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1. 우리가 놓친 순간들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1. 우리가 놓친 순간들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2.20 12: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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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지난날을 생각하다
순간을 놓치고
오늘을 놓치고
허망하게 흘러간 많은 시간

자고 나면 깨어나면 없어진 꿈처럼
따스한 남향 햇살 아래 녹아 버린 눈처럼
이 순간에도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순간처럼
마음도 기억도 그랬으면 좋겠어.
때론 기억을 잊는 것조차 행복인 것처럼.







#작가의 변
아들이 학교 카운셀러랑 월요일에 상담이 있었는데 아들이 잘못한 것같이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혹시 너 자폐증 아니냐”고 하더란다. 2살에 이민을 와서 유아원 유치원 엘레멘터리(초등학교) 세컨더리(중고등학교) 수없이 많은 학교생활을 거쳐 30살이 되도록 교육받은 학생한테 자폐라고 말한 건 분명 차별이라 생각된다.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상담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다. 물론 한국처럼 치맛바람 날리는 학부형들이나 촌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촌지가 있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 학부형이 많은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를 선생님에게 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들과 딸이 같은 클래스였는데, 딸이 아들 신발을 챙기고 옷, 가방을 챙기고 하니까 선생님이 둘을 클래스를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아들을 홀딱 벗겨서 아내가 선생님에게 컴플레인한 적이 있는데, 딸이 아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벗긴 거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학급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이름이 ‘릴리’였다.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얼굴 생김이나 눈을 뜨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릴리’하고 말을 붙이고 “오늘 기분 좋아”하면 아는 채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 부모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상담에서 학교 상담사였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런 얘길 들었다면서 “정말 나 정상이 아닌 거야”하며 걱정한다. “나 정말 자폐아 그거야” 그러면서. 그래서 “자폐는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적으로 공부했겠냐”고 말하면서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냐”고, “따져야지. 네가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긴 해도 자폐아라는 말은 아주 너를 무시해서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슬러 선생이랑 상담하고 학과장하고 상담했는데 교수와 학과 학생 리더는 학교에 학과장이나 카운셀러보다 더 높은 곳에 단체로 얘기해서 오히려 더 학과에서 따돌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시험이 있었는데, 날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도 긴장한다. 아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와 “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해서 네가 몇 년을 준비해서 들어간 학과인데 그냥 이대로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학교엔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규칙이 2페이지나 있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한 학생을 따돌리고 공공연하게 “넌 떨어질 거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부모로서 답답하다.

학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교육부나 정부 기관의 담당 부서가 어딘지 알고 싶다. 언론에도 알리고 싶다. 아들은 “그냥 학교를 그만 둔다”고만 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이 배우고 돈이 여유가 없으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되는 거”라고. 사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많은 걸 다해주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못 해도 남들처럼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부자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세상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다. 나의 부모도 그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아예 야학도 다니시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전과와 수련장으로 가정교사 삼아 공부했다. 누군가가 산수도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거나 어떻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도와주고 부모가 도와주는 젊고 이쁘고 화장품과 고급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다른 젊은 엄마, 멋진 아빠들이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풍에 김밥을 싸와서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나는 소풍 때 늘 누나가 부모님 대신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가족을 보면 부러웠다.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니 나중에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놀이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면 나도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과 해야지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고 함께 하길 싫어하니까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 하고자 노력했다. 때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군대에서 후임들 때리던 손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어릴 때 맞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을 한다. 난 아버지한테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종아리를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오줌을 싸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는 피아노 레슨, 수영 레슨, 태권도 레슨 등등 그리고 딸은 영재학교격인 IB중학교를 다녔다. 시예산을 많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승마, 보트타기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도 많이 했다. 때로는 많이 부담이 가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다른 부모들처럼 넉넉히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적도 있다. 운동에는 소질이 뭐가 있나 싶어서 농구교실, 연극교실 등 다방면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소중했던 소망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난해서 부자처럼 지원해 주지 못한 부모만 남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 학교서 픽업하고 레슨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자 바쁜 아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민을 오면서 많은 이민자가 꿈을 꾸듯이 나는 비록 힘들게 이민자로 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주류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들이 경찰이 됐데, 누구네 아들이 사관학교를 나와서 영관장교래, 누구네 딸이 대학교 연구원이라더라, 누구네 딸이 스페셜 닥터가 됐데, 누구 아들은 미국에 오일회사 매니저라 돈을 많이 번다더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 아이들이 잘 안됐다면 속이 쓰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왜 그럴까 하다가도 누구네 아들은 툭하면 징역을 산다더라는 소식보다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둘과 밥을 한 밥상에서 먹고, 엄마와 딸(누나)는 바닥에서 먹었다. 뭐 대단한 양반집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 7시면 아침을 드셔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아침 7시에 먹게 밥을 하려면 늦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한다. 여름엔 4시쯤에 일어나 밭에 가 일하다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밥을 했다. 큰 밥상을 펼쳐서 함께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꾸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수저를 뜨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자정에 지내던 제사도 저녁 8시쯤 지내게 되었고 호롱불을 쓰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생기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엔 집도 새로 지어서 수세식 변기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세식 변기를 불편해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셨을 때 “더우실 테니 욕실에서 샤워를 먼저 하시라”고 했더니, “날 더럽다고 했다”고 서운해하셨다.

