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7. 2015년 남북종교인들의 모임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7. 2015년 남북종교인들의 모임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3.27 12: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강산에서 종교를 말하다”

천하절승 금강산은 삼국과 고려 시대로부터 봉래 양사언・겸재 정선・추사 김정희・난고(蘭皐) 김병연 등 인문학의 보고이다. 또 성지로 조상들의 혼이 담긴 ‘산 그 이상의 산’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조선 침탈의 목적으로, 강원도 철원에서 내금강역까지 총 116.6Km에 이르는 금강산 전기철도를 놓았다. 장안사 옆에 호텔까지 지었고, 금강산에 대한 사진첩과 팸플릿을 발행했다. 또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1924년 10월호)은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20쪽 분량의 특집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2008년 6월호)에도 ‘미국인이 갈 수 없는 최고의 관광명소’라는 제목으로 금강산을 다뤘다.

1998년 11월부터 2008년 7월까지 개방된 금강산은 남측에서 193만 명이 방문했다. 분단 이후, 금강산에는 종교의 영역도 사라졌다. 옛 4대 사찰 가운데, 표훈사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근세기까지 조선을 대표한 유점사와 장안사・신계사 등 대부분의 사찰은 1951년에 미공군 폭격과 국군의 소개작전으로 폐허가 됐다. 1912년에 제정된 《유점사본말사지법》에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신령스러운 도량’(金剛不壞之靈場)이라 기록된 유점사는 60여 채 건물과 150여 명의 주거승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반세기 동안 텅 비었던 금강산에 남북 종교인들이 모였다. 16세기 말, 송도삼절이라 불린 최립은 《간이집》 시 ‘남여(藍輿)’에서 “자나 깨나 이름난 산을 60년 동안 잊지 못해, 오늘에야 가마 타고 산모퉁이에서 빙 둘러본다.”라고 했다. 2015년 남측 종교인들은 가마 대신에 허가받은 버스를 타고 금강산엘 다녀왔다. 그때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과 또 다른 국제교류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

내금강 표훈사의 한여름(2007.7.16.). 사진: 민족미술인협회 금강산스케치여행단





금강산 유점사 옛 모습(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Ⅱ(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된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들(1920년).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자료



금강산에 간 남북종교인들

구한말부터 금강산을 예찬하는 시문이 많아지면서 풍성해졌다. 최남선은 1924년에 쓴 《금강예찬》에서 “금강산 시화를 다 모으면, 도서관 하나를 채울 수도 있다.” “천하명산 어디 메뇨. 천하명산 구경 갈제.”로 시작하는 1930년대 최정식 작사ㆍ작곡의 경기민요 《금강산타령》에도 나온다. 그때 금강산 꽃구경과 단풍 행락이 극에 달했던 무렵으로 일간지 신문광고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6.25 전쟁 이전에는 장안사와 유점사에서 시작했던 금강산 구경이, 내금강 표훈사 또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따로 출발하는 것으로 달라졌다.

지난 10년간 열렸던 금강산관광은 그곳의 탄생과 역사에 얽혀 있는 스토리가 품격을 좌우했다. 북측 여성 봉사원들은 곳곳마다 신화와 전설을 실화처럼 소개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와 같이 명성황후의 무녀 진령군과 이유인은 1884년 2월,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라고 계시했다. 고종이 그리 시행하면서 금강산 구경과 참배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또 이곳에 팔만구 암자 설이나 108 암자가 있다고 금강산 관광할 때 들었던 이야기는 낭설이다.

일본인 조감도 화원이던 요시다 하츠사부로가 1929년에 그린 〈금강산 조감도〉에는 31개 사암과 8개 절터가 등장하므로 과대 포장됐다. 조감도 원본을 통해 사암 현황을 확인할 수도 있다. 전쟁으로 사라졌던 외금강 신계사는 2007년 10월에 복원됐으며, 내금강에 표훈사・정양사・보덕암・불지암과 마하연 칠성각만이 남아 있다.

이곳을 찾았던 금강산관광은 북측이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의 남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의 전원 추방으로 중단됐다.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했다. 2011년 11월 4일 중국인의 금강산 국제관광이 시작, 중단됐다가 2019년 7월 15일부터 다시 개시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멈추었다.

