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2. 손톱과 머리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2. 손톱과 머리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5.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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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줄도 모르던
자라길 바라지도 않던 손톱이
어느 날 불편해지면 자란 손톱과 이별해야 할 순간
자라는 줄도 모르던 수염은 까칠하게 밤송이처럼 날을 세우고
어느 사이 숨기고 싶은 사연처럼 숨죽이고 멀어져 버린 머리는
마음 뿐인 마음 닦음처럼 자라지 않네.

#작가의변
손톱과 머리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라는데 마음을 쓰고 노력해도 자라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천상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천상계는 아주 멀까? 밴쿠버에 이민을 와서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이민 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법당에 조상을 모시고 명절 때도 스님이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얼마 전 분명 그 아파트 지을 때 기초 공사를 하면서 많은 지하수가 나와서 물 구덩이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하고 아내도 "그러네.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은 것을 알면 못살 거야"라고 했던 아내가

“저기 저 아파트 인터넷에 광고를 봤는데 2베드룸이 1밀리언 35만불이래.” 했더니

“나한테 아파트 아 자도 꺼내지 마”한다.

“있는 아파트도 날려 먹고 평생 죽을 때까지 지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도 못 가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면서 입도 뻥 끗 하지 못하게 했다.

이민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잘하려고 더 많이 벌려고 욕심부터 사업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도 팔고 나니 계속 올라 배 이상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처음부터 없으면 몰라도 있던 아파트를 팔고 계속 오르는 렌트비에 아파트 매니저의 횡포 일테면 집에 물건이 너무 많으니 줄여라 여기는 통로 이니 물건을 놓으면 안된다 등등 간섭을 해대니 아내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파서 도움을 주지 못하니 아내 혼자 낑낑 거리면서 가재 도구를 옮기고 다음 주에 다시 검사하려 온다는 매니저의 말에 스트레스 만 땅일 것이다.

이젠 나이 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직장에서 직장 생활 할 수 있는 나이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이리라 생각이 된다.돈도 없는데 나이도 먹어 이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 집에 아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내가 좋아 하는 순위인데 그 순위가 남편인 나는 가장 후 순위이다. 아들, 딸 그리고 남편.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일 때는 그것이 그렇게 티를 내지 않다가 지금 아파서 일도 못하고 심지어 운전도 아내가 운전해야 어딜 움직이게 된 상황이니 늘 꼴 보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그래서 지인에게 카톡으로 나 이렇게 당해 그러면 그 형 말이 다 똑같아. 숫 사자처럼 쫓겨 나지 않는 것 만도 다행이지 하면서 위로한다. 다른 생각 말구 얼른 몸을 추스려서 등산도 함께하고 직장도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그래야지.

맞는 말이다.그럼에도 서럽다.우울증 상태도 심해서 약을 먹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날도 많다. 그런데 거기다 이제 일 못하고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억울한 느낌 마져 든다.

천상계에서는 9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지고 향기로운 꽃들이 정원이 곳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은 참 좋겠다. 싶다 가도 백 년을 사는 것도 힘겨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상계에서 900년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천상 세계가 다를까? 같을까 하는 궁금증도 가져본다. 만약에 창조주가 있고 하느님이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라면 결국은 천상 세계는 하나가 아닐까? 유대교와, 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은 하느님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니 당연히 천상세계에 하느님은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옥황상제도 같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면 대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와 인간계 축생계. 그리고 아귀계와 아수라, 지옥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계와 축생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니까 당연히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귀계( 귀신의 고통)와 아수라, 지옥은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이다. 즉 전해 들은 이야기다라는 말이다.

죽어서 아귀가 되거나 아수라(악령의 세계)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하지만 우리가 더 싫어 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이다. 실제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어도 혼령이라도 고통 받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법화경에 의하면 일체의 사람이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은 생존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원인은 탄생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아기의 탄생이 사실을 늙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던져 지는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생일이라고 축하하고 아기의 탄생을 빌고 아기가 없어 설움 받은 조선의 많은 며느리들은 탄생부터 슬픈 존재인 아기 때문에 또 고통 받는 것이다. 인연의 끈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남의 아이와 내 핏줄에 의한 가족 관계는 아주 중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기를 빨고 아기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내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해서는 어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끊을 래야 끊을 수 업는 관계이다.







석가모니도 욕망과 집착을 끊어 내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실체가 없는 공한 세상이니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욕망을 끊어 내면 업이 소멸되어 윤회에서 해방되고 해탈 열반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즉 태어 나지 않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열반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열반은 산스크리스트어의 비루비나(Zirvana) 즉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을 말한다. 열반에 들면 궁금한 것도 없는 제행무상, 제행무아, 열반적정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과 욕망 그리고 번뇌를 끊어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산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에는 육바라밀(보시와 베품) 지계(계율을 잘 지킴) 인욕( 어렵고 힘든 것을 참아냄) 정진( 끝없는 정진) 선정( 마음을 닦음) 지혜(정견)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초기불고의 팔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염불을 외우고 진언을 하는 것도 불교의 한 방편이다.

