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 효율적 통제·전통성 말살 위해 법령 개정
조선불교 효율적 통제·전통성 말살 위해 법령 개정
  • 이창윤
  • 승인 2022.10.1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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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 화엄사 근경.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원판번호 D80076).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전남 구례 화엄사 근경.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원판번호 D80076).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2) 사찰령의 개정 추이

사찰령은 제정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이유는 조선 불교의 효율적인 통제 때문이었다. 1911년 제정된 사찰령과 시행규칙에서 제일 먼저 개정된 것은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였다. 이는 조선 불교를 30본산으로 제한하는 조항인데 이 30본산에 지정되지 못한 사찰 가운데 쌍계사와 화엄사의 경우 조선 불교 통제 정책과 관계없이 해인사와 선암사의 말사가 되는 것에 반발하여 본산승격운동을 벌였다. 이 가운데 화엄사는 오랜 시간 동안 승격운동을 진행한 결과 1924년 11월 본산이 되었다. 총독부는 부령 제69호로 사찰령 시행 규칙을 개정하여 화엄사를 승격시켰다. 이후 조선 불교는 31본산 체제가 되었다.13)

이런 총독부의 사찰령 시행규칙의 개정은 조선 불교의 통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무렵 30본산 가운데 총독부 통제를 반대하는 본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월 7일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석왕사, 백양사, 위봉사, 봉선사, 송광사, 기림사, 건봉사 등 10본산은 조선불교도총회를 개최하고 통일기관으로 조선불교총무원을 두기로 결의하고 사무소를 각황사에 두었다.14) 여기에 조선불교유신회가 참여하면서 일제의 통제에 저항하는 모습이 되었다.15) 나머지 본산들은 연합하여 교무원을 결성하면서 조선 불교는 양분되었다.16) 뒤에 일제의 지원을 받은 교무원이 총무원을 통합하여 1924년 4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출범하였다.17)

총독부는 통제를 벗어나려는 조선 불교에 대해 사찰령시행규칙을 개정하여 오랫동안 본산으로 승격하고자 했던 화엄사를 포함시켜 다시 친일적인 분위기로 재편하였다. 그 결과 오랫동안 본산 승격을 주장해온 화엄사는 사찰 자체의 위상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통제에서 벗어나려던 조선 불교의 자주적 기회가 상실되면서 더욱 예속화되었다.

다음, 일제는 조선 불교의 전통성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통제법령을 개정하였다. 그것이 1926년 육식과 대처에 대한 허용이었다. 1921년 시작된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은 조선불교유신회와 비밀결사 만당으로 이어졌다. 불교 청년들은 조선 불교의 정교를 흐리게 하는 사찰령의 부정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와 함께 대처식육을 금지해 달라는 불교계의 요구가 거세졌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총독부는 오히려 대처식육을 원하는 대다수의 승려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조선 불교 지계정신을 흐려 놓았다. 일제의 통제 정책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사찰령 시행 규칙으로 제정된 본말사법에는 본사 주지의 자격은 연령이 만 40세 이상으로 비구계를 구족하고 다시 보살계를 수지한 자, 법랍이 하안거 10회 이상, 그리고 수학이 대교과 졸업 이상이었다. 말사의 주지는 연령이 만 25세 이상으로 비구계를 구족하고 다시 보살계를 수지한 자, 법랍이 하안거 5회 이상이었다. 그리고 수학이 사교과 졸업 이상이었지만 당분간 사집과를 졸업한 사람도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런 제한으로 조선 불교의 본말사 주지는 출가한 독신 수행자만이 할 수 있었으나 일제의 통치가 지속되면서 조선 불교도 일본 불교와 같이 대처의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가 만연되자 본산 주지는 물론 말사의 주지들도 대처식육을 하면서 사찰 관리의 기득권을 지속하고 싶은 생각으로 본말사법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총독부는 1926년 10월 각 본말사법 제16조 주지 자격 규정 가운데 ‘비구계를 구족’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승려의 가취(嫁娶)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총독부는 이런 본말사법의 개정을 독려하였다. 그 후 범어사의 신청을 필두로 용주사, 전등사, 마곡사, 화엄사, 법주사, 위봉사, 보석사 등 본산들의 신청이 쇄도하였다. 대부분의 본사들의 개정이 완료된 1929년에 이르면 조선 불교의 지계 정신은 급속도로 변질되었다.18)