컴퓨터도 없고, 손전화기는커녕, 다이얼 전화기도 없던 시골 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고 모여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 동무들이 떠오른다.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어린 나이에 먼저 갔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도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해야 산다. 하지만 따돌리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 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조승희가 대학교에서 총을 난사해서 수없이 많은 학생을 죽인 이유도 학교 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 서로를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미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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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지난날을 생각하다
순간을 놓치고
오늘을 놓치고
허망하게 흘러간 많은 시간

자고 나면 깨어나면 없어진 꿈처럼
따스한 남향 햇살 아래 녹아 버린 눈처럼
이 순간에도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순간처럼
마음도 기억도 그랬으면 좋겠어.
때론 기억을 잊는 것조차 행복인 것처럼.





늘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지난날을 생각하다
순간을 놓치고
오늘을 놓치고
허망하게 흘러간 많은 시간

자고 나면 깨어나면 없어진 꿈처럼
따스한 남향 햇살 아래 녹아 버린 눈처럼
이 순간에도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순간처럼
마음도 기억도 그랬으면 좋겠어.
때론 기억을 잊는 것조차 행복인 것처럼.







#작가의 변
아들이 학교 카운셀러랑 월요일에 상담이 있었는데 아들이 잘못한 것같이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혹시 너 자폐증 아니냐”고 하더란다. 2살에 이민을 와서 유아원 유치원 엘레멘터리(초등학교) 세컨더리(중고등학교) 수없이 많은 학교생활을 거쳐 30살이 되도록 교육받은 학생한테 자폐라고 말한 건 분명 차별이라 생각된다.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상담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다. 물론 한국처럼 치맛바람 날리는 학부형들이나 촌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촌지가 있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 학부형이 많은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를 선생님에게 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들과 딸이 같은 클래스였는데, 딸이 아들 신발을 챙기고 옷, 가방을 챙기고 하니까 선생님이 둘을 클래스를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아들을 홀딱 벗겨서 아내가 선생님에게 컴플레인한 적이 있는데, 딸이 아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벗긴 거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학급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이름이 ‘릴리’였다.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얼굴 생김이나 눈을 뜨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릴리’하고 말을 붙이고 “오늘 기분 좋아”하면 아는 채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 부모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상담에서 학교 상담사였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런 얘길 들었다면서 “정말 나 정상이 아닌 거야”하며 걱정한다. “나 정말 자폐아 그거야” 그러면서. 그래서 “자폐는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적으로 공부했겠냐”고 말하면서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냐”고, “따져야지. 네가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긴 해도 자폐아라는 말은 아주 너를 무시해서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슬러 선생이랑 상담하고 학과장하고 상담했는데 교수와 학과 학생 리더는 학교에 학과장이나 카운셀러보다 더 높은 곳에 단체로 얘기해서 오히려 더 학과에서 따돌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시험이 있었는데, 날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도 긴장한다. 아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와 “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해서 네가 몇 년을 준비해서 들어간 학과인데 그냥 이대로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학교엔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규칙이 2페이지나 있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한 학생을 따돌리고 공공연하게 “넌 떨어질 거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부모로서 답답하다.

