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5. 연극 같은 인생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5. 연극 같은 인생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0.30 2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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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 같던 벼 이삭에 물이 차오르고 단단해지듯
병치레 많던 아이가 쌀 한 가마니도 덥석덥석 잘도 짊어졌다

산골짜기 비탈밭에 심은 들깨와 참깨가 익기를 기다리다
익은 들깨 참깨 베면서 툭툭 떨어져 버리듯 때를 기다리고 맞춘다는 건 힘들다

돌아가 그 시간 앞에 다시 선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그래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다시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듯이

홍길동전 오래된 이야기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에겐 가슴 뭉클한 이야기고
콩쥐 팥쥐 팥쥐처럼 약삭빠르게 제 껄 챙겨야 사는 세상

복수 화신 복수 드라마 보다 빼앗기고 뺏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것만 같다
드라마를 다큐로 보고 싶은 마음처럼 지나간 내 시간인 것만 같은 산골 다큐에 소환된 어린 시절. 같이







#작가의 변
날마다 비가 오는 우기가 시작됐나 싶었더니 오늘은 화창한 가을날이다. 푸른 하늘, 비가 와서 파릇파릇한 녹색 잔디밭 그래서 양지바른 벽에 기대어 서서 햇살을 몸에 콩가루 묻히듯 묻히고 가슴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는다. 지난주에 알버타 주 캘거리엔 첫눈이 많이도 내렸다던데, 밴쿠버엔 날마다 내리던 비가 오지 않고 흐린 날도 아닌 맑은 날이 되다 보니 이것이 마치 보너스인 것만 같다. 한국에도 강원도 산골이나 울릉도 산골엔 눈이 오지 않았을까 싶다. 일하지 못하고 집에서 환자로 산다는 것처럼 무료한 것이 없다 싶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삶의 모습은 흡사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과 하나 다르지 않다. 벌들이 열심히 벌꿀을 따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보단 꽃과 입맞춤하는 것만 같았는데, 벌들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벌꿀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듯이,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아내가 운동도 할 겸 은행에 가는데, 버스 타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비가 떨구기도 하고 바람도 불기도 했다. 아침엔 강풍이 불어서 비씨 주 곳곳에 단전이 되고 신호등이 들어 오지 않는 넘버원 고속도로의 안내도 있고 보니 을씨년스런 날씨가 더욱 고스트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버스를 타려고 가는데 앞서가는 병원에서 나온 환자복 입은 남자가 거추장스럽게 하니 아내가 추월해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팡이 짚고 걷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옆에서 붙잡고 걸으면서 추월을 내게 말하길래, 당연히 그냥 따라가자고 했더니 인도가 아닌 주차장 길로 들어섰지만 앞서가던 그와 우리의 길이 같아 또 앞에서 길을 막고 있다. 버스 정류장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그가 담배를 피웠다. 정류장 바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가 출입구를 아래로 내려 준다. 캐나다는 장애인이나 애들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타면 앞에 출입구를 내리고 겹쳐있던 바닥을 늘려서 조금 경사진 출입구를 만들어 유모차나 장애자 휠체어가 탈 수 있게 배려해 준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자전거를 버스 앞에 싣고 차에 탈 수도 있다. 기사가 배려해서 출입구를 내려 준 덕에 계단 없는 입구가 되어 탑승하기 쉬웠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장애인과 노약자석에 앉아 리치몬드 센터까지 갈 수 있었는데, 보통은 정차하기 전에 미리 입구로 나가서 서서 기다리지만 차가 정차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니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내의 볼 일을 따라 리치몬드 센터까지 갔다 온 것이 하루 집에서 나갔다 온 일이 어제 하루의 일과다.