그 사이에는 남북한 종교인들이 금강산에서 만났다. 2015년 11월 9~10일 금강산호텔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한 북남종교인들의 모임’이 개최됐다. 2001년 3월 27~29일 금강산호텔과 금강원에서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와 남측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남북종교인 평화모임’을 가진 이래, 두 번째 조우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겸 조선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 강지영 위원장과 1988년 9월에 건립된 평양 장충성당 김철웅 총회장 등이 참가했다.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과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참가했으며, 강수린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4대 종교단체 5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박남수 천도교령, 어윤경 성균관장,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이은형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등 7대 종교 수장을 비롯한 조계종 교구본사 주지 등 145명이 참석해 남북 종교계의 지도부가 총출동한 셈이었다.

2015년 오전 10시 55분(한국시간 11시 25분) 금강산호텔 2층 금강홀에서 열린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은 남측 7대 종교와 북측 4대 종단 수장들이 상견례를 시작으로, 김광준 KCRP 사무총장과 서철수 조선카톨릭협회 서기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북측의 강지영 신임 조선종교인협의회장은 “우리 겨레의 통일 열망인 양 단풍이 붉게 타는 좋은 계절에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서 열리게 됐다. 남측의 종교단체 대표 여러분들의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조선종교인협의회와 북측 종교인들의 이름으로 렬렬히 환영한다.”고 축하 연설을 했다. 이어 자승 총무원장이 대표 연설을 하고, 북측의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부위원장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이, 남측은 박남수 천도교령과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어윤경 성균관장이 각각 연설했다. 이날 연설자들은 7.4선언과 6.15공동선언, 10.4선언 등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하고,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를 갈구했으며, 종교인들이 화해와 단합에 앞장서자고 호소했다.

200여 명의 종교인들은 려정선 조선천도교회 서기장과 이원형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총무가 공동 낭독한 ‘남북 종교인들의 공동성명’에서 남과 북의 종교인들이 더욱 자주 만나고 교류함으로써 연대와 단합을 강화하고, 민족의 화해와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해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국보 유적 제95호 신계사를 거쳐 금강산 구룡연까지 공동 관람에 나섰다. 강원도인민위원회가 세운 표석에 새긴 신계사 기록을 보며 합동 참배와 통일 타종을 한 남북 종교인들은 가을비로 젖은 단풍의 풍악산 길을 오르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튿날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종교별 상봉 모임을, 오후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삼일포를 함께 관람하며 우의를 다진 뒤 귀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남북 종교인들조차 위무하지 못한 금강산의 슬픈 이야기는 묻혀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금강산 승려와 백성들은 유람 관료들의 횡포에 몸서리쳤다. 연좌제 묶인 승려들은 물론, 외금강 아랫마을 온정리(따뜻한 온천마을)와 강원도 장전과 고성리 남쪽의 게방촌(해금강 적벽강변의 마을) 사람들이 그 피해자들이었다. 게방촌에서 가파른 산길 60리를 올라 유점사에 이르는 길을 맨발과도 같은 짚신을 싣고 가마를 등짐으로 메야 했다. 1894년 5월 말, 금강산을 처음 방문했던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상상의 방’이라 표현한 금강산 유점사의 전각들은 1951년 5월 10일 미극동군의 집중 폭격으로 60여 채와 석조물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 《조선중앙통신》은 2002년 12월 13일 기사에서 “미군의 유점사 폭격을 가리켜 ‘귀축 같은 만행’이었다.”라고 세상을 향해 고발했다.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 개막행사(2015.11.9. 금강산호텔). 사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홈페이지





남북해외여성토론회 개막식(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 한국여성단체연합 홈페이지





남북해외여성토론회에서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회장의 토론발표(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통일뉴스(2014.3.29.)



