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업(共業)이란 무엇인가
[기고] 공업(共業)이란 무엇인가
  • 허정 스님
  • 승인 2022.11.24 17:5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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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 28분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규모 8.0의 큰 지진이 일어나 약 6만 9천 명이 사망하고 약 37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해 하안거를 준비 중인 조계종 진제 종정께 기자가 어째서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무수한 희생자가 났는가를 물었다. 진제 종정은 "과거 전생의 악업으로 동타지옥(同墮地獄.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의 변란을 맞는다. 항시 선한 마음을 닦아 착한 행동을 해야 동타지옥을 면하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이 말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신문들은 동타지옥(同墮地獄)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였는데 한 신문만이 사실대로 보도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수많은 중국인은 과거 공동으로 지은 업(共業)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오가는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세월호 사고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며, 기본 상식을 지키지 않은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뼈아픈 통찰과 참회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회도 "어른들의 잘못으로 한 학년 절반의 학생들이 희생된 안산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부모를 잃은 6살배기의 희생과 눈물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영원히 책임져야 할 숙제이며, 공업(共業)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불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세상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인드라망으로 연결돼 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공업(共業)의 결과다. 잘못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라고 말하였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난 뒤 조계종 총무원은 11월 4일 조계사 마당에서 위령법회를 개최하였다. 진우 총무원장은 “우리 기성세대들은 사회적 참사가 있을 때마다 재발 방지를 되뇌어 왔지만, 그 약속을 또 지키지 못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말하였고, 본각 비구니회장은 “누구 허물을 탓하기 앞서 우리 모두는 부처님 전에 참회한다”고 말했다. 관음종 총무원장도 “우리들의 공업(公業)입니다. 참회하고 또 참회합니다.”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들의 잘못, 우리 모두의 잘못은 모두 공업(共業)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 승려와 불자들은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지면 우리 모두가 책임이라는 공업(共業)을 말할까?





신(神)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듯이 불자들은 모든 게 과거의 업(業)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걸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듯이 모든 게 업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다. 누구도 신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고 누구도 공업(共業)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진이 났으니까, 세월호가 바다에 빠졌으니까, 압사 참사가 발생했으니까, 그 일어난 결과를 보고 짐작으로 말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과거의 업으로 바라보는 업설이 인도에도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 시와까라는 사람도 현재 일어난 결과는 모두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 물었다. “지금 느끼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등 모든 느낌은 모두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담즙의 장애(pitta) 때문에 생긴 것이고, 어떤 느낌들은 점액의 장애(Semha)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바람의 장애(vāta)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그 세 가지가 겹쳐져(sannipātikāni), 어떤 느낌들은 온도의 변화(utupariṇāmaj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서(visamaparihārajāni), 어떤 느낌들은 과도한 노력(opakkamik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업의 과보(kammavipākjāni)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와까 경>(S36:21)

‘모든 것이 업에서 생긴 것이다’라는 외도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업은 여덟 가지 중에 한 가지 원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고통을 느끼는데 어떤 때는 체내에 담즙(膽汁), 점액(粘液) 등이 과다 분비되거나 추운 데 오래 있어서 냉기(冷氣)가 몸에 들어와서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가 많은 것 때문에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지나친 체력소모 때문에 생긴다. 어떤 고통은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업의 과보는 여덟 가지 원인 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것도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만 관찰된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가 깜박 졸아서 접촉 사고를 냈다. 쥐가 독이 든 빵을 모르고 먹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업 때문인가?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을 모두 과거에 저지른 업의 결과라고 말하거나 공업의 결과라고만 말하는 것은 업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외도의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인 업설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불교를 설명하거나 개인의 업을 이야기할 때 툭 하면 전생과 전생의 죄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사기꾼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전생의 업은 모르지만, 현재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경찰청과 용산구청 등은 10월 29일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대거 몰릴 것이라는 예측하고서도 혼잡경비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저녁 6시부터 압사 위험이 있다는 신고가 112에 여러 차례 접수 됐지만 기동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며, 희생자라는 용어 대신에 사망자라고 말하고 국민은 아직도 희생자 158명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대통령은 위패와 영정사진이 없는 분향소를 설치하여 국화꽃 다발에게 연이어 조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태원 참사를 공업(共業)이라고 말하며 다 같이 참회하자고 말하는 것은 불교적인 태도가 아니며 유족을 위로하는 말이 될 수도 없다.