일 못하고 집에 있으니 날마다 드라마를 챙겨보는 일이 일과가 됐다. 그런데 아침 드라마는 날마다 짧게 짧게 이어져서 즐길 만하면 끝나고는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도 저 드라마도 어릴 때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이거나, 자녀를 잃게 되면서 얽히고설킨 복수의 화신. 대기업이나 그룹이 늘 드라마의 주류가 된다. 어쩌면 민생고를 해결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한 욕망을 채워 주는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을 때 라시찬이 나오는 전우 드라마라든지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약속의 땅 같은 드라마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드라마 스토리가 기억이 나기보단 드라마를 보기 위해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농지개량조합에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네 집에서 드라마를 보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날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 집에 사정이 있어 보여주지 않으면 그리 서운할 수가 없었다. 전파를 타서 텔레비전이 직직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필름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컴퓨터로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세상, 녹화된 것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편리하면서도 편리함을 느끼지 못하고 드라마 홍수, 볼 것이 많고 채널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니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산간벽지 오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라던 그때의 가족인 내 동생과 누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이젠 자주 얼굴도 보지 못해 가족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오랜 시간 누군가 찍는다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순간들이 정말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가족이라는 명제 앞에도 우리는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에게 때론 화를 내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또 생각한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사람들은 가족이 늘 내 곁에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나의 부모가 나를 떠났듯이 내 누나도 동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아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순서로 떠날 것이다. 자녀의 공부 때문에 27년을 가족이 떨어져서 생이별한 코미디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삶이 그리 길지 않은데 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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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 같던 벼 이삭에 물이 차오르고 단단해지듯
병치레 많던 아이가 쌀 한 가마니도 덥석덥석 잘도 짊어졌다

산골짜기 비탈밭에 심은 들깨와 참깨가 익기를 기다리다
익은 들깨 참깨 베면서 툭툭 떨어져 버리듯 때를 기다리고 맞춘다는 건 힘들다

돌아가 그 시간 앞에 다시 선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그래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다시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듯이

홍길동전 오래된 이야기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에겐 가슴 뭉클한 이야기고
콩쥐 팥쥐 팥쥐처럼 약삭빠르게 제 껄 챙겨야 사는 세상

복수 화신 복수 드라마 보다 빼앗기고 뺏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것만 같다
드라마를 다큐로 보고 싶은 마음처럼 지나간 내 시간인 것만 같은 산골 다큐에 소환된 어린 시절. 같이





쭉정이 같던 벼 이삭에 물이 차오르고 단단해지듯
병치레 많던 아이가 쌀 한 가마니도 덥석덥석 잘도 짊어졌다

산골짜기 비탈밭에 심은 들깨와 참깨가 익기를 기다리다
익은 들깨 참깨 베면서 툭툭 떨어져 버리듯 때를 기다리고 맞춘다는 건 힘들다

돌아가 그 시간 앞에 다시 선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그래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다시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듯이

홍길동전 오래된 이야기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에겐 가슴 뭉클한 이야기고
콩쥐 팥쥐 팥쥐처럼 약삭빠르게 제 껄 챙겨야 사는 세상

복수 화신 복수 드라마 보다 빼앗기고 뺏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것만 같다
드라마를 다큐로 보고 싶은 마음처럼 지나간 내 시간인 것만 같은 산골 다큐에 소환된 어린 시절. 같이