해탈은 산스크리스트어 (Vimoksa,moksha,팔리어 vimoksha, vimukti nirvana) 비모크샤, 비무티 즉 해방이라는 뜻으로 자유라는 의미다.속박에서 풀려나다.자신을 자신이 해방시킨다.전지전능한 신의 구원과 같은 타력에 의한 구원과도 다르다.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마음속 구속에서 해방됨으로 얻는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다.

요즘 대통령이 많이 찾는 그런 책임지지 않는 자유가 아니고 욕망과 번뇌를 끊어 내는 자유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 나면서 한 번은 죽는다는 명제를 가지고 태어 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면서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수없이 많은 억 겁의 시간. 즉 일 겁은 천지개벅이 이루어 지고 다음 개벽이 오는 때까지이다. 43억 2천 만년의 긴 시간이다. 160평방 킬로의 커다란 바위 위로 선녀의 날개 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서 달아 없어지는 아주 긴 시간을 말하는데 불경에는 그 겁이 참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꿀같은 달콤한 유혹에 취해 유한하다는 생명의 명제를 잊고 산다.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자식이 잘살아야 하니까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 줘야 한다면서

아내가 친구 중에 부동산이 올라서 밀리온을 벌어 들인 친구가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말하더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아내에게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물으니 “그럼 부자가 되면 부처님의 가피지” 하고 말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에게 빌고 영험이 있다는 갓 바위에 빌어 대학을 가고 그런 것은 사실 장독대에 냉수 떠 놓고 치성을 들여 비는 것 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많은 시주나 헌금을 하면 대접도 틀리고 대우도 받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을 모르고 남들이 절에 가니 따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해탈을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 마음에 이미 부처님이 실존해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하면서 석가모니나 아미타불과 교신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불을 미루고 인간의 교화와 중생의 제도를 위해 힘쓰고 있는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을 두루 살피고 관장하는 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욕망과 번뇌, 집착은 끊었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천수천안 끝없는 보살핌과 손길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탈은 죽은 상태, 불이 꺼진 상태라고 하면서 진짜 영생을 얻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우리의 영생은 산 영생이고 불교의 궁극의 목표인 해탈 열반은 모든 것을 끊어낸 불 꺼진 생명 같은 상태라고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것도 자신이 승려에서 목회자로 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진짜 살아 있는 보살도는 보지도 못하면서.

마치 불교를 나무로 깍은 불상이나, 바위로 조각한 불상을 보고 부처라고 잘 못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보이는 것만 보고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체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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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줄도 모르던
자라길 바라지도 않던 손톱이
어느 날 불편해지면 자란 손톱과 이별해야 할 순간
자라는 줄도 모르던 수염은 까칠하게 밤송이처럼 날을 세우고
어느 사이 숨기고 싶은 사연처럼 숨죽이고 멀어져 버린 머리는
마음 뿐인 마음 닦음처럼 자라지 않네.

#작가의변
손톱과 머리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라는데 마음을 쓰고 노력해도 자라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천상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천상계는 아주 멀까? 밴쿠버에 이민을 와서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이민 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법당에 조상을 모시고 명절 때도 스님이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얼마 전 분명 그 아파트 지을 때 기초 공사를 하면서 많은 지하수가 나와서 물 구덩이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하고 아내도 "그러네.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은 것을 알면 못살 거야"라고 했던 아내가

“저기 저 아파트 인터넷에 광고를 봤는데 2베드룸이 1밀리언 35만불이래.” 했더니

“나한테 아파트 아 자도 꺼내지 마”한다.

“있는 아파트도 날려 먹고 평생 죽을 때까지 지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도 못 가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면서 입도 뻥 끗 하지 못하게 했다.

이민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잘하려고 더 많이 벌려고 욕심부터 사업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도 팔고 나니 계속 올라 배 이상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처음부터 없으면 몰라도 있던 아파트를 팔고 계속 오르는 렌트비에 아파트 매니저의 횡포 일테면 집에 물건이 너무 많으니 줄여라 여기는 통로 이니 물건을 놓으면 안된다 등등 간섭을 해대니 아내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파서 도움을 주지 못하니 아내 혼자 낑낑 거리면서 가재 도구를 옮기고 다음 주에 다시 검사하려 온다는 매니저의 말에 스트레스 만 땅일 것이다.

이젠 나이 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직장에서 직장 생활 할 수 있는 나이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이리라 생각이 된다.돈도 없는데 나이도 먹어 이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 집에 아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내가 좋아 하는 순위인데 그 순위가 남편인 나는 가장 후 순위이다. 아들, 딸 그리고 남편.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일 때는 그것이 그렇게 티를 내지 않다가 지금 아파서 일도 못하고 심지어 운전도 아내가 운전해야 어딜 움직이게 된 상황이니 늘 꼴 보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그래서 지인에게 카톡으로 나 이렇게 당해 그러면 그 형 말이 다 똑같아. 숫 사자처럼 쫓겨 나지 않는 것 만도 다행이지 하면서 위로한다. 다른 생각 말구 얼른 몸을 추스려서 등산도 함께하고 직장도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그래야지.

