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2. 부모님 영가 전에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2. 부모님 영가 전에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2.28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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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시절엔 마냥 울타리 돼 주실 듯하던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마음은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던 아버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열 달 어머니 태중에서 호수인 양 뒤집고 발로 차고 무엇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는 손님을 맞이하듯 인연을 기다리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뒤집는 것도 기는 것도 걷기 전에 아장아장 걸음도
넘어져서 무릎 깨지고 아파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 쓰던 수없이 많은 나날

수건을 두르고 불 때서 연기 마시면 날마다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
지게 짐에 다리는 퉁퉁 붓고 등은 굽어서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던 아버지

밭이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비 오듯 땀을 흘리던 어머니나
새벽에 삽 들고 나서서 논에 피 솎아 내고 물을 대고 물을 빼던 개구리 울던 시골

툇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은 동네 장례 집 꽃상여 타고 요령을 흔들며 슬피 부르던 장송곡
생신날에도 동네 사람들 모여 밥을 먹듯이 장례 날에도 동네잔치처럼 국밥을 먹고

작은할아버지 상여 떠나던 날 기억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픈 법
외국에서 소식 듣고 슬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장례 치르고 삼우제

슬픔이 깊으면 눈물도 안 난 다더니 곡소리도 안나 오던 아버지 떠난 날 삼베 상복 입고
건 쓰고 가족들 곡소리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슬피 울던 날도 불효한 생각에 흘린 눈물

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불쑥불쑥 올챙이 얼굴 내밀듯 모낸 논에 개구리 개굴개굴 울듯
이국땅 하늘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어 슬픔을 채웠네

오면 가고 가면 또 온다는 진리처럼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을
마음으론 알겠지만 꽃피면 꽃핀다고 그립고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워 보고 싶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날들은 손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흙 내음 꽃 내음 거름 내음 풍기던 날들
차례 지내려 쪽 잠자면 차례 음식 만들던 어머니도 향을 깎던 아버지도 옆에 없는데

그림자 없는 그믐밤에 그림자 찾듯 꿈속에서 한 번 뵙기를 청해 봅니다
꿈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괜찮으니 머나먼 그곳은 어떠신지.

 







#작가의 변

가시거리와 도보 거리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리막길을 걷고, 가다 서서 외투를 벗기도 하고 땀도 흘리고 다리에 쥐도 나고, 뭐 그렇게 가다 서다 반복해서 정상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바로 저긴데, 왜 그리 돌아 돌아 돌길, 흙길을 걸어왔나 싶다.

그저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쉬웠을 것을. 아니면 드론이라도 타고 올랐다면 쉬웠을 것을.

천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천사도 날갯짓이 힘들어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아니면 저승사자처럼 순간 이동한다면 날개 달린 천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300만 원을 빨리 해 달라던 동생은 죽으면 한국에 조카 둘이 있는데 그 둘을 형이 맡아 달라면서 협박한다. 동생도 몇 년 전에 뇌암으로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몇 년 전에 뇌경색으로 1년 이상을 쉬고 이번에 또 일을 못 한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카들을 캐나다에 데려다 우리가 기르면 동생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양해야 하는데 입양 절차가 까다롭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입양할 조건이 안 됐다. 지금에 와서 제수와 사별하고 조카 둘을 기르는 동생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형편이라 막무가내로 돈 해내라는 동생이 야속하다.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팔려서 할머니 산소도 이장해야 한다고 동생이 말하면서 이장 비용을 달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이역만리 떠나있어도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못 간 것도 형편이 안 되어서다. 동생이 부모님이 물려준 몇백 평 되는 천수답이자 들어가는 길이 없는 맹지 땅 동네 사람한테 무료로 농사를 지으라고 줬었는데, 그 땅을 농사짓는 사람이 300만 원이면 산다고 하니 팔아서 달라고 한다. 아무리 맹지이고 땅값이 싸도 300만 원이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다. 막상 사려고 찾아보면 그 돈 주고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던데. 집안에 우환이 끝나지 않아 걱정이 많은 아내가 부모님 산소 자리를 걱정한다. 혹시 수맥이 흘러서 동생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우리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다가 절에서 백중 때 조상을 위한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버지 뒤에서 엉덩이 쳐들고 절을 하고, 제사 지낼 때 입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의 쓸리는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이상한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상이 밴쿠버까지 제사상을 찾아 먹으러 오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49재가 끝나면 재판받고 지옥으로 가거나 천상 세계로 가거나 가축이나 미물로 환생하거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까? 조상이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괴롭히며 아프게 하거나 일을 안 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데 조상은 후손이 잘되는 것을 훼방 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나갔으면 후손들이 잘되라고 천상에 가서도 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환생을 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은 악귀가 되어서 환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 죽을 쑤면서 홍골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외지로 나가 살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외지를 떠돌고 서울에서 단칸방과 독서실을 전전하다 이민을 와서 보니 이민한 밴쿠버에서도 돈이 있던가, 한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주 한국에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많이 부럽다. 눈에 보이면 가까워 보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불경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넓고도 넓은 세상, 그래도 달을 보면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에 고향 땅에 있는 집(지금은 동생 집)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땅, 그리고 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 산소를 늘 생각한다. 생각과 마음은 늘 고향 땅에 있다. 고향의 친구들과 제천 상고 함께 다닌 학교 동창들도 보고 싶다. 동창회 공지를 늘 밴드로 보면서 마음만 함께하고 사진으로 만족한다.

