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7. 왜 사는가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7. 왜 사는가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4.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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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웃으면 나도 웃고

비 오는 날은 꽃도 운다
날이 좋으니 꽃도 웃고
마음조차 광나게 닦은 놋쇠 그릇처럼 나도 웃는다.

내 것이 아닌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됐다.

 







#작가의 변

우리는 왜 사는가?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회 현상을 놓고 보면 돈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생활 자체가 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내 집이 아닐 경우 렌트비와 셀폰, 가스비,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아닌 회사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다음 월급을 기다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도 행복한 것이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없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심각해지고 바로 도시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기지나 신용대출도 쉽지만, 직장을 잃게 되면 쓸모없는 인간처럼 버림받은 파트 취급받게 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가 돈이 좀 있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직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쁜 직장인들 같은 경우는 2주 이상 시간을 내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기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업주는 더 심각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중소기업은 시간을 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TV 프로그램에 여행 프로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드라마도 일종의 대리 만족이고 현실에서 살아보지 못한 욕구의 분출이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벌써 28년이 지났다. 아직도 젖병을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싱가폴 항공 승무원에게 아이들 분유를 타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나중엔 미안해서 스튜디어스 스테이션에 직접 가서 분유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오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가진 돈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한 적 없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던 그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힘든 생활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 외국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늘 듣던 미국에 가면 설거지를 해서도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오는 성공담 속의 이민자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쌍둥이인 아이들이 울고 분유를 먹여서 좌석 4개에 둘을 엇갈려 누여 놓으니 잘 잤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도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가장 나중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다가 이민국에서 묵을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숙소는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분이 모텔을 잡아 주기로 했다는데, 랜딩 서비스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민국 직원이 우리를 한쪽에 붙잡아 놓고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랜딩 서비스가 이민은 물론 유학을 오는 사람들을 픽업하고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정착했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단어이기는 했다. 밖에 있는 랜딩 서비스 직원을 이민국으로 불러 설명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김포공항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밴쿠버 공항을 보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과 다른 느낌과 랜딩 서비스 나온 분이 사무실에 데려가서 오렌지와 코스코 쿠키를 줬는데 오렌지야 호텔서 일하면서 많이 먹었지만, 캐나다에서 먹는 오렌지는 육즙이 많고 달콤했다. 쿠키도 바삭한 게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이민하던 때와 어릴 적 동네 돼지 잡던 날이 왜 겹쳐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동네서 돼지고기를 먹기 쉽지 않던 시절, 동네에 가끔 오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 장사한테 사는 고등어자반이나 이면수 자반 말고는 사실 고기 구경이 쉽지 않던 시골 동네에 돼지를 잡는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를 눕혀 놓고 멱을 딴다. 멱을 따는 밑에는 양동이를 받혀 놓고 피를 받아 놓는데 이것이 선지다. 그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간 염통 등의 내장을 바로 먹는 사람도 있다. 피를 따뜻할 때 마시기도 한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돼지가 소리를 못 지르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돼지털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털을 없앴던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기억이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리는 다리대로, 갈비는 갈비대로, 돼지의 사지가 찢겨나간다. 그리고 신문지에 둘둘 싸져 집마다 나누어 간다. 그렇게 나눈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서 먹고 화롯불에 구워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고기를 구경 못하던 동네에 고기 잔치가 벌어진다. 유목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광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때 만해도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몰랐다. 물론 나중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인 검둥이가 쥐를 잡겠다고 놓은 농약을 먹고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마루 밑에서 울부짖던 그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하던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애원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돼지나 개는 집에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동물이지 사료를 먹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검둥이도 늘 단백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똥을 먹게 되고 그래서 똥개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배도 고프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그냥 둘리 없는 똥개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 밥상에 그렇게 단백질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도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고급 차와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집이 없거나 넓은 고급 빌라에 살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많이 느끼고 TV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해 소식을 듣지만 당시엔 소문뿐인 상태여서 밥에 보리나 감자가 덜 섞였으면 하는 바람이나 김치찌개에 두부를 사다가 넣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검둥이의 무덤을 집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주고 왔다. 그런데 동네 청년들이 내가 묻어 놓은 검둥이를 꺼내어 먹었다는 소문을 다음날 듣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백질이 부족한 야생 늑대가 고기를 묻어 둔다는 것은 저장을 위한 것이지 무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검둥이를 꺼내서 해 먹었다는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보였다.