중국 심양에서의 외침

2014년 1월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지정된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홈페이지(2023.3.22. 검색창)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특히 2018년 8월 동 진흥원이 여성가족부 보조금 사업으로 시작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archive814.or.kr)의 관련 연표에서조차 북측과의 교류 사항을 생략한 것을 보면, SY정권에 의한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행해지던 일본 규탄 집회까지도 몰이해 되는 현 시국에서 정의기억연대가 남측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활동 현황을 북측에 설명하고 연대활동을 제안하면서 북측 ‘조선일본군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와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1992년 8월에 발족한 북측의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그 후 2002년 5월 ‘조선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희생자위원회’(종태위)라 개칭하고, 5월 3~4일 평양에서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를 개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문필기 등 12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발족에 합의했다. 또 남북・해외동포가 일본 정부에 유엔 결의를 준수하도록 촉구하는 서한과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그 후, 2014년 3월 29일~30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칠보산호텔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조선민주여성동맹 등 20여 개의 여성・종교단체가 공동 주최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토론회’를 개최했다. 남측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한국YWCA, 전국여성연대 등, 북측에서는 조선민주여성동맹, 6·15 북측위원회 여성분과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여성부, 조선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등이 참가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분쟁 등에 대해 한목소리로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나선 남북 민간단체들은 이날 “일본군의 성노예 범죄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투쟁과 연대활동을 강력히 전개하겠다.”는 공동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리산옥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여성회장, 한국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김영녀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이 공동발표한 결의문에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을 맹비난하고, 이념・제도를 초월해 위안부 문제에 공동 대응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북측 단장인 김명숙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들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성토하고, 리정희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사는 최근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리현숙 조선불교도련맹 전국신도회 부회장은 토론 발표에서 “길원옥 할머니가 한 피눈물 나는 성토를 들으니, 정말로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 터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분개하며, “일본 당국으로부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인정과 사죄,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단순히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며, 우리 여성들의 존엄과 민족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길원옥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들의 성범죄와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아픈 기억을 꺼내자 토론회장은 숙연한 분위기가 됐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진실한 사과의 말을 듣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거듭 말했다.

특히 리현숙 전국신도회 부회장은 “일본이 고노담화 검증론을 거론하는 것은 결국, 고노담화를 철회함으로써 성노예 범죄 부정을 정책화하려는 것이다. 지난 14년 동안 세계 각국의 국회는 총 55건의 성노예 문제 결의안을 채택했고, 미국에서도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인류 공동의 과제가 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면서 “이 문제를 결산하지 못하면 역사와 선조들, 후손들이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일본 당국에는 ▲일본군 성노예 범죄 관련 자료의 전면 공개, ▲국가 명의의 정식 사죄 및 피해자・유가족에 대한 배상, ▲일본군 성노예 범죄 등 반인륜범죄의 교과서 기술”을 강력히 촉구했다.

2008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 등의 이유로 중단된 남북 간 공동토론회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 2월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되었지만, 이명박 정권의 불허 조치로 말미암아 무산됐다. 그로부터 위안부 피해 실태에 관한 남북 간 정보 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2015년 3월 중국 심양에서의 외침은 여성 존엄과 민족적 자존심을 되살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일찍이 만해 선사는 민족 대표들이 변절할 때 전향서나 반성문이 아닌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드리데, 일제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중국 심양과 금강산에서 우리 겨레가 얼싸안고 통일 만세를 높이 외쳤다. 하지만 2023년 3월 SY 대통령 내외가 일본 땅에서 벌인 온갖 추문들은 그저 참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민중들이 ‘말과 행동을 꾹 참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 다음 편은 ‘2017년 일본과의 교류사업’이 이어집니다.

----------------------------------------------------------------------------------------------
내금강 표훈사의 한여름(2007.7.16.). 사진: 민족미술인협회 금강산스케치여행단
금강산 유점사 옛 모습(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Ⅱ(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금강산 유점사 옛 모습(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Ⅱ(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된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들(1920년).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자료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된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들(1920년).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자료

금강산에 간 남북종교인들

구한말부터 금강산을 예찬하는 시문이 많아지면서 풍성해졌다. 최남선은 1924년에 쓴 《금강예찬》에서 “금강산 시화를 다 모으면, 도서관 하나를 채울 수도 있다.” “천하명산 어디 메뇨. 천하명산 구경 갈제.”로 시작하는 1930년대 최정식 작사ㆍ작곡의 경기민요 《금강산타령》에도 나온다. 그때 금강산 꽃구경과 단풍 행락이 극에 달했던 무렵으로 일간지 신문광고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6.25 전쟁 이전에는 장안사와 유점사에서 시작했던 금강산 구경이, 내금강 표훈사 또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따로 출발하는 것으로 달라졌다.

지난 10년간 열렸던 금강산관광은 그곳의 탄생과 역사에 얽혀 있는 스토리가 품격을 좌우했다. 북측 여성 봉사원들은 곳곳마다 신화와 전설을 실화처럼 소개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와 같이 명성황후의 무녀 진령군과 이유인은 1884년 2월,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라고 계시했다. 고종이 그리 시행하면서 금강산 구경과 참배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또 이곳에 팔만구 암자 설이나 108 암자가 있다고 금강산 관광할 때 들었던 이야기는 낭설이다.

