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
[기고]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
  • 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23.02.14 22:2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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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괴로움(dukkha)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당신의 가르침(사성제)을 설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괴로움(dukkha)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다.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겪어야 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부처님이 수행법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 쉬고,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쉰다.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길게 숨을 들이 쉰다’고 바르게 알고,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짧게 숨을 들이 쉰다’고 바르게 안다.”라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관찰하라고 설한다. 관찰의 대상인 호흡이나 느낌이나 일으킨 마음은 지금 여기에서 관찰해야 할 생명현상이지 믿음을 필요로 하는 단어와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괴로움(dukkha)을 믿음의 영역으로 떨어뜨리는 설명이 있다. 《초기불교 이해》 95~96쪽에서 각묵 스님은 “평온한 것이나 모든 형성된 것은 생멸의 현상에 지배되기 때문에 괴로움일 수 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오래전 각묵 스님은 <초기불전 연구원> 카페의 문답 게시판에서 아래와 같이 답글을 단 적이 있다.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즉 pain 혹은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이나 남방 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dukkha(苦)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苦라는 것입니다.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그리고 감각 접촉이나 집중, 마음챙김, 정진, 자애, 연민 등등의 여러 심리 현상도 그 자체는 고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에서 고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사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각묵 스님의 견해가 최근 초기불교TV 동영상을 보니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동영상에서 각묵 스님은 구체적으로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행고의 설명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는 믿음의 영역으로 떨어뜨린다. 부처님은 괴로움 경(s45:165)등에서 괴로움(dukkha)을 세 가지로 설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 있다. 어떠한 것이 세 가지인가? 고통의 괴로움(苦苦,Dukkhadukkhatā), 형성의 괴로움(行苦,saṅkhāradukkhatā), 변화의 괴로움(壞苦,vipariṇāmadukkhatā)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 가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가지 괴로움을 잘 알고 두루 알고 소멸시키기 위해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 각묵 스님이 오해하는 부분은 행고(行苦)의 설명이다.

《청정도론》 ⅩⅥ:35에서 세 가지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 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에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壞苦)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saṅkhāra)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된 괴로움(行苦)이라 한다.”

각묵 스님이 “모든 형성된 것은 생멸의 현상에 지배되기 때문에 괴로움일 수 밖에 없다.”고 행고를 이해하는 것이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경에서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순서로 나타나기에 행고(行苦)가 고고(苦苦)와 괴고(壞苦)보다 더 넓은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고, 《청정도론》에서는 근심(soka), 육체적 고통(dukkha), 정신적 고통(domanassa)을 고고(苦苦)라고 설명하고, 늙음(jarā), 탄식(parideva), 절망(upāyāsa)을 행고(行苦)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나 유정물에게 괴로움(dukkha)이 있다는 설명을 하였고, 무생물에 괴로움(dukkha)이 있다는 설명을 한 적이 없다. ‘로히땃사 경’(A4:45)에서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을 천명하노라.”(Api cāhaṃ, āvuso, imasmiṃyeva byāmamatte kaḷevare sasaññimhi samanake lokañca paññāpemi lokasamudayañca lokanirodhañca lokanirodhagāminiñca paṭipadanti)라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인식과 마음을 가진(sasaññimhi samanake) 유정물에게 괴로움이 있는 것이지 인식이 없고 마음이 없는 무정물에게는 괴로움은 없고 갈애도 없다.

주석서에서도 “세상이란 괴로움의 진리이며, 세상의 일어남이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며, 세상의 소멸이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며, 세상의 소멸로 이르는 도 닦음이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붓다는 도반이여, 나는 이러한 4가지 진리를 풀이나 나무토막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四大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Lokanti dukkhasaccaṃ. Lokasamudayanti samudayasaccaṃ. Lokanirodhanti nirodha saccaṃ. Paṭipadanti maggasaccaṃ. Iti “nāhaṃ, āvuso, imāni cattāri saccāni tinakaṭṭhādisu paññapemi, imasmiṃ pana catumahābhûtike kāyasmiṃyeva paññapemī)(AA.3.88-89)고 설명한다. 부처님은 정확하게 풀(tina)이나 나무토막(kaṭṭha) 같은 무정물에게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갈애가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외도의 주장 경>(A3:61)에서도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천명한다.”(Vediyamānassa kho panāhaṁ, bhikkhave, idaṁ dukkhanti paññapemi, ayaṁ dukkhasamudayoti paññapemi, ayaṁ dukkhanirodhoti paññapem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ññapemi)

이렇듯이 부처님은 목탁 같은 무정물이 고통이라고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오해할까봐 여러 곳에서 인식과 마음을 가진(sasaññimhi samanake),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Vediyamānassa)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말하고 있고, 풀(tina)이나 나무토막(kaṭṭha) 같은 무정물에게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각묵 스님은 《청정도론》의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을 잘못 해석하여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목탁이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갈애를 일으켜야한다. 목탁이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갈애를 일으킬 수 있는가?

마치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sabbe savkhara dukkha)라는 말을 한문으로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번역해 놓고 “삼라만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 일체(一切)는 오온(pañcakkhandha)을 의미한다고 주석서에서 한결같이 설명한다. 경전에서나 주석서에서나 무생물에게 괴로움(dukkha)이 있다는 표현은 한 번도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행고(行苦)를 설명해 놓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다시 "부처님의 깊은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니 그냥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믿으라는 태도는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설마, 각묵 스님이 실수 했을려고?' 하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목탁도 괴로움이다.”라는 비불교적인 주장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각묵 스님은 <니까야?를 번역하여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분이고 앞으로도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분이기에, 이러한 주장은 서둘러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 아래 영상의 1:10분경에 행고의 설명에서. 각묵 스님은"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주장을 오랫동안 해 온 것 같은데.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nhwfBbtl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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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15:20:32
삑사리.

큰스님 2023-02-15 17:59:53
큰스님의 올바르고 명쾌하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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