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8. 2016년 일본과의 교류사업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8. 2016년 일본과의 교류사업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4.1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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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존경합니다(本当に尊敬)”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옛 인물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그저 도래인(渡来人, 물을 건너온 사람)이라 부른다.

일본에서 ‘청구(靑丘) 성자’로 불리는 원효대사는 이광수가 1948년 장편소설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이 세상에 다녀간 뒤에 불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리라.”고 썼다.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제창했고, 관세음보살을 덧붙인 사람은 의상대사이다. 원효가 세상에 제안한 것을, 의상이 불교적으로 완성했다. 출가와 재가자의 경계조차 뛰어넘은 원효성사는 일본 학계에서 존경하는 것과 달리 출가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의상대사에 대한 일본에서의 낮은 평가는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신라 서라벌에서 불멸이 된 원효・의상대사와 다르게 일본에서 먼저 추앙된 인물이 있다. 일본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 도쿄대학 부설 기소관측소 교수는 고사이 히로키와 함께 1977년 발견한 우주 소행성 제4963호에 ‘간로쿠’(KANROKU, 觀勒)라는 명칭을 붙여 1998년 3월 국제천문연맹에 등록했다. 1997년 일본 나라 아스카데라(飛鳥寺) 연못에서 출토된 677년 목간(木簡)으로, 그 실체가 증명된 관륵은 602년 10월 왜국으로 건너가 백제 문물을 전하고,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가 됐다. 일본 아스카 시대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때인 624년 왜국의 초대 승정(교단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관륵조사는 600년 융운대사와 함께 내금강 정양사를 창건한 인물로, 1792년 편찬된 《회양읍지》에 기록됐다.

또 다른 인물은 고구려 학승 담징이다. 610년 3월 백제를 경유해 일본에 건너간 담징은 쇼토쿠 태자가 아버지 요메이 왕의 명복을 위해 호류지 금당 벽면에 불상을 그려달라고 요청해서 그린 것이 유명한 ‘사불정토도’(석가・아미타・미륵・약사불로 구성된 그림) 설이다. 일본 나라현의 호류지(法隆寺)는 670년 창건됐는데, 담징은 631년에 입적한 후였다.

법륭사 금당벽화 설은 19세기 일본 메이지 시대의 미술학자 다카야마 쵸규가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처음 주창하면서 국내에서도 이 속설을 따랐다. 문일평과 오세창의 담징 설명과 특히, 이병도가 《신수국사대관》(1956년)에서 “일본 고대 미술의 자랑인 법륭사 금당벽화도 담징의 원화(原畵)에 의한 것이다.”라고 서술 주창하면서 현행 역사 교과서에까지 수록됐다. 일본인이 주장한 속설을 한국 학계가 그대로 받아들인 사례다.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어버린 ‘한일합작의 역사 왜곡’이다. 석굴암・중국 윈강석굴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이라고 일본 측이 곧잘 만드는 세계나 동양 3대와 같은 비공식 컨셉을 따른 학술 사대의 이유도 풍긴다.

고구려 담징 화상은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7세기 초, 왜국 왕실에 물감과 닥나무 제지의 비법과 맷돌(연자방아) 만드는 방법을 최초로 전래한 학승이다. 그 담징으로 기록한 《니혼쇼키(日本書紀)》를 다시 해부해 볼 까닭이 있다. 지금까지 식민사관에 입각한 인물 평가들과 달리 “참으로 존경합니다”(혼도니 손케)로 재조명된 우리나라 역사 인물에 의한 국제교류가 일본과 북조선 사이에 추진됐다. 그 현장인 개성 영통사에서 전개된 조・일 민간외교와 남북불교 교류에 대해 살펴본다.

일본 최초의 승정 관륵조사 목조상. 사진: 일본나라국립박물관 쇼토쿠태자 1400주기 특별전(2021.4.27.)





