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선리 포교 위해 남전·도봉·석두 스님 주도로 설립
정법·선리 포교 위해 남전·도봉·석두 스님 주도로 설립
  • 선학원백년사간행위원회
  • 승인 2022.12.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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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학원의 설립 과정

선학원은 1921년 8월 1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0월 4일에 상량식을 하고, 그해 11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선학원이 건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건립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선학원이 1921년 10월 4일에 입주상량하며 쓴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창건 상량문(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梁文)>이 남아 있어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상량문에는 선학원 건립의 취지와 건립 참여자 명단을 싣고 있다. 이를 통해 선학원 건립의 배경과 설립 주역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창건 상량문(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梁文). 1921년 8월 공사를 시작하여 1921년 10월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 김남전 스님을 중심으로 상량식(上梁式)을 거행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창건 상량문(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梁文). 1921년 8월 공사를 시작하여 1921년 10월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 김남전 스님을 중심으로 상량식(上梁式)을 거행했다.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창건 상량문(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梁文)6)

六緯의 唱은 支那 宋·元時로부터 始作됨이요, 自古로 有한 法은 아닌 卽, 足히 取할 바가 無하도다. 대저 正法千年과 像法千年이 旣是過去하고, 季法萬年 중에서도 역시 九百四十八年이나 되었으니, 世道와 人心이 점차 복잡함으로 敎理의 通學과 宗旨의 宣傳이 실로 極難한 중에 各宗의 敎가 朝發而暮作하야 個個 自善自是로 闡揚하니 邪正의 根과 眞膺의 端이 無異於鳥之雌雄이로다. 此時를 當한 佛子가 어찌 責任이 無하리요.

吾輩 六七人이 潛伏의 志를 打破하고 金剛心願을 共發하여 京城에 來去한지 數星霜만에 先卽 禪學院을 創設하기로 하나, 準備의 物體가 艱少함으로, 惱心焦思한 중에 丁巳生 具氏智月花의 檀力이 有하고 梵魚寺에서 仁寺洞敎堂 全部와 겸하여 千圓金額을 寄付하기, 吾輩의 蚊力에 대하여는 可謂 虎가 山에 處하고 龍이 海에 蟠함과 如하도다.

辛酉十月四日 卯時에 立柱上梁하니 大院을 成就한 然後에는 敎理硏究하며 正法을 說示하여 佛法大海를 十方世界에 永遠流通하기로 하노라.

世尊應化 二千九百四十八年 辛酉十月 四日

大衆秩
白龍城 吳惺月 宋滿空 康道峰 金石頭 韓雪濟 金南泉 李景悅 朴普善 白俊燦 朴敦法

檀越秩
戊午生 李氏光明眼, 丙辰生 朴氏光明相, 戊辰生 李氏光明空, 辛巳生 金氏大覺心, 壬辰生 趙氏如來性, 庚寅生 朴氏萬德心

其他 同願
片手 金萬濟, 木工 金聖吉, 石工 王春實

상량문을 통해 선학원 건립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여타 종교에 비해 불교의 미약한 포교와 이에 대한 책임의식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의 교리와 종지의 선전이 어렵지만 각 종교는 날로 번성하고 널리 알려 결과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에 대한 강한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상량문은 동시에 선학원 건립 과정과 그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승려 6, 7인’이 서로 원력을 내서 선학원을 창설하였다는 것과 준비된 물력이 부족하여 노심초사하던 중에 ‘정사생丁(巳生) 구지월화(具智月花)의 단력(檀力)’과 ‘범어사(梵魚寺) 인사동교당(仁寺洞敎堂)의 전부와 1000원의 기부’로 선학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설립의 주체는 ① 승려 6, 7인을 핵심으로 하는 승려 11명, ② 구지월화를 비롯한 단월 세력, 그리고 ③ 범어사포교당으로 대표되는 범어사 등 크게 세 부류로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3. 선학원의 설립 조사 – 11명의 승려

