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꿈인 줄 알았는데
그 손길이 그 체온이 남아도는 손끝처럼
꿈과 현실을 방랑하게 한다.
처음 만남에도 인연이었기에
먹이고 입히고 울고 웃던 날들이
갑자기 꿈에서만 허락된 시간이 되어
하늘을 날고 천 길 낭떠러지기를 걸을 때도
함께하면 두려움이 없던 내 가장 가깝고도 먼 그대
떠나고 나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리움.
#작가의 변
지금은 가상현실이 정말 많다. 그중에서도 가상 증가 현실이라고 해서 현실인지 가상 세계인지 구분하기 힘든 전자기기를 쓰고 가상 세계를 즐기는 시대까지 왔다. 현실과 완전히 똑같이 느끼게 만든 것은 그냥 영화를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내가 그 가상 세계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상현실에 아주 많은 느낌을 받은 것은 입체 영화라고도 불리는 3D 안경을 끼고 영화를 보면 영화 안, 즉 필름 안에만 있던 세계가 현실 세계로 툭 튀어나오는 느낌을 들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본 영화는 홍길동이었다. 영화에서 화살을 쏘면 화살이 날아와 나한테 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현실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이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해 발표된 아바타를 광고만 보고 만화 영화 같아서 아예 보고 싶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가 어제 보게 되었다. 가상의 세계에 내가 빠져든 영화 중에 하나다. 나를 정글로 초대해서 내가 주인공이 되게 만든 영화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는 꽤 있었다. 킹콩도 사실 밀림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가 스토리에 몰입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쮸라기월드도 쥬라기가 살던 시대로 관객을 데리고 들어가 주라기 시대를 살게 한 영화이자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엔 타잔이 가상이기보단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우리 관객을 정글의 생활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아바타라는 영화는 미래의 세계를 보여 주면서 원초적인 세계 밀림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라디오만 있던 세상에서는 라디오에 나오는 성우들의 목소리만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라디오도 없던 시대엔 이야기가 똑같아도 때로는 나의 상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설 삼국지를 읽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삼국지연의가 가리키는 삼국지의 시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삼국지의 유비가 되어 조조와도 싸우고 상산 조자룡처럼 창을 꼬나들고 백만대군 속에서 종횡무진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적 상상에는 그 개인의 성품이 포함되어 있어 잔인함의 척도가 높고 낮을 수 있어서 그 리얼리티가 현실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상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소 죽을 끓이면서 들은 연속극을 통해 서울에 산다. 내 동생이란 극을 들을 땐 내가 서울에 가서 사는 상상을 했다. 나중에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물론 그 라디오 방송극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이 상상하는 상상의 척도도 올라간다. 전화를 처음 보고 사용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 속에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흘러나올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라디오나 TV도 마찬가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이 하도 신기해서 라디오 뒷판을 뜯어 봤더니 라디오 안에는 부속품 몇 개밖에 없고 성우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TV도 마찬가지였다. TV는 속에 얼마나 커다란 세상을 담고 있길래 저렇게 사안마다 다른 뉴스나 드라마를 내보낼 수 있을까 궁금해서 TV를 뜯어 보고 실망하고는 했다. 어떻게 이렇게 속이 생겼는데 그런 장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고춧대를 아궁이에 불 피워서 따뜻한 겨울을 나는 현실과 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가 그대로 문풍지로 전해져서 문풍지가 울던 그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아궁이도 없는 부억과 방 옆에 있는 화장실에서 생활하지만 지금 나에겐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정말 스마트하고 똑똑한 전화기가 있어서 비서 역할, 사전 역할, 달력 역할, 전화와 TV, 전축 역할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지금도 나는 상상을 하고 꿈을 꾼다.
영화 홍길동, 킹콩, 타잔을 보던 어릴 적 내 모습과 쥬라기 월드에 나오는 공룡의 모습이 들어간 카드를 모으던 아들의 모습 그리고 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아바타의 미래 모습은 기본적인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또 다른 인간인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냥 무너트려야 할 상대로 보고 무자비한 공격을 이어가다 결국은 원주민이 승리해서 침략자들을 물리친다는 영화 아바타 이야기 속 곳곳에 들어 있는 자연과 원주민과의 사랑과 이해, 무너트릴 적이 아닌, 사랑해야 하는 상대로 대하는 모습은 거대한 원시림 속의 거대한 나무와 폭포는 물론 상상의 동물이긴 하지만 날으는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불안한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첨단 기술을 탑재한 비행선보다 더욱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교감하고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 모습은 우리 인간 세상부터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민족이 다르다고, 국가가 다르다고, 신념이 다르다고, 서로를 원수로 보고 무너트려야 할 상대로만 본다면 공생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국민의 대표로 뽑을 때는 여러분의 심부름꾼, 공복을 자임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국민의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꾼들이 있고 권력의 썩은 부위에 기생하는 무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선한 영향력은 기대할 수 없다. 사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과 같이 기본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종교도 기업화되어 기부금이나 교부금, 헌금을 많이 내고 소위 기여를 많이 하면 종교에서도 영향력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고 선하고 공명정대한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락되지 않은 행위를 하는 지도자도 많다. 부패 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리고 그 열매는 달다. 하지만 공생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쓰디쓴 한약과 같아서 맛도 없고 쓰기만 할 뿐이다.
시대가 별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달에 토끼가 절구를 찢는 그런 상상은 이제 하는 사람들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에 도착해서 달 표면의 사진을 찍고 물도 없는 사막 같은 땅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밤하늘 맨눈으로 달을 보고 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상상은 현실과 무관한 우리의 감정인 것이다. 현실과 감정의 세계는 또 별개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늘 죄를 짓고 그것을 참회하고 회개하면서 살아간다. 가상의 세계가 우리가 만든 또 하나의 세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의 세상은 늘 현실이 되어 오곤 했다. 가상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사랑하고 교감하고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서로를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것은 없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나를 그 미움의 세계에 가두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상상으로 살인한다고 가정해보라 그 두려움과 떨림,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살인 드라마에서는 마귀나 사탄의 속삭임처럼 한 번이 어렵지, 한 번이 두 번 되고 계속될수록 그 묘미를 잊을 수 없다고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사탄이 꼬이듯이 달콤한 꿀을 바른말을 내뱉듯이 대사가 이어진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이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도 늘 도처에 있다. 고통은 생각에 따라 환희와 행복이 될 수 있다.
나는 왜 가난할까? 나의 부모는 왜 부자가 아닐까? 죽음 또한 무료가 아니다. 죽음에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 장례를 지낼 장지는 주택 택지보다 비싸다. 그리고 화장하는 데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 내가 죽고 내 자식들이 내 장례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보지 못하겠다. 그래서 얼마간 돈을 준비하고 남겨 놓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죽음만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어제 아이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 전화가 왔다. 2주 전에 남편이 수술받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미 장례는 치렀고 묘목장을 지냈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 같았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없이 계속 소식을 전한다. 이젠 주변에 가까운 지인들의 부음이 심심찮게 들려 온다. 분명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기도 하다. 내가 떠나고 나면 힘들게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생각은 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내가 살아 있다는 표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삶의 징표로 우리가 감내하고 교감해야 하는 우리의 이웃과도 같은 것이다. 행복한 순간은 아주 적고 짧다. 영화 아바타처럼 미래에는 돌아가신 분들과 가상의 세계에서 교감하는 세상을 꿈꾼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될 수도 있고 과거가 될 수도 있는 가상현실을 꿈꾼다. 간밤에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어라는 말을 어릴 때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부분 좋지 않은 상황이 닥치고는 했다. 미리 와서 알려주려고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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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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