가시거리엔 밴쿠버 거리가 늘 있지만, 마음엔 조국에 있는 친구와 고향이 있는데 그 거리는 이역만리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도 보이니 걸어서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듯이 고향 땅의 친구들과 동창들은 인터넷 가시거리에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도보 거리는 아니다.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함께 일한 많은 직장 동료가 있지만 어려울 때 서로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은퇴하면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고향 땅에 토굴을 파고 홀로 살려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다. 왜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녀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도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것이다. 수입 면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에서도 은퇴하고 은퇴 연금으로 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 살면 은퇴 연금을 반 정도는 받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가시거리를 넓혀 멀리 보고 있지만 현실은 도보 거리에서 잰걸음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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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시절엔 마냥 울타리 돼 주실 듯하던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마음은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던 아버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열 달 어머니 태중에서 호수인 양 뒤집고 발로 차고 무엇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는 손님을 맞이하듯 인연을 기다리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뒤집는 것도 기는 것도 걷기 전에 아장아장 걸음도
넘어져서 무릎 깨지고 아파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 쓰던 수없이 많은 나날

수건을 두르고 불 때서 연기 마시면 날마다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
지게 짐에 다리는 퉁퉁 붓고 등은 굽어서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던 아버지

밭이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비 오듯 땀을 흘리던 어머니나
새벽에 삽 들고 나서서 논에 피 솎아 내고 물을 대고 물을 빼던 개구리 울던 시골

툇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은 동네 장례 집 꽃상여 타고 요령을 흔들며 슬피 부르던 장송곡
생신날에도 동네 사람들 모여 밥을 먹듯이 장례 날에도 동네잔치처럼 국밥을 먹고

작은할아버지 상여 떠나던 날 기억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픈 법
외국에서 소식 듣고 슬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장례 치르고 삼우제

슬픔이 깊으면 눈물도 안 난 다더니 곡소리도 안나 오던 아버지 떠난 날 삼베 상복 입고
건 쓰고 가족들 곡소리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슬피 울던 날도 불효한 생각에 흘린 눈물

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불쑥불쑥 올챙이 얼굴 내밀듯 모낸 논에 개구리 개굴개굴 울듯
이국땅 하늘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어 슬픔을 채웠네

오면 가고 가면 또 온다는 진리처럼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을
마음으론 알겠지만 꽃피면 꽃핀다고 그립고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워 보고 싶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날들은 손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흙 내음 꽃 내음 거름 내음 풍기던 날들
차례 지내려 쪽 잠자면 차례 음식 만들던 어머니도 향을 깎던 아버지도 옆에 없는데

그림자 없는 그믐밤에 그림자 찾듯 꿈속에서 한 번 뵙기를 청해 봅니다
꿈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괜찮으니 머나먼 그곳은 어떠신지.

