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음·석두·만공 첫 본부이사…사무 토의·의결 평의원 20명 선출
적음·석두·만공 첫 본부이사…사무 토의·의결 평의원 20명 선출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3.03.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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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우공제회의 조직과 운영

선우공제회의 조직은 수좌들이 철저한 수행과 선풍 진작을 위하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중생구제의 원력을 세우고 국권상실에 따른 식민지불교 정책에서 파생된 불교 현실을 자주, 자립의 정신으로 극복하겠다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들 81명의 선승들은 선종의 부활과 승려들 상호간의 부조 및 자립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선우공제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러한 설립 《취지서》를 발표한 뒤 개최된 창립총회는 선우공제회 운영의 대강을 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우선 선원기관(禪院機關)의 조직체로 서울에 ‘선우공제회 본부’를 두고, 중앙조직 안에는 서무부, 재무부, 수도부(修道部) 등 3부를 두었다. 또한 지방에는 지부(支部)를 설치하고, 공제회 제반사항을 의결하는 의사부(議事部)를 두었다.

중앙의 3부와 함께 중요한 것은 지방의 선우공제회 지부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19개 사찰에 지부를 두었는데 다음과 같다.

망월사 정혜사 직지사 백양사 범어사 불영사 건봉사 마하연 장안사 월정사 개심사 통도사 신계사 남장사 석왕사 선암사 천은사 용화사 해인사

19개 지부 사찰 가운데 사찰령 체제의 31본산에 해당하는 본사는 백양사, 범어사, 건봉사, 통도사, 석왕사, 선암사, 해인사 등 7개 사찰이다. 31개 본사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경남 3본산(범어사, 통도사, 해인사)과 건봉사와 석왕사 등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선우공제회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북쪽의 금강산과 남쪽의 지리산이라는 한국불교 전통에서 금강산의 건봉사, 장안사, 마하연과 지리산 천은사가 포함됨으로써 선 수행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지부인 월정사는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가 아니고 황해도 신천군의 구월산(九月山) 월정사〔月精寺, 주지 박혜명(朴慧明)〕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오대산 월정사가 선풍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선우공제회 지부가 설치됐던 양산 통도사의 일제강점기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건판16310) 사진.



선우공제회 사무를 총괄하는 집행부로 본부에 이사 3명 및 서기 1명을 두었고, 지부에는 간사 2명을 두기로 하였다. 간사는 각 지부에서 중망이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첫 선우공제회 본부 임원으로 서무부 이사 김적음(金寂音), 재무부 이사 김석두(金石頭), 수도부 이사 송만공(宋滿空)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서기는 김용환(金用煥)이 선출되었다. 이는 선학원을 만든 설립 조사들인 송만공, 김석두, 김적음 등이 선우공제회 이사로 취임함으로써 선학원 건립의 근본 취지를 살리면서 선우공제회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공제회 사무를 토의하고 의결하기 위하여 전조선 사찰을 통하여 평의원(評議員) 20명을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오성월 백학명 강도봉 임석두 정석암 신환옹 황용음 이해산 권일봉 박고봉 기석호 이각원 이용하 이계봉 김남전 권남경 김초안 김영해 김법융 김경석

선우공제회 업무에 대한 의결권을 갖는 이들 20명의 평의원들은 전체적으로 선우공제회 발기인들로 구성된 셈이다. 20명 평의원 중 이각원(李覺元), 이용하(李龍河), 김영해(金映海) 등 3명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다.

특히 창립총회에서는 선우공제회 유지 방침의 원칙을 정하였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공제회의 경비는 선우(禪友)의 의연금 및 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각 지부의 선량(禪糧) 중 2할과 매년 예산액 중 잉여금을 저축하여 공제회의 기본 재산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의 각 선원을 진흥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재산의 수지 총액과 예산·결산 및 중요 사안은 평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공제회의 운영 방침, 공제회 규칙, 세칙을 정하기 위한 기초위원으로 기석호(奇石虎), 박고봉(朴高峰), 이해산(李海山) 등 3명을 선정하였다. 이들에 의해 제정된 규칙과 세칙을 세 번 낭독한 후 다소의 수정을 거쳐 결정한 후 각 지부에 공포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각 지부 설립을 위한 지방위원을 각처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창립 정신에 발맞추어 선풍 진작의 구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 김용환(金用煥)이 작성한 선학원 《일지(日誌)》를 통해 선학원의 조직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선우공제회가 조직됨에 따라 선학원에서 수좌(首座) 9명을 육성하기 위해 1922년 4월 15일(양, 5. 10) 제1회 하안거 결제식을 하고 정혜사에서 상경한 송만공 스님이 상당설법을 하였다. 이로써 선학원의 활동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튿날부터 각 지부에 회원증 청구를 위한 공문 및 임원 명부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각각 발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선우공제회 본부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4월 16일(양, 5. 11) 만공 선사의 상당 설법, 5월 2일(양, 5. 28) 김남전 화상 설법 등을 통해 선학원의 설립 목적을 강화해 갔다.