돈은 멀고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진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시골이다. 동네에 창꽃이라 불리던 진달래가 피고 묘 둥지 옆에 할미꽃도 슬며시 다녀 가면 산에 벚꽃이 피고 개울가에 아까시나무엔 아까시 꽃이 피는데 그 꽃엔 꿀이 많아 아주 달다. 진달래도 먹고 아까시 꽃도 먹고 아이들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늘 상처받았다. 사랑방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가 해먹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동네 누가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적반하장으로 삼자대면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따졌다. 어린 마음에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엉엉 울고 말았다. 토끼 먹이를 준다고 뽕잎을 따다가 주고 토끼풀을 뜯어 다 주고 얼마나 공을 들였고, 정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 주는 말과 행동만 했다. 도덕이 존재했지만 서리라는 이름을 남의 집 가축을 훔쳐다가 먹으면서도 했다. 닭서리, 토끼 서리, 무덤을 만들어 준 검둥이 가져다 먹은 것도 서리인가?

사회에는 법이 있고 도덕이 있지만 사실 욕심과 욕구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능에 더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랑잎 밑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사람이 접근하면 공격한다. 그런 뱀을 겁이 많은 나는 비료 포대에 툭 던져 넣고 시내에 뱀 장사한테 팔았다. 뱀장사 집엔 뭉치로 마치 축구공같이 뭉쳐 있는 뱀 무리를 보기도 했다. 물론 뒷집에 친구 아버지는 뱀을 좋아해서 껍질 벗긴 하얀 뱀을 뚝배기에 넣고 달여 먹었는데 뚝배기에서 나온 그것을 보는데 껍질 벗긴 것이 살아 뚝배기서 나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본능적으로 살고도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가식 속에 살면서 속고 속이고 아픔을 주고 이성적이란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약육강식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은 좀 더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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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웃으면 나도 웃고

비 오는 날은 꽃도 운다
날이 좋으니 꽃도 웃고
마음조차 광나게 닦은 놋쇠 그릇처럼 나도 웃는다.

내 것이 아닌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됐다.

 





꽃이 웃으면 나도 웃고

비 오는 날은 꽃도 운다
날이 좋으니 꽃도 웃고
마음조차 광나게 닦은 놋쇠 그릇처럼 나도 웃는다.

내 것이 아닌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됐다.

 







