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3. 지워지지 않는 기억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3. 지워지지 않는 기억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2.26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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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랩으로
숨이 막혀 물이 되었다
껍데기 비닐만 홀로 남아
오이인척한다

공갈빵처럼
감자칩 봉지에
감자칩이 반만 들었듯
선물 박스에
조그만 선물 하나
박스 속에 스치로폼
그리고 또 박스
오래된 바가지 엎어 놓고
콱 밟듯
때론 밟고 또 밟고 싶다

계란 꾸러미
손으로 만든 수수 빗자루
댑싸리로 만든 싸리 빗자루
아궁이 재 파내는 삼태기
엄마가 묘가부리던 키 쓰고
이불에 지도 그렸다며
소금꾸러 가던 아이
도리깨질 신기해
나도 한다건 아이창밖에 눈 내리겠다


 







#작가의 변
어른이 되어 국민학교 때 나의 너에게
가물거리는 기억 넘어
물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누나 뒤를 따라가던 너
오징어 놀이하다 뾰족한 바위에 이마를 찢기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울던 누나 얼굴 뒤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쯤 엄마가 퍼 온 된장을 붙이고 소청으로 머릴 싸맸지

밭 가장자리 철조망에 손을 얻은 손 지주였던 심 노인 호통에 놀라 집으로 달려가던 너
애창이라 불리던 이름 없고 봉분 없던 형들 무덤엔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 쌓이고 어머니 눈물도 쌓이고
국민 교육 헌장을 못 외우면 집에 못 간다던 선생님
우리 반 칠십 명 눈감으라고 하고 빵과 가루우유 타서 나눠 주던 선생님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옥외 변소 똥을 열일곱 통이나 날랐더니 머리통만한 고구마가 달렸지
몽달귀신이 산다는 옥외 변소는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어

소풍은 늘 절골로 갔지
보물찾기엔 하나도 찾지 못하고 울고 서 있던 내가 누나와 찍은 흑백 사진은 어디 갔을까
칠성 사이다 한 병에 취해 흔들거리던 나
운동회 때마다 밑에 깔리는 덤블링
앞에 서서 들던 차전놀이
기마전엔 말
씨름도 달리기도 상 한 번 받지 못한 고단한 날들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가 신고 싶었고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 짝꿍 규식이 도시락 반찬은 오뎅에 계란말이, 내 반찬은 쏟아져 책에 지도 그린 김치와 검정 콩자반
아파서 먹던 두더지 고기
오줌 싸면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
안 나가려는 나를 부지깽이로 쫓아내던 어머니

두드러기에 홀라당 벗겨진 네가 아궁이 앞에 서서 태운 짚으로 쓸리던 날
감기가 폐렴이 된다는 걸 몰랐어 다들 훌쩍대며 감기를 달고 살았으니 그러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시커먼 필름엔 내 한쪽 폐를 보고
심각해 하던 의사 얼굴
아파 누운 내가 얼어버린 사과를 긁어 떠넣어 주던 엄마
대보름날 망우리 깡통에 불을 넣고 윙윙 소리 내며 돌리다 옆 동네와 패싸움이 붙고
쓰는 냄비 쓰는 고무신으로 엿 바꿔 먹고
쳇바퀴로 고기 잡고
독사 비료 푸대에 잡아 시내 뱀 장수한테 팔고
옥수수 대 끌고 다니다 찢어진 손바닥에 지금도 선명한 손금처럼
저수지에 빠져 죽을뻔하고도 활 쏜다고 닥나무 홀에 수수깡 화살에 못을 박아 날리던 날들이
다른 애들은 달리는 경운기 잘도 타는데
다른 애들은 달리는 도라쿠 잘도 타는데
기계로 뜨개질한 구멍 숭숭 뚫린 홑겹바지에 빤스도 안 입고 추운 겨울 집에 오다 얼어 버린 다리처럼