조계종은 어느 종교보다 빠르게 11월 4일 조계사 마당에서 위패도 없이 영정도 없이 유족도 없이 윤석렬 부부만 초청하여 위령재를 지냈다. 조계종은 위령재를 지내며 이태원 참사는 기성세대의 잘못이고 우리 모두의 잘못이니 참회하자고 제안하였다. 위령재를 지내려면 158명 영가의 영정, 위패, 유족이 있어야 하고 죽은 이들의 유족이 초청되어야 하건만 조계종은 정작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최고 책임자인 윤석렬을 초청하여 면죄부를 주는 듯한 위령재를 지낸 것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발 빠른 위령재는 기독교와 천주교에도 대통령을 초청하여 추모예배와 추모 미사를 열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에도 위패는 없었고 유족도 없었다.

인간 세상의 다양한 사건을 모두 공업(共業)이라고 설명하면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모호한 사건으로 전락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지구의 온난화 문제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나라별로 큰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많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데 그 배출량은 2등인 미국의 2배에 해당하고 우리나라가 배출하는 양보다 17배나 많다. 이러한 구체적인 차이를 거론하며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에 책임을 거론하지 않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국이나 미국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다.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도 원시적인 모습으로 사는 아프리카 부족과 아직도 농업과 같은 1차산업이 주요 산업인 나라들은 참으로 억울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책임의 경중(敬重)을 가려야 할 일을 공업(共業)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천주교 미카엘 신부는 촛불집회에서 “인간의 비참은 불행한 소수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불의(不義)에 결과입니다. 이 같은 불의(不義)는 항상 근절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게 공업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건의 핵심을 잘 파악한 관찰이다. 이러한 신부의 글을 보고 지리산에 사시는 어느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가끔 SNS에 당신이 사시는 토굴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올리시는데 많은 불자가 그 스님의 삶을 좋아하고 존경의 인사를 올리곤 하던 스님이었다.

“버스에 내가 탓는 데 그 버스에 사람이 치어 죽었다. 나도 그 사람이 죽는 데 일조를 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국민이 다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끼어 희생되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의(義) 불의(不義)를 따지기 전에 그런 책임감이 공업(共業) 아닌가? 의(義)로운 사람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도 책임이 없는가?”

그 스님의 댓글에 내가 대답했다. “막연히 생각하면 그런 게 공업(共業)일 겁니다. 그러나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에 맨홀 뚜껑이 열려 있어서 버스 바퀴가 빠진 거라면, 버스 운전사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난 사고라면, 맨홀 뚜껑을 덮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한 공사업자와 음주운전을 한 운전사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10.29 참사도 처음에 국민은 피치 못할 사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거 모일 거라는 걸 예측하고도 혼잡경비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6시부터 112에 신고가 여러 번 도착했는데도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공업(共業)을 거론 하십니까? 스님이 말하는 공업(共業)은 아무리 관찰해보아도 그 사건의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막연히 짐작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신(神)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듯이 불자들은 모든 게 과거의 업(業)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걸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듯이 모든 게 업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다. 누구도 신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고 누구도 공업(共業)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진이 났으니까, 세월호가 바다에 빠졌으니까, 압사 참사가 발생했으니까, 그 일어난 결과를 보고 짐작으로 말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과거의 업으로 바라보는 업설이 인도에도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 시와까라는 사람도 현재 일어난 결과는 모두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 물었다. “지금 느끼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등 모든 느낌은 모두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담즙의 장애(pitta) 때문에 생긴 것이고, 어떤 느낌들은 점액의 장애(Semha)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바람의 장애(vāta)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그 세 가지가 겹쳐져(sannipātikāni), 어떤 느낌들은 온도의 변화(utupariṇāmaj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서(visamaparihārajāni), 어떤 느낌들은 과도한 노력(opakkamik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업의 과보(kammavipākjāni)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와까 경>(S36:21)