또한 지방위원들을 금강산, 지리산 등 각처로 출장을 보내 지방위원의 역할을 강화하였다. 이에 강원도 지방위원 김성민(金性玟)의 요청으로 오대산 월정사에 《규칙서》 2부를 보내고, 강원도 지방위원 윤상언(尹祥彦)의 요청으로 금강산 마하연에도 2부를 배부하였다. 지방위원 이해산(李海山)은 구례 천은사 삼일암 지부 설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부에 선우공제회 공용지 인쇄물을 만들어 각 지부에 보내 사용하게 하였다. 정혜사 지부에서 《규칙서》 100부를 제작 요청하기도 하였고, 각 지부에 수학(修學)을 권고하는 공문을 발송하고, 《규칙서》와 《취지서》를 송부하였다. 또한 각 지부의 위상 강화를 위해 지부 인장(印章)을 문심당(文心堂)에서 제작하여 교부하였다. 또는 위임장을 보내 회원 모집을 독려하고 입회원서를 보내 회원 가입을 독려하였다. 또한 회원증 청구를 요청하라는 공문을 각 지부에 발송하는 등 지방지부 조직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1922년 5월 3일(양, 5. 29) 《선우공제회 취지서》 출판허가원을 제출하고, 선우공제회 규칙을 3차에 걸쳐 수정하여 《규칙서》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1000부를 인쇄 발간토록 하여 선전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5월 9일(양 6. 4.) 이날 ‘선우공제회 본부’ 간판을 달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7)

한편 1922년 11월 3일(음 9. 15.)부터 2일간 안국동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 제2회 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오성월, 김남전, 한용운, 강도봉, 김석두, 기석호 등 19명이 참석하였고, 서무부 이사 대리 오성월, 수도부 이사 대리 황용음, 평의원 김재규 대리로 마응허가 참석하여 전체 24명이 참석한 셈이다. 또한 남장사 선원과 파계사 선원은 총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총회결의에 따른다는 공함을 통해 위임하였다. 이날 총회에 참석한 인물로 만해 한용운이 주목된다. 선우공제회 《취지서》 발기인 명단에 들어 있었지만 선우공제회 관련 총회에 처음 등장한 셈이다.

이날 총회에서는 선우공제회 본부와 지부 명칭 변경과 전무위원 제도를 신설하는 조직적 차원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즉 선우공제회는 본부와 지부의 명칭을 삭제하고 본부는 ‘사무소’로, 지부는 ‘○○선원’이라 칭하기로 하였다. 또한 공제회 유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7명으로 구성된 ‘전무위원(專務委員)’ 제도를 신설하였다. 이에 선임된 전무위원은 기석호(奇石虎), 이각원(李覺元), 임해봉(任海峰), 이혜봉(李慧峰), 강도봉(康道峰), 김남전(金南泉), 김영해(金映海) 등 7명이었다.