학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교육부나 정부 기관의 담당 부서가 어딘지 알고 싶다. 언론에도 알리고 싶다. 아들은 “그냥 학교를 그만 둔다”고만 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이 배우고 돈이 여유가 없으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되는 거”라고. 사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많은 걸 다해주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못 해도 남들처럼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부자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세상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다. 나의 부모도 그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아예 야학도 다니시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전과와 수련장으로 가정교사 삼아 공부했다. 누군가가 산수도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거나 어떻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도와주고 부모가 도와주는 젊고 이쁘고 화장품과 고급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다른 젊은 엄마, 멋진 아빠들이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풍에 김밥을 싸와서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나는 소풍 때 늘 누나가 부모님 대신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가족을 보면 부러웠다.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니 나중에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놀이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면 나도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과 해야지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고 함께 하길 싫어하니까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 하고자 노력했다. 때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군대에서 후임들 때리던 손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어릴 때 맞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을 한다. 난 아버지한테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종아리를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오줌을 싸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는 피아노 레슨, 수영 레슨, 태권도 레슨 등등 그리고 딸은 영재학교격인 IB중학교를 다녔다. 시예산을 많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승마, 보트타기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도 많이 했다. 때로는 많이 부담이 가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다른 부모들처럼 넉넉히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적도 있다. 운동에는 소질이 뭐가 있나 싶어서 농구교실, 연극교실 등 다방면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소중했던 소망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난해서 부자처럼 지원해 주지 못한 부모만 남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 학교서 픽업하고 레슨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자 바쁜 아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민을 오면서 많은 이민자가 꿈을 꾸듯이 나는 비록 힘들게 이민자로 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주류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들이 경찰이 됐데, 누구네 아들이 사관학교를 나와서 영관장교래, 누구네 딸이 대학교 연구원이라더라, 누구네 딸이 스페셜 닥터가 됐데, 누구 아들은 미국에 오일회사 매니저라 돈을 많이 번다더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 아이들이 잘 안됐다면 속이 쓰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왜 그럴까 하다가도 누구네 아들은 툭하면 징역을 산다더라는 소식보다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둘과 밥을 한 밥상에서 먹고, 엄마와 딸(누나)는 바닥에서 먹었다. 뭐 대단한 양반집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 7시면 아침을 드셔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아침 7시에 먹게 밥을 하려면 늦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한다. 여름엔 4시쯤에 일어나 밭에 가 일하다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밥을 했다. 큰 밥상을 펼쳐서 함께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꾸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수저를 뜨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자정에 지내던 제사도 저녁 8시쯤 지내게 되었고 호롱불을 쓰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생기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엔 집도 새로 지어서 수세식 변기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세식 변기를 불편해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셨을 때 “더우실 테니 욕실에서 샤워를 먼저 하시라”고 했더니, “날 더럽다고 했다”고 서운해하셨다.