관륵조사가 창건한 내금강 정양사 탐방객(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Ⅳ》, 260쪽





개성특별시에서 오관산 영통사로 가는 길목(2012.5.2.). 사진: 《robgs87》 페이스북



영통사, 조일 민간외교의 산실

지금으로부터 1,450여 년 전에 한・일 문화외교는 관륵과 아좌태자가 바닷길을 열었다. 관륵조사는 602년 10월 강원도 원산항에서 동해 뱃길로 건너가 나라현 겐코지(元興寺)에 머물며 ‘구다라’(백제의 일본말) 학문을 가르쳤다. 일본 아스카 왕실의 쇼토쿠 태자가 존경해 모셨던 관륵조사는 왜나라 조정에 달력의 역법을 가르치고, 천문과 지리학 그리고 병법인 둔갑방술을 비롯한 다양한 선진 구다라 학문을 전하여 지금까지 일본인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관륵의 일본 도착보다 앞서 577년 백제에서 파견한 인물 가운데 주금사(주문을 읽어서 질병을 물리치는 직책의 관료)가 있었다.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는 597년 4월 충남 남양항에서 서남해 뱃길로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일본서기》와 《성덕태자전사기》 등에 전한다. 지금,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이 그림은 일본 최고의 초상화이다.

그 후, 왜국과 일본국에 이르기까지 존경받는 인물로 11세기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꼽힌다. 일본 임제종의 총본산인 쇼코쿠지(相國寺)를 비롯해 ‘황금의 집’이라는 킨카쿠지(金閣寺)・은박을 입힌 집이 없는 긴카쿠지(銀閣寺) 등 쿄토 고잔(임제종 사찰의 순위제도)의 사찰들을 중심으로 대각국사 의천을 추앙하고 있다.

1392년에 창건된 쇼코쿠지는 1423년 12월 조선 세종에게 하사받은 밀교 대장경판과 금자(金字) 《80화엄경》・《주(注)화엄경판》을 소장한 사찰이다.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진 1425년 5월 상국사의 화재로 모두 소실돼 그 유물들은 전하지 않는다. 11세기 초,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 정원 법사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에서 새긴 《대방광불화엄경소》(120권)의 목판인 《주화엄경판》은 개성 영통사에 보관됐다. 세종의 왕명에 의해 황남 장연군 몽금포의 금사사 밀교 대장경판과 개성 영통사의 《주화엄경판》・운암사의 금자 사경본 《화엄경》을 뱃길로 한양에 옮겨진 다음, 일본 사승(승려 신분의 사신) 게이쥬(圭籌)와 본레이(梵齡) 등 135명에게 대장경이 처음 하사됐다.

그로부터 쿄토 고잔(五山) 문학의 중심지가 된 쇼코쿠지는 동아시아의 문명 총서인 고려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 후손들은 대장경을 하사한 사람보다 대장경 주석서를 집대성한 대각국사를 추앙했다. 일본의 오토가와 코분(2002. 사망)을 정신적 멘토로 삼은 스티브 잡스(2011.10.5. 사망)와 입적한 날이 같은 대각국사 의천(1101.10.5. 열반)은 당대 최고의 소셜디자이너였다. 이들은 집중(focus)과 단순(simplicity)이란 화두를 들고서 고려와 미국에서 천년의 간극을 넘어 학술・지석정보 콘텐츠 황제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일본 쿄토 사찰들이 개성 영통사를 순례하는 것은 그들이 전해 받은 대장경의 고향이던 금사사와 운암사가 사라지고, 개성 영통사가 2005년 10월 복원되면서다. 영통사는 세납 47세의 짧은 삶을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한 사찰인 동시에 돌아가 안장된 입멸처이다. 이곳은 1998년 상반기부터 일본 다이쇼 대학이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영통사 유적발굴조사를 추진하는 등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본 쿄토 상국사 아리마 라이테이 관장을 비롯해 일본불교협회 소속의 10여 명은 중국 베이징을 경유, 평양으로 들어가 2000년 6월 개성 영통사 터를 방문했다 쿄토 금각사 주지 타케모토 슌은 평양에서 북측 내각의 문화성 고문과 개성 영통사복원위원회 일본대표로 추대됐다. 2006년 5월 25일에는 조・일불교 공동으로 영통사 낙경법요식을 개최했다. 금각사와 은각사 주지・상국사 관장・경도불교협회 이사장・일본 천태종 종무총장 등 80명이 방문했다. 북측에서도 개성 영통사 혜명 주지와 정각 부전, 관음사 주지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때 일본과 북측 문화성 관계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 유골조사 협력에 관한 협의를 처음 가졌다.