지방 선원 증설을 위해 지방(地方)위원 4명을 선임하였는데, 임해봉, 이혜봉, 이탄옹(李炭翁), 신환옹(申幻翁) 등이다. 임해봉과 이혜봉은 7인의 전무위원으로 지방위원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임해봉(任海峰)은 범어사 승려로 경남 부산의 마하사(摩訶寺) 주지(1911. 12. 2~1914. 12. 1.), 동래군 영주암(瀛洲庵) 주지(1918. 9. 13~1921. 9. 15.)를 거쳐 1922년 당시 김해군 은하사(銀河寺) 주지(1921. 2. 25~1923. 4. 25.)를 역임하고 있어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혜봉(李慧峰)은 경북 선산군 도리사(桃李寺) 주지(1912. 1~1915. 1, 1919. 8~1929. 5.)를 오랫동안 맡았고, 이후 경북 상주군 남장사(南長寺) 주지(1930. 7~1933. 7.)를 맡았다. 따라서 이혜봉은 경북 지역 선원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2년 당시 이탄옹의 활동 지역은 정확하지 않지만, 후에 윤퇴운(尹退雲)의 임기만료에 따라 경북 김천 직지사 주지(1929. 8. 12~1933. 8. 11)를 맡았고, 1930년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지역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임원으로 재무부 이사 김석두(金石頭) 스님이 신병으로 사면하고자 했으나 수리되지 않고 대신 박보선(朴普善)이 임시로 대리하게 하였다. 김석두 스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경성사무소에 전무간사 1인을 두기로 하여 기석호(奇石虎) 스님이 선임되었다. 전무간사 제도를 통해 선우공제회 전체를 총괄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기석호 스님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업무 가중에 대하여 전무간사의 봉급은 매달 50원으로 정하고 이에 대하여 각 선원에서 선미(禪米)를 받아 처리하고 부족액은 다시 각 선원이 부담키로 결의하였다. 그 부담금액은 다음과 같다.
선우공제회 지부가 설치됐던 양산 통도사의 일제강점기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건판16310) 사진.

선우공제회 사무를 총괄하는 집행부로 본부에 이사 3명 및 서기 1명을 두었고, 지부에는 간사 2명을 두기로 하였다. 간사는 각 지부에서 중망이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첫 선우공제회 본부 임원으로 서무부 이사 김적음(金寂音), 재무부 이사 김석두(金石頭), 수도부 이사 송만공(宋滿空)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서기는 김용환(金用煥)이 선출되었다. 이는 선학원을 만든 설립 조사들인 송만공, 김석두, 김적음 등이 선우공제회 이사로 취임함으로써 선학원 건립의 근본 취지를 살리면서 선우공제회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공제회 사무를 토의하고 의결하기 위하여 전조선 사찰을 통하여 평의원(評議員) 20명을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오성월 백학명 강도봉 임석두 정석암 신환옹 황용음 이해산 권일봉 박고봉 기석호 이각원 이용하 이계봉 김남전 권남경 김초안 김영해 김법융 김경석

선우공제회 업무에 대한 의결권을 갖는 이들 20명의 평의원들은 전체적으로 선우공제회 발기인들로 구성된 셈이다. 20명 평의원 중 이각원(李覺元), 이용하(李龍河), 김영해(金映海) 등 3명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다.

특히 창립총회에서는 선우공제회 유지 방침의 원칙을 정하였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공제회의 경비는 선우(禪友)의 의연금 및 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각 지부의 선량(禪糧) 중 2할과 매년 예산액 중 잉여금을 저축하여 공제회의 기본 재산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의 각 선원을 진흥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재산의 수지 총액과 예산·결산 및 중요 사안은 평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공제회의 운영 방침, 공제회 규칙, 세칙을 정하기 위한 기초위원으로 기석호(奇石虎), 박고봉(朴高峰), 이해산(李海山) 등 3명을 선정하였다. 이들에 의해 제정된 규칙과 세칙을 세 번 낭독한 후 다소의 수정을 거쳐 결정한 후 각 지부에 공포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각 지부 설립을 위한 지방위원을 각처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창립 정신에 발맞추어 선풍 진작의 구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 김용환(金用煥)이 작성한 선학원 《일지(日誌)》를 통해 선학원의 조직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선우공제회가 조직됨에 따라 선학원에서 수좌(首座) 9명을 육성하기 위해 1922년 4월 15일(양, 5. 10) 제1회 하안거 결제식을 하고 정혜사에서 상경한 송만공 스님이 상당설법을 하였다. 이로써 선학원의 활동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튿날부터 각 지부에 회원증 청구를 위한 공문 및 임원 명부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각각 발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선우공제회 본부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4월 16일(양, 5. 11) 만공 선사의 상당 설법, 5월 2일(양, 5. 28) 김남전 화상 설법 등을 통해 선학원의 설립 목적을 강화해 갔다.