일본인 조감도 화원이던 요시다 하츠사부로가 1929년에 그린 〈금강산 조감도〉에는 31개 사암과 8개 절터가 등장하므로 과대 포장됐다. 조감도 원본을 통해 사암 현황을 확인할 수도 있다. 전쟁으로 사라졌던 외금강 신계사는 2007년 10월에 복원됐으며, 내금강에 표훈사・정양사・보덕암・불지암과 마하연 칠성각만이 남아 있다.

이곳을 찾았던 금강산관광은 북측이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의 남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의 전원 추방으로 중단됐다.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했다. 2011년 11월 4일 중국인의 금강산 국제관광이 시작, 중단됐다가 2019년 7월 15일부터 다시 개시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멈추었다.

그 사이에는 남북한 종교인들이 금강산에서 만났다. 2015년 11월 9~10일 금강산호텔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한 북남종교인들의 모임’이 개최됐다. 2001년 3월 27~29일 금강산호텔과 금강원에서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와 남측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남북종교인 평화모임’을 가진 이래, 두 번째 조우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겸 조선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 강지영 위원장과 1988년 9월에 건립된 평양 장충성당 김철웅 총회장 등이 참가했다.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과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참가했으며, 강수린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4대 종교단체 5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박남수 천도교령, 어윤경 성균관장,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이은형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등 7대 종교 수장을 비롯한 조계종 교구본사 주지 등 145명이 참석해 남북 종교계의 지도부가 총출동한 셈이었다.

2015년 오전 10시 55분(한국시간 11시 25분) 금강산호텔 2층 금강홀에서 열린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은 남측 7대 종교와 북측 4대 종단 수장들이 상견례를 시작으로, 김광준 KCRP 사무총장과 서철수 조선카톨릭협회 서기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북측의 강지영 신임 조선종교인협의회장은 “우리 겨레의 통일 열망인 양 단풍이 붉게 타는 좋은 계절에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서 열리게 됐다. 남측의 종교단체 대표 여러분들의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조선종교인협의회와 북측 종교인들의 이름으로 렬렬히 환영한다.”고 축하 연설을 했다. 이어 자승 총무원장이 대표 연설을 하고, 북측의 윤정호 조선천도교회 부위원장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이, 남측은 박남수 천도교령과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어윤경 성균관장이 각각 연설했다. 이날 연설자들은 7.4선언과 6.15공동선언, 10.4선언 등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하고,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를 갈구했으며, 종교인들이 화해와 단합에 앞장서자고 호소했다.

200여 명의 종교인들은 려정선 조선천도교회 서기장과 이원형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총무가 공동 낭독한 ‘남북 종교인들의 공동성명’에서 남과 북의 종교인들이 더욱 자주 만나고 교류함으로써 연대와 단합을 강화하고, 민족의 화해와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해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국보 유적 제95호 신계사를 거쳐 금강산 구룡연까지 공동 관람에 나섰다. 강원도인민위원회가 세운 표석에 새긴 신계사 기록을 보며 합동 참배와 통일 타종을 한 남북 종교인들은 가을비로 젖은 단풍의 풍악산 길을 오르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튿날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종교별 상봉 모임을, 오후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삼일포를 함께 관람하며 우의를 다진 뒤 귀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남북 종교인들조차 위무하지 못한 금강산의 슬픈 이야기는 묻혀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금강산 승려와 백성들은 유람 관료들의 횡포에 몸서리쳤다. 연좌제 묶인 승려들은 물론, 외금강 아랫마을 온정리(따뜻한 온천마을)와 강원도 장전과 고성리 남쪽의 게방촌(해금강 적벽강변의 마을) 사람들이 그 피해자들이었다. 게방촌에서 가파른 산길 60리를 올라 유점사에 이르는 길을 맨발과도 같은 짚신을 싣고 가마를 등짐으로 메야 했다. 1894년 5월 말, 금강산을 처음 방문했던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상상의 방’이라 표현한 금강산 유점사의 전각들은 1951년 5월 10일 미극동군의 집중 폭격으로 60여 채와 석조물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 《조선중앙통신》은 2002년 12월 13일 기사에서 “미군의 유점사 폭격을 가리켜 ‘귀축 같은 만행’이었다.”라고 세상을 향해 고발했다.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 개막행사(2015.11.9. 금강산호텔). 사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홈페이지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 개막행사(2015.11.9. 금강산호텔). 사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홈페이지
남북해외여성토론회 개막식(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 한국여성단체연합 홈페이지
남북해외여성토론회 개막식(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 한국여성단체연합 홈페이지
남북해외여성토론회에서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회장의 토론발표(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통일뉴스(2014.3.29.)
남북해외여성토론회에서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회장의 토론발표(2014.3.29.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사진:통일뉴스(2014.3.29.)