#작가의 변
날마다 비가 오는 우기가 시작됐나 싶었더니 오늘은 화창한 가을날이다. 푸른 하늘, 비가 와서 파릇파릇한 녹색 잔디밭 그래서 양지바른 벽에 기대어 서서 햇살을 몸에 콩가루 묻히듯 묻히고 가슴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는다. 지난주에 알버타 주 캘거리엔 첫눈이 많이도 내렸다던데, 밴쿠버엔 날마다 내리던 비가 오지 않고 흐린 날도 아닌 맑은 날이 되다 보니 이것이 마치 보너스인 것만 같다. 한국에도 강원도 산골이나 울릉도 산골엔 눈이 오지 않았을까 싶다. 일하지 못하고 집에서 환자로 산다는 것처럼 무료한 것이 없다 싶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삶의 모습은 흡사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과 하나 다르지 않다. 벌들이 열심히 벌꿀을 따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보단 꽃과 입맞춤하는 것만 같았는데, 벌들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벌꿀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듯이,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아내가 운동도 할 겸 은행에 가는데, 버스 타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비가 떨구기도 하고 바람도 불기도 했다. 아침엔 강풍이 불어서 비씨 주 곳곳에 단전이 되고 신호등이 들어 오지 않는 넘버원 고속도로의 안내도 있고 보니 을씨년스런 날씨가 더욱 고스트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버스를 타려고 가는데 앞서가는 병원에서 나온 환자복 입은 남자가 거추장스럽게 하니 아내가 추월해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팡이 짚고 걷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옆에서 붙잡고 걸으면서 추월을 내게 말하길래, 당연히 그냥 따라가자고 했더니 인도가 아닌 주차장 길로 들어섰지만 앞서가던 그와 우리의 길이 같아 또 앞에서 길을 막고 있다. 버스 정류장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그가 담배를 피웠다. 정류장 바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가 출입구를 아래로 내려 준다. 캐나다는 장애인이나 애들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타면 앞에 출입구를 내리고 겹쳐있던 바닥을 늘려서 조금 경사진 출입구를 만들어 유모차나 장애자 휠체어가 탈 수 있게 배려해 준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자전거를 버스 앞에 싣고 차에 탈 수도 있다. 기사가 배려해서 출입구를 내려 준 덕에 계단 없는 입구가 되어 탑승하기 쉬웠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장애인과 노약자석에 앉아 리치몬드 센터까지 갈 수 있었는데, 보통은 정차하기 전에 미리 입구로 나가서 서서 기다리지만 차가 정차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니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내의 볼 일을 따라 리치몬드 센터까지 갔다 온 것이 하루 집에서 나갔다 온 일이 어제 하루의 일과다.

일 못하고 집에 있으니 날마다 드라마를 챙겨보는 일이 일과가 됐다. 그런데 아침 드라마는 날마다 짧게 짧게 이어져서 즐길 만하면 끝나고는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도 저 드라마도 어릴 때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이거나, 자녀를 잃게 되면서 얽히고설킨 복수의 화신. 대기업이나 그룹이 늘 드라마의 주류가 된다. 어쩌면 민생고를 해결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한 욕망을 채워 주는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을 때 라시찬이 나오는 전우 드라마라든지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약속의 땅 같은 드라마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드라마 스토리가 기억이 나기보단 드라마를 보기 위해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농지개량조합에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네 집에서 드라마를 보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날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 집에 사정이 있어 보여주지 않으면 그리 서운할 수가 없었다. 전파를 타서 텔레비전이 직직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필름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컴퓨터로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세상, 녹화된 것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편리하면서도 편리함을 느끼지 못하고 드라마 홍수, 볼 것이 많고 채널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니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산간벽지 오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라던 그때의 가족인 내 동생과 누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이젠 자주 얼굴도 보지 못해 가족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오랜 시간 누군가 찍는다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순간들이 정말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가족이라는 명제 앞에도 우리는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에게 때론 화를 내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또 생각한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사람들은 가족이 늘 내 곁에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나의 부모가 나를 떠났듯이 내 누나도 동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아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순서로 떠날 것이다. 자녀의 공부 때문에 27년을 가족이 떨어져서 생이별한 코미디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삶이 그리 길지 않은데 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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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날마다 비가 오는 우기가 시작됐나 싶었더니 오늘은 화창한 가을날이다. 푸른 하늘, 비가 와서 파릇파릇한 녹색 잔디밭 그래서 양지바른 벽에 기대어 서서 햇살을 몸에 콩가루 묻히듯 묻히고 가슴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는다. 지난주에 알버타 주 캘거리엔 첫눈이 많이도 내렸다던데, 밴쿠버엔 날마다 내리던 비가 오지 않고 흐린 날도 아닌 맑은 날이 되다 보니 이것이 마치 보너스인 것만 같다. 한국에도 강원도 산골이나 울릉도 산골엔 눈이 오지 않았을까 싶다. 일하지 못하고 집에서 환자로 산다는 것처럼 무료한 것이 없다 싶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삶의 모습은 흡사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과 하나 다르지 않다. 벌들이 열심히 벌꿀을 따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보단 꽃과 입맞춤하는 것만 같았는데, 벌들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벌꿀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듯이,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아내가 운동도 할 겸 은행에 가는데, 버스 타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비가 떨구기도 하고 바람도 불기도 했다. 아침엔 강풍이 불어서 비씨 주 곳곳에 단전이 되고 신호등이 들어 오지 않는 넘버원 고속도로의 안내도 있고 보니 을씨년스런 날씨가 더욱 고스트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버스를 타려고 가는데 앞서가는 병원에서 나온 환자복 입은 남자가 거추장스럽게 하니 아내가 추월해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팡이 짚고 걷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옆에서 붙잡고 걸으면서 추월을 내게 말하길래, 당연히 그냥 따라가자고 했더니 인도가 아닌 주차장 길로 들어섰지만 앞서가던 그와 우리의 길이 같아 또 앞에서 길을 막고 있다. 버스 정류장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그가 담배를 피웠다. 정류장 바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가 출입구를 아래로 내려 준다. 캐나다는 장애인이나 애들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타면 앞에 출입구를 내리고 겹쳐있던 바닥을 늘려서 조금 경사진 출입구를 만들어 유모차나 장애자 휠체어가 탈 수 있게 배려해 준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자전거를 버스 앞에 싣고 차에 탈 수도 있다. 기사가 배려해서 출입구를 내려 준 덕에 계단 없는 입구가 되어 탑승하기 쉬웠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장애인과 노약자석에 앉아 리치몬드 센터까지 갈 수 있었는데, 보통은 정차하기 전에 미리 입구로 나가서 서서 기다리지만 차가 정차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니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내의 볼 일을 따라 리치몬드 센터까지 갔다 온 것이 하루 집에서 나갔다 온 일이 어제 하루의 일과다.