세수하고 잡은 문고리에 들어붙은 손
컴컴한 부엌에 불을 때고
디딜방아 옆 광 콩깍지 따뜻한 계란
돌담 울타리 이엉 위에 호박꽃처럼
뒷밭에 보라색 도라지꽃
다시 돌아가도 없는 고향 집은 어린 네가 사는 고향.
이번 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면 뭘 하나, 몸이 아파 아무런 계획도 없다.
아니 몸이 안 아파도 날씨 때문에 꼼짝 마라는 정부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미 온 눈 위에 오늘 눈이 또 내리고 있고 날이 풀
면 얼음 비가 되어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데 큰일이지 싶다.
나는 죽고 또 죽는 형들 덕분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고 병치레하지 말고 잘 자라라고 광주리에 담아 두었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이 광우리였다. 광주리의 사투리가 광우리다. 그런데 그 광우리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다 광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집을 가리키는 말은 광우리네 집이었다. 그 덕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부모님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서 낳았지만, 절에 가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불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많이 갔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게 온 날 밖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로 되어, 바라 소리가 방안까지 윙윙 들리는 그 집에서 추위에 떨며 이불밖에 나오기 싫어하던 그때,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천사의 음성이 들리듯 찬송이 들렸다.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 기억인데 그 찬송을 한 천사들은 누나가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이었다.
또 한 장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구유 예수 연극을 보기 위해 눈이 수북히 쌓인 고갯길을 넘어가던 몇몇 어린 친구들과 인솔하던 누군가, 발자욱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고갯길 저 멀리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여름 성경 학교 보단 그 겨울 발자욱 소리가 평생을 간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기쁜 날들, 기억의 회로에 남아 있는 자욱들을 다시 되새겨본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을 사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시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노트북에 자판을 두들기고 전등 불과 책상, 손전화며 옷장 가득한 옷들 침대 등등 당시엔 상상조차 못하던 것들이 당연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조차 신기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 즐거움이 없다면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되새김질이라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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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랩으로
숨이 막혀 물이 되었다
껍데기 비닐만 홀로 남아
오이인척한다

공갈빵처럼
감자칩 봉지에
감자칩이 반만 들었듯
선물 박스에
조그만 선물 하나
박스 속에 스치로폼
그리고 또 박스
오래된 바가지 엎어 놓고
콱 밟듯
때론 밟고 또 밟고 싶다

계란 꾸러미
손으로 만든 수수 빗자루
댑싸리로 만든 싸리 빗자루
아궁이 재 파내는 삼태기
엄마가 묘가부리던 키 쓰고
이불에 지도 그렸다며
소금꾸러 가던 아이
도리깨질 신기해
나도 한다건 아이창밖에 눈 내리겠다

 





오이가 랩으로
숨이 막혀 물이 되었다
껍데기 비닐만 홀로 남아
오이인척한다

공갈빵처럼
감자칩 봉지에
감자칩이 반만 들었듯
선물 박스에
조그만 선물 하나
박스 속에 스치로폼
그리고 또 박스
오래된 바가지 엎어 놓고
콱 밟듯
때론 밟고 또 밟고 싶다

계란 꾸러미
손으로 만든 수수 빗자루
댑싸리로 만든 싸리 빗자루
아궁이 재 파내는 삼태기
엄마가 묘가부리던 키 쓰고
이불에 지도 그렸다며
소금꾸러 가던 아이
도리깨질 신기해
나도 한다건 아이창밖에 눈 내리겠다


 







#작가의 변
어른이 되어 국민학교 때 나의 너에게
가물거리는 기억 넘어
물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누나 뒤를 따라가던 너
오징어 놀이하다 뾰족한 바위에 이마를 찢기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울던 누나 얼굴 뒤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쯤 엄마가 퍼 온 된장을 붙이고 소청으로 머릴 싸맸지

밭 가장자리 철조망에 손을 얻은 손 지주였던 심 노인 호통에 놀라 집으로 달려가던 너
애창이라 불리던 이름 없고 봉분 없던 형들 무덤엔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 쌓이고 어머니 눈물도 쌓이고
국민 교육 헌장을 못 외우면 집에 못 간다던 선생님
우리 반 칠십 명 눈감으라고 하고 빵과 가루우유 타서 나눠 주던 선생님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옥외 변소 똥을 열일곱 통이나 날랐더니 머리통만한 고구마가 달렸지
몽달귀신이 산다는 옥외 변소는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어

소풍은 늘 절골로 갔지
보물찾기엔 하나도 찾지 못하고 울고 서 있던 내가 누나와 찍은 흑백 사진은 어디 갔을까
칠성 사이다 한 병에 취해 흔들거리던 나
운동회 때마다 밑에 깔리는 덤블링
앞에 서서 들던 차전놀이
기마전엔 말
씨름도 달리기도 상 한 번 받지 못한 고단한 날들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가 신고 싶었고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 짝꿍 규식이 도시락 반찬은 오뎅에 계란말이, 내 반찬은 쏟아져 책에 지도 그린 김치와 검정 콩자반
아파서 먹던 두더지 고기
오줌 싸면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
안 나가려는 나를 부지깽이로 쫓아내던 어머니

