 가운데, 특구 개발 사업에서부터 골프장・면세점・땅콩판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장은 개점 휴업 상태였다.

그 후 북측은 이명박 정부의 요구대로 2010년 1월 14일 아·태평화위원회 명의로 남북당국 간 회담을 공식 제의했으며, 그해 2월 8일 개성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열린 ‘금강산·개성관광 관련 남북당국 간 실무회담’은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양측의 주장이 서로 팽팽히 맞서면서 아무런 합의사항 없이 종료됐다.

실무회담이 무산된 후, 북측은 <조선중앙방송>(2010.2.8.)을 통해 “남측 당국의 태도를 비난하고, 계속 관광사업을 방해할 경우, 남측에 특혜로 주었던 관광사업과 관련한 모든 합의와 계약의 파기, 관광지역 내 남측 부동산 동결 등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등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유화책에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2010년 3월 4일 아·태평화위원회 대변인 담화 성명으로 금강산 관광사업과 관련된 계약 파기 및 부동산 동결조치 예고를 하며, 3월 26일~31일까지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측 기업의 부동산 및 시설 조사를 제안했다. 이어 4월 13일 남측 정부와 한국관광공사 자산인 이산가족면회소・소방서・문화회관・온천장과 면세점 등에 대해 동결조치,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의 중국 관리원을 추방했다. 2010년 4월 23일에는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금강산국제관광특구지도국) 명의로 상기 다섯 곳의 부동산에 대한 몰수 조치하고, 기타 자산에 대해 동결 조치했다. 그리고 4월 30일에는 이산가족면회소와 소방대・문화회관・온천장 및 면세점을 동결하고, 최소 관리직원 16명 제외한 관리 인원을 추방했다.

2008년 7월 11일 남측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전면 중단이라는 극적인 운명을 맞은 금강산관광은 북측이 남측 부동산에 대한 몰수・동결조치(2010.4.)에 이어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 독점권 면허취소(2011.4.)를 발표했다. 2011년 8월에는 남측 재산에 대한 법적 처분 단행을 통지하고, 남측 인원을 모두 추방했다. 이후 관광 재개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이 시도되었으나, 북측의 핵・미사일 개발과 그에 대해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가 고강도 제재를 단행하면서 실질적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류를 위한 만남의 공간은 남북 공조에 의해 복원한 금강산 신계사(2007.10.13. 준공)가 이때까지도 빈틈으로 열려 있었다. 당시 금강산 해금강의 북측 해설봉사원이 자주 말하기를, “나는 새는 저렇게 북남을 잘도 오가는데, 우리 민족은 언제쯤 금강산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고”라며 분단의 아픈 현실을 노래했다.



외금강산 접선봉을 탐승한 일본인 관광객(1937.3.20.). 사진=半島の近影, 조선총독부철도국 발행





내금강 장안사 사성지전(四聖之殿)・대웅보전 소실 전의 모습(1930년대). 사진=북한지역정보넷.



금강산 관광과 순례의 다름

금강산과 백두산 등은 외국 사례와 달리 통역이 필요 없는 세계 유일의 국가 관광지다. 그때 착각한 사실로, 금강산관광을 우리나라에서의 관광쯤으로 생각한 이들이 종종 있었다. 중국을 경유해서 백두산에 가는 것은 중국 땅으로 인식하고 입국 절차를 잘 따랐던 반면, 금강산관광에서는 우리 땅으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위반 행위를 하던 이들조차 있었다. 또 그와 반대로, 북측은 ‘빨간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인지 여행을 주저하거나 경직된 행동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흔히 북한이라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UN에 가입한 개별 국가인 동시에 외국이다. 국명 표기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북측(DPRK)이 160번째이고, 남측(ROK)이 161번째의 유엔 회원국이다.

10년 동안 193만 명의 남측 관광객이 찾았던 금강산관광은 ‘북조선(北朝鮮)’이라는 외국 여행의 한 종류이다. 외국의 자국법이 적용되는 곳으로, 그 나라의 법률을 준수하는 것은 현실적 사항이다. 다만,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로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통일을 지향해가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는 의미로, 국가와 국가를 드나드는 ‘출입국’이라는 용어 대신에 ‘출입경(出入境)’이라 썼다. 그래서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관광, 개성공단의 입출 과정에서는 입국 비자와 같은 신분증을 북측이 발급한 ‘단수 사증(査證, 입국 관광비자)’으로 간소화했다.