 





철없는 시절엔 마냥 울타리 돼 주실 듯하던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마음은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던 아버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열 달 어머니 태중에서 호수인 양 뒤집고 발로 차고 무엇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는 손님을 맞이하듯 인연을 기다리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뒤집는 것도 기는 것도 걷기 전에 아장아장 걸음도
넘어져서 무릎 깨지고 아파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 쓰던 수없이 많은 나날

수건을 두르고 불 때서 연기 마시면 날마다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
지게 짐에 다리는 퉁퉁 붓고 등은 굽어서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던 아버지

밭이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비 오듯 땀을 흘리던 어머니나
새벽에 삽 들고 나서서 논에 피 솎아 내고 물을 대고 물을 빼던 개구리 울던 시골

툇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은 동네 장례 집 꽃상여 타고 요령을 흔들며 슬피 부르던 장송곡
생신날에도 동네 사람들 모여 밥을 먹듯이 장례 날에도 동네잔치처럼 국밥을 먹고

작은할아버지 상여 떠나던 날 기억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픈 법
외국에서 소식 듣고 슬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장례 치르고 삼우제

슬픔이 깊으면 눈물도 안 난 다더니 곡소리도 안나 오던 아버지 떠난 날 삼베 상복 입고
건 쓰고 가족들 곡소리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슬피 울던 날도 불효한 생각에 흘린 눈물

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불쑥불쑥 올챙이 얼굴 내밀듯 모낸 논에 개구리 개굴개굴 울듯
이국땅 하늘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어 슬픔을 채웠네

오면 가고 가면 또 온다는 진리처럼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을
마음으론 알겠지만 꽃피면 꽃핀다고 그립고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워 보고 싶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날들은 손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흙 내음 꽃 내음 거름 내음 풍기던 날들
차례 지내려 쪽 잠자면 차례 음식 만들던 어머니도 향을 깎던 아버지도 옆에 없는데

그림자 없는 그믐밤에 그림자 찾듯 꿈속에서 한 번 뵙기를 청해 봅니다
꿈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괜찮으니 머나먼 그곳은 어떠신지.

 







#작가의 변

가시거리와 도보 거리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리막길을 걷고, 가다 서서 외투를 벗기도 하고 땀도 흘리고 다리에 쥐도 나고, 뭐 그렇게 가다 서다 반복해서 정상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바로 저긴데, 왜 그리 돌아 돌아 돌길, 흙길을 걸어왔나 싶다.

그저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쉬웠을 것을. 아니면 드론이라도 타고 올랐다면 쉬웠을 것을.

천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천사도 날갯짓이 힘들어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아니면 저승사자처럼 순간 이동한다면 날개 달린 천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300만 원을 빨리 해 달라던 동생은 죽으면 한국에 조카 둘이 있는데 그 둘을 형이 맡아 달라면서 협박한다. 동생도 몇 년 전에 뇌암으로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몇 년 전에 뇌경색으로 1년 이상을 쉬고 이번에 또 일을 못 한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카들을 캐나다에 데려다 우리가 기르면 동생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양해야 하는데 입양 절차가 까다롭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입양할 조건이 안 됐다. 지금에 와서 제수와 사별하고 조카 둘을 기르는 동생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형편이라 막무가내로 돈 해내라는 동생이 야속하다.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팔려서 할머니 산소도 이장해야 한다고 동생이 말하면서 이장 비용을 달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이역만리 떠나있어도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못 간 것도 형편이 안 되어서다. 동생이 부모님이 물려준 몇백 평 되는 천수답이자 들어가는 길이 없는 맹지 땅 동네 사람한테 무료로 농사를 지으라고 줬었는데, 그 땅을 농사짓는 사람이 300만 원이면 산다고 하니 팔아서 달라고 한다. 아무리 맹지이고 땅값이 싸도 300만 원이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다. 막상 사려고 찾아보면 그 돈 주고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던데. 집안에 우환이 끝나지 않아 걱정이 많은 아내가 부모님 산소 자리를 걱정한다. 혹시 수맥이 흘러서 동생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우리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다가 절에서 백중 때 조상을 위한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버지 뒤에서 엉덩이 쳐들고 절을 하고, 제사 지낼 때 입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의 쓸리는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이상한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상이 밴쿠버까지 제사상을 찾아 먹으러 오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49재가 끝나면 재판받고 지옥으로 가거나 천상 세계로 가거나 가축이나 미물로 환생하거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까? 조상이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괴롭히며 아프게 하거나 일을 안 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데 조상은 후손이 잘되는 것을 훼방 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나갔으면 후손들이 잘되라고 천상에 가서도 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환생을 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은 악귀가 되어서 환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 죽을 쑤면서 홍골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외지로 나가 살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외지를 떠돌고 서울에서 단칸방과 독서실을 전전하다 이민을 와서 보니 이민한 밴쿠버에서도 돈이 있던가, 한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주 한국에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많이 부럽다. 눈에 보이면 가까워 보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불경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넓고도 넓은 세상, 그래도 달을 보면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에 고향 땅에 있는 집(지금은 동생 집)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땅, 그리고 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 산소를 늘 생각한다. 생각과 마음은 늘 고향 땅에 있다. 고향의 친구들과 제천 상고 함께 다닌 학교 동창들도 보고 싶다. 동창회 공지를 늘 밴드로 보면서 마음만 함께하고 사진으로 만족한다.