두드러기에 홀라당 벗겨진 네가 아궁이 앞에 서서 태운 짚으로 쓸리던 날
감기가 폐렴이 된다는 걸 몰랐어 다들 훌쩍대며 감기를 달고 살았으니 그러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시커먼 필름엔 내 한쪽 폐를 보고
심각해 하던 의사 얼굴
아파 누운 내가 얼어버린 사과를 긁어 떠넣어 주던 엄마
대보름날 망우리 깡통에 불을 넣고 윙윙 소리 내며 돌리다 옆 동네와 패싸움이 붙고
쓰는 냄비 쓰는 고무신으로 엿 바꿔 먹고
쳇바퀴로 고기 잡고
독사 비료 푸대에 잡아 시내 뱀 장수한테 팔고
옥수수 대 끌고 다니다 찢어진 손바닥에 지금도 선명한 손금처럼
저수지에 빠져 죽을뻔하고도 활 쏜다고 닥나무 홀에 수수깡 화살에 못을 박아 날리던 날들이
다른 애들은 달리는 경운기 잘도 타는데
다른 애들은 달리는 도라쿠 잘도 타는데
기계로 뜨개질한 구멍 숭숭 뚫린 홑겹바지에 빤스도 안 입고 추운 겨울 집에 오다 얼어 버린 다리처럼

세수하고 잡은 문고리에 들어붙은 손
컴컴한 부엌에 불을 때고
디딜방아 옆 광 콩깍지 따뜻한 계란
돌담 울타리 이엉 위에 호박꽃처럼
뒷밭에 보라색 도라지꽃
다시 돌아가도 없는 고향 집은 어린 네가 사는 고향.
이번 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면 뭘 하나, 몸이 아파 아무런 계획도 없다.
아니 몸이 안 아파도 날씨 때문에 꼼짝 마라는 정부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미 온 눈 위에 오늘 눈이 또 내리고 있고 날이 풀
면 얼음 비가 되어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데 큰일이지 싶다.
나는 죽고 또 죽는 형들 덕분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고 병치레하지 말고 잘 자라라고 광주리에 담아 두었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이 광우리였다. 광주리의 사투리가 광우리다. 그런데 그 광우리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다 광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집을 가리키는 말은 광우리네 집이었다. 그 덕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부모님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서 낳았지만, 절에 가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불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많이 갔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게 온 날 밖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로 되어, 바라 소리가 방안까지 윙윙 들리는 그 집에서 추위에 떨며 이불밖에 나오기 싫어하던 그때,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천사의 음성이 들리듯 찬송이 들렸다.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 기억인데 그 찬송을 한 천사들은 누나가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이었다.
또 한 장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구유 예수 연극을 보기 위해 눈이 수북히 쌓인 고갯길을 넘어가던 몇몇 어린 친구들과 인솔하던 누군가, 발자욱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고갯길 저 멀리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여름 성경 학교 보단 그 겨울 발자욱 소리가 평생을 간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기쁜 날들, 기억의 회로에 남아 있는 자욱들을 다시 되새겨본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을 사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시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노트북에 자판을 두들기고 전등 불과 책상, 손전화며 옷장 가득한 옷들 침대 등등 당시엔 상상조차 못하던 것들이 당연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조차 신기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 즐거움이 없다면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되새김질이라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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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어른이 되어 국민학교 때 나의 너에게
가물거리는 기억 넘어
물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누나 뒤를 따라가던 너
오징어 놀이하다 뾰족한 바위에 이마를 찢기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울던 누나 얼굴 뒤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쯤 엄마가 퍼 온 된장을 붙이고 소청으로 머릴 싸맸지

밭 가장자리 철조망에 손을 얻은 손 지주였던 심 노인 호통에 놀라 집으로 달려가던 너
애창이라 불리던 이름 없고 봉분 없던 형들 무덤엔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 쌓이고 어머니 눈물도 쌓이고
국민 교육 헌장을 못 외우면 집에 못 간다던 선생님
우리 반 칠십 명 눈감으라고 하고 빵과 가루우유 타서 나눠 주던 선생님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옥외 변소 똥을 열일곱 통이나 날랐더니 머리통만한 고구마가 달렸지
몽달귀신이 산다는 옥외 변소는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어

소풍은 늘 절골로 갔지
보물찾기엔 하나도 찾지 못하고 울고 서 있던 내가 누나와 찍은 흑백 사진은 어디 갔을까
칠성 사이다 한 병에 취해 흔들거리던 나
운동회 때마다 밑에 깔리는 덤블링
앞에 서서 들던 차전놀이
기마전엔 말
씨름도 달리기도 상 한 번 받지 못한 고단한 날들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가 신고 싶었고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 짝꿍 규식이 도시락 반찬은 오뎅에 계란말이, 내 반찬은 쏟아져 책에 지도 그린 김치와 검정 콩자반
아파서 먹던 두더지 고기
오줌 싸면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
안 나가려는 나를 부지깽이로 쫓아내던 어머니