19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강원도 동해항에서 이산가족 등 826명을 태운 금강호의 첫 출항으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2003년 2월부터 외금강 육로관광 개설에 이은 2007년 6월 일반인 대상의 내금강 시범 관광으로 확대됐다. 미사일 발사·핵실험 등으로 국내외적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2008년도 관광객 20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2007년 12월 5일부터 1년간 시행된 개성관광은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 후에도 약 4개월간 지속됐을 정도다.

낯섦과 설렘이 교차했던 금강산관광은 그때 불교계에 있어 단순 관광 차원을 넘어 성지순례였다. 660년 원효대사가 내금강 정양사를 재창건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강산 숭배 사상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또 조선 중기부터 생겨난 속담으로, 금강산관광의 대명사처럼 ‘금강산도 식후경(金剛山猶食後景)’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천 년 전, 고려시대부터 중국인들조차 방문하고자 원했던 금강산관광은 조선 중・후기에 황진이의 금강산 방문과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확산해 민간에서부터 불린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은 1819년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권7, 주(注)에 처음 기록됐다. 소당 김형수는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1816년에 지은 《농가월령가》를 한역해 1861년에 증보 편찬한 《농가십이월속시》 <5월령>에 다시 기록했다. 1927년 4월 발행된 잡지 《별건곤》 제6호에 실린 다음, 《별건곤》 제33호와 《남조선민보》, 《동아일보》의 신문 기사에 등장하면서 널리 회자한 속담이다.

과거엔 중국인, 근세기에 일본인들과 유럽사람까지 드나들던 금강산은 지난 10년간 관광과 순례의 다른 패턴을 보였다. 성지를 예경하며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순례는 명승지를 구경하고 즐기는 관광과는 다름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외금강관 내금강의 주요 명승지를 관람하는 관광 차원에서 신계사·표훈사·보덕암·묘길상·삼불암·백화암 부도밭 등 현존하는 불교 성소는 물론, 장안사 터·마하연암 터·백화암 터에 대한 남측 불자들의 성지순례는 해방 이후, 금강산이 민중들에게 처음으로 펼친 영산회상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신선과 선녀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전설이 깃든 금강산은 2008년 11월 관광이 중단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금강산을 방문했던 사람보다 갈 수 없었던 사람과 스스로 가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이 있다. 1818년 심노숭은 《해악소기》에서 “조선 땅에 살면서 금강산을 보지 않고 죽으면, 저승에서는 황토 한 삼태기를 저 나르게 한다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워낭과 함께 소(牛)에게 덧씌워진 상징인 멍에를 벗고, 남북교류에 새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다음 편은 ‘2008년 국외문화재 환수사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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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육로관광 개설(2003.2.). 사진=현대아산 홈페이지(2004.2.16.)
1930년대 금강산 구룡연 일본인 수학여행단. 사진=강원도청 홈페이지(미디어한국학 제공)
1930년대 금강산 구룡연 일본인 수학여행단. 사진=강원도청 홈페이지(미디어한국학 제공)

금강산 관광 시작과 멈춤의 차이

그간 금강산관광의 시작과 멈춤을 보면, 시작은 민간의 힘으로 일구었다. 그 멈춤은 몇몇 정권에서 막아 버렸다. 열정을 가졌던 소수의 사람이 척박한 교류의 밭을 일구어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여러 사람이 누리던 즐거움은 일부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과 야욕으로 말미암아 제한되고 사라졌다.

관광객 200만 명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변수에 있어 남측의 진상규명・재발 방지・신변안전 보장 등 3대 조건이 부각하면서 금강산관광의 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관광사업 초기이던 1999년 6월, 여성 관광객 1명이 북측 안내원에게 귀순자 문제를 언급한 이유로 억류된 때에도 남측은 즉시 금강산관광을 중단하고 추가적인 신변안전 조치를 요구했다. 당시 억류되었던 관광객은 현대아산과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원회)의 협의로 6일 만에 풀려나 귀환했다. 한 달 후, 양측의 신변안전 등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45일 만에 금강산관광이 재개됐다.