컴퓨터도 없고, 손전화기는커녕, 다이얼 전화기도 없던 시골 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고 모여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 동무들이 떠오른다.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어린 나이에 먼저 갔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도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해야 산다. 하지만 따돌리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 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조승희가 대학교에서 총을 난사해서 수없이 많은 학생을 죽인 이유도 학교 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 서로를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미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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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아들이 학교 카운셀러랑 월요일에 상담이 있었는데 아들이 잘못한 것같이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혹시 너 자폐증 아니냐”고 하더란다. 2살에 이민을 와서 유아원 유치원 엘레멘터리(초등학교) 세컨더리(중고등학교) 수없이 많은 학교생활을 거쳐 30살이 되도록 교육받은 학생한테 자폐라고 말한 건 분명 차별이라 생각된다.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상담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다. 물론 한국처럼 치맛바람 날리는 학부형들이나 촌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촌지가 있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 학부형이 많은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를 선생님에게 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들과 딸이 같은 클래스였는데, 딸이 아들 신발을 챙기고 옷, 가방을 챙기고 하니까 선생님이 둘을 클래스를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아들을 홀딱 벗겨서 아내가 선생님에게 컴플레인한 적이 있는데, 딸이 아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벗긴 거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학급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이름이 ‘릴리’였다.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얼굴 생김이나 눈을 뜨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릴리’하고 말을 붙이고 “오늘 기분 좋아”하면 아는 채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 부모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상담에서 학교 상담사였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런 얘길 들었다면서 “정말 나 정상이 아닌 거야”하며 걱정한다. “나 정말 자폐아 그거야” 그러면서. 그래서 “자폐는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적으로 공부했겠냐”고 말하면서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냐”고, “따져야지. 네가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긴 해도 자폐아라는 말은 아주 너를 무시해서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슬러 선생이랑 상담하고 학과장하고 상담했는데 교수와 학과 학생 리더는 학교에 학과장이나 카운셀러보다 더 높은 곳에 단체로 얘기해서 오히려 더 학과에서 따돌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시험이 있었는데, 날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도 긴장한다. 아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와 “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해서 네가 몇 년을 준비해서 들어간 학과인데 그냥 이대로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학교엔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규칙이 2페이지나 있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한 학생을 따돌리고 공공연하게 “넌 떨어질 거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부모로서 답답하다.

학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교육부나 정부 기관의 담당 부서가 어딘지 알고 싶다. 언론에도 알리고 싶다. 아들은 “그냥 학교를 그만 둔다”고만 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이 배우고 돈이 여유가 없으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되는 거”라고. 사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많은 걸 다해주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못 해도 남들처럼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부자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세상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다. 나의 부모도 그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아예 야학도 다니시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전과와 수련장으로 가정교사 삼아 공부했다. 누군가가 산수도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거나 어떻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도와주고 부모가 도와주는 젊고 이쁘고 화장품과 고급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다른 젊은 엄마, 멋진 아빠들이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풍에 김밥을 싸와서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나는 소풍 때 늘 누나가 부모님 대신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가족을 보면 부러웠다.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니 나중에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놀이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면 나도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과 해야지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고 함께 하길 싫어하니까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 하고자 노력했다. 때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군대에서 후임들 때리던 손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어릴 때 맞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을 한다. 난 아버지한테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종아리를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오줌을 싸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는 피아노 레슨, 수영 레슨, 태권도 레슨 등등 그리고 딸은 영재학교격인 IB중학교를 다녔다. 시예산을 많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승마, 보트타기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도 많이 했다. 때로는 많이 부담이 가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다른 부모들처럼 넉넉히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적도 있다. 운동에는 소질이 뭐가 있나 싶어서 농구교실, 연극교실 등 다방면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소중했던 소망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난해서 부자처럼 지원해 주지 못한 부모만 남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 학교서 픽업하고 레슨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자 바쁜 아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민을 오면서 많은 이민자가 꿈을 꾸듯이 나는 비록 힘들게 이민자로 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주류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들이 경찰이 됐데, 누구네 아들이 사관학교를 나와서 영관장교래, 누구네 딸이 대학교 연구원이라더라, 누구네 딸이 스페셜 닥터가 됐데, 누구 아들은 미국에 오일회사 매니저라 돈을 많이 번다더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 아이들이 잘 안됐다면 속이 쓰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왜 그럴까 하다가도 누구네 아들은 툭하면 징역을 산다더라는 소식보다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늘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지난날을 생각하다
순간을 놓치고
오늘을 놓치고
허망하게 흘러간 많은 시간

자고 나면 깨어나면 없어진 꿈처럼
따스한 남향 햇살 아래 녹아 버린 눈처럼
이 순간에도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순간처럼
마음도 기억도 그랬으면 좋겠어.
때론 기억을 잊는 것조차 행복인 것처럼.