두드러기에 홀라당 벗겨진 네가 아궁이 앞에 서서 태운 짚으로 쓸리던 날
감기가 폐렴이 된다는 걸 몰랐어 다들 훌쩍대며 감기를 달고 살았으니 그러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시커먼 필름엔 내 한쪽 폐를 보고
심각해 하던 의사 얼굴
아파 누운 내가 얼어버린 사과를 긁어 떠넣어 주던 엄마
대보름날 망우리 깡통에 불을 넣고 윙윙 소리 내며 돌리다 옆 동네와 패싸움이 붙고
쓰는 냄비 쓰는 고무신으로 엿 바꿔 먹고
쳇바퀴로 고기 잡고
독사 비료 푸대에 잡아 시내 뱀 장수한테 팔고
옥수수 대 끌고 다니다 찢어진 손바닥에 지금도 선명한 손금처럼
저수지에 빠져 죽을뻔하고도 활 쏜다고 닥나무 홀에 수수깡 화살에 못을 박아 날리던 날들이
다른 애들은 달리는 경운기 잘도 타는데
다른 애들은 달리는 도라쿠 잘도 타는데
기계로 뜨개질한 구멍 숭숭 뚫린 홑겹바지에 빤스도 안 입고 추운 겨울 집에 오다 얼어 버린 다리처럼

세수하고 잡은 문고리에 들어붙은 손
컴컴한 부엌에 불을 때고
디딜방아 옆 광 콩깍지 따뜻한 계란
돌담 울타리 이엉 위에 호박꽃처럼
뒷밭에 보라색 도라지꽃
다시 돌아가도 없는 고향 집은 어린 네가 사는 고향.
이번 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면 뭘 하나, 몸이 아파 아무런 계획도 없다.
아니 몸이 안 아파도 날씨 때문에 꼼짝 마라는 정부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미 온 눈 위에 오늘 눈이 또 내리고 있고 날이 풀
면 얼음 비가 되어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데 큰일이지 싶다.
나는 죽고 또 죽는 형들 덕분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고 병치레하지 말고 잘 자라라고 광주리에 담아 두었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이 광우리였다. 광주리의 사투리가 광우리다. 그런데 그 광우리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다 광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집을 가리키는 말은 광우리네 집이었다. 그 덕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부모님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서 낳았지만, 절에 가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불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많이 갔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게 온 날 밖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로 되어, 바라 소리가 방안까지 윙윙 들리는 그 집에서 추위에 떨며 이불밖에 나오기 싫어하던 그때,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천사의 음성이 들리듯 찬송이 들렸다.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 기억인데 그 찬송을 한 천사들은 누나가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이었다.
또 한 장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구유 예수 연극을 보기 위해 눈이 수북히 쌓인 고갯길을 넘어가던 몇몇 어린 친구들과 인솔하던 누군가, 발자욱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고갯길 저 멀리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여름 성경 학교 보단 그 겨울 발자욱 소리가 평생을 간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기쁜 날들, 기억의 회로에 남아 있는 자욱들을 다시 되새겨본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을 사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시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노트북에 자판을 두들기고 전등 불과 책상, 손전화며 옷장 가득한 옷들 침대 등등 당시엔 상상조차 못하던 것들이 당연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조차 신기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 즐거움이 없다면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되새김질이라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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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랩으로
숨이 막혀 물이 되었다
껍데기 비닐만 홀로 남아
오이인척한다

공갈빵처럼
감자칩 봉지에
감자칩이 반만 들었듯
선물 박스에
조그만 선물 하나
박스 속에 스치로폼
그리고 또 박스
오래된 바가지 엎어 놓고
콱 밟듯
때론 밟고 또 밟고 싶다

계란 꾸러미
손으로 만든 수수 빗자루
댑싸리로 만든 싸리 빗자루
아궁이 재 파내는 삼태기
엄마가 묘가부리던 키 쓰고
이불에 지도 그렸다며
소금꾸러 가던 아이
도리깨질 신기해
나도 한다건 아이창밖에 눈 내리겠다


 







#작가의 변
어른이 되어 국민학교 때 나의 너에게
가물거리는 기억 넘어
물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누나 뒤를 따라가던 너
오징어 놀이하다 뾰족한 바위에 이마를 찢기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울던 누나 얼굴 뒤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쯤 엄마가 퍼 온 된장을 붙이고 소청으로 머릴 싸맸지

