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건립, 김남전·강도봉·김석두 세 설립조사가 주도
선학원 건립, 김남전·강도봉·김석두 세 설립조사가 주도
  • 선학원백년사간행위원회
  • 승인 2023.01.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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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監督 金石頭
一. 工事人夫供은 康道峰 선사가 京城 諫洞 釋王寺布敎師로 있어서 役人夫供也

특히 기존의 자료와 차별성을 지니는 것은 공사 감독과 인부 제공에 대한 기록이다. 즉 공사를 총감독한 것은 김석두(石頭) 스님이었다는 점을 특기하고 있다. 선학원 건립에서 단순히 재물 등의 물력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건설 현장을 총감독한 인물이 김석두 스님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강도봉 스님은 석왕사 간동 포교당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선학원 공사에 인부를 제공하였다. 석왕사 간동 포교당 열반계(涅槃稧)의 소작료 20석지기 안성 토지를 선학원에 기부한 것도 강도봉 스님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한편 소작료 30두의 안성 토지는 영의정 심순택 부인 구지월화 원답으로 납입하였는데, 이는 김석두 스님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선학원 창설 연기록>은 선학원 건립에서 이들 3명 스님들의 역할을 재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선학원 건립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선학원에 머물며 선학원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석주 스님의 증언이 있다. 석주 스님의 증언을 통해 선학원 건립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세 분(남전, 도봉, 석두)이 주동이 되어 시작했는데 처음 우리 스님(남전)이 인사동 임제종 포교당 계시면서 3500원 저금한 것이 있었고, 도봉 스님은 … 훈동댁, 박동댁, 조복댁 … 대갓집들이 … 그이들한테 의뢰해서 한 2000원을 선학원을 짓는데 내놨고, 석두 스님은 계동의 심정승 댁에서 한 2500원 내놓을 것을 출연했고 우리 스님이 저금한 것을 기본으로 하고 모금도 해서 한겨울 단시일 안에 선학원을 지었어.8)

선학원 건립의 주인공인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등 세 스님의 주도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특히 김남전 스님이 저축한 돈이 큰 역할을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동의 심정승 댁, 즉 영의정 심순택 부인 구지월화의 2500원 출연금이 김석두 스님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이를 시작으로 강도봉 스님이 훈동댁, 박동댁 등 대갓집에 의뢰해 2500원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석주 스님은 은사 김남전 스님이 저축한 돈 3500원을 통해 선학원 건립의 기초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일제 강점기 선학원 자료(1935) 가운데 선학원 창립 발기인을 다음과 같이 거명하고 있다.

佛紀二九四八年(大正十年)에 宋滿空 金南泉 白龍城 吳惺月 康道峰 諸氏의 發起로 禪學院을 創立하다.9)

즉 1921년 “송만공, 김남전,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등 여러분의 발기”로 선학원을 창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35년 시점에서 선학원 창립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선학원 창립의 핵심 인물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등 3명의 이름에서 김석두 스님 대신 송만공과 백용성 스님이 선학원 창립의 핵심적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강석주 스님의 증언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셈이다.

처음 간동 법륜사에서 우리 스님(남전 스님), 도봉 스님, 석두 스님이 주동이 되어 만공 스님, 용성 스님도 초청해서 회의를 했다고 해요. 수좌들이 선계에서 선학원 같은 기관을 하나 만들자고. 그래서 발기를 했는데 용성 스님은 대각사 운영하신다고 참여 못 하시고, 만공 스님도 참여 못 하시겠다고 했지. 참여 못 하겠다는 편지도 남아 있어.10)

용성과 만공 스님의 선학원 건립 과정의 입장과 태도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용성 스님과 만공 스님이 각자의 사업과 일로 선학원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동시에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세 스님이 선학원 건립을 주도한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1921년 10월 4일에 작성된 <선학원 상량문(禪學院上樑文)>의 ‘창건 대중질’의 백용성, 오성월, 송만공, 강도봉, 김석두, 한설제, 김남전, 이경열, 박보선, 백준찬, 박돈법 등 11명의 명단을 통해 본다면 “송만공, 김남전, 백용성, 강도봉 등 여러분의 발기”로 선학원이 창립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다만 1935년 시점에서 만공 스님과 용성 스님이 거명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선학원의 중흥을 꿈꾸며 적음 스님이 주도하여 중앙선리참구원을 만들었을 때 만공 스님의 수덕사 계통에서 많은 기부를 하였던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1933년 8월경 재단 설립을 위하여 송만공(宋滿空) 스님 등을 비롯한 16명으로부터 전답 15만여 평의 기부를 받았다.

