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구법 위해 당항진 가던 중 직산 무덤에서 깨달음
입당구법 위해 당항진 가던 중 직산 무덤에서 깨달음
  • 김경집 교수
  • 승인 2022.12.3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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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 원효 스님 진영.
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 원효 스님 진영.

원효의 제1차 구법 행로와 그 이유

원효와 의상의 입당 구법을 전하고 있는 기록은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이다. 그 자료에 의하면 그들은 650년 제1차, 661년 제2차의 구법을 시도하였다. 원효의 제1차 구법을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의상전교>이다.

“의상은 출가 후 얼마 되지 않아 서방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보고자 하였다.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으나 변방의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영휘(永徽) 초에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의상전(義湘傳)을 살펴보면, 영휘 초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지엄 법사를 뵈었다고 하나, 부석사 본비〔浮石本碑〕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영휘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으로 들어가 지엄 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원효는 1차 구법 때 고구려를 거쳐 육로로 당나라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첩자의 혐의를 받아 갇혔다가 수십 일 만에 돌아왔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 14년(553) 7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그곳을 대당 해로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효와 의상의 1차 구법인 650년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다. 원효는 육체적 힘이 덜한 해로를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원효는 육로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해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평양 반룡사에 주석하고 있던 보덕 화상에게 배워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당나라 현장(玄奘)은 645년 인도에서 귀국한 후 역경과 후학양성을 하였다. 그는 중국불교 자은종(유식학)의 초조가 되었다.

현장을 사모하여 그의 문도가 되기를 희망한 원효에게 유식학 공부에 앞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고구려의 보덕 화상은 그 방면에 명성을 날리던 분이었다. 중국에 가기 전 그를 만나 대승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원효에게 고구려행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에 직접 갈 수 있는 해로를 마다하고 어려운 육로로 고구려에 간 것이다. 그러나 변방에서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고생만 하다가 수십 일 만에 되돌아온 것이다.

원효가 신라로 돌아온 후 650년 6월 보덕은 고구려 지도층이 도교를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거처를 백제 땅 완주로 이주한 것으로 볼 때, 원효와 의상의 1차 구법의 시기는 650년 6월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제2차 구법 시기와 방향

650년 제1차 구법을 실패한 원효가 제2차 구법을 실행한 것은 661년이다. 햇수로 12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 사이 원효가 구법을 시도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육로는 고구려에 막혀 어려웠지만 해로는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여건이었다. 상식적으로 현장을 사모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볼 때 해로를 통해서 입당 구법을 추진해도 되는데 그런 사실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우려고 했던 간절함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나라 현장에게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덕 화상에게 열반과 방등의 가르침을 받는 것 역시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보덕 화상이 완산주로 거처를 옮기자 그를 만나려던 원효와 의상은 다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제동맹의 결렬 이후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왕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660년 7월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완산주(전주)에 있는 보덕 화상에게 수학한 후 중국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곳으로 가는데 어려움이 해결되자 두 사람은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후대 의천은 이곳을 들러 원효와 의상이 경주를 떠나 완산주 고대산 경복사에 이르러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경주에 있던 원효와 의상이 완산주에 있는 보덕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면 그곳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2차 원효의 입당 경로는 먼저 경주-경산-합천(대야성)-함양-장수-진안-완산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가르침을 받았을까? 백제가 멸망한 것이 660년 7월이고 661년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던 두 사람이 고분과 같은 밖에서 잠을 잘 수 있으려면 적어도 초여름 전후로 보인다. 《송고승전》에서 여러 날 비가 왔다는 것으로 보아 장마 무렵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원효와 의상이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은 대략 9~10개월 정도이다.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운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2차 때는 고구려를 거쳐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배를 타려고 하였다. 완산주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신라의 대당 항로의 출발지인 당항진으로 가야 한다. 완산주에서 그곳을 가는 최단 경로는 완산주-논산-공주-직산-당항진이다. 그런 정황을 종합할 때 원효의 제2차 구법 경로는 경주-경산-합천(대야성)-함양-장수-진안-완산주-논산-공주-직산-당항진이 된다.

원효의 오도처

원효의 오도처를 전하고 있는 기록은 《송고승전》 <의상전>과 ‘월광사(月光寺) 원랑 선사(圓朗 禪師) 대보선광탑비(大寶禪光塔碑)’ 두 가지이다. 먼저 《송고승전》 <의상전>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효와 의상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한 후 장차 창파(滄波)를 넘으려고 계획했다. 그래서 진흙길을 재촉하며 갔지만 고우(苦雨)를 만나 길옆 토감(土龕)에 은신하였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땅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이었고 해골도 뒹굴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땅도 진흙투성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워 하룻밤을 더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날 것과 같은 생각에 원효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제는 땅굴이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과 천지차이였다. 그때 원효는 이에 모든 것이 마음 도리임을 깨달았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땅굴과 고분도 둘이 아니다.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다. 마음 외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원효가 깨달음을 이룬 곳은 해문 당주계에 있던 오래된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오도처를 기록한 ‘대보선광탑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회창 을축년 봄(문성왕 7년, 845) 대덕 성린(聖鱗)에게 구족계를 받은 원랑 선사는 단엄사(丹嚴寺)에 주석하였다. 계율을 지키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이때 선배인 자인 선사(慈仁 禪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때때로 찾아가 뵈었다. 자인은 원랑의 품은 뜻이 큰 것을 알아보고 자신이 가르칠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격려하여 용과 코끼리와 같은 마음을 내도록 자극하였다. 이에 선사는 곧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 ○○○에 주석하였다. 이곳은 원효 대사가 도를 깨친 곳이었다.”

두 가지 자료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원효는 제2차 입당 구법 과정에서 당주계 부근 해문에 인접한 직산의 오래된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원효 입멸 후 그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려는 수행자가 그 주변에 사찰을 세워 수행하였고, 사찰은 9세기 중엽 원랑 선사(816~883)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원랑 선사 비문에 나오는 직산(樴山)은 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추정된다. 먼저 원효의 구법 경로를 생각할 때 지금의 직산을 거칠 수밖에 없다. 완산주에서 보덕 화상에게 수학한 다음 배를 타기 위해 당항진으로 가는 행로는 논산-공주-천안을 거쳐 직산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직산(樴山)이 뒤에 직산(稷山)으로 표기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역을 표기하는 한자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음을 지닌 다른 글자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경상도 상주(尙州)의 경우가 그와 같은 예이다. 12대 첨해왕(247~261) 때 사벌국(沙伐國)을 취하여 주(州)로 삼았다. 그 후 법흥왕 11년(524) 처음으로 군주(軍主)를 설치하여 상주(上州)로 삼았다. 그 후 경덕왕 16년(757) 이름을 상주(尙州)로 고쳤다. 이곳은 한때 상주(湘州)라고도 불렸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지금의 상주는 상주(上州)에서 상주(尙州)와 상주(湘州)를 거쳐 다시 상주(尙州)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예로 볼 때 직산(樴山) 역시 직산(稷山)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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