중국 심양에서의 외침

2014년 1월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지정된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홈페이지(2023.3.22. 검색창)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특히 2018년 8월 동 진흥원이 여성가족부 보조금 사업으로 시작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archive814.or.kr)의 관련 연표에서조차 북측과의 교류 사항을 생략한 것을 보면, SY정권에 의한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행해지던 일본 규탄 집회까지도 몰이해 되는 현 시국에서 정의기억연대가 남측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활동 현황을 북측에 설명하고 연대활동을 제안하면서 북측 ‘조선일본군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와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1992년 8월에 발족한 북측의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그 후 2002년 5월 ‘조선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희생자위원회’(종태위)라 개칭하고, 5월 3~4일 평양에서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를 개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문필기 등 12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발족에 합의했다. 또 남북・해외동포가 일본 정부에 유엔 결의를 준수하도록 촉구하는 서한과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그 후, 2014년 3월 29일~30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칠보산호텔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조선민주여성동맹 등 20여 개의 여성・종교단체가 공동 주최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토론회’를 개최했다. 남측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한국YWCA, 전국여성연대 등, 북측에서는 조선민주여성동맹, 6·15 북측위원회 여성분과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여성부, 조선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등이 참가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분쟁 등에 대해 한목소리로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나선 남북 민간단체들은 이날 “일본군의 성노예 범죄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투쟁과 연대활동을 강력히 전개하겠다.”는 공동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리산옥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여성회장, 한국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김영녀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이 공동발표한 결의문에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을 맹비난하고, 이념・제도를 초월해 위안부 문제에 공동 대응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북측 단장인 김명숙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들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성토하고, 리정희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사는 최근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리현숙 조선불교도련맹 전국신도회 부회장은 토론 발표에서 “길원옥 할머니가 한 피눈물 나는 성토를 들으니, 정말로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 터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분개하며, “일본 당국으로부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인정과 사죄,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단순히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며, 우리 여성들의 존엄과 민족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길원옥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들의 성범죄와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아픈 기억을 꺼내자 토론회장은 숙연한 분위기가 됐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진실한 사과의 말을 듣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거듭 말했다.

특히 리현숙 전국신도회 부회장은 “일본이 고노담화 검증론을 거론하는 것은 결국, 고노담화를 철회함으로써 성노예 범죄 부정을 정책화하려는 것이다. 지난 14년 동안 세계 각국의 국회는 총 55건의 성노예 문제 결의안을 채택했고, 미국에서도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인류 공동의 과제가 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면서 “이 문제를 결산하지 못하면 역사와 선조들, 후손들이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일본 당국에는 ▲일본군 성노예 범죄 관련 자료의 전면 공개, ▲국가 명의의 정식 사죄 및 피해자・유가족에 대한 배상, ▲일본군 성노예 범죄 등 반인륜범죄의 교과서 기술”을 강력히 촉구했다.

2008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 등의 이유로 중단된 남북 간 공동토론회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 2월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되었지만, 이명박 정권의 불허 조치로 말미암아 무산됐다. 그로부터 위안부 피해 실태에 관한 남북 간 정보 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2015년 3월 중국 심양에서의 외침은 여성 존엄과 민족적 자존심을 되살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일찍이 만해 선사는 민족 대표들이 변절할 때 전향서나 반성문이 아닌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드리데, 일제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중국 심양과 금강산에서 우리 겨레가 얼싸안고 통일 만세를 높이 외쳤다. 하지만 2023년 3월 SY 대통령 내외가 일본 땅에서 벌인 온갖 추문들은 그저 참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민중들이 ‘말과 행동을 꾹 참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 다음 편은 ‘2017년 일본과의 교류사업’이 이어집니다.

----------------------------------------------------------------------------------------------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