#작가의 변
아들이 학교 카운셀러랑 월요일에 상담이 있었는데 아들이 잘못한 것같이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혹시 너 자폐증 아니냐”고 하더란다. 2살에 이민을 와서 유아원 유치원 엘레멘터리(초등학교) 세컨더리(중고등학교) 수없이 많은 학교생활을 거쳐 30살이 되도록 교육받은 학생한테 자폐라고 말한 건 분명 차별이라 생각된다.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상담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다. 물론 한국처럼 치맛바람 날리는 학부형들이나 촌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촌지가 있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 학부형이 많은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를 선생님에게 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들과 딸이 같은 클래스였는데, 딸이 아들 신발을 챙기고 옷, 가방을 챙기고 하니까 선생님이 둘을 클래스를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아들을 홀딱 벗겨서 아내가 선생님에게 컴플레인한 적이 있는데, 딸이 아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벗긴 거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학급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이름이 ‘릴리’였다.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얼굴 생김이나 눈을 뜨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릴리’하고 말을 붙이고 “오늘 기분 좋아”하면 아는 채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 부모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상담에서 학교 상담사였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런 얘길 들었다면서 “정말 나 정상이 아닌 거야”하며 걱정한다. “나 정말 자폐아 그거야” 그러면서. 그래서 “자폐는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적으로 공부했겠냐”고 말하면서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냐”고, “따져야지. 네가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긴 해도 자폐아라는 말은 아주 너를 무시해서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슬러 선생이랑 상담하고 학과장하고 상담했는데 교수와 학과 학생 리더는 학교에 학과장이나 카운셀러보다 더 높은 곳에 단체로 얘기해서 오히려 더 학과에서 따돌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시험이 있었는데, 날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도 긴장한다. 아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와 “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해서 네가 몇 년을 준비해서 들어간 학과인데 그냥 이대로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학교엔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규칙이 2페이지나 있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한 학생을 따돌리고 공공연하게 “넌 떨어질 거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부모로서 답답하다.

학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교육부나 정부 기관의 담당 부서가 어딘지 알고 싶다. 언론에도 알리고 싶다. 아들은 “그냥 학교를 그만 둔다”고만 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이 배우고 돈이 여유가 없으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되는 거”라고. 사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많은 걸 다해주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못 해도 남들처럼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부자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세상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다. 나의 부모도 그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아예 야학도 다니시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전과와 수련장으로 가정교사 삼아 공부했다. 누군가가 산수도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거나 어떻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도와주고 부모가 도와주는 젊고 이쁘고 화장품과 고급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다른 젊은 엄마, 멋진 아빠들이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풍에 김밥을 싸와서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나는 소풍 때 늘 누나가 부모님 대신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가족을 보면 부러웠다.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니 나중에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놀이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면 나도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과 해야지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고 함께 하길 싫어하니까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 하고자 노력했다. 때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군대에서 후임들 때리던 손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어릴 때 맞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을 한다. 난 아버지한테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종아리를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오줌을 싸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는 피아노 레슨, 수영 레슨, 태권도 레슨 등등 그리고 딸은 영재학교격인 IB중학교를 다녔다. 시예산을 많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승마, 보트타기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도 많이 했다. 때로는 많이 부담이 가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다른 부모들처럼 넉넉히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적도 있다. 운동에는 소질이 뭐가 있나 싶어서 농구교실, 연극교실 등 다방면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소중했던 소망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난해서 부자처럼 지원해 주지 못한 부모만 남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 학교서 픽업하고 레슨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자 바쁜 아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민을 오면서 많은 이민자가 꿈을 꾸듯이 나는 비록 힘들게 이민자로 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주류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들이 경찰이 됐데, 누구네 아들이 사관학교를 나와서 영관장교래, 누구네 딸이 대학교 연구원이라더라, 누구네 딸이 스페셜 닥터가 됐데, 누구 아들은 미국에 오일회사 매니저라 돈을 많이 번다더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 아이들이 잘 안됐다면 속이 쓰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왜 그럴까 하다가도 누구네 아들은 툭하면 징역을 산다더라는 소식보다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둘과 밥을 한 밥상에서 먹고, 엄마와 딸(누나)는 바닥에서 먹었다. 뭐 대단한 양반집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 7시면 아침을 드셔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아침 7시에 먹게 밥을 하려면 늦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한다. 여름엔 4시쯤에 일어나 밭에 가 일하다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밥을 했다. 큰 밥상을 펼쳐서 함께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꾸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수저를 뜨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자정에 지내던 제사도 저녁 8시쯤 지내게 되었고 호롱불을 쓰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생기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엔 집도 새로 지어서 수세식 변기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세식 변기를 불편해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셨을 때 “더우실 테니 욕실에서 샤워를 먼저 하시라”고 했더니, “날 더럽다고 했다”고 서운해하셨다.