이때 수덕사 주지였던 만공 스님은 전(田) 1549평과 답(畓) 2만 2779평 총 2만 4328평을 기부함과 동시에 수덕사의 전서경(全西耕) 1291평과 수덕사 황법천(黃法泉)·방법인(方法印)·마경선(馬鏡禪) 공동명의로 4162평의 기부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11) 또한 1935년 10월 9일 만공 스님은 본사 마곡사 주지로 임명되어 31본산 주지 가운데 한 명으로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또한 선리참구원에서 처음 결제할 때 용성 스님이 조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봉익동 대각사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도 각 선방 및 선리참구원 조실을 맡았던 용성 스님과 수덕사를 비롯하여 마하연 등의 조실로 활동하던 만공 스님에 대한 선리참구원(선학원)의 입장이 일치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11명의 선학원 설립의 주도자 가운데 백용성, 오성월, 송만공, 강도봉, 김석두, 김남전 등 설립 조사들 외에 나머지 인물들의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한설제(韓雪濟)는 선학원 창립 당시 귀주사(歸州寺) 함흥포교당 포교사(1915. 12.17~1932. 12. 1)였다.12) 이후 1938년 4월부터 함경남도 신흥군 개심사(開心寺) 주지를 맡았고,13) 적어도 1940년까지 개심사 주지를 맡아 함경도를 주무대로 활동한 인물인 셈이다.14) 그러나 이경열, 박보선, 백준찬, 박돈법 등은 행적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일제의 사찰령 체제 아래 포교사, 주지 등을 역임한 적이 없는 수좌들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삶을 산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

4. 선학원 건립과 단월 세력

승려 6, 7인은 선학원 설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즉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송만공(宋滿空), 강도봉(康道峰), 김석두(金石頭), 김남전(金南泉)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승려의 역할과 함께 단월로 선학원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구지월화’와 ‘범어사 인사동 포교당’의 역할을 특별히 거론하고 있다. 설립 조사 및 범어사 인사동 포교당의 역할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구지월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구지월화(具智月華, 1857~?)는 영의정 심순택의 부인으로 이름은 구택희(具澤喜이다. 심순택(沈舜澤, 1824∼1906)은 안효공 심온의 후손으로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과 왕실에 대한 충성으로 대표적 근왕주의자(勤王主義者)였다. 1906년 83세로 서거한 심순택은 딸만 셋이어서 동생 심이택(沈履澤)의 아들 상진(相璡)을 양자로 삼았다. 심순택의 첫 부인 한산 이씨(1823~1872)가 딸 둘을 낳고 사망하자, 둘째 부인 능성 구씨와 재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15) 정경부인인 능성 구씨(구지월화, 구택희)는 인자하고 후덕하여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친척과 이웃들에게 두루 시혜를 베풀었다. 남편 심순택이 죽어 진위군 진위면 봉남리에 묘소를 쓰자 그곳에 정사를 짓고 살며 학교를 세워 지역 무산아동을 가르치게 하고, 돈을 내어 다리를 놓고 도로를 보수하였다. 또한 소유 토지의 소작인 조합을 만들어 매년 봄에는 무이자로 곡식을 빌려주고, 매년 연말에는 극빈자들에게 쌀을 나누어 구제하였다. 이러한 선행으로 평택 지역민들은 1919년 8월 능성 구씨 공덕비를 세웠다. 능성 구씨는 돈독한 불교신자로 ‘구지월화’라는 이름으로 많은 시주와 공덕을 베풀었는데, 특히 선학원 설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구지월화의 시주에 힘입어 이후 대갓집 마님들과 상궁들의 시주가 이어져 재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셈이다.

구지월화 이외에도 대시주자로 참여한 단월로는 무오생(戊午生, 1856년) 이광명안(李光明眼), 병진생(丙辰生, 1856년) 박광명상(朴光明相), 무진생(戊辰生, 1868년) 이광명공(李光明空), 신사생(辛巳生, 1881년) 김대각심(金大覺心), 임진생(壬辰生, 1892년) 조여래성(趙如來性), 경인생(庚寅生, 1890년) 박만덕심(朴萬德心) 등이 있다.