밭 가장자리 철조망에 손을 얻은 손 지주였던 심 노인 호통에 놀라 집으로 달려가던 너
애창이라 불리던 이름 없고 봉분 없던 형들 무덤엔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 쌓이고 어머니 눈물도 쌓이고
국민 교육 헌장을 못 외우면 집에 못 간다던 선생님
우리 반 칠십 명 눈감으라고 하고 빵과 가루우유 타서 나눠 주던 선생님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옥외 변소 똥을 열일곱 통이나 날랐더니 머리통만한 고구마가 달렸지
몽달귀신이 산다는 옥외 변소는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어

소풍은 늘 절골로 갔지
보물찾기엔 하나도 찾지 못하고 울고 서 있던 내가 누나와 찍은 흑백 사진은 어디 갔을까
칠성 사이다 한 병에 취해 흔들거리던 나
운동회 때마다 밑에 깔리는 덤블링
앞에 서서 들던 차전놀이
기마전엔 말
씨름도 달리기도 상 한 번 받지 못한 고단한 날들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가 신고 싶었고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 짝꿍 규식이 도시락 반찬은 오뎅에 계란말이, 내 반찬은 쏟아져 책에 지도 그린 김치와 검정 콩자반
아파서 먹던 두더지 고기
오줌 싸면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
안 나가려는 나를 부지깽이로 쫓아내던 어머니

두드러기에 홀라당 벗겨진 네가 아궁이 앞에 서서 태운 짚으로 쓸리던 날
감기가 폐렴이 된다는 걸 몰랐어 다들 훌쩍대며 감기를 달고 살았으니 그러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시커먼 필름엔 내 한쪽 폐를 보고
심각해 하던 의사 얼굴
아파 누운 내가 얼어버린 사과를 긁어 떠넣어 주던 엄마
대보름날 망우리 깡통에 불을 넣고 윙윙 소리 내며 돌리다 옆 동네와 패싸움이 붙고
쓰는 냄비 쓰는 고무신으로 엿 바꿔 먹고
쳇바퀴로 고기 잡고
독사 비료 푸대에 잡아 시내 뱀 장수한테 팔고
옥수수 대 끌고 다니다 찢어진 손바닥에 지금도 선명한 손금처럼
저수지에 빠져 죽을뻔하고도 활 쏜다고 닥나무 홀에 수수깡 화살에 못을 박아 날리던 날들이
다른 애들은 달리는 경운기 잘도 타는데
다른 애들은 달리는 도라쿠 잘도 타는데
기계로 뜨개질한 구멍 숭숭 뚫린 홑겹바지에 빤스도 안 입고 추운 겨울 집에 오다 얼어 버린 다리처럼

세수하고 잡은 문고리에 들어붙은 손
컴컴한 부엌에 불을 때고
디딜방아 옆 광 콩깍지 따뜻한 계란
돌담 울타리 이엉 위에 호박꽃처럼
뒷밭에 보라색 도라지꽃
다시 돌아가도 없는 고향 집은 어린 네가 사는 고향.
이번 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면 뭘 하나, 몸이 아파 아무런 계획도 없다.
아니 몸이 안 아파도 날씨 때문에 꼼짝 마라는 정부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미 온 눈 위에 오늘 눈이 또 내리고 있고 날이 풀
면 얼음 비가 되어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데 큰일이지 싶다.
나는 죽고 또 죽는 형들 덕분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고 병치레하지 말고 잘 자라라고 광주리에 담아 두었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이 광우리였다. 광주리의 사투리가 광우리다. 그런데 그 광우리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다 광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집을 가리키는 말은 광우리네 집이었다. 그 덕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부모님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서 낳았지만, 절에 가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불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많이 갔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게 온 날 밖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다. 창호지로 되어, 바라 소리가 방안까지 윙윙 들리는 그 집에서 추위에 떨며 이불밖에 나오기 싫어하던 그때,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천사의 음성이 들리듯 찬송이 들렸다.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 기억인데 그 찬송을 한 천사들은 누나가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이었다.
또 한 장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구유 예수 연극을 보기 위해 눈이 수북히 쌓인 고갯길을 넘어가던 몇몇 어린 친구들과 인솔하던 누군가, 발자욱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고갯길 저 멀리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여름 성경 학교 보단 그 겨울 발자욱 소리가 평생을 간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기쁜 날들, 기억의 회로에 남아 있는 자욱들을 다시 되새겨본다. 그렇게 함으로 오늘을 사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시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노트북에 자판을 두들기고 전등 불과 책상, 손전화며 옷장 가득한 옷들 침대 등등 당시엔 상상조차 못하던 것들이 당연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조차 신기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 즐거움이 없다면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되새김질이라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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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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