세 번째는 주지의 권한을 더욱 제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911년 6월 제정된 사찰령에서 주지와 사원경제에 관한 조항은 제4조와 5조였다. 제4조는 사찰에는 주지를 두고 주지는 그 사찰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하며, 사무와 법요 집행의 책임을 맡은 대표였다. 제5조는 사찰에 속하는 토지·삼림·건물·불상·석물·고문서·고서화 등의 귀중품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를 처분할 수 없었다. 이런 규정을 어겼을 경우 제6조에 의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500원 이상의 벌금에 처하였다.19)

각 본산의 사법에도 그런 주지의 권한과 사찰 재산의 유지관리 범위에 대하여 규정하였다. 사법 가운데 사원재산의 관리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이 4개 조항이었다. 제37조 사찰의 재산은 동산, 부동산을 구별하여 대장을 작성하여 그 증감과 이동을 명확하게 기재할 것과, 제38조 말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처분하려면 사찰령에 따라 본사를 경유해서 조선 총독에게 신청하여야 한다. 그러나 본사 주지가 그 신청을 적당하지 않다고 인식할 때에는 의견을 첨부하여 다시 신청하여야 한다. 제39조 사찰의 재산을 삼보 유지의 목적 이외에 사용하거나 경비를 지출할 수 없으며, 제40조 사찰의 토지 삼림의 관리에 관한 세목 규정은 주지가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20)

당시 조선 불교의 사원 재산에 관한 조항은 이와 같은 규정이 있을 뿐 그 세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주지의 권한은 규정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현재 주지의 권한이 너무 강해 다른 승려의 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으라는 제한은 있으나 토지, 삼림, 건물 등 부동산을 제외한 각 사찰이 가지고 있는 토지로부터 수입되는 지상물과 같은 동산의 처분에 관해서는 어떤 조항도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권한은 주지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개인적 지출과 사찰의 중흥을 핑계로 부채를 남행하여 사찰의 재원이 소모되는 원인이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총독부의 관리 의도와 달리 통제력을 상실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었다.21) 총독부는 주지 개인의 부정과 비행을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찰령 시행규칙에 의해 각 본산이 제정한 사법을 개정하여 사찰에 있는 재산의 유지 처분에 대한 규정을 명확하게 정하는 동시에 유지의 권한도 제한하였다.22)

사찰령 5조와 6조를 법의국(法議局)에 회부해서 검토한 개정안은 5월 21일 각의에서 통과되어 총독부로 들어왔다.23) 이때 개정된 내용을 보면 제5조 사찰 재산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를 양도하거나 담보로 제공하거나 기타 어떤 처분도 할 수 없었다. 사찰에서 돈을 빌리는 때도 역시 동일하였다. 이에 대해 허가를 받지 않고 사찰 재산을 양도하거나 담보에 제공하거나 기타 처분 또는 돈을 빌리는 때는 이를 무효로 하였다. 여기서 사찰 재산이라 함은 사찰에 속한 부동산은 물론 기타 조선총독이 정한 재무를 총칭하는 것이었다.

제6조 사찰 재산을 처분하는 경우에 그 사찰 주지는 이를 취득할 수 없게 하였다. 단 특별사정에 의하여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은 때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때 정해진 부칙은 다음과 같았다. “본령의 시행 기일은 조선 총독이 이를 정하고, 본령 시행 때에 현존한 사찰의 부채는 제5조의 허가를 받은 자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부채는 “그 액수와 용도, 방법, 이율 및 채무반환의 방법을 갖추어 본령 시행일부터 3개월 내에 이를 총독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24)

이 개정안은 1929년 6월 10일 제령 제9호로 공포되었고,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런 조치에 따라 사찰 재산 기입 대장의 형식이 종래 것보다 상세하게 되었다. 총독부 종교과는 조선 내 주요한 사찰에 담당자를 파견하여 개정 대장에 의한 조사를 하였다. 조사에 의하면 1364개 사찰에서 빌린 돈이 60만 원을 넘었다.25) 이는 자신들이 통제력 강화를 감추고 현재 조선 사찰의 문제점만을 드러낸 조사로 짐작된다.

[주] -----

13) 《조선총독부관보》 제3681호.
14) 《동아일보》 1922. 01. 09.
15) 《동아일보》 1922. 01. 05.
16) 《동아일보》 1922. 05. 28.
17) 《동아일보》 1924. 04. 03.
18) 김경집(2007), <일제하 사법에 관한 연구>, 《한국불교학》 제49집, 286쪽.
19) 《조선총독부관보》 제22호.
20) 이능화(1918), 《조선불교통사》(하), 신문관, 1143~1144쪽.
21) 《매일신보》 1929. 05. 23.
22) 《매일신보》 1926. 06. 19.
23) 《매일신보》 1929. 05. 23.
24) 《조선총독부관보》 730호.
25) 《매일신보》 192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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