#작가의 변

우리는 왜 사는가?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회 현상을 놓고 보면 돈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생활 자체가 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내 집이 아닐 경우 렌트비와 셀폰, 가스비,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아닌 회사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다음 월급을 기다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도 행복한 것이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없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심각해지고 바로 도시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기지나 신용대출도 쉽지만, 직장을 잃게 되면 쓸모없는 인간처럼 버림받은 파트 취급받게 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가 돈이 좀 있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직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쁜 직장인들 같은 경우는 2주 이상 시간을 내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기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업주는 더 심각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중소기업은 시간을 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TV 프로그램에 여행 프로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드라마도 일종의 대리 만족이고 현실에서 살아보지 못한 욕구의 분출이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벌써 28년이 지났다. 아직도 젖병을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싱가폴 항공 승무원에게 아이들 분유를 타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나중엔 미안해서 스튜디어스 스테이션에 직접 가서 분유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오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가진 돈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한 적 없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던 그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힘든 생활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 외국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늘 듣던 미국에 가면 설거지를 해서도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오는 성공담 속의 이민자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쌍둥이인 아이들이 울고 분유를 먹여서 좌석 4개에 둘을 엇갈려 누여 놓으니 잘 잤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도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가장 나중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다가 이민국에서 묵을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숙소는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분이 모텔을 잡아 주기로 했다는데, 랜딩 서비스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민국 직원이 우리를 한쪽에 붙잡아 놓고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랜딩 서비스가 이민은 물론 유학을 오는 사람들을 픽업하고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정착했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단어이기는 했다. 밖에 있는 랜딩 서비스 직원을 이민국으로 불러 설명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김포공항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밴쿠버 공항을 보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과 다른 느낌과 랜딩 서비스 나온 분이 사무실에 데려가서 오렌지와 코스코 쿠키를 줬는데 오렌지야 호텔서 일하면서 많이 먹었지만, 캐나다에서 먹는 오렌지는 육즙이 많고 달콤했다. 쿠키도 바삭한 게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이민하던 때와 어릴 적 동네 돼지 잡던 날이 왜 겹쳐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동네서 돼지고기를 먹기 쉽지 않던 시절, 동네에 가끔 오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 장사한테 사는 고등어자반이나 이면수 자반 말고는 사실 고기 구경이 쉽지 않던 시골 동네에 돼지를 잡는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를 눕혀 놓고 멱을 딴다. 멱을 따는 밑에는 양동이를 받혀 놓고 피를 받아 놓는데 이것이 선지다. 그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간 염통 등의 내장을 바로 먹는 사람도 있다. 피를 따뜻할 때 마시기도 한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돼지가 소리를 못 지르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돼지털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털을 없앴던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기억이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리는 다리대로, 갈비는 갈비대로, 돼지의 사지가 찢겨나간다. 그리고 신문지에 둘둘 싸져 집마다 나누어 간다. 그렇게 나눈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서 먹고 화롯불에 구워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고기를 구경 못하던 동네에 고기 잔치가 벌어진다. 유목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광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때 만해도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몰랐다. 물론 나중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인 검둥이가 쥐를 잡겠다고 놓은 농약을 먹고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마루 밑에서 울부짖던 그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하던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애원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돼지나 개는 집에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동물이지 사료를 먹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검둥이도 늘 단백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똥을 먹게 되고 그래서 똥개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배도 고프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그냥 둘리 없는 똥개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 밥상에 그렇게 단백질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도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고급 차와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집이 없거나 넓은 고급 빌라에 살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많이 느끼고 TV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해 소식을 듣지만 당시엔 소문뿐인 상태여서 밥에 보리나 감자가 덜 섞였으면 하는 바람이나 김치찌개에 두부를 사다가 넣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검둥이의 무덤을 집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주고 왔다. 그런데 동네 청년들이 내가 묻어 놓은 검둥이를 꺼내어 먹었다는 소문을 다음날 듣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백질이 부족한 야생 늑대가 고기를 묻어 둔다는 것은 저장을 위한 것이지 무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검둥이를 꺼내서 해 먹었다는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보였다.

돈은 멀고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진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시골이다. 동네에 창꽃이라 불리던 진달래가 피고 묘 둥지 옆에 할미꽃도 슬며시 다녀 가면 산에 벚꽃이 피고 개울가에 아까시나무엔 아까시 꽃이 피는데 그 꽃엔 꿀이 많아 아주 달다. 진달래도 먹고 아까시 꽃도 먹고 아이들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늘 상처받았다. 사랑방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가 해먹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동네 누가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적반하장으로 삼자대면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따졌다. 어린 마음에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엉엉 울고 말았다. 토끼 먹이를 준다고 뽕잎을 따다가 주고 토끼풀을 뜯어 다 주고 얼마나 공을 들였고, 정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 주는 말과 행동만 했다. 도덕이 존재했지만 서리라는 이름을 남의 집 가축을 훔쳐다가 먹으면서도 했다. 닭서리, 토끼 서리, 무덤을 만들어 준 검둥이 가져다 먹은 것도 서리인가?