선학원 설립을 주도한 11명의 대중 명단이 주목된다. 즉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송만공(宋滿空), 강도봉(康道峰), 김석두(金石頭), 한설제(韓雪濟), 김남전(金南泉), 이경열(李景悅), 박보선(朴普善), 백준찬(白俊燦), 박돈법(朴敦法) 등 11명을 특기하고 있다. 기존의 백용성, 오성월, 송만공, 강도봉, 김석두, 김남전 등 널리 알려진 설립 조사에 더하여 한설제, 이경열, 박보선, 백준찬, 박돈법 등 5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48년 12월 20일 작성된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이 전한다. 해방 후 작성된 <선학원 창설 연기록>은 선학원 설립에 대한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설립자 강도봉 스님의 증언을 기초로 김경봉(金鏡峰) 스님이 쓴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8년 12월 시점에서 선학원 창건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던 셈이다. 김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은 1941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을 역임한 인연이 있다.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7)

京城 도시 내에 正法禪理를 布敎하기 위하여 金南泉·康道峰·金石頭 三和尙이 협의하여 발기, 左와 如히 自願金을 수합하여 辛酉年八月十日에 공사를 시작하여 同年 十一月三十日에 竣工入宅也.

金貳千円=金南泉, 金壹千五百円=康道峰, 金貳千円=金石頭, 金六千円=磚洞 趙判書 東潤慈堂 李光明眼, 金四千円=勳洞 趙判書 東冕慈堂 朴光明眼, 金壹萬円=京城信徒一同 自願金

計合貳萬五千五百円也

一. 家屋二十五間과 垈地는 韓相鶴處 買入也

一. 石物及蓋瓦는 需昌洞 於義宮에서 買用也

一. 材木은 尹澤榮處에서 買用也

一. 監督 金石頭

一. 京城 仁寺洞 梵魚寺布敎堂 破屋材木은 現禪學院事務所 건축에 混用이요, 其垈地는 梵魚寺에서 賣去也

一. 工事人夫供은 康道峰 선사가 京城 諫洞 釋王寺布敎師로 있어서 役人夫供也

一. 禪學院 家屋名義及垈地名義는 金南泉·康道峰·金石頭 三和尙 名義로 하였다가 稅金관계로 梵魚寺名義 借用也(吳梨山 梵魚寺住持時)

一. 安城郡 土地小作料 二十石斗土地는 諫洞布敎堂 涅槃稧畓條로 本院으로 引來也. 又安城土地 小作料 參拾斗는 領議政 沈舜澤夫人 具智月華 願畓으로 納入也.

檀紀四二八一年 戊子十二月貳拾日

緣起筆記人 金鏡峰 印
設立者證人 康道峰 印
立證人 朴石頭 印
立證人 李勝雲 印

<선학원 창설 연기록>은 “경성(京城) 도시 내에 정법선리(正法禪理)를 포교(布敎)하기 위하여 김남전(金南泉)·강도봉(康道峰)·김석두(金石頭) 삼화상(三和尙)이 협의하여 발기”하였음을 명확히 쓰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정법과 선리를 포교하기 위한 공간으로 선학원이 마련되었고, 김남전·강도봉·김석두 등 3명의 스님이 선학원 설립 주체가 되어 이들이 주도하여 모금을 통해 설립했다는 점과 1921년 8월 10일 공사를 시작하여 11월 30일에 준공하여 입주했음을 밝히고 있다. <선학원 창설 연기록>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것은 선학원 건립에 따른 자원금(自願金) 내역이다. 곧 김남전(2000원), 강도봉(1500원), 김석두(2000원) 스님을 비롯하여 조동윤(趙東潤)의 자당 이광명안(6000원), 조동면(趙東冕) 자당 박광명안(4000원), 그리고 경성의 신도 일동(1만 원) 등 총액 2만 5500원을 모아 건축한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건축비 자원금 명단에서 2000원의 김남전 스님을 첫 번째로 기록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주금을 받아 낸 것이 아니라 스님이 오랫동안 저축해 모은 자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도봉 스님의 1500원과 김석두 스님의 2000원도 이들 스님의 역량에 의한 모금이라는 점에서 선학원 건립의 중요한 계기였다. 이들의 노력에 따라 선학원 전체 건축비 2만 5500원을 모을 수 있었던 셈이다.

