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8. 민들레처럼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8. 민들레처럼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4.1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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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잔디 밭에 난 민들레를 풀이라며
뽑아 버린다

민들레 꽃도 꽃인데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못생겼다 질기다고 욕하고 간다

즈려 밟고 뽑고 또 뽑아도 질기게 살아 남는 질경이처럼
뽑고 밟을수록 홀씨를 희망처럼 날려 살아 남아라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 오면 모진 나날도 가고
홀씨처럼 행복한 춤을 추리니.
 

#작가의 변
백팔번뇌의 뜻을 살펴보면 첫째는 눈·귀·코·혀·피부·뜻의 육근과 이 육근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색깔·소리·냄새·맛·감각·법의 육진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에 대한 산출하는 방법이다.

육근이 육진을 접촉할 때 각각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3×6=18의 십팔 번뇌가 된다. 또, 이 호·오·평등에 의거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이 생기거나, 괴롭고 언짢은 마음이 생기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고·낙·사수의 삼수를 육근과 육진 관계에서 생겨나는 육식에 곱하면 역시 십팔 번뇌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36종의 번뇌에 전생·금생·내생의 3세를 곱하면 108이 되어 백팔번뇌의 실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팔번뇌의 풀이이다.

두 번째의 산출법은 더 깊은 교리적인 해설이 요구된다. 이 산출법은 어떻게 수행해서 번뇌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수행 실천의 문제를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이며,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를 근거로 하는 산출법이다.

곧, 견혹인 88사 번뇌와 수혹인 10혹 번뇌에는 십전의 번뇌를 더하여 얻는 백팔번뇌 설이다. 견혹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고·지식·인식 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견은 지혜로 얻은 지식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정견)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다.

이에 대해 사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아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심리 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내재하여 인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번뇌로서 끊어 내고 싶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듯이 점차로 끊어야 한다.

이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면 눈, 코, 귀, 혀, 피부와 장기가 아프게 되고 보는 것, 냄새, 듣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느낌과 마음에서 뜻을 알고 법을 통해 아프게 되어 좋은 것, 나쁜 것,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다. 즉 쓴맛과 단맛은 같은 것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이 다 백팔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된다. 혹자는 그 괴로움을 끊어 내고자 보고, 듣고 안 하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다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젊어서 한때 나는 스님이나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신부같이 성직자가 되어도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느끼는 희노애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희노애락이 있고 그 세계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백팔번뇌란 우리가 그 숫자를 헤아려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백팔 염주로 그 많은 우리의 번뇌를 헤아리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백팔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그것을 없앨 방법도 생겨난다.

전생, 현생, 미래의 삼생에 번뇌와 얽히어지면 질수록 번뇌는 고무풍선처럼 커지고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기면 끊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잘 들리던 귀도 이젠 이명으로 인해 듣기 싫은 소리는 늘 들리고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야 요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빵을 구울 때 구수한 냄새는 물로 밥이 끓을 때 구수한 밥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니 괴롭다. 요리를 하다가 타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는데 냄새를 맡지 못하니 시간을 맞춰 놓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좋은 것은 화장실에서나 악취가 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과 빵을 구울 때 그 구수한 유혹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는 것도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에서는 활자 크기를 키워 놓으면 되지만 그러면 또 페이지가 늘어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반대로 불편하고 하기 쉽지 않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나이 들어 가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난 내 어릴 적,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발달하고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아서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발달해 있었던 것처럼 아는 새로운 세대가 이해 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다. 때로는 같은 시대를 겪어도 생각의 차이로 빈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프랑스의 어느 왕비가 국민이 빵도 못 먹고 굶주린다고 신하들이 말하니까,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하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활이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괴로움을 없앤다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면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신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한 뜻깊은 날에 부처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을 가지게 되면 불행도 늘 따라온다는 것 즉 해탈 열반이 길임을 일깨워 주러 오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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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잔디 밭에 난 민들레를 풀이라며
뽑아 버린다

민들레 꽃도 꽃인데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못생겼다 질기다고 욕하고 간다

즈려 밟고 뽑고 또 뽑아도 질기게 살아 남는 질경이처럼
뽑고 밟을수록 홀씨를 희망처럼 날려 살아 남아라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 오면 모진 나날도 가고
홀씨처럼 행복한 춤을 추리니.
 

#작가의 변
백팔번뇌의 뜻을 살펴보면 첫째는 눈·귀·코·혀·피부·뜻의 육근과 이 육근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색깔·소리·냄새·맛·감각·법의 육진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에 대한 산출하는 방법이다.

육근이 육진을 접촉할 때 각각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3×6=18의 십팔 번뇌가 된다. 또, 이 호·오·평등에 의거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이 생기거나, 괴롭고 언짢은 마음이 생기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고·낙·사수의 삼수를 육근과 육진 관계에서 생겨나는 육식에 곱하면 역시 십팔 번뇌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36종의 번뇌에 전생·금생·내생의 3세를 곱하면 108이 되어 백팔번뇌의 실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팔번뇌의 풀이이다.