사회에는 법이 있고 도덕이 있지만 사실 욕심과 욕구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능에 더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랑잎 밑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사람이 접근하면 공격한다. 그런 뱀을 겁이 많은 나는 비료 포대에 툭 던져 넣고 시내에 뱀 장사한테 팔았다. 뱀장사 집엔 뭉치로 마치 축구공같이 뭉쳐 있는 뱀 무리를 보기도 했다. 물론 뒷집에 친구 아버지는 뱀을 좋아해서 껍질 벗긴 하얀 뱀을 뚝배기에 넣고 달여 먹었는데 뚝배기에서 나온 그것을 보는데 껍질 벗긴 것이 살아 뚝배기서 나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본능적으로 살고도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가식 속에 살면서 속고 속이고 아픔을 주고 이성적이란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약육강식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은 좀 더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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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우리는 왜 사는가?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회 현상을 놓고 보면 돈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생활 자체가 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내 집이 아닐 경우 렌트비와 셀폰, 가스비,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아닌 회사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다음 월급을 기다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도 행복한 것이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없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심각해지고 바로 도시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기지나 신용대출도 쉽지만, 직장을 잃게 되면 쓸모없는 인간처럼 버림받은 파트 취급받게 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가 돈이 좀 있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직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쁜 직장인들 같은 경우는 2주 이상 시간을 내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기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업주는 더 심각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중소기업은 시간을 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TV 프로그램에 여행 프로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드라마도 일종의 대리 만족이고 현실에서 살아보지 못한 욕구의 분출이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벌써 28년이 지났다. 아직도 젖병을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싱가폴 항공 승무원에게 아이들 분유를 타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나중엔 미안해서 스튜디어스 스테이션에 직접 가서 분유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오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가진 돈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한 적 없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던 그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힘든 생활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 외국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늘 듣던 미국에 가면 설거지를 해서도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오는 성공담 속의 이민자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쌍둥이인 아이들이 울고 분유를 먹여서 좌석 4개에 둘을 엇갈려 누여 놓으니 잘 잤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도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가장 나중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다가 이민국에서 묵을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숙소는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분이 모텔을 잡아 주기로 했다는데, 랜딩 서비스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민국 직원이 우리를 한쪽에 붙잡아 놓고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랜딩 서비스가 이민은 물론 유학을 오는 사람들을 픽업하고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정착했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단어이기는 했다. 밖에 있는 랜딩 서비스 직원을 이민국으로 불러 설명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김포공항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밴쿠버 공항을 보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과 다른 느낌과 랜딩 서비스 나온 분이 사무실에 데려가서 오렌지와 코스코 쿠키를 줬는데 오렌지야 호텔서 일하면서 많이 먹었지만, 캐나다에서 먹는 오렌지는 육즙이 많고 달콤했다. 쿠키도 바삭한 게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이민하던 때와 어릴 적 동네 돼지 잡던 날이 왜 겹쳐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동네서 돼지고기를 먹기 쉽지 않던 시절, 동네에 가끔 오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 장사한테 사는 고등어자반이나 이면수 자반 말고는 사실 고기 구경이 쉽지 않던 시골 동네에 돼지를 잡는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를 눕혀 놓고 멱을 딴다. 멱을 따는 밑에는 양동이를 받혀 놓고 피를 받아 놓는데 이것이 선지다. 그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간 염통 등의 내장을 바로 먹는 사람도 있다. 피를 따뜻할 때 마시기도 한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돼지가 소리를 못 지르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돼지털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털을 없앴던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기억이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리는 다리대로, 갈비는 갈비대로, 돼지의 사지가 찢겨나간다. 그리고 신문지에 둘둘 싸져 집마다 나누어 간다. 그렇게 나눈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서 먹고 화롯불에 구워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고기를 구경 못하던 동네에 고기 잔치가 벌어진다. 유목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광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때 만해도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몰랐다. 물론 나중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인 검둥이가 쥐를 잡겠다고 놓은 농약을 먹고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마루 밑에서 울부짖던 그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하던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애원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돼지나 개는 집에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동물이지 사료를 먹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검둥이도 늘 단백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똥을 먹게 되고 그래서 똥개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배도 고프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그냥 둘리 없는 똥개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 밥상에 그렇게 단백질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도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고급 차와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집이 없거나 넓은 고급 빌라에 살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많이 느끼고 TV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해 소식을 듣지만 당시엔 소문뿐인 상태여서 밥에 보리나 감자가 덜 섞였으면 하는 바람이나 김치찌개에 두부를 사다가 넣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꽃이 웃으면 나도 웃고