가시거리엔 밴쿠버 거리가 늘 있지만, 마음엔 조국에 있는 친구와 고향이 있는데 그 거리는 이역만리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도 보이니 걸어서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듯이 고향 땅의 친구들과 동창들은 인터넷 가시거리에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도보 거리는 아니다.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함께 일한 많은 직장 동료가 있지만 어려울 때 서로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은퇴하면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고향 땅에 토굴을 파고 홀로 살려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다. 왜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녀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도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것이다. 수입 면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에서도 은퇴하고 은퇴 연금으로 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 살면 은퇴 연금을 반 정도는 받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가시거리를 넓혀 멀리 보고 있지만 현실은 도보 거리에서 잰걸음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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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가시거리와 도보 거리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리막길을 걷고, 가다 서서 외투를 벗기도 하고 땀도 흘리고 다리에 쥐도 나고, 뭐 그렇게 가다 서다 반복해서 정상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바로 저긴데, 왜 그리 돌아 돌아 돌길, 흙길을 걸어왔나 싶다.

그저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쉬웠을 것을. 아니면 드론이라도 타고 올랐다면 쉬웠을 것을.

천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천사도 날갯짓이 힘들어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아니면 저승사자처럼 순간 이동한다면 날개 달린 천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300만 원을 빨리 해 달라던 동생은 죽으면 한국에 조카 둘이 있는데 그 둘을 형이 맡아 달라면서 협박한다. 동생도 몇 년 전에 뇌암으로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몇 년 전에 뇌경색으로 1년 이상을 쉬고 이번에 또 일을 못 한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카들을 캐나다에 데려다 우리가 기르면 동생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양해야 하는데 입양 절차가 까다롭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입양할 조건이 안 됐다. 지금에 와서 제수와 사별하고 조카 둘을 기르는 동생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형편이라 막무가내로 돈 해내라는 동생이 야속하다.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팔려서 할머니 산소도 이장해야 한다고 동생이 말하면서 이장 비용을 달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이역만리 떠나있어도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못 간 것도 형편이 안 되어서다. 동생이 부모님이 물려준 몇백 평 되는 천수답이자 들어가는 길이 없는 맹지 땅 동네 사람한테 무료로 농사를 지으라고 줬었는데, 그 땅을 농사짓는 사람이 300만 원이면 산다고 하니 팔아서 달라고 한다. 아무리 맹지이고 땅값이 싸도 300만 원이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다. 막상 사려고 찾아보면 그 돈 주고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던데. 집안에 우환이 끝나지 않아 걱정이 많은 아내가 부모님 산소 자리를 걱정한다. 혹시 수맥이 흘러서 동생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우리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다가 절에서 백중 때 조상을 위한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버지 뒤에서 엉덩이 쳐들고 절을 하고, 제사 지낼 때 입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의 쓸리는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이상한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상이 밴쿠버까지 제사상을 찾아 먹으러 오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49재가 끝나면 재판받고 지옥으로 가거나 천상 세계로 가거나 가축이나 미물로 환생하거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까? 조상이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괴롭히며 아프게 하거나 일을 안 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데 조상은 후손이 잘되는 것을 훼방 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나갔으면 후손들이 잘되라고 천상에 가서도 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환생을 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은 악귀가 되어서 환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철없는 시절엔 마냥 울타리 돼 주실 듯하던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마음은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던 아버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열 달 어머니 태중에서 호수인 양 뒤집고 발로 차고 무엇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는 손님을 맞이하듯 인연을 기다리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뒤집는 것도 기는 것도 걷기 전에 아장아장 걸음도
넘어져서 무릎 깨지고 아파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 쓰던 수없이 많은 나날

수건을 두르고 불 때서 연기 마시면 날마다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
지게 짐에 다리는 퉁퉁 붓고 등은 굽어서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던 아버지

밭이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비 오듯 땀을 흘리던 어머니나
새벽에 삽 들고 나서서 논에 피 솎아 내고 물을 대고 물을 빼던 개구리 울던 시골