‘모든 것이 업에서 생긴 것이다’라는 외도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업은 여덟 가지 중에 한 가지 원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고통을 느끼는데 어떤 때는 체내에 담즙(膽汁), 점액(粘液) 등이 과다 분비되거나 추운 데 오래 있어서 냉기(冷氣)가 몸에 들어와서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가 많은 것 때문에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지나친 체력소모 때문에 생긴다. 어떤 고통은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업의 과보는 여덟 가지 원인 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것도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만 관찰된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가 깜박 졸아서 접촉 사고를 냈다. 쥐가 독이 든 빵을 모르고 먹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업 때문인가?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을 모두 과거에 저지른 업의 결과라고 말하거나 공업의 결과라고만 말하는 것은 업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외도의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인 업설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불교를 설명하거나 개인의 업을 이야기할 때 툭 하면 전생과 전생의 죄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사기꾼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전생의 업은 모르지만, 현재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경찰청과 용산구청 등은 10월 29일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대거 몰릴 것이라는 예측하고서도 혼잡경비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저녁 6시부터 압사 위험이 있다는 신고가 112에 여러 차례 접수 됐지만 기동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며, 희생자라는 용어 대신에 사망자라고 말하고 국민은 아직도 희생자 158명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대통령은 위패와 영정사진이 없는 분향소를 설치하여 국화꽃 다발에게 연이어 조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태원 참사를 공업(共業)이라고 말하며 다 같이 참회하자고 말하는 것은 불교적인 태도가 아니며 유족을 위로하는 말이 될 수도 없다.

조계종은 어느 종교보다 빠르게 11월 4일 조계사 마당에서 위패도 없이 영정도 없이 유족도 없이 윤석렬 부부만 초청하여 위령재를 지냈다. 조계종은 위령재를 지내며 이태원 참사는 기성세대의 잘못이고 우리 모두의 잘못이니 참회하자고 제안하였다. 위령재를 지내려면 158명 영가의 영정, 위패, 유족이 있어야 하고 죽은 이들의 유족이 초청되어야 하건만 조계종은 정작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최고 책임자인 윤석렬을 초청하여 면죄부를 주는 듯한 위령재를 지낸 것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발 빠른 위령재는 기독교와 천주교에도 대통령을 초청하여 추모예배와 추모 미사를 열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에도 위패는 없었고 유족도 없었다.

인간 세상의 다양한 사건을 모두 공업(共業)이라고 설명하면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모호한 사건으로 전락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지구의 온난화 문제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나라별로 큰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많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데 그 배출량은 2등인 미국의 2배에 해당하고 우리나라가 배출하는 양보다 17배나 많다. 이러한 구체적인 차이를 거론하며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에 책임을 거론하지 않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국이나 미국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다.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도 원시적인 모습으로 사는 아프리카 부족과 아직도 농업과 같은 1차산업이 주요 산업인 나라들은 참으로 억울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책임의 경중(敬重)을 가려야 할 일을 공업(共業)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천주교 미카엘 신부는 촛불집회에서 “인간의 비참은 불행한 소수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불의(不義)에 결과입니다. 이 같은 불의(不義)는 항상 근절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게 공업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건의 핵심을 잘 파악한 관찰이다. 이러한 신부의 글을 보고 지리산에 사시는 어느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가끔 SNS에 당신이 사시는 토굴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올리시는데 많은 불자가 그 스님의 삶을 좋아하고 존경의 인사를 올리곤 하던 스님이었다.

“버스에 내가 탓는 데 그 버스에 사람이 치어 죽었다. 나도 그 사람이 죽는 데 일조를 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국민이 다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끼어 희생되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의(義) 불의(不義)를 따지기 전에 그런 책임감이 공업(共業) 아닌가? 의(義)로운 사람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도 책임이 없는가?”