비 오는 날은 꽃도 운다
날이 좋으니 꽃도 웃고
마음조차 광나게 닦은 놋쇠 그릇처럼 나도 웃는다.

내 것이 아닌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됐다.

 







#작가의 변

우리는 왜 사는가?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회 현상을 놓고 보면 돈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생활 자체가 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내 집이 아닐 경우 렌트비와 셀폰, 가스비,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아닌 회사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다음 월급을 기다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도 행복한 것이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없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심각해지고 바로 도시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기지나 신용대출도 쉽지만, 직장을 잃게 되면 쓸모없는 인간처럼 버림받은 파트 취급받게 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가 돈이 좀 있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직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쁜 직장인들 같은 경우는 2주 이상 시간을 내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기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업주는 더 심각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중소기업은 시간을 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TV 프로그램에 여행 프로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드라마도 일종의 대리 만족이고 현실에서 살아보지 못한 욕구의 분출이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벌써 28년이 지났다. 아직도 젖병을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싱가폴 항공 승무원에게 아이들 분유를 타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나중엔 미안해서 스튜디어스 스테이션에 직접 가서 분유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오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가진 돈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한 적 없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던 그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힘든 생활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 외국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늘 듣던 미국에 가면 설거지를 해서도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오는 성공담 속의 이민자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쌍둥이인 아이들이 울고 분유를 먹여서 좌석 4개에 둘을 엇갈려 누여 놓으니 잘 잤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도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가장 나중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다가 이민국에서 묵을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숙소는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분이 모텔을 잡아 주기로 했다는데, 랜딩 서비스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민국 직원이 우리를 한쪽에 붙잡아 놓고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랜딩 서비스가 이민은 물론 유학을 오는 사람들을 픽업하고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정착했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단어이기는 했다. 밖에 있는 랜딩 서비스 직원을 이민국으로 불러 설명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김포공항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밴쿠버 공항을 보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과 다른 느낌과 랜딩 서비스 나온 분이 사무실에 데려가서 오렌지와 코스코 쿠키를 줬는데 오렌지야 호텔서 일하면서 많이 먹었지만, 캐나다에서 먹는 오렌지는 육즙이 많고 달콤했다. 쿠키도 바삭한 게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이민하던 때와 어릴 적 동네 돼지 잡던 날이 왜 겹쳐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동네서 돼지고기를 먹기 쉽지 않던 시절, 동네에 가끔 오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 장사한테 사는 고등어자반이나 이면수 자반 말고는 사실 고기 구경이 쉽지 않던 시골 동네에 돼지를 잡는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를 눕혀 놓고 멱을 딴다. 멱을 따는 밑에는 양동이를 받혀 놓고 피를 받아 놓는데 이것이 선지다. 그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간 염통 등의 내장을 바로 먹는 사람도 있다. 피를 따뜻할 때 마시기도 한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돼지가 소리를 못 지르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돼지털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털을 없앴던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기억이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리는 다리대로, 갈비는 갈비대로, 돼지의 사지가 찢겨나간다. 그리고 신문지에 둘둘 싸져 집마다 나누어 간다. 그렇게 나눈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서 먹고 화롯불에 구워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고기를 구경 못하던 동네에 고기 잔치가 벌어진다. 유목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광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때 만해도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몰랐다. 물론 나중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인 검둥이가 쥐를 잡겠다고 놓은 농약을 먹고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마루 밑에서 울부짖던 그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하던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애원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돼지나 개는 집에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동물이지 사료를 먹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검둥이도 늘 단백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똥을 먹게 되고 그래서 똥개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배도 고프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그냥 둘리 없는 똥개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 밥상에 그렇게 단백질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도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고급 차와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집이 없거나 넓은 고급 빌라에 살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많이 느끼고 TV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해 소식을 듣지만 당시엔 소문뿐인 상태여서 밥에 보리나 감자가 덜 섞였으면 하는 바람이나 김치찌개에 두부를 사다가 넣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검둥이의 무덤을 집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주고 왔다. 그런데 동네 청년들이 내가 묻어 놓은 검둥이를 꺼내어 먹었다는 소문을 다음날 듣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백질이 부족한 야생 늑대가 고기를 묻어 둔다는 것은 저장을 위한 것이지 무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검둥이를 꺼내서 해 먹었다는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보였다.