일 못하고 집에 있으니 날마다 드라마를 챙겨보는 일이 일과가 됐다. 그런데 아침 드라마는 날마다 짧게 짧게 이어져서 즐길 만하면 끝나고는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도 저 드라마도 어릴 때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이거나, 자녀를 잃게 되면서 얽히고설킨 복수의 화신. 대기업이나 그룹이 늘 드라마의 주류가 된다. 어쩌면 민생고를 해결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한 욕망을 채워 주는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을 때 라시찬이 나오는 전우 드라마라든지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약속의 땅 같은 드라마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드라마 스토리가 기억이 나기보단 드라마를 보기 위해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농지개량조합에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네 집에서 드라마를 보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날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 집에 사정이 있어 보여주지 않으면 그리 서운할 수가 없었다. 전파를 타서 텔레비전이 직직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필름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컴퓨터로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세상, 녹화된 것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편리하면서도 편리함을 느끼지 못하고 드라마 홍수, 볼 것이 많고 채널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니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산간벽지 오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라던 그때의 가족인 내 동생과 누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이젠 자주 얼굴도 보지 못해 가족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오랜 시간 누군가 찍는다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순간들이 정말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가족이라는 명제 앞에도 우리는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에게 때론 화를 내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또 생각한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사람들은 가족이 늘 내 곁에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나의 부모가 나를 떠났듯이 내 누나도 동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아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순서로 떠날 것이다. 자녀의 공부 때문에 27년을 가족이 떨어져서 생이별한 코미디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삶이 그리 길지 않은데 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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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 같던 벼 이삭에 물이 차오르고 단단해지듯
병치레 많던 아이가 쌀 한 가마니도 덥석덥석 잘도 짊어졌다

산골짜기 비탈밭에 심은 들깨와 참깨가 익기를 기다리다
익은 들깨 참깨 베면서 툭툭 떨어져 버리듯 때를 기다리고 맞춘다는 건 힘들다

돌아가 그 시간 앞에 다시 선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그래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다시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듯이

홍길동전 오래된 이야기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에겐 가슴 뭉클한 이야기고
콩쥐 팥쥐 팥쥐처럼 약삭빠르게 제 껄 챙겨야 사는 세상

복수 화신 복수 드라마 보다 빼앗기고 뺏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것만 같다
드라마를 다큐로 보고 싶은 마음처럼 지나간 내 시간인 것만 같은 산골 다큐에 소환된 어린 시절. 같이