컴퓨터도 없고, 손전화기는커녕, 다이얼 전화기도 없던 시골 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고 모여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 동무들이 떠오른다.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어린 나이에 먼저 갔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도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해야 산다. 하지만 따돌리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 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조승희가 대학교에서 총을 난사해서 수없이 많은 학생을 죽인 이유도 학교 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 서로를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미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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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둘과 밥을 한 밥상에서 먹고, 엄마와 딸(누나)는 바닥에서 먹었다. 뭐 대단한 양반집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 7시면 아침을 드셔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아침 7시에 먹게 밥을 하려면 늦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한다. 여름엔 4시쯤에 일어나 밭에 가 일하다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밥을 했다. 큰 밥상을 펼쳐서 함께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꾸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수저를 뜨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자정에 지내던 제사도 저녁 8시쯤 지내게 되었고 호롱불을 쓰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생기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엔 집도 새로 지어서 수세식 변기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세식 변기를 불편해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셨을 때 “더우실 테니 욕실에서 샤워를 먼저 하시라”고 했더니, “날 더럽다고 했다”고 서운해하셨다.

컴퓨터도 없고, 손전화기는커녕, 다이얼 전화기도 없던 시골 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고 모여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 동무들이 떠오른다.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어린 나이에 먼저 갔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도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해야 산다. 하지만 따돌리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 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조승희가 대학교에서 총을 난사해서 수없이 많은 학생을 죽인 이유도 학교 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 서로를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미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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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지난날을 생각하다
순간을 놓치고
오늘을 놓치고
허망하게 흘러간 많은 시간

자고 나면 깨어나면 없어진 꿈처럼
따스한 남향 햇살 아래 녹아 버린 눈처럼
이 순간에도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순간처럼
마음도 기억도 그랬으면 좋겠어.
때론 기억을 잊는 것조차 행복인 것처럼.







#작가의 변
아들이 학교 카운셀러랑 월요일에 상담이 있었는데 아들이 잘못한 것같이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혹시 너 자폐증 아니냐”고 하더란다. 2살에 이민을 와서 유아원 유치원 엘레멘터리(초등학교) 세컨더리(중고등학교) 수없이 많은 학교생활을 거쳐 30살이 되도록 교육받은 학생한테 자폐라고 말한 건 분명 차별이라 생각된다.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상담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났다. 물론 한국처럼 치맛바람 날리는 학부형들이나 촌지가 있어서는 아니다. 아니 촌지가 있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 학부형이 많은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를 선생님에게 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들과 딸이 같은 클래스였는데, 딸이 아들 신발을 챙기고 옷, 가방을 챙기고 하니까 선생님이 둘을 클래스를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아들을 홀딱 벗겨서 아내가 선생님에게 컴플레인한 적이 있는데, 딸이 아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벗긴 거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학급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이름이 ‘릴리’였다.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얼굴 생김이나 눈을 뜨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릴리’하고 말을 붙이고 “오늘 기분 좋아”하면 아는 채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 부모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상담에서 학교 상담사였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런 얘길 들었다면서 “정말 나 정상이 아닌 거야”하며 걱정한다. “나 정말 자폐아 그거야” 그러면서. 그래서 “자폐는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적으로 공부했겠냐”고 말하면서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냐”고, “따져야지. 네가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긴 해도 자폐아라는 말은 아주 너를 무시해서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슬러 선생이랑 상담하고 학과장하고 상담했는데 교수와 학과 학생 리더는 학교에 학과장이나 카운셀러보다 더 높은 곳에 단체로 얘기해서 오히려 더 학과에서 따돌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시험이 있었는데, 날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도 긴장한다. 아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와 “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해서 네가 몇 년을 준비해서 들어간 학과인데 그냥 이대로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학교엔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규칙이 2페이지나 있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한 학생을 따돌리고 공공연하게 “넌 떨어질 거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부모로서 답답하다.