돈은 멀고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진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시골이다. 동네에 창꽃이라 불리던 진달래가 피고 묘 둥지 옆에 할미꽃도 슬며시 다녀 가면 산에 벚꽃이 피고 개울가에 아까시나무엔 아까시 꽃이 피는데 그 꽃엔 꿀이 많아 아주 달다. 진달래도 먹고 아까시 꽃도 먹고 아이들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늘 상처받았다. 사랑방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가 해먹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동네 누가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적반하장으로 삼자대면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따졌다. 어린 마음에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엉엉 울고 말았다. 토끼 먹이를 준다고 뽕잎을 따다가 주고 토끼풀을 뜯어 다 주고 얼마나 공을 들였고, 정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 주는 말과 행동만 했다. 도덕이 존재했지만 서리라는 이름을 남의 집 가축을 훔쳐다가 먹으면서도 했다. 닭서리, 토끼 서리, 무덤을 만들어 준 검둥이 가져다 먹은 것도 서리인가?

사회에는 법이 있고 도덕이 있지만 사실 욕심과 욕구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능에 더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랑잎 밑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사람이 접근하면 공격한다. 그런 뱀을 겁이 많은 나는 비료 포대에 툭 던져 넣고 시내에 뱀 장사한테 팔았다. 뱀장사 집엔 뭉치로 마치 축구공같이 뭉쳐 있는 뱀 무리를 보기도 했다. 물론 뒷집에 친구 아버지는 뱀을 좋아해서 껍질 벗긴 하얀 뱀을 뚝배기에 넣고 달여 먹었는데 뚝배기에서 나온 그것을 보는데 껍질 벗긴 것이 살아 뚝배기서 나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본능적으로 살고도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가식 속에 살면서 속고 속이고 아픔을 주고 이성적이란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약육강식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은 좀 더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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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이의 무덤을 집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주고 왔다. 그런데 동네 청년들이 내가 묻어 놓은 검둥이를 꺼내어 먹었다는 소문을 다음날 듣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백질이 부족한 야생 늑대가 고기를 묻어 둔다는 것은 저장을 위한 것이지 무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검둥이를 꺼내서 해 먹었다는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보였다.