두 번째의 산출법은 더 깊은 교리적인 해설이 요구된다. 이 산출법은 어떻게 수행해서 번뇌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수행 실천의 문제를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이며,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를 근거로 하는 산출법이다.

곧, 견혹인 88사 번뇌와 수혹인 10혹 번뇌에는 십전의 번뇌를 더하여 얻는 백팔번뇌 설이다. 견혹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고·지식·인식 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견은 지혜로 얻은 지식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정견)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다.

이에 대해 사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아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심리 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내재하여 인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번뇌로서 끊어 내고 싶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듯이 점차로 끊어야 한다.

이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보기 좋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잔디 밭에 난 민들레를 풀이라며
뽑아 버린다

민들레 꽃도 꽃인데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못생겼다 질기다고 욕하고 간다

즈려 밟고 뽑고 또 뽑아도 질기게 살아 남는 질경이처럼
뽑고 밟을수록 홀씨를 희망처럼 날려 살아 남아라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 오면 모진 나날도 가고
홀씨처럼 행복한 춤을 추리니.
 

#작가의 변
백팔번뇌의 뜻을 살펴보면 첫째는 눈·귀·코·혀·피부·뜻의 육근과 이 육근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색깔·소리·냄새·맛·감각·법의 육진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에 대한 산출하는 방법이다.

육근이 육진을 접촉할 때 각각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3×6=18의 십팔 번뇌가 된다. 또, 이 호·오·평등에 의거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이 생기거나, 괴롭고 언짢은 마음이 생기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고·낙·사수의 삼수를 육근과 육진 관계에서 생겨나는 육식에 곱하면 역시 십팔 번뇌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36종의 번뇌에 전생·금생·내생의 3세를 곱하면 108이 되어 백팔번뇌의 실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팔번뇌의 풀이이다.

두 번째의 산출법은 더 깊은 교리적인 해설이 요구된다. 이 산출법은 어떻게 수행해서 번뇌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수행 실천의 문제를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이며,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를 근거로 하는 산출법이다.

곧, 견혹인 88사 번뇌와 수혹인 10혹 번뇌에는 십전의 번뇌를 더하여 얻는 백팔번뇌 설이다. 견혹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고·지식·인식 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견은 지혜로 얻은 지식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정견)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다.

이에 대해 사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아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심리 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내재하여 인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번뇌로서 끊어 내고 싶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듯이 점차로 끊어야 한다.

이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면 눈, 코, 귀, 혀, 피부와 장기가 아프게 되고 보는 것, 냄새, 듣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느낌과 마음에서 뜻을 알고 법을 통해 아프게 되어 좋은 것, 나쁜 것,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다. 즉 쓴맛과 단맛은 같은 것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이 다 백팔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된다. 혹자는 그 괴로움을 끊어 내고자 보고, 듣고 안 하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다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젊어서 한때 나는 스님이나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신부같이 성직자가 되어도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느끼는 희노애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희노애락이 있고 그 세계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백팔번뇌란 우리가 그 숫자를 헤아려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백팔 염주로 그 많은 우리의 번뇌를 헤아리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백팔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그것을 없앨 방법도 생겨난다.

전생, 현생, 미래의 삼생에 번뇌와 얽히어지면 질수록 번뇌는 고무풍선처럼 커지고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기면 끊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잘 들리던 귀도 이젠 이명으로 인해 듣기 싫은 소리는 늘 들리고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야 요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빵을 구울 때 구수한 냄새는 물로 밥이 끓을 때 구수한 밥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니 괴롭다. 요리를 하다가 타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는데 냄새를 맡지 못하니 시간을 맞춰 놓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좋은 것은 화장실에서나 악취가 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과 빵을 구울 때 그 구수한 유혹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는 것도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에서는 활자 크기를 키워 놓으면 되지만 그러면 또 페이지가 늘어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반대로 불편하고 하기 쉽지 않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나이 들어 가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난 내 어릴 적,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발달하고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아서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발달해 있었던 것처럼 아는 새로운 세대가 이해 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다. 때로는 같은 시대를 겪어도 생각의 차이로 빈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프랑스의 어느 왕비가 국민이 빵도 못 먹고 굶주린다고 신하들이 말하니까,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하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활이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괴로움을 없앤다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면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신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한 뜻깊은 날에 부처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을 가지게 되면 불행도 늘 따라온다는 것 즉 해탈 열반이 길임을 일깨워 주러 오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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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람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면 눈, 코, 귀, 혀, 피부와 장기가 아프게 되고 보는 것, 냄새, 듣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느낌과 마음에서 뜻을 알고 법을 통해 아프게 되어 좋은 것, 나쁜 것,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다. 즉 쓴맛과 단맛은 같은 것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이 다 백팔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된다. 혹자는 그 괴로움을 끊어 내고자 보고, 듣고 안 하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다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젊어서 한때 나는 스님이나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신부같이 성직자가 되어도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느끼는 희노애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희노애락이 있고 그 세계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백팔번뇌란 우리가 그 숫자를 헤아려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백팔 염주로 그 많은 우리의 번뇌를 헤아리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백팔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그것을 없앨 방법도 생겨난다.