툇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은 동네 장례 집 꽃상여 타고 요령을 흔들며 슬피 부르던 장송곡
생신날에도 동네 사람들 모여 밥을 먹듯이 장례 날에도 동네잔치처럼 국밥을 먹고

작은할아버지 상여 떠나던 날 기억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픈 법
외국에서 소식 듣고 슬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장례 치르고 삼우제

슬픔이 깊으면 눈물도 안 난 다더니 곡소리도 안나 오던 아버지 떠난 날 삼베 상복 입고
건 쓰고 가족들 곡소리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슬피 울던 날도 불효한 생각에 흘린 눈물

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불쑥불쑥 올챙이 얼굴 내밀듯 모낸 논에 개구리 개굴개굴 울듯
이국땅 하늘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어 슬픔을 채웠네

오면 가고 가면 또 온다는 진리처럼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을
마음으론 알겠지만 꽃피면 꽃핀다고 그립고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워 보고 싶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날들은 손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흙 내음 꽃 내음 거름 내음 풍기던 날들
차례 지내려 쪽 잠자면 차례 음식 만들던 어머니도 향을 깎던 아버지도 옆에 없는데

그림자 없는 그믐밤에 그림자 찾듯 꿈속에서 한 번 뵙기를 청해 봅니다
꿈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괜찮으니 머나먼 그곳은 어떠신지.

 







#작가의 변

가시거리와 도보 거리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리막길을 걷고, 가다 서서 외투를 벗기도 하고 땀도 흘리고 다리에 쥐도 나고, 뭐 그렇게 가다 서다 반복해서 정상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바로 저긴데, 왜 그리 돌아 돌아 돌길, 흙길을 걸어왔나 싶다.

그저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쉬웠을 것을. 아니면 드론이라도 타고 올랐다면 쉬웠을 것을.

천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천사도 날갯짓이 힘들어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아니면 저승사자처럼 순간 이동한다면 날개 달린 천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300만 원을 빨리 해 달라던 동생은 죽으면 한국에 조카 둘이 있는데 그 둘을 형이 맡아 달라면서 협박한다. 동생도 몇 년 전에 뇌암으로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몇 년 전에 뇌경색으로 1년 이상을 쉬고 이번에 또 일을 못 한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카들을 캐나다에 데려다 우리가 기르면 동생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양해야 하는데 입양 절차가 까다롭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입양할 조건이 안 됐다. 지금에 와서 제수와 사별하고 조카 둘을 기르는 동생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형편이라 막무가내로 돈 해내라는 동생이 야속하다.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팔려서 할머니 산소도 이장해야 한다고 동생이 말하면서 이장 비용을 달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이역만리 떠나있어도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못 간 것도 형편이 안 되어서다. 동생이 부모님이 물려준 몇백 평 되는 천수답이자 들어가는 길이 없는 맹지 땅 동네 사람한테 무료로 농사를 지으라고 줬었는데, 그 땅을 농사짓는 사람이 300만 원이면 산다고 하니 팔아서 달라고 한다. 아무리 맹지이고 땅값이 싸도 300만 원이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다. 막상 사려고 찾아보면 그 돈 주고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던데. 집안에 우환이 끝나지 않아 걱정이 많은 아내가 부모님 산소 자리를 걱정한다. 혹시 수맥이 흘러서 동생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우리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다가 절에서 백중 때 조상을 위한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버지 뒤에서 엉덩이 쳐들고 절을 하고, 제사 지낼 때 입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의 쓸리는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이상한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상이 밴쿠버까지 제사상을 찾아 먹으러 오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49재가 끝나면 재판받고 지옥으로 가거나 천상 세계로 가거나 가축이나 미물로 환생하거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까? 조상이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괴롭히며 아프게 하거나 일을 안 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데 조상은 후손이 잘되는 것을 훼방 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나갔으면 후손들이 잘되라고 천상에 가서도 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환생을 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은 악귀가 되어서 환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 죽을 쑤면서 홍골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외지로 나가 살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외지를 떠돌고 서울에서 단칸방과 독서실을 전전하다 이민을 와서 보니 이민한 밴쿠버에서도 돈이 있던가, 한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주 한국에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많이 부럽다. 눈에 보이면 가까워 보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불경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넓고도 넓은 세상, 그래도 달을 보면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에 고향 땅에 있는 집(지금은 동생 집)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땅, 그리고 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 산소를 늘 생각한다. 생각과 마음은 늘 고향 땅에 있다. 고향의 친구들과 제천 상고 함께 다닌 학교 동창들도 보고 싶다. 동창회 공지를 늘 밴드로 보면서 마음만 함께하고 사진으로 만족한다.