돈은 멀고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진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시골이다. 동네에 창꽃이라 불리던 진달래가 피고 묘 둥지 옆에 할미꽃도 슬며시 다녀 가면 산에 벚꽃이 피고 개울가에 아까시나무엔 아까시 꽃이 피는데 그 꽃엔 꿀이 많아 아주 달다. 진달래도 먹고 아까시 꽃도 먹고 아이들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늘 상처받았다. 사랑방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가 해먹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동네 누가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적반하장으로 삼자대면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따졌다. 어린 마음에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엉엉 울고 말았다. 토끼 먹이를 준다고 뽕잎을 따다가 주고 토끼풀을 뜯어 다 주고 얼마나 공을 들였고, 정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 주는 말과 행동만 했다. 도덕이 존재했지만 서리라는 이름을 남의 집 가축을 훔쳐다가 먹으면서도 했다. 닭서리, 토끼 서리, 무덤을 만들어 준 검둥이 가져다 먹은 것도 서리인가?

사회에는 법이 있고 도덕이 있지만 사실 욕심과 욕구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능에 더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랑잎 밑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사람이 접근하면 공격한다. 그런 뱀을 겁이 많은 나는 비료 포대에 툭 던져 넣고 시내에 뱀 장사한테 팔았다. 뱀장사 집엔 뭉치로 마치 축구공같이 뭉쳐 있는 뱀 무리를 보기도 했다. 물론 뒷집에 친구 아버지는 뱀을 좋아해서 껍질 벗긴 하얀 뱀을 뚝배기에 넣고 달여 먹었는데 뚝배기에서 나온 그것을 보는데 껍질 벗긴 것이 살아 뚝배기서 나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본능적으로 살고도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가식 속에 살면서 속고 속이고 아픔을 주고 이성적이란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약육강식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은 좀 더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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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웃으면 나도 웃고

비 오는 날은 꽃도 운다
날이 좋으니 꽃도 웃고
마음조차 광나게 닦은 놋쇠 그릇처럼 나도 웃는다.

내 것이 아닌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됐다.

 







#작가의 변

우리는 왜 사는가?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회 현상을 놓고 보면 돈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생활 자체가 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내 집이 아닐 경우 렌트비와 셀폰, 가스비,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등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아닌 회사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다음 월급을 기다려야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쳇바퀴 돌아가는 생활도 행복한 것이다. 만약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없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심각해지고 바로 도시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기지나 신용대출도 쉽지만, 직장을 잃게 되면 쓸모없는 인간처럼 버림받은 파트 취급받게 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중 하나가 돈이 좀 있으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물론 직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쁜 직장인들 같은 경우는 2주 이상 시간을 내서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기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업주는 더 심각하다. 대부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중소기업은 시간을 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TV 프로그램에 여행 프로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드라마도 일종의 대리 만족이고 현실에서 살아보지 못한 욕구의 분출이다.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벌써 28년이 지났다. 아직도 젖병을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싱가폴 항공 승무원에게 아이들 분유를 타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나중엔 미안해서 스튜디어스 스테이션에 직접 가서 분유병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오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가진 돈도 없이 해외여행 한번 한 적 없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던 그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힘든 생활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 외국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늘 듣던 미국에 가면 설거지를 해서도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오는 성공담 속의 이민자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쌍둥이인 아이들이 울고 분유를 먹여서 좌석 4개에 둘을 엇갈려 누여 놓으니 잘 잤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도 아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가장 나중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오다가 이민국에서 묵을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숙소는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분이 모텔을 잡아 주기로 했다는데, 랜딩 서비스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이민국 직원이 우리를 한쪽에 붙잡아 놓고 내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랜딩 서비스가 이민은 물론 유학을 오는 사람들을 픽업하고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정착했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단어이기는 했다. 밖에 있는 랜딩 서비스 직원을 이민국으로 불러 설명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김포공항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밴쿠버 공항을 보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과 다른 느낌과 랜딩 서비스 나온 분이 사무실에 데려가서 오렌지와 코스코 쿠키를 줬는데 오렌지야 호텔서 일하면서 많이 먹었지만, 캐나다에서 먹는 오렌지는 육즙이 많고 달콤했다. 쿠키도 바삭한 게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이민하던 때와 어릴 적 동네 돼지 잡던 날이 왜 겹쳐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동네서 돼지고기를 먹기 쉽지 않던 시절, 동네에 가끔 오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 장사한테 사는 고등어자반이나 이면수 자반 말고는 사실 고기 구경이 쉽지 않던 시골 동네에 돼지를 잡는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돼지 잡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를 눕혀 놓고 멱을 딴다. 멱을 따는 밑에는 양동이를 받혀 놓고 피를 받아 놓는데 이것이 선지다. 그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간 염통 등의 내장을 바로 먹는 사람도 있다. 피를 따뜻할 때 마시기도 한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돼지가 소리를 못 지르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돼지털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털을 없앴던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기억이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리는 다리대로, 갈비는 갈비대로, 돼지의 사지가 찢겨나간다. 그리고 신문지에 둘둘 싸져 집마다 나누어 간다. 그렇게 나눈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서 먹고 화롯불에 구워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고기를 구경 못하던 동네에 고기 잔치가 벌어진다. 유목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광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때 만해도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몰랐다. 물론 나중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인 검둥이가 쥐를 잡겠다고 놓은 농약을 먹고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마루 밑에서 울부짖던 그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하던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 애원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돼지나 개는 집에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동물이지 사료를 먹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검둥이도 늘 단백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똥을 먹게 되고 그래서 똥개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배도 고프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그냥 둘리 없는 똥개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 집 밥상에 그렇게 단백질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도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고급 차와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집이 없거나 넓은 고급 빌라에 살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많이 느끼고 TV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해 소식을 듣지만 당시엔 소문뿐인 상태여서 밥에 보리나 감자가 덜 섞였으면 하는 바람이나 김치찌개에 두부를 사다가 넣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검둥이의 무덤을 집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주고 왔다. 그런데 동네 청년들이 내가 묻어 놓은 검둥이를 꺼내어 먹었다는 소문을 다음날 듣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백질이 부족한 야생 늑대가 고기를 묻어 둔다는 것은 저장을 위한 것이지 무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검둥이를 꺼내서 해 먹었다는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보였다.