1932년 2월 선학원에서 발간한 기관지 《선원(禪苑)》 2호에는 다른 호에 비해 40명 가까운 보살들이 후원 광고를 싣고 있다. 이 가운데 영의정 심순택 부인이었던 구지월화(具智月華, 1857년생)와 조동윤의 어머니이자 조영하의 부인인 이광명안(李光明眼, 1858년생)은 보다 큰 칸의 광고를 하고 있다. 또한 1933년 8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설립 당시에도 계동 34번지 구택희(具澤喜) 이름으로 밭 938평을 기부하고 있다.16) 재단 기부자들이 승려들인데 통동(通洞)의 이정숙(李貞淑) 답 3,194평과 더불어 구택희가 유일한 단월로 재산 기부를 하고 있다. 따라서 구지월화(구택희)는 선학원 창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선학원을 후원하는 대표적인 단월 세력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지월화의 기부와 역할이 선학원 건립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선학원 창설 연기록(禪學院創設緣起錄)>은 선학원 창립의 주역인 김남전·강도봉·김석두 등 3명의 스님 이외에 큰돈을 기부한 단월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광명안(李光明眼), 박광명안(朴光明眼), 구지월화(具智月華) 등이 거명되고 있다. 즉 박동의 이광명안은 조동윤(趙東潤), 1871~1923)의 자당으로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로 공조판서를 지낸 조영하(趙寧夏), 1845~1884)의 부인이다. 4천 원을 기부한 훈동의 박광명안도 조동면(趙東冕, 1867~?)의 자당으로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로 이조판서를 지낸 조성하(趙成夏, 1845~1881)의 부인이다. 따라서 신정왕후 조대비와 관련한 왕실 인척의 기부금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영의정을 역임한 심순택의 부인 구지월화는 소작료 30두의 안성 토지를 헌납하였다. 앞의 <상량문>(1921)에서 특별히 기술된 구지월화의 역할과 내용이 <선학원 창설 연기록>(1941)에는 서술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때는 신도가 그리 없었어. 선학원도 훈박동 마님 두 분과 계동 대방마님이 있었는데, 그 집 따라오는 신도가 많았어. 큰 대갓집에서 후원했던 거지. 그때는 별궁이 안국동 네거리 지금 풍문여고 있는 데 있었는데 거기에는 상궁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 나도 어렸을 때는 출입을 많이 했지. 그 마마님들과 세 대갓집이 후원했지.17)

이는 강석주 스님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훈박동 마님 두 분은 훈동과 박동의 이광명안과 박광명안 보살이며, 계동 대방마님이 구지월화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선학원 건립에서 가장 큰돈을 기부한 개인이 6000원을 기부한 박동의 이광명안과 4000원을 기부한 훈동의 박광명안이었다. 이를 통해 선학원 건립을 비롯해 당시 불교계의 큰 시주자들이 고관대작 부인들과 상궁 마마님들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들 이외에 ‘경성의 신도 일동 1만원’ 등 총액 2만 5500원을 모아 선학원을 건축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판결문>(1954)의 “信徒 崔昌勳外 多數人으로부터 寄附를 받어 서울特別市 安國洞 四十番地 垈百九十坪을 買入”하였다는 자료를 통해 최창훈(崔昌勳)을 비롯한 선학원의 일반 신도들의 역할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 -----

8) 강석주 증언(2002),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 선우도량, 24쪽.

9) 선학원(2007), <조선불교선종 수좌대회록>, 선리연구원 총서 1, 《選佛場 – 안거방함록과 수좌대회록》, 선리연구원, 142~143쪽.

10) 강석주 증언, 앞의 책, 23쪽.

11) 《禪苑》 4호(1935. 10), 44쪽.

12) ‘布敎擔任者屆出’, 《조선총독부관보》 1917. 4. 2 ; ‘布敎擔任者變更屆’, 《조선총독부관보》 1933. 6. 23.

13) ‘住持異動’, 《조선총독부관보》 1938. 5. 30.

14) ‘寺有林伐採許可’, 《조선총독부관보》 1940. 4. 10

15) 《靑松沈氏大同世譜》 7, 2002, 92~93쪽.

16)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설립 당시 기부재산자 일람표’, 《禪苑》 4호(1935. 10), 44쪽.

17) 강석주 증언(2002),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 선우도량,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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