학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교육부나 정부 기관의 담당 부서가 어딘지 알고 싶다. 언론에도 알리고 싶다. 아들은 “그냥 학교를 그만 둔다”고만 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이 배우고 돈이 여유가 없으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되는 거”라고. 사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많은 걸 다해주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못 해도 남들처럼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부자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세상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다. 나의 부모도 그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아예 야학도 다니시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전과와 수련장으로 가정교사 삼아 공부했다. 누군가가 산수도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거나 어떻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도와주고 부모가 도와주는 젊고 이쁘고 화장품과 고급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다른 젊은 엄마, 멋진 아빠들이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풍에 김밥을 싸와서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나는 소풍 때 늘 누나가 부모님 대신 따라왔다. 하지만 다른 가족을 보면 부러웠다. 운동회에서 함께 손잡고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니 나중에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놀이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면 나도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과 해야지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고 함께 하길 싫어하니까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 하고자 노력했다. 때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군대에서 후임들 때리던 손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어릴 때 맞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을 한다. 난 아버지한테 한 대도 맞지 않고 자랐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종아리를 맞는 일이 종종 있었고 오줌을 싸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는 피아노 레슨, 수영 레슨, 태권도 레슨 등등 그리고 딸은 영재학교격인 IB중학교를 다녔다. 시예산을 많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승마, 보트타기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도 많이 했다. 때로는 많이 부담이 가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다른 부모들처럼 넉넉히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적도 있다. 운동에는 소질이 뭐가 있나 싶어서 농구교실, 연극교실 등 다방면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소중했던 소망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난해서 부자처럼 지원해 주지 못한 부모만 남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 학교서 픽업하고 레슨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자 바쁜 아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민을 오면서 많은 이민자가 꿈을 꾸듯이 나는 비록 힘들게 이민자로 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주류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기를 꿈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들이 경찰이 됐데, 누구네 아들이 사관학교를 나와서 영관장교래, 누구네 딸이 대학교 연구원이라더라, 누구네 딸이 스페셜 닥터가 됐데, 누구 아들은 미국에 오일회사 매니저라 돈을 많이 번다더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 아이들이 잘 안됐다면 속이 쓰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왜 그럴까 하다가도 누구네 아들은 툭하면 징역을 산다더라는 소식보다는 건강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 둘과 밥을 한 밥상에서 먹고, 엄마와 딸(누나)는 바닥에서 먹었다. 뭐 대단한 양반집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 7시면 아침을 드셔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아침 7시에 먹게 밥을 하려면 늦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한다. 여름엔 4시쯤에 일어나 밭에 가 일하다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밥을 했다. 큰 밥상을 펼쳐서 함께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꾸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수저를 뜨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자정에 지내던 제사도 저녁 8시쯤 지내게 되었고 호롱불을 쓰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가 생기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엔 집도 새로 지어서 수세식 변기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세식 변기를 불편해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올라오셨을 때 “더우실 테니 욕실에서 샤워를 먼저 하시라”고 했더니, “날 더럽다고 했다”고 서운해하셨다.

컴퓨터도 없고, 손전화기는커녕, 다이얼 전화기도 없던 시골 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고 모여서 공부하던 어린 시절 동무들이 떠오른다. 한 명은 아주 오래전에 어린 나이에 먼저 갔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도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해야 산다. 하지만 따돌리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 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조승희가 대학교에서 총을 난사해서 수없이 많은 학생을 죽인 이유도 학교 따돌림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 서로를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미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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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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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씨 2023-02-21 02:51:08
유튜브 일반티비. 글고 사회에서. 북파공작원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ㅅ습니다. 오늘도
유튜브에서 봐아ㅅ습니다
대한민국 과거현재 미래도
위의. 군인들이. 얪으면 가능했는지요
너무. 마음이ㅊ울적합니다. 이영춘님과. ㅎ가수님의. 마음울적하여 듣습니다

우선 나중에 북파공작원. 위령제. 천도재 할것입니다
글고 정부와 구카는 위 분들의. 명예. 치료. 보상등의. 법적지위를. 주셔야 합니다. 뭐가 두려운지요. 정부는?
국가를 위해. 싸운분을. 저기학ㅗ. 저시기하면누가 한국을 위해. 희생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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