그 후, 1995년 10월에 설립된 일본 세계평화재단(RMC)이 개성 영통사 방문단 행사를 주관하면서 영통사는 조・일 민간외교의 산실로 급부상했다. 2015년 11월 25일 제1회 개성・영통사 순례 법요식에는 쿄토 금각사 주지 등 60명이, 2016년 10월 30일 제2회 법요식에는 50명, 2017년 11월 16일 제3회 법요식에는 30명, 2018년 11월 21일 제4회 법요식에는 30명이 순례했다. 2019년에 열리기로 한 제5회 법요식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돼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7년부터 개성 영통사 주지(관리인)에 취임한 정각대사는 안내와 불교 의식을 주관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방문할 때마다 “일본불교 인사들이 대각국사 의천에 대해 ‘참으로 존경합니다’(本当に尊敬)라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고 일본 세계평화재단과 프랑스의 AFP 통신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2006년 영통사 주지에 취임했던 혜명대사는 고문으로 직함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 2010년부터 개성시 인민위원회 소속으로 조불련 중앙위원회에 등록된 3~4명의 영통사 승려들은 삭발여미하고 법복을 착용하며, 출퇴근하고 있다.



개성 영통사 보광원 5층 석탑과 정각대사 뒷모습(2010.4.27.). 사진: Eric Lafforgue 페이스북





조일불교 공동의 개성 영통사 낙경법요식(2006.5.25.) 사진: 일본 세계평화재단(RMC) 홈페이지





제4회 개성・영통사 순례 법요식(2018.11.21.) 사진: 《AFP 통신사》(2018.11.22.)



남북불교, 단절의 시간

북측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2015년 12월 30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높아지게 될 새해 2016년에 민족의 화해와 단합, 북남공동선언 리행과 북남관계 개선을 위하여 북남불교도들 사이의 련대가 더욱 강화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원장 스님과 귀 단체의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하시는 일에 불은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새해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도 2016년과 2017년 두 해 동안 남북불교 교류는 멈추었다. 북측은 2016년 1월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제4차 핵실험(수소탄 6kt급)을 강행했다. 그해 2월 10일 오후 5시경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가 발표됐다. 그해 3월 6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신법타 신임본부장은 남측 언론을 통해 북측 조불련에 봉축 ‘남북 공동발원문’의 채택과 동시 발표를 공개 제안했다. 통상적으로 매년 2~3월 중국 베이징과 선양, 개성 등에서 교류회의를 통해 결정해온 사안에 대해 남북의 불가역적 상황을 극복한 새로운 묘수였다.

36년 만에 개최한 조선로동당 제7차 당대회(2016.5.6.)보다 앞서 조불련은 5월 초, 강수린 위원장 명의로 공동발원문을 조계종 민추본에 전달했다. 조계종단은 5월 14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법회에서 공동발원문을 발표하지 않고, 연등법회 ‘기원문’으로 대체했다. 공개 제의로 상호 공유했던 남북 공동발원문의 미발표는 조계종 총무원장에 의해 단독 파기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또 2016년 5월 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원불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의 축하 영상메시지를 미리 받고, 전문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남북교류 성과를 앞다투어 선전하던 불교와 원불교가 박근혜 정권의 눈치를 본 굴욕적 사례였다.

그때, 몇 해 동안 남측 불교계와 일본인들의 북조선 방문이 화해를 위한 제스처였기를 바랐다. 《일본외교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94년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조선 무력 침략을 준비하며 ‘먼 나라는 친하게, 가까운 나라는 발밑에’ 두려고 했던 방책이 한낱 기우였기를. 박해순 한일관계연구가는 《선을 넘는 일본 간첩대-그 기막힌 교활함》(2022년, 나녹)에서 “이제부터라도 일본을 제대로 알자, 조선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다.”고 일갈했다.

# 다음 편은 ‘2017년 북녘의 부처님오신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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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승정 관륵조사 목조상. 사진: 일본나라국립박물관 쇼토쿠태자 1400주기 특별전(2021.4.27.)
관륵조사가 창건한 내금강 정양사 탐방객(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Ⅳ》, 260쪽
관륵조사가 창건한 내금강 정양사 탐방객(1930년대). 사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목록집Ⅳ》, 260쪽
개성특별시에서 오관산 영통사로 가는 길목(2012.5.2.). 사진: 《robgs87》 페이스북
개성특별시에서 오관산 영통사로 가는 길목(2012.5.2.). 사진: 《robgs87》 페이스북