가옥과 대지 및 석물과 기와, 재목의 용처는 정치적 거물과 궁방에서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어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안국동 가옥 25칸과 대지는 한상학(韓相鶴)으로부터 매입하였고, 석물과 기와는 수창동(需昌洞) 어의궁(於義宮)에서 사서 쓴 것이며, 목재는 윤택영(尹澤榮)에게 구입하여 쓴 것이다.

한상학(韓相鶴, 1872년생)은 한상봉(韓相鳳, 1876~1933)과 한상룡(韓相龍, 1880~?)의 형으로 고종 독살설에 연루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외삼촌이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다. 윤택영(尹澤榮, 1876~1935)은 순종황제의 계비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친일파 윤덕영(尹悳榮)의 동생이다. 친일 귀족이었으나 아들 윤홍섭(尹弘燮)은 독립운동을 했다.

수창동 어의궁(於義宮)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잠저(潛邸)였다. 서부 인달방, 영빈동·누정동·승전교·내수동·내수사전동·사직동·박정동·대창동·북문동 지역이 1914년 수창동이 되었다. 이름은 내수동과 대창동에서 글자를 따왔다. 어의궁은 왕실의 사적 재산을 조달 및 관리하고, 왕과 왕세자가 가례를 올리는 별궁으로 기능했다.

一. 監督 金石頭
一. 工事人夫供은 康道峰 선사가 京城 諫洞 釋王寺布敎師로 있어서 役人夫供也

특히 기존의 자료와 차별성을 지니는 것은 공사 감독과 인부 제공에 대한 기록이다. 즉 공사를 총감독한 것은 김석두(石頭) 스님이었다는 점을 특기하고 있다. 선학원 건립에서 단순히 재물 등의 물력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건설 현장을 총감독한 인물이 김석두 스님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강도봉 스님은 석왕사 간동 포교당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선학원 공사에 인부를 제공하였다. 석왕사 간동 포교당 열반계(涅槃稧)의 소작료 20석지기 안성 토지를 선학원에 기부한 것도 강도봉 스님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한편 소작료 30두의 안성 토지는 영의정 심순택 부인 구지월화 원답으로 납입하였는데, 이는 김석두 스님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선학원 창설 연기록>은 선학원 건립에서 이들 3명 스님들의 역할을 재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선학원 건립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선학원에 머물며 선학원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석주 스님의 증언이 있다. 석주 스님의 증언을 통해 선학원 건립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세 분(남전, 도봉, 석두)이 주동이 되어 시작했는데 처음 우리 스님(남전)이 인사동 임제종 포교당 계시면서 3500원 저금한 것이 있었고, 도봉 스님은 … 훈동댁, 박동댁, 조복댁 … 대갓집들이 … 그이들한테 의뢰해서 한 2000원을 선학원을 짓는데 내놨고, 석두 스님은 계동의 심정승 댁에서 한 2500원 내놓을 것을 출연했고 우리 스님이 저금한 것을 기본으로 하고 모금도 해서 한겨울 단시일 안에 선학원을 지었어.8)

선학원 건립의 주인공인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등 세 스님의 주도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특히 김남전 스님이 저축한 돈이 큰 역할을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동의 심정승 댁, 즉 영의정 심순택 부인 구지월화의 2500원 출연금이 김석두 스님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이를 시작으로 강도봉 스님이 훈동댁, 박동댁 등 대갓집에 의뢰해 2500원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석주 스님은 은사 김남전 스님이 저축한 돈 3500원을 통해 선학원 건립의 기초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주] -----

6) 선학원(1986), 《財團法人 禪學院略史》, 7쪽.
7) 정광호(1999), 《韓國佛敎最近百年史編年》, 인하대학교출판부, 248~249쪽.
8) 강석주 증언(2002),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 선우도량,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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