전생, 현생, 미래의 삼생에 번뇌와 얽히어지면 질수록 번뇌는 고무풍선처럼 커지고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기면 끊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잔디 밭에 난 민들레를 풀이라며
뽑아 버린다

민들레 꽃도 꽃인데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못생겼다 질기다고 욕하고 간다

즈려 밟고 뽑고 또 뽑아도 질기게 살아 남는 질경이처럼
뽑고 밟을수록 홀씨를 희망처럼 날려 살아 남아라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 오면 모진 나날도 가고
홀씨처럼 행복한 춤을 추리니.
 

#작가의 변
백팔번뇌의 뜻을 살펴보면 첫째는 눈·귀·코·혀·피부·뜻의 육근과 이 육근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색깔·소리·냄새·맛·감각·법의 육진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에 대한 산출하는 방법이다.

육근이 육진을 접촉할 때 각각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3×6=18의 십팔 번뇌가 된다. 또, 이 호·오·평등에 의거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이 생기거나, 괴롭고 언짢은 마음이 생기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고·낙·사수의 삼수를 육근과 육진 관계에서 생겨나는 육식에 곱하면 역시 십팔 번뇌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36종의 번뇌에 전생·금생·내생의 3세를 곱하면 108이 되어 백팔번뇌의 실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팔번뇌의 풀이이다.

두 번째의 산출법은 더 깊은 교리적인 해설이 요구된다. 이 산출법은 어떻게 수행해서 번뇌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수행 실천의 문제를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이며,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를 근거로 하는 산출법이다.

곧, 견혹인 88사 번뇌와 수혹인 10혹 번뇌에는 십전의 번뇌를 더하여 얻는 백팔번뇌 설이다. 견혹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고·지식·인식 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견은 지혜로 얻은 지식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정견)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다.

이에 대해 사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아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심리 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내재하여 인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번뇌로서 끊어 내고 싶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듯이 점차로 끊어야 한다.

이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면 눈, 코, 귀, 혀, 피부와 장기가 아프게 되고 보는 것, 냄새, 듣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느낌과 마음에서 뜻을 알고 법을 통해 아프게 되어 좋은 것, 나쁜 것,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다. 즉 쓴맛과 단맛은 같은 것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이 다 백팔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된다. 혹자는 그 괴로움을 끊어 내고자 보고, 듣고 안 하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다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젊어서 한때 나는 스님이나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신부같이 성직자가 되어도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느끼는 희노애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희노애락이 있고 그 세계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백팔번뇌란 우리가 그 숫자를 헤아려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백팔 염주로 그 많은 우리의 번뇌를 헤아리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백팔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그것을 없앨 방법도 생겨난다.

전생, 현생, 미래의 삼생에 번뇌와 얽히어지면 질수록 번뇌는 고무풍선처럼 커지고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기면 끊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잘 들리던 귀도 이젠 이명으로 인해 듣기 싫은 소리는 늘 들리고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야 요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빵을 구울 때 구수한 냄새는 물로 밥이 끓을 때 구수한 밥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니 괴롭다. 요리를 하다가 타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는데 냄새를 맡지 못하니 시간을 맞춰 놓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좋은 것은 화장실에서나 악취가 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과 빵을 구울 때 그 구수한 유혹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는 것도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에서는 활자 크기를 키워 놓으면 되지만 그러면 또 페이지가 늘어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반대로 불편하고 하기 쉽지 않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나이 들어 가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난 내 어릴 적,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발달하고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아서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발달해 있었던 것처럼 아는 새로운 세대가 이해 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다. 때로는 같은 시대를 겪어도 생각의 차이로 빈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프랑스의 어느 왕비가 국민이 빵도 못 먹고 굶주린다고 신하들이 말하니까,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하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활이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괴로움을 없앤다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면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신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한 뜻깊은 날에 부처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을 가지게 되면 불행도 늘 따라온다는 것 즉 해탈 열반이 길임을 일깨워 주러 오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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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가면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잘 들리던 귀도 이젠 이명으로 인해 듣기 싫은 소리는 늘 들리고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야 요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빵을 구울 때 구수한 냄새는 물로 밥이 끓을 때 구수한 밥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니 괴롭다. 요리를 하다가 타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는데 냄새를 맡지 못하니 시간을 맞춰 놓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좋은 것은 화장실에서나 악취가 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과 빵을 구울 때 그 구수한 유혹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는 것도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에서는 활자 크기를 키워 놓으면 되지만 그러면 또 페이지가 늘어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반대로 불편하고 하기 쉽지 않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나이 들어 가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난 내 어릴 적,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발달하고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아서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발달해 있었던 것처럼 아는 새로운 세대가 이해 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다. 때로는 같은 시대를 겪어도 생각의 차이로 빈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프랑스의 어느 왕비가 국민이 빵도 못 먹고 굶주린다고 신하들이 말하니까,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하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활이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괴로움을 없앤다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면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신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한 뜻깊은 날에 부처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을 가지게 되면 불행도 늘 따라온다는 것 즉 해탈 열반이 길임을 일깨워 주러 오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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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잔디 밭에 난 민들레를 풀이라며
뽑아 버린다