2008년 상반기까지 금강산관광은 양적・질적으로 활성화됐다. 그해 2월 5일 개성에서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실무접촉을 갖고, 빠른 시일내 금강산 관광지구에 ‘금강산관리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3월 17일부터 개인 승용차로 금강산을 방문하고, 7월 중 금강산 비로봉 관광, 7월 말에는 금강산 골프장 정식 개장이 예정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8년 7월 갑자기 발생한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은 추진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남측의 주장과 달리 북측은 관광객의 개인 불찰로 일어난 일이라 규정하고, 피격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합동 조사를 거부했다. 관광사업이 중단된 가운데, 2009년 8월 16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관광에 필요한 모든 편의와 안전을 철저히 담보한다”는 내용의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또한 2009년 11월 금강산관광 11주년 기념식에도 북측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고, 또 남측 당국에 대해서도 당국 간 회담을 제의했다.

이때 이명박 정부는 그간 민간사업으로 분류했던 금강산관광에 대해 개입 의사를 드러냈다. “이 문제는 사업자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이 아닌 만큼, 당국 차원에서 공식적인 제의가 있어야 한다”는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민간사업자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변안전 보장 합의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규정했다. 또 남북당국 간 합의사항 위반이라는 점을 앞세워 사실상 금강산관광 사업에 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더욱이 관광객 피격사건에 이어 2009년 3월 30일 개성공단에서 현대아산 근로자 억류사건이 발생하면서 기존의 신변안전에 대한 합의로는 계속 증대하고, 다양화되는 남북 인적교류를 뒷받침하는 데 미흡하다는 남측의 문제 제기가 뒤따랐다. 북측은 2009년 현대아산・아태평화위원회 간 합의로 충분하다면서 민간 영역 부문의 교류에 무게를 두었다. 당시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약 40여 개에 이르는 남측 기업과 현대아산 협력업체들이 입주한 가운데, 특구 개발 사업에서부터 골프장・면세점・땅콩판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장은 개점 휴업 상태였다.

그 후 북측은 이명박 정부의 요구대로 2010년 1월 14일 아·태평화위원회 명의로 남북당국 간 회담을 공식 제의했으며, 그해 2월 8일 개성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열린 ‘금강산·개성관광 관련 남북당국 간 실무회담’은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양측의 주장이 서로 팽팽히 맞서면서 아무런 합의사항 없이 종료됐다.

실무회담이 무산된 후, 북측은 <조선중앙방송>(2010.2.8.)을 통해 “남측 당국의 태도를 비난하고, 계속 관광사업을 방해할 경우, 남측에 특혜로 주었던 관광사업과 관련한 모든 합의와 계약의 파기, 관광지역 내 남측 부동산 동결 등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등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유화책에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2010년 3월 4일 아·태평화위원회 대변인 담화 성명으로 금강산 관광사업과 관련된 계약 파기 및 부동산 동결조치 예고를 하며, 3월 26일~31일까지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측 기업의 부동산 및 시설 조사를 제안했다. 이어 4월 13일 남측 정부와 한국관광공사 자산인 이산가족면회소・소방서・문화회관・온천장과 면세점 등에 대해 동결조치,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의 중국 관리원을 추방했다. 2010년 4월 23일에는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금강산국제관광특구지도국) 명의로 상기 다섯 곳의 부동산에 대한 몰수 조치하고, 기타 자산에 대해 동결 조치했다. 그리고 4월 30일에는 이산가족면회소와 소방대・문화회관・온천장 및 면세점을 동결하고, 최소 관리직원 16명 제외한 관리 인원을 추방했다.

2008년 7월 11일 남측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전면 중단이라는 극적인 운명을 맞은 금강산관광은 북측이 남측 부동산에 대한 몰수・동결조치(2010.4.)에 이어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 독점권 면허취소(2011.4.)를 발표했다. 2011년 8월에는 남측 재산에 대한 법적 처분 단행을 통지하고, 남측 인원을 모두 추방했다. 이후 관광 재개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이 시도되었으나, 북측의 핵・미사일 개발과 그에 대해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가 고강도 제재를 단행하면서 실질적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류를 위한 만남의 공간은 남북 공조에 의해 복원한 금강산 신계사(2007.10.13. 준공)가 이때까지도 빈틈으로 열려 있었다. 당시 금강산 해금강의 북측 해설봉사원이 자주 말하기를, “나는 새는 저렇게 북남을 잘도 오가는데, 우리 민족은 언제쯤 금강산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고”라며 분단의 아픈 현실을 노래했다.