가시거리엔 밴쿠버 거리가 늘 있지만, 마음엔 조국에 있는 친구와 고향이 있는데 그 거리는 이역만리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도 보이니 걸어서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듯이 고향 땅의 친구들과 동창들은 인터넷 가시거리에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도보 거리는 아니다.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함께 일한 많은 직장 동료가 있지만 어려울 때 서로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은퇴하면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고향 땅에 토굴을 파고 홀로 살려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다. 왜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녀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도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것이다. 수입 면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에서도 은퇴하고 은퇴 연금으로 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 살면 은퇴 연금을 반 정도는 받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가시거리를 넓혀 멀리 보고 있지만 현실은 도보 거리에서 잰걸음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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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죽을 쑤면서 홍골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외지로 나가 살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외지를 떠돌고 서울에서 단칸방과 독서실을 전전하다 이민을 와서 보니 이민한 밴쿠버에서도 돈이 있던가, 한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주 한국에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많이 부럽다. 눈에 보이면 가까워 보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불경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넓고도 넓은 세상, 그래도 달을 보면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에 고향 땅에 있는 집(지금은 동생 집)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땅, 그리고 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 산소를 늘 생각한다. 생각과 마음은 늘 고향 땅에 있다. 고향의 친구들과 제천 상고 함께 다닌 학교 동창들도 보고 싶다. 동창회 공지를 늘 밴드로 보면서 마음만 함께하고 사진으로 만족한다.

가시거리엔 밴쿠버 거리가 늘 있지만, 마음엔 조국에 있는 친구와 고향이 있는데 그 거리는 이역만리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도 보이니 걸어서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듯이 고향 땅의 친구들과 동창들은 인터넷 가시거리에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도보 거리는 아니다.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함께 일한 많은 직장 동료가 있지만 어려울 때 서로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은퇴하면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고향 땅에 토굴을 파고 홀로 살려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다. 왜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녀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도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것이다. 수입 면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에서도 은퇴하고 은퇴 연금으로 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 살면 은퇴 연금을 반 정도는 받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가시거리를 넓혀 멀리 보고 있지만 현실은 도보 거리에서 잰걸음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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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시절엔 마냥 울타리 돼 주실 듯하던 부모님이 떠나고 나니 마음은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던 아버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열 달 어머니 태중에서 호수인 양 뒤집고 발로 차고 무엇을 해도
어머니 아버지는 손님을 맞이하듯 인연을 기다리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뒤집는 것도 기는 것도 걷기 전에 아장아장 걸음도
넘어져서 무릎 깨지고 아파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 쓰던 수없이 많은 나날

수건을 두르고 불 때서 연기 마시면 날마다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
지게 짐에 다리는 퉁퉁 붓고 등은 굽어서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던 아버지

밭이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비 오듯 땀을 흘리던 어머니나
새벽에 삽 들고 나서서 논에 피 솎아 내고 물을 대고 물을 빼던 개구리 울던 시골

툇마루 아래 하얀 고무신은 동네 장례 집 꽃상여 타고 요령을 흔들며 슬피 부르던 장송곡
생신날에도 동네 사람들 모여 밥을 먹듯이 장례 날에도 동네잔치처럼 국밥을 먹고

작은할아버지 상여 떠나던 날 기억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픈 법
외국에서 소식 듣고 슬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장례 치르고 삼우제

슬픔이 깊으면 눈물도 안 난 다더니 곡소리도 안나 오던 아버지 떠난 날 삼베 상복 입고
건 쓰고 가족들 곡소리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슬피 울던 날도 불효한 생각에 흘린 눈물

살다 보면 어린 시절이 불쑥불쑥 올챙이 얼굴 내밀듯 모낸 논에 개구리 개굴개굴 울듯
이국땅 하늘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어 슬픔을 채웠네

오면 가고 가면 또 온다는 진리처럼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을
마음으론 알겠지만 꽃피면 꽃핀다고 그립고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워 보고 싶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날들은 손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흙 내음 꽃 내음 거름 내음 풍기던 날들
차례 지내려 쪽 잠자면 차례 음식 만들던 어머니도 향을 깎던 아버지도 옆에 없는데

그림자 없는 그믐밤에 그림자 찾듯 꿈속에서 한 번 뵙기를 청해 봅니다
꿈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괜찮으니 머나먼 그곳은 어떠신지.