민들레 꽃도 꽃인데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못생겼다 질기다고 욕하고 간다

즈려 밟고 뽑고 또 뽑아도 질기게 살아 남는 질경이처럼
뽑고 밟을수록 홀씨를 희망처럼 날려 살아 남아라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 오면 모진 나날도 가고
홀씨처럼 행복한 춤을 추리니.
 

#작가의 변
백팔번뇌의 뜻을 살펴보면 첫째는 눈·귀·코·혀·피부·뜻의 육근과 이 육근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색깔·소리·냄새·맛·감각·법의 육진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에 대한 산출하는 방법이다.

육근이 육진을 접촉할 때 각각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3×6=18의 십팔 번뇌가 된다. 또, 이 호·오·평등에 의거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이 생기거나, 괴롭고 언짢은 마음이 생기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고·낙·사수의 삼수를 육근과 육진 관계에서 생겨나는 육식에 곱하면 역시 십팔 번뇌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36종의 번뇌에 전생·금생·내생의 3세를 곱하면 108이 되어 백팔번뇌의 실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백팔번뇌의 풀이이다.

두 번째의 산출법은 더 깊은 교리적인 해설이 요구된다. 이 산출법은 어떻게 수행해서 번뇌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수행 실천의 문제를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이며, 실천의 영역에 속하는 번뇌를 근거로 하는 산출법이다.

곧, 견혹인 88사 번뇌와 수혹인 10혹 번뇌에는 십전의 번뇌를 더하여 얻는 백팔번뇌 설이다. 견혹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고·지식·인식 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서 견은 지혜로 얻은 지식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정견)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다.

이에 대해 사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아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심리 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내재하여 인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번뇌로서 끊어 내고 싶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듯이 점차로 끊어야 한다.

이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면 눈, 코, 귀, 혀, 피부와 장기가 아프게 되고 보는 것, 냄새, 듣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느낌과 마음에서 뜻을 알고 법을 통해 아프게 되어 좋은 것, 나쁜 것,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다. 즉 쓴맛과 단맛은 같은 것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이 다 백팔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끊어 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된다. 혹자는 그 괴로움을 끊어 내고자 보고, 듣고 안 하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다고 보고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젊어서 한때 나는 스님이나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신부같이 성직자가 되어도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느끼는 희노애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희노애락이 있고 그 세계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백팔번뇌란 우리가 그 숫자를 헤아려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백팔 염주로 그 많은 우리의 번뇌를 헤아리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백팔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야 그것을 없앨 방법도 생겨난다.

전생, 현생, 미래의 삼생에 번뇌와 얽히어지면 질수록 번뇌는 고무풍선처럼 커지고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기면 끊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잘 들리던 귀도 이젠 이명으로 인해 듣기 싫은 소리는 늘 들리고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야 요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빵을 구울 때 구수한 냄새는 물로 밥이 끓을 때 구수한 밥 냄새도 맡을 수가 없으니 괴롭다. 요리를 하다가 타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는데 냄새를 맡지 못하니 시간을 맞춰 놓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좋은 것은 화장실에서나 악취가 나는 곳에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과 빵을 구울 때 그 구수한 유혹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는 것도 이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에서는 활자 크기를 키워 놓으면 되지만 그러면 또 페이지가 늘어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반대로 불편하고 하기 쉽지 않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 사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나이 들어 가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난 내 어릴 적,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발달하고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아서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발달해 있었던 것처럼 아는 새로운 세대가 이해 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다. 때로는 같은 시대를 겪어도 생각의 차이로 빈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프랑스의 어느 왕비가 국민이 빵도 못 먹고 굶주린다고 신하들이 말하니까,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고 하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활이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괴로움을 없앤다는 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에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면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신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한 뜻깊은 날에 부처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을 가지게 되면 불행도 늘 따라온다는 것 즉 해탈 열반이 길임을 일깨워 주러 오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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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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