외금강산 접선봉을 탐승한 일본인 관광객(1937.3.20.). 사진=半島の近影, 조선총독부철도국 발행
외금강산 접선봉을 탐승한 일본인 관광객(1937.3.20.). 사진=半島の近影, 조선총독부철도국 발행
내금강 장안사 사성지전(四聖之殿)・대웅보전 소실 전의 모습(1930년대). 사진=북한지역정보넷.
내금강 장안사 사성지전(四聖之殿)・대웅보전 소실 전의 모습(1930년대). 사진=북한지역정보넷.

금강산 관광과 순례의 다름

금강산과 백두산 등은 외국 사례와 달리 통역이 필요 없는 세계 유일의 국가 관광지다. 그때 착각한 사실로, 금강산관광을 우리나라에서의 관광쯤으로 생각한 이들이 종종 있었다. 중국을 경유해서 백두산에 가는 것은 중국 땅으로 인식하고 입국 절차를 잘 따랐던 반면, 금강산관광에서는 우리 땅으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위반 행위를 하던 이들조차 있었다. 또 그와 반대로, 북측은 ‘빨간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인지 여행을 주저하거나 경직된 행동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흔히 북한이라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UN에 가입한 개별 국가인 동시에 외국이다. 국명 표기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북측(DPRK)이 160번째이고, 남측(ROK)이 161번째의 유엔 회원국이다.

10년 동안 193만 명의 남측 관광객이 찾았던 금강산관광은 ‘북조선(北朝鮮)’이라는 외국 여행의 한 종류이다. 외국의 자국법이 적용되는 곳으로, 그 나라의 법률을 준수하는 것은 현실적 사항이다. 다만,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로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통일을 지향해가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는 의미로, 국가와 국가를 드나드는 ‘출입국’이라는 용어 대신에 ‘출입경(出入境)’이라 썼다. 그래서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관광, 개성공단의 입출 과정에서는 입국 비자와 같은 신분증을 북측이 발급한 ‘단수 사증(査證, 입국 관광비자)’으로 간소화했다.

19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강원도 동해항에서 이산가족 등 826명을 태운 금강호의 첫 출항으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2003년 2월부터 외금강 육로관광 개설에 이은 2007년 6월 일반인 대상의 내금강 시범 관광으로 확대됐다. 미사일 발사·핵실험 등으로 국내외적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2008년도 관광객 20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2007년 12월 5일부터 1년간 시행된 개성관광은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 후에도 약 4개월간 지속됐을 정도다.

낯섦과 설렘이 교차했던 금강산관광은 그때 불교계에 있어 단순 관광 차원을 넘어 성지순례였다. 660년 원효대사가 내금강 정양사를 재창건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강산 숭배 사상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또 조선 중기부터 생겨난 속담으로, 금강산관광의 대명사처럼 ‘금강산도 식후경(金剛山猶食後景)’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천 년 전, 고려시대부터 중국인들조차 방문하고자 원했던 금강산관광은 조선 중・후기에 황진이의 금강산 방문과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확산해 민간에서부터 불린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은 1819년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권7, 주(注)에 처음 기록됐다. 소당 김형수는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1816년에 지은 《농가월령가》를 한역해 1861년에 증보 편찬한 《농가십이월속시》 <5월령>에 다시 기록했다. 1927년 4월 발행된 잡지 《별건곤》 제6호에 실린 다음, 《별건곤》 제33호와 《남조선민보》, 《동아일보》의 신문 기사에 등장하면서 널리 회자한 속담이다.

과거엔 중국인, 근세기에 일본인들과 유럽사람까지 드나들던 금강산은 지난 10년간 관광과 순례의 다른 패턴을 보였다. 성지를 예경하며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순례는 명승지를 구경하고 즐기는 관광과는 다름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외금강관 내금강의 주요 명승지를 관람하는 관광 차원에서 신계사·표훈사·보덕암·묘길상·삼불암·백화암 부도밭 등 현존하는 불교 성소는 물론, 장안사 터·마하연암 터·백화암 터에 대한 남측 불자들의 성지순례는 해방 이후, 금강산이 민중들에게 처음으로 펼친 영산회상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신선과 선녀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전설이 깃든 금강산은 2008년 11월 관광이 중단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금강산을 방문했던 사람보다 갈 수 없었던 사람과 스스로 가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이 있다. 1818년 심노숭은 《해악소기》에서 “조선 땅에 살면서 금강산을 보지 않고 죽으면, 저승에서는 황토 한 삼태기를 저 나르게 한다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워낭과 함께 소(牛)에게 덧씌워진 상징인 멍에를 벗고, 남북교류에 새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다음 편은 ‘2008년 국외문화재 환수사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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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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