 







#작가의 변

가시거리와 도보 거리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리막길을 걷고, 가다 서서 외투를 벗기도 하고 땀도 흘리고 다리에 쥐도 나고, 뭐 그렇게 가다 서다 반복해서 정상에 서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바로 저긴데, 왜 그리 돌아 돌아 돌길, 흙길을 걸어왔나 싶다.

그저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쉬웠을 것을. 아니면 드론이라도 타고 올랐다면 쉬웠을 것을.

천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천사도 날갯짓이 힘들어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아니면 저승사자처럼 순간 이동한다면 날개 달린 천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300만 원을 빨리 해 달라던 동생은 죽으면 한국에 조카 둘이 있는데 그 둘을 형이 맡아 달라면서 협박한다. 동생도 몇 년 전에 뇌암으로 뇌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몇 년 전에 뇌경색으로 1년 이상을 쉬고 이번에 또 일을 못 한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카들을 캐나다에 데려다 우리가 기르면 동생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양해야 하는데 입양 절차가 까다롭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입양할 조건이 안 됐다. 지금에 와서 제수와 사별하고 조카 둘을 기르는 동생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형편이라 막무가내로 돈 해내라는 동생이 야속하다.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팔려서 할머니 산소도 이장해야 한다고 동생이 말하면서 이장 비용을 달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이역만리 떠나있어도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못 간 것도 형편이 안 되어서다. 동생이 부모님이 물려준 몇백 평 되는 천수답이자 들어가는 길이 없는 맹지 땅 동네 사람한테 무료로 농사를 지으라고 줬었는데, 그 땅을 농사짓는 사람이 300만 원이면 산다고 하니 팔아서 달라고 한다. 아무리 맹지이고 땅값이 싸도 300만 원이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다. 막상 사려고 찾아보면 그 돈 주고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던데. 집안에 우환이 끝나지 않아 걱정이 많은 아내가 부모님 산소 자리를 걱정한다. 혹시 수맥이 흘러서 동생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우리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다가 절에서 백중 때 조상을 위한 기도로 끝내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아버지 뒤에서 엉덩이 쳐들고 절을 하고, 제사 지낼 때 입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의 쓸리는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이상한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상이 밴쿠버까지 제사상을 찾아 먹으러 오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49재가 끝나면 재판받고 지옥으로 가거나 천상 세계로 가거나 가축이나 미물로 환생하거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까? 조상이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괴롭히며 아프게 하거나 일을 안 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데 조상은 후손이 잘되는 것을 훼방 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나갔으면 후손들이 잘되라고 천상에 가서도 빌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환생을 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은 악귀가 되어서 환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 죽을 쑤면서 홍골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외지로 나가 살아갈지 생각했다. 그리고 외지를 떠돌고 서울에서 단칸방과 독서실을 전전하다 이민을 와서 보니 이민한 밴쿠버에서도 돈이 있던가, 한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주 한국에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많이 부럽다. 눈에 보이면 가까워 보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불경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넓고도 넓은 세상, 그래도 달을 보면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에 고향 땅에 있는 집(지금은 동생 집)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땅, 그리고 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 산소를 늘 생각한다. 생각과 마음은 늘 고향 땅에 있다. 고향의 친구들과 제천 상고 함께 다닌 학교 동창들도 보고 싶다. 동창회 공지를 늘 밴드로 보면서 마음만 함께하고 사진으로 만족한다.

가시거리엔 밴쿠버 거리가 늘 있지만, 마음엔 조국에 있는 친구와 고향이 있는데 그 거리는 이역만리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도 보이니 걸어서 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듯이 고향 땅의 친구들과 동창들은 인터넷 가시거리에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도보 거리는 아니다.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함께 일한 많은 직장 동료가 있지만 어려울 때 서로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은퇴하면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고향 땅에 토굴을 파고 홀로 살려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다. 왜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녀들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도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것이다. 수입 면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캐나다에서도 은퇴하고 은퇴 연금으로 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 살면 은퇴 연금을 반 정도는 받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가시거리를 넓혀 멀리 보고 있지만 현실은 도보 거리에서 잰걸음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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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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