그 스님의 댓글에 내가 대답했다. “막연히 생각하면 그런 게 공업(共業)일 겁니다. 그러나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에 맨홀 뚜껑이 열려 있어서 버스 바퀴가 빠진 거라면, 버스 운전사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난 사고라면, 맨홀 뚜껑을 덮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한 공사업자와 음주운전을 한 운전사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10.29 참사도 처음에 국민은 피치 못할 사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거 모일 거라는 걸 예측하고도 혼잡경비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6시부터 112에 신고가 여러 번 도착했는데도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공업(共業)을 거론 하십니까? 스님이 말하는 공업(共業)은 아무리 관찰해보아도 그 사건의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막연히 짐작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신(神)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듯이 불자들은 모든 게 과거의 업(業)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걸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듯이 모든 게 업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만 짐작으로 하는 말이다. 누구도 신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고 누구도 공업(共業)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진이 났으니까, 세월호가 바다에 빠졌으니까, 압사 참사가 발생했으니까, 그 일어난 결과를 보고 짐작으로 말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과거의 업으로 바라보는 업설이 인도에도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 시와까라는 사람도 현재 일어난 결과는 모두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 물었다. “지금 느끼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등 모든 느낌은 모두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담즙의 장애(pitta) 때문에 생긴 것이고, 어떤 느낌들은 점액의 장애(Semha)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바람의 장애(vāta)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그 세 가지가 겹쳐져(sannipātikāni), 어떤 느낌들은 온도의 변화(utupariṇāmaj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서(visamaparihārajāni), 어떤 느낌들은 과도한 노력(opakkamikāni) 때문에, 어떤 느낌들은 업의 과보(kammavipākjāni)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와까 경>(S36:21)

‘모든 것이 업에서 생긴 것이다’라는 외도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업은 여덟 가지 중에 한 가지 원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고통을 느끼는데 어떤 때는 체내에 담즙(膽汁), 점액(粘液) 등이 과다 분비되거나 추운 데 오래 있어서 냉기(冷氣)가 몸에 들어와서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가 많은 것 때문에 생기고, 어떤 괴로움은 지나친 체력소모 때문에 생긴다. 어떤 고통은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업의 과보는 여덟 가지 원인 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것도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만 관찰된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가 깜박 졸아서 접촉 사고를 냈다. 쥐가 독이 든 빵을 모르고 먹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업 때문인가?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을 모두 과거에 저지른 업의 결과라고 말하거나 공업의 결과라고만 말하는 것은 업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외도의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인 업설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불교를 설명하거나 개인의 업을 이야기할 때 툭 하면 전생과 전생의 죄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사기꾼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전생의 업은 모르지만, 현재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경찰청과 용산구청 등은 10월 29일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대거 몰릴 것이라는 예측하고서도 혼잡경비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저녁 6시부터 압사 위험이 있다는 신고가 112에 여러 차례 접수 됐지만 기동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며, 희생자라는 용어 대신에 사망자라고 말하고 국민은 아직도 희생자 158명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대통령은 위패와 영정사진이 없는 분향소를 설치하여 국화꽃 다발에게 연이어 조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태원 참사를 공업(共業)이라고 말하며 다 같이 참회하자고 말하는 것은 불교적인 태도가 아니며 유족을 위로하는 말이 될 수도 없다.

조계종은 어느 종교보다 빠르게 11월 4일 조계사 마당에서 위패도 없이 영정도 없이 유족도 없이 윤석렬 부부만 초청하여 위령재를 지냈다. 조계종은 위령재를 지내며 이태원 참사는 기성세대의 잘못이고 우리 모두의 잘못이니 참회하자고 제안하였다. 위령재를 지내려면 158명 영가의 영정, 위패, 유족이 있어야 하고 죽은 이들의 유족이 초청되어야 하건만 조계종은 정작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최고 책임자인 윤석렬을 초청하여 면죄부를 주는 듯한 위령재를 지낸 것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발 빠른 위령재는 기독교와 천주교에도 대통령을 초청하여 추모예배와 추모 미사를 열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에도 위패는 없었고 유족도 없었다.

