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에 얼굴을 파묻고 바다가 부르는 애상곡을 듣는다
접싯물에 코 박고 숨을 쉬니 코로 물이 들어가 매웠다
날마다 세수하고 목욕한다고 더럽힌 물
날마다 깨끗한 옷 입는다고 빨래한다고 버린 물
물 없는 아프리카 사막에선 더러운 웅덩이 물도 먹는 다지
마실 물도 없는데 씻기는 뭐
개미가 뭔가 먹을 것 열심히 물어 오듯
벌이 날마다 화분 가루 나르듯
돈을 좇아가는 도시 사람들 속에
비누조차 없어 개울물에 세수하던 시골 소년
풀잎 가득한 개울 뽀드득 소리 나는 아이 해맑은 미소같이.
#작가의 변
지난해 9월에 신청할 때 엘리베이터에 1시간 갇혀 있으면서 뇌경색이 왔다고 했지만, 상해 보험사는 뇌경색이란 검사 결과를 얻지 못해서 상해 보험을 지급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는 “언제부터 일 나올 수 있냐”고 전화가 왔다. 상해 보험에서도 회사로 편지를 보냈고 상해 보험에서 말하기를 너는 뇌경색이 아니라고 한다면서. 그래서 뇌경색 검사에서 찾지 못했을 뿐이지 당시에 앰블런스도, 소방 구조대도, 병원도 뇌경색으로 진료했고, 회사에서 상해 보험 신청서까지 보내 줘서 신청했다. 하지만 CT, MRI에서 아무런 소견을 찾지 못했고 상해 보험 지급을 하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다. 12월에 신청한 실업 보험은 상해 보험이 아직 보류 상태여서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지금 뇌경색 증세를 보여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럼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라고 해서 패밀리 닥터를 찾아갔더니 가정의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네가 뇌경색 증세가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 “각종 검사 소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온다”고 말하면서 “소견서를 원한다면 네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써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침에 배변 시에 피가 많이 보여서 치질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하니까 옷 벗고 검사해야 하니 기다리라고 하더니 침대에 누우라고 하고 손가락을 넣어서 검사하더니 치질은 아니고 찢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처방전을 써서 줬는데 계산을 한 아내가 투덜거린다. 그냥 후시딘 연고 바르면 될 것을 40불이나 하는 연고를 사야 하겠냐면서 처방한 연고를 사려면 30분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처방전으로 산 연고를 기다리면서 후시딘 연고나 바르라는 아내의 말끝에 수입도 없으면서라는 것이 서운해서, 나대로 화가 났고 집에 와서 딸에게 하소연했더니 딸도 아빠가 그동안 직장도 한군데 오래 못 있고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한 것이 많지 않냐고 아내 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직장 한군데서 30년 이상 다니고 싶었지만, 기내식 회사에서는 9.11사태 후에 해고 되고 ‘한아름 마트’에서 일하고 있을 때 다시 오라고 하는 것을 해고 또 안 한다는 보장이 있냐고 하니 보장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레스토랑과 독일 델리를 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사업하면 안 되는 사람이 사업을 해서 돈을 다 까먹었다고 하니 딸도 맞다고 했다 해서 그것도 열심히 하려고 했고 직장을 잡아서 낮에 가게 밤에 직장을 다니는 것을 3년 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결과적으로 아파트도 팔고 다시는 집을 살 수 없었고 그 후에도 오래 직장을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구세군에서 인도계와 필리핀계의 차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8년을 일했지만 파트 타임과 임시직으로 일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을 딸이나 아내가 모르지 않는데 그런 말을 하니 무척 서운했다. 아빠는 재수가 없어서 상해 보험도 못 받고 실업 보험도 못 타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지난번에 학교에서 따돌림으로 고통받아 학과장에게 이의 신청하고 상담받은 아들이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제 갑자기 학교 상담사와 상담하더니 자기가 자폐가 있는 것 같다고 검사를 해보라고 한다면서 자폐 검사하는데 2,000불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 왜 자폐 검사를 안 했냐고 따졌다.
어릴 때 자폐 증상이 없으니 안 했다고 말하면서 너하고 말하면 커다란 벽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답답한 성격일 뿐이지 자폐 증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담한 사람은 자폐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면서 검사를 해야 한다면서 다른 백인들은 다 검사를 하는데 왜 안 했냐고 따진다. 백인 누가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자폐 검사를 하느냐고 말하면서 영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무브 투 헤븐을 보라고 그런 증세가 자폐라고 말을 해도 아들은 아빠 말을 믿기보단 상담사 말을 신뢰했다. 설령 자폐 증상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과 리더와 학생들이 집단으로 너를 그렇게 따돌리고 교수까지 같은 편이 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직장 다닐 때도 다른 사람들이 따돌리고 한 것을 보면 상담사 말이 맞는 것 같다면서 그것을 핑계로 평생 학교도 직장도 다니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부모로서 속이 타들어 간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나도 잘해보려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쓸데없는 인간처럼 보이는 게 슬프다. 세상엔 성공한 사람들보다 실패한 사람들이 더 많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버림받아도 가정에서는 보호받아야 하는데 가정에서도 나의 노력이 아무런 쓸데없는 삶이라는 느낌의 말을 듣고 나니. 너는 정말 왜 살아왔니 하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형제들하고 애틋하지도 못하고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집이 없어서 물려받은 유산이 없어서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것만 같다. 어제 휠체어에 아내를 태우고 들어오던 사람을 아파트 출입구에서 만났다. 지금 그래도 내가 옷을 입고 화장실도 가고 목욕도 혼자하고 멀리는 못 걸어도 짧은 거리는 지팡이 짚고 걸어 다니지만 정말 꼼짝 못하고 정부 지원금이나 연금도 못 받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상담하면서 계단은 오를 수 있느냐 욕실에 보조 팔걸이는 있느냐 아파트 계단은 몇 개냐 등등을 물었다. 그런데 사실 쓸모없는 인간 취급받은 것이 더 가슴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문제가 뭐냐고 해서 걸을 때 지그재그로 걷고 균형을 잘 못 잡으며 오른쪽 팔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고 말했다. 목표가 뭐냐고 해서 일하는 직장에서 소스나 숲 통을 들고 재료를 들고 나르려면 최소한 20킬로그램 정도는 들어야 한다. 그것이 목표다. 그리고 소스나 숲은 뜨거워서 쏟으면 다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빨리 쾌유해서 쓸모 있는 가장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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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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