영통사, 조일 민간외교의 산실

지금으로부터 1,450여 년 전에 한・일 문화외교는 관륵과 아좌태자가 바닷길을 열었다. 관륵조사는 602년 10월 강원도 원산항에서 동해 뱃길로 건너가 나라현 겐코지(元興寺)에 머물며 ‘구다라’(백제의 일본말) 학문을 가르쳤다. 일본 아스카 왕실의 쇼토쿠 태자가 존경해 모셨던 관륵조사는 왜나라 조정에 달력의 역법을 가르치고, 천문과 지리학 그리고 병법인 둔갑방술을 비롯한 다양한 선진 구다라 학문을 전하여 지금까지 일본인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관륵의 일본 도착보다 앞서 577년 백제에서 파견한 인물 가운데 주금사(주문을 읽어서 질병을 물리치는 직책의 관료)가 있었다.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는 597년 4월 충남 남양항에서 서남해 뱃길로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일본서기》와 《성덕태자전사기》 등에 전한다. 지금,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이 그림은 일본 최고의 초상화이다.

그 후, 왜국과 일본국에 이르기까지 존경받는 인물로 11세기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꼽힌다. 일본 임제종의 총본산인 쇼코쿠지(相國寺)를 비롯해 ‘황금의 집’이라는 킨카쿠지(金閣寺)・은박을 입힌 집이 없는 긴카쿠지(銀閣寺) 등 쿄토 고잔(임제종 사찰의 순위제도)의 사찰들을 중심으로 대각국사 의천을 추앙하고 있다.

1392년에 창건된 쇼코쿠지는 1423년 12월 조선 세종에게 하사받은 밀교 대장경판과 금자(金字) 《80화엄경》・《주(注)화엄경판》을 소장한 사찰이다.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진 1425년 5월 상국사의 화재로 모두 소실돼 그 유물들은 전하지 않는다. 11세기 초,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 정원 법사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에서 새긴 《대방광불화엄경소》(120권)의 목판인 《주화엄경판》은 개성 영통사에 보관됐다. 세종의 왕명에 의해 황남 장연군 몽금포의 금사사 밀교 대장경판과 개성 영통사의 《주화엄경판》・운암사의 금자 사경본 《화엄경》을 뱃길로 한양에 옮겨진 다음, 일본 사승(승려 신분의 사신) 게이쥬(圭籌)와 본레이(梵齡) 등 135명에게 대장경이 처음 하사됐다.

그로부터 쿄토 고잔(五山) 문학의 중심지가 된 쇼코쿠지는 동아시아의 문명 총서인 고려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 후손들은 대장경을 하사한 사람보다 대장경 주석서를 집대성한 대각국사를 추앙했다. 일본의 오토가와 코분(2002. 사망)을 정신적 멘토로 삼은 스티브 잡스(2011.10.5. 사망)와 입적한 날이 같은 대각국사 의천(1101.10.5. 열반)은 당대 최고의 소셜디자이너였다. 이들은 집중(focus)과 단순(simplicity)이란 화두를 들고서 고려와 미국에서 천년의 간극을 넘어 학술・지석정보 콘텐츠 황제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일본 쿄토 사찰들이 개성 영통사를 순례하는 것은 그들이 전해 받은 대장경의 고향이던 금사사와 운암사가 사라지고, 개성 영통사가 2005년 10월 복원되면서다. 영통사는 세납 47세의 짧은 삶을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한 사찰인 동시에 돌아가 안장된 입멸처이다. 이곳은 1998년 상반기부터 일본 다이쇼 대학이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영통사 유적발굴조사를 추진하는 등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본 쿄토 상국사 아리마 라이테이 관장을 비롯해 일본불교협회 소속의 10여 명은 중국 베이징을 경유, 평양으로 들어가 2000년 6월 개성 영통사 터를 방문했다 쿄토 금각사 주지 타케모토 슌은 평양에서 북측 내각의 문화성 고문과 개성 영통사복원위원회 일본대표로 추대됐다. 2006년 5월 25일에는 조・일불교 공동으로 영통사 낙경법요식을 개최했다. 금각사와 은각사 주지・상국사 관장・경도불교협회 이사장・일본 천태종 종무총장 등 80명이 방문했다. 북측에서도 개성 영통사 혜명 주지와 정각 부전, 관음사 주지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때 일본과 북측 문화성 관계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 유골조사 협력에 관한 협의를 처음 가졌다.