인간 세상의 다양한 사건을 모두 공업(共業)이라고 설명하면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모호한 사건으로 전락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지구의 온난화 문제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나라별로 큰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많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데 그 배출량은 2등인 미국의 2배에 해당하고 우리나라가 배출하는 양보다 17배나 많다. 이러한 구체적인 차이를 거론하며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에 책임을 거론하지 않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국이나 미국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다.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도 원시적인 모습으로 사는 아프리카 부족과 아직도 농업과 같은 1차산업이 주요 산업인 나라들은 참으로 억울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책임의 경중(敬重)을 가려야 할 일을 공업(共業)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천주교 미카엘 신부는 촛불집회에서 “인간의 비참은 불행한 소수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불의(不義)에 결과입니다. 이 같은 불의(不義)는 항상 근절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게 공업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건의 핵심을 잘 파악한 관찰이다. 이러한 신부의 글을 보고 지리산에 사시는 어느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가끔 SNS에 당신이 사시는 토굴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올리시는데 많은 불자가 그 스님의 삶을 좋아하고 존경의 인사를 올리곤 하던 스님이었다.

“버스에 내가 탓는 데 그 버스에 사람이 치어 죽었다. 나도 그 사람이 죽는 데 일조를 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국민이 다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끼어 희생되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의(義) 불의(不義)를 따지기 전에 그런 책임감이 공업(共業) 아닌가? 의(義)로운 사람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도 책임이 없는가?”

그 스님의 댓글에 내가 대답했다. “막연히 생각하면 그런 게 공업(共業)일 겁니다. 그러나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에 맨홀 뚜껑이 열려 있어서 버스 바퀴가 빠진 거라면, 버스 운전사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난 사고라면, 맨홀 뚜껑을 덮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한 공사업자와 음주운전을 한 운전사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10.29 참사도 처음에 국민은 피치 못할 사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거 모일 거라는 걸 예측하고도 혼잡경비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당일 6시부터 112에 신고가 여러 번 도착했는데도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공업(共業)을 거론 하십니까? 스님이 말하는 공업(共業)은 아무리 관찰해보아도 그 사건의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막연히 짐작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대로 사건마다 큰스님들이나 불자들은 현재의 고통과 사고가 모두 과거의 업 탓이라고 보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공업의 실체를 바로 보고하는 말들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러한 일을 당하는가”라고 한탄하는 수준이다. 왜 어떻게 일어난 사고인가를 잘 밝혀서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하는 일임에도 승려와 불자들은 우리 모두의 공업이라며 같이 참회하자고 말한다. 다른 종교인들은 공업이라고 뭉떵 그려 말하지 않는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업이라고 둘러대는 승려들과 불자들의 태도는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사회의 낙오자 같은 느낌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인재(人災)다. 능히 예방으로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대형 사건들에 대한 승려와 불자들의 대응을 보면 매번 안타깝다. 불교가 사회에 외면받고 있다면 불자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면 모든 사건을 공업(共業)이라고 치부하는 승려들과 불자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지 않을까? 모든 사건을 공업으로 치부하는 바람에 희생자 개개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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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큰스님 같으신 2022-11-25 18:32:52
허정 큰스님 같이 초기불교를 바르게 공부하시고 수행하신 분들이 불교 공중파 케이블 ott 유튜브에 많이 나와서 100만이상 조회수 구독자 좋아요 댓글 많이 달려야 합니다.

이시대 2022-11-25 14:58:56
이시대 깨어있는 불자들이 널리 수지하고 독송하고 실천하며 전법해야할 크나큰 가르침을 주신 큰스님께 감사삼배 올립니다

놀다 2022-11-25 14:57:05
스님의 옳으신 말씀. 백번 공감합니다.
명료하게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2022-11-25 12:12:00
숙명론 운명론과 불교의 업설을 잘 정리해 주신 허정스님께 삼배 드립니다.
초기 경전에 근거한 설명에 모호한 부분이 확연히 정리되었습니다.
한국 불교는 부처님 재세시의 육사외도나 중국의 노장사상과 뒤엉켜 혼재되어 있슴에 그 심각성에도 인지를 하여야 합니다.
우린 도교의 도사들도 아닌데 육식과 오신채를 불교의 계율로 착각하고 있지요. 허정스님께서 이 부분도 짚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나 2022-11-24 18:33:34
초기불교 가르침에 따라 크신 깨달음을 주시는 크신 법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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