또한 지방위원들을 금강산, 지리산 등 각처로 출장을 보내 지방위원의 역할을 강화하였다. 이에 강원도 지방위원 김성민(金性玟)의 요청으로 오대산 월정사에 《규칙서》 2부를 보내고, 강원도 지방위원 윤상언(尹祥彦)의 요청으로 금강산 마하연에도 2부를 배부하였다. 지방위원 이해산(李海山)은 구례 천은사 삼일암 지부 설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부에 선우공제회 공용지 인쇄물을 만들어 각 지부에 보내 사용하게 하였다. 정혜사 지부에서 《규칙서》 100부를 제작 요청하기도 하였고, 각 지부에 수학(修學)을 권고하는 공문을 발송하고, 《규칙서》와 《취지서》를 송부하였다. 또한 각 지부의 위상 강화를 위해 지부 인장(印章)을 문심당(文心堂)에서 제작하여 교부하였다. 또는 위임장을 보내 회원 모집을 독려하고 입회원서를 보내 회원 가입을 독려하였다. 또한 회원증 청구를 요청하라는 공문을 각 지부에 발송하는 등 지방지부 조직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1922년 5월 3일(양, 5. 29) 《선우공제회 취지서》 출판허가원을 제출하고, 선우공제회 규칙을 3차에 걸쳐 수정하여 《규칙서》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1000부를 인쇄 발간토록 하여 선전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5월 9일(양 6. 4.) 이날 ‘선우공제회 본부’ 간판을 달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7)

한편 1922년 11월 3일(음 9. 15.)부터 2일간 안국동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 제2회 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오성월, 김남전, 한용운, 강도봉, 김석두, 기석호 등 19명이 참석하였고, 서무부 이사 대리 오성월, 수도부 이사 대리 황용음, 평의원 김재규 대리로 마응허가 참석하여 전체 24명이 참석한 셈이다. 또한 남장사 선원과 파계사 선원은 총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총회결의에 따른다는 공함을 통해 위임하였다. 이날 총회에 참석한 인물로 만해 한용운이 주목된다. 선우공제회 《취지서》 발기인 명단에 들어 있었지만 선우공제회 관련 총회에 처음 등장한 셈이다.

이날 총회에서는 선우공제회 본부와 지부 명칭 변경과 전무위원 제도를 신설하는 조직적 차원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즉 선우공제회는 본부와 지부의 명칭을 삭제하고 본부는 ‘사무소’로, 지부는 ‘○○선원’이라 칭하기로 하였다. 또한 공제회 유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7명으로 구성된 ‘전무위원(專務委員)’ 제도를 신설하였다. 이에 선임된 전무위원은 기석호(奇石虎), 이각원(李覺元), 임해봉(任海峰), 이혜봉(李慧峰), 강도봉(康道峰), 김남전(金南泉), 김영해(金映海) 등 7명이었다.

지방 선원 증설을 위해 지방(地方)위원 4명을 선임하였는데, 임해봉, 이혜봉, 이탄옹(李炭翁), 신환옹(申幻翁) 등이다. 임해봉과 이혜봉은 7인의 전무위원으로 지방위원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임해봉(任海峰)은 범어사 승려로 경남 부산의 마하사(摩訶寺) 주지(1911. 12. 2~1914. 12. 1.), 동래군 영주암(瀛洲庵) 주지(1918. 9. 13~1921. 9. 15.)를 거쳐 1922년 당시 김해군 은하사(銀河寺) 주지(1921. 2. 25~1923. 4. 25.)를 역임하고 있어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혜봉(李慧峰)은 경북 선산군 도리사(桃李寺) 주지(1912. 1~1915. 1, 1919. 8~1929. 5.)를 오랫동안 맡았고, 이후 경북 상주군 남장사(南長寺) 주지(1930. 7~1933. 7.)를 맡았다. 따라서 이혜봉은 경북 지역 선원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2년 당시 이탄옹의 활동 지역은 정확하지 않지만, 후에 윤퇴운(尹退雲)의 임기만료에 따라 경북 김천 직지사 주지(1929. 8. 12~1933. 8. 11)를 맡았고, 1930년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지역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임원으로 재무부 이사 김석두(金石頭) 스님이 신병으로 사면하고자 했으나 수리되지 않고 대신 박보선(朴普善)이 임시로 대리하게 하였다. 김석두 스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경성사무소에 전무간사 1인을 두기로 하여 기석호(奇石虎) 스님이 선임되었다. 전무간사 제도를 통해 선우공제회 전체를 총괄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기석호 스님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업무 가중에 대하여 전무간사의 봉급은 매달 50원으로 정하고 이에 대하여 각 선원에서 선미(禪米)를 받아 처리하고 부족액은 다시 각 선원이 부담키로 결의하였다. 그 부담금액은 다음과 같다.

[주] -----

7) 《禪友共濟會 日誌》(1922. 4.),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65, 민족사(1996), 39~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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