#작가의 변
날마다 비가 오는 우기가 시작됐나 싶었더니 오늘은 화창한 가을날이다. 푸른 하늘, 비가 와서 파릇파릇한 녹색 잔디밭 그래서 양지바른 벽에 기대어 서서 햇살을 몸에 콩가루 묻히듯 묻히고 가슴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는다. 지난주에 알버타 주 캘거리엔 첫눈이 많이도 내렸다던데, 밴쿠버엔 날마다 내리던 비가 오지 않고 흐린 날도 아닌 맑은 날이 되다 보니 이것이 마치 보너스인 것만 같다. 한국에도 강원도 산골이나 울릉도 산골엔 눈이 오지 않았을까 싶다. 일하지 못하고 집에서 환자로 산다는 것처럼 무료한 것이 없다 싶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삶의 모습은 흡사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과 하나 다르지 않다. 벌들이 열심히 벌꿀을 따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보단 꽃과 입맞춤하는 것만 같았는데, 벌들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벌꿀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듯이,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아내가 운동도 할 겸 은행에 가는데, 버스 타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비가 떨구기도 하고 바람도 불기도 했다. 아침엔 강풍이 불어서 비씨 주 곳곳에 단전이 되고 신호등이 들어 오지 않는 넘버원 고속도로의 안내도 있고 보니 을씨년스런 날씨가 더욱 고스트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버스를 타려고 가는데 앞서가는 병원에서 나온 환자복 입은 남자가 거추장스럽게 하니 아내가 추월해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팡이 짚고 걷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옆에서 붙잡고 걸으면서 추월을 내게 말하길래, 당연히 그냥 따라가자고 했더니 인도가 아닌 주차장 길로 들어섰지만 앞서가던 그와 우리의 길이 같아 또 앞에서 길을 막고 있다. 버스 정류장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그가 담배를 피웠다. 정류장 바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가 출입구를 아래로 내려 준다. 캐나다는 장애인이나 애들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타면 앞에 출입구를 내리고 겹쳐있던 바닥을 늘려서 조금 경사진 출입구를 만들어 유모차나 장애자 휠체어가 탈 수 있게 배려해 준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자전거를 버스 앞에 싣고 차에 탈 수도 있다. 기사가 배려해서 출입구를 내려 준 덕에 계단 없는 입구가 되어 탑승하기 쉬웠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장애인과 노약자석에 앉아 리치몬드 센터까지 갈 수 있었는데, 보통은 정차하기 전에 미리 입구로 나가서 서서 기다리지만 차가 정차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니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내의 볼 일을 따라 리치몬드 센터까지 갔다 온 것이 하루 집에서 나갔다 온 일이 어제 하루의 일과다.

일 못하고 집에 있으니 날마다 드라마를 챙겨보는 일이 일과가 됐다. 그런데 아침 드라마는 날마다 짧게 짧게 이어져서 즐길 만하면 끝나고는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도 저 드라마도 어릴 때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이거나, 자녀를 잃게 되면서 얽히고설킨 복수의 화신. 대기업이나 그룹이 늘 드라마의 주류가 된다. 어쩌면 민생고를 해결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한 욕망을 채워 주는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을 때 라시찬이 나오는 전우 드라마라든지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약속의 땅 같은 드라마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드라마 스토리가 기억이 나기보단 드라마를 보기 위해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농지개량조합에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네 집에서 드라마를 보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날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 집에 사정이 있어 보여주지 않으면 그리 서운할 수가 없었다. 전파를 타서 텔레비전이 직직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필름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컴퓨터로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세상, 녹화된 것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편리하면서도 편리함을 느끼지 못하고 드라마 홍수, 볼 것이 많고 채널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니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산간벽지 오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라던 그때의 가족인 내 동생과 누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이젠 자주 얼굴도 보지 못해 가족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오랜 시간 누군가 찍는다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순간들이 정말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가족이라는 명제 앞에도 우리는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에게 때론 화를 내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또 생각한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사람들은 가족이 늘 내 곁에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나의 부모가 나를 떠났듯이 내 누나도 동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아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순서로 떠날 것이다. 자녀의 공부 때문에 27년을 가족이 떨어져서 생이별한 코미디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삶이 그리 길지 않은데 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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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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