그 후, 1995년 10월에 설립된 일본 세계평화재단(RMC)이 개성 영통사 방문단 행사를 주관하면서 영통사는 조・일 민간외교의 산실로 급부상했다. 2015년 11월 25일 제1회 개성・영통사 순례 법요식에는 쿄토 금각사 주지 등 60명이, 2016년 10월 30일 제2회 법요식에는 50명, 2017년 11월 16일 제3회 법요식에는 30명, 2018년 11월 21일 제4회 법요식에는 30명이 순례했다. 2019년에 열리기로 한 제5회 법요식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돼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7년부터 개성 영통사 주지(관리인)에 취임한 정각대사는 안내와 불교 의식을 주관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방문할 때마다 “일본불교 인사들이 대각국사 의천에 대해 ‘참으로 존경합니다’(本当に尊敬)라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고 일본 세계평화재단과 프랑스의 AFP 통신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2006년 영통사 주지에 취임했던 혜명대사는 고문으로 직함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 2010년부터 개성시 인민위원회 소속으로 조불련 중앙위원회에 등록된 3~4명의 영통사 승려들은 삭발여미하고 법복을 착용하며, 출퇴근하고 있다.

개성 영통사 보광원 5층 석탑과 정각대사 뒷모습(2010.4.27.). 사진: Eric Lafforgue 페이스북
개성 영통사 보광원 5층 석탑과 정각대사 뒷모습(2010.4.27.). 사진: Eric Lafforgue 페이스북
조일불교 공동의 개성 영통사 낙경법요식(2006.5.25.) 사진: 일본 세계평화재단(RMC) 홈페이지
조일불교 공동의 개성 영통사 낙경법요식(2006.5.25.) 사진: 일본 세계평화재단(RMC) 홈페이지
제4회 개성・영통사 순례 법요식(2018.11.21.) 사진: 《AFP 통신사》(2018.11.22.)
제4회 개성・영통사 순례 법요식(2018.11.21.) 사진: 《AFP 통신사》(2018.11.22.)

남북불교, 단절의 시간

북측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2015년 12월 30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높아지게 될 새해 2016년에 민족의 화해와 단합, 북남공동선언 리행과 북남관계 개선을 위하여 북남불교도들 사이의 련대가 더욱 강화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원장 스님과 귀 단체의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하시는 일에 불은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새해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도 2016년과 2017년 두 해 동안 남북불교 교류는 멈추었다. 북측은 2016년 1월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제4차 핵실험(수소탄 6kt급)을 강행했다. 그해 2월 10일 오후 5시경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가 발표됐다. 그해 3월 6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신법타 신임본부장은 남측 언론을 통해 북측 조불련에 봉축 ‘남북 공동발원문’의 채택과 동시 발표를 공개 제안했다. 통상적으로 매년 2~3월 중국 베이징과 선양, 개성 등에서 교류회의를 통해 결정해온 사안에 대해 남북의 불가역적 상황을 극복한 새로운 묘수였다.

36년 만에 개최한 조선로동당 제7차 당대회(2016.5.6.)보다 앞서 조불련은 5월 초, 강수린 위원장 명의로 공동발원문을 조계종 민추본에 전달했다. 조계종단은 5월 14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법회에서 공동발원문을 발표하지 않고, 연등법회 ‘기원문’으로 대체했다. 공개 제의로 상호 공유했던 남북 공동발원문의 미발표는 조계종 총무원장에 의해 단독 파기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또 2016년 5월 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원불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의 축하 영상메시지를 미리 받고, 전문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남북교류 성과를 앞다투어 선전하던 불교와 원불교가 박근혜 정권의 눈치를 본 굴욕적 사례였다.

그때, 몇 해 동안 남측 불교계와 일본인들의 북조선 방문이 화해를 위한 제스처였기를 바랐다. 《일본외교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94년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조선 무력 침략을 준비하며 ‘먼 나라는 친하게, 가까운 나라는 발밑에’ 두려고 했던 방책이 한낱 기우였기를. 박해순 한일관계연구가는 《선을 넘는 일본 간첩대-그 기막힌 교활함》(2022년, 나녹)에서 “이제부터라도 일본을 제대로 알자, 조선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다.”고 일갈했다.

# 다음 편은 ‘2017년 북녘의 부처님오신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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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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