돈은 멀고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진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시골이다. 동네에 창꽃이라 불리던 진달래가 피고 묘 둥지 옆에 할미꽃도 슬며시 다녀 가면 산에 벚꽃이 피고 개울가에 아까시나무엔 아까시 꽃이 피는데 그 꽃엔 꿀이 많아 아주 달다. 진달래도 먹고 아까시 꽃도 먹고 아이들은 야생의 들짐승처럼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늘 상처받았다. 사랑방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가 해먹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동네 누가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적반하장으로 삼자대면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 따졌다. 어린 마음에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엉엉 울고 말았다. 토끼 먹이를 준다고 뽕잎을 따다가 주고 토끼풀을 뜯어 다 주고 얼마나 공을 들였고, 정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 주는 말과 행동만 했다. 도덕이 존재했지만 서리라는 이름을 남의 집 가축을 훔쳐다가 먹으면서도 했다. 닭서리, 토끼 서리, 무덤을 만들어 준 검둥이 가져다 먹은 것도 서리인가?

사회에는 법이 있고 도덕이 있지만 사실 욕심과 욕구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능에 더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랑잎 밑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사람이 접근하면 공격한다. 그런 뱀을 겁이 많은 나는 비료 포대에 툭 던져 넣고 시내에 뱀 장사한테 팔았다. 뱀장사 집엔 뭉치로 마치 축구공같이 뭉쳐 있는 뱀 무리를 보기도 했다. 물론 뒷집에 친구 아버지는 뱀을 좋아해서 껍질 벗긴 하얀 뱀을 뚝배기에 넣고 달여 먹었는데 뚝배기에서 나온 그것을 보는데 껍질 벗긴 것이 살아 뚝배기서 나왔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본능적으로 살고도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가식 속에 살면서 속고 속이고 아픔을 주고 이성적이란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약육강식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은 좀 더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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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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