맞는 말이다.그럼에도 서럽다.우울증 상태도 심해서 약을 먹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날도 많다. 그런데 거기다 이제 일 못하고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억울한 느낌 마져 든다.

천상계에서는 9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지고 향기로운 꽃들이 정원이 곳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은 참 좋겠다. 싶다 가도 백 년을 사는 것도 힘겨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상계에서 900년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천상 세계가 다를까? 같을까 하는 궁금증도 가져본다. 만약에 창조주가 있고 하느님이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라면 결국은 천상 세계는 하나가 아닐까? 유대교와, 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은 하느님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니 당연히 천상세계에 하느님은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옥황상제도 같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면 대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와 인간계 축생계. 그리고 아귀계와 아수라, 지옥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계와 축생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니까 당연히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귀계( 귀신의 고통)와 아수라, 지옥은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이다. 즉 전해 들은 이야기다라는 말이다.

죽어서 아귀가 되거나 아수라(악령의 세계)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하지만 우리가 더 싫어 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이다. 실제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어도 혼령이라도 고통 받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법화경에 의하면 일체의 사람이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은 생존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원인은 탄생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아기의 탄생이 사실을 늙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던져 지는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생일이라고 축하하고 아기의 탄생을 빌고 아기가 없어 설움 받은 조선의 많은 며느리들은 탄생부터 슬픈 존재인 아기 때문에 또 고통 받는 것이다. 인연의 끈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남의 아이와 내 핏줄에 의한 가족 관계는 아주 중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기를 빨고 아기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내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해서는 어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끊을 래야 끊을 수 업는 관계이다.





 

자라는 줄도 모르던
자라길 바라지도 않던 손톱이
어느 날 불편해지면 자란 손톱과 이별해야 할 순간
자라는 줄도 모르던 수염은 까칠하게 밤송이처럼 날을 세우고
어느 사이 숨기고 싶은 사연처럼 숨죽이고 멀어져 버린 머리는
마음 뿐인 마음 닦음처럼 자라지 않네.

#작가의변
손톱과 머리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라는데 마음을 쓰고 노력해도 자라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천상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천상계는 아주 멀까? 밴쿠버에 이민을 와서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이민 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법당에 조상을 모시고 명절 때도 스님이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얼마 전 분명 그 아파트 지을 때 기초 공사를 하면서 많은 지하수가 나와서 물 구덩이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하고 아내도 "그러네.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은 것을 알면 못살 거야"라고 했던 아내가

“저기 저 아파트 인터넷에 광고를 봤는데 2베드룸이 1밀리언 35만불이래.” 했더니

“나한테 아파트 아 자도 꺼내지 마”한다.

“있는 아파트도 날려 먹고 평생 죽을 때까지 지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도 못 가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면서 입도 뻥 끗 하지 못하게 했다.

이민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잘하려고 더 많이 벌려고 욕심부터 사업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도 팔고 나니 계속 올라 배 이상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처음부터 없으면 몰라도 있던 아파트를 팔고 계속 오르는 렌트비에 아파트 매니저의 횡포 일테면 집에 물건이 너무 많으니 줄여라 여기는 통로 이니 물건을 놓으면 안된다 등등 간섭을 해대니 아내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파서 도움을 주지 못하니 아내 혼자 낑낑 거리면서 가재 도구를 옮기고 다음 주에 다시 검사하려 온다는 매니저의 말에 스트레스 만 땅일 것이다.

이젠 나이 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직장에서 직장 생활 할 수 있는 나이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이리라 생각이 된다.돈도 없는데 나이도 먹어 이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 집에 아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내가 좋아 하는 순위인데 그 순위가 남편인 나는 가장 후 순위이다. 아들, 딸 그리고 남편.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일 때는 그것이 그렇게 티를 내지 않다가 지금 아파서 일도 못하고 심지어 운전도 아내가 운전해야 어딜 움직이게 된 상황이니 늘 꼴 보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그래서 지인에게 카톡으로 나 이렇게 당해 그러면 그 형 말이 다 똑같아. 숫 사자처럼 쫓겨 나지 않는 것 만도 다행이지 하면서 위로한다. 다른 생각 말구 얼른 몸을 추스려서 등산도 함께하고 직장도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그래야지.

맞는 말이다.그럼에도 서럽다.우울증 상태도 심해서 약을 먹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날도 많다. 그런데 거기다 이제 일 못하고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억울한 느낌 마져 든다.

천상계에서는 9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지고 향기로운 꽃들이 정원이 곳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은 참 좋겠다. 싶다 가도 백 년을 사는 것도 힘겨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상계에서 900년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천상 세계가 다를까? 같을까 하는 궁금증도 가져본다. 만약에 창조주가 있고 하느님이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라면 결국은 천상 세계는 하나가 아닐까? 유대교와, 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은 하느님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니 당연히 천상세계에 하느님은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옥황상제도 같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면 대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와 인간계 축생계. 그리고 아귀계와 아수라, 지옥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계와 축생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니까 당연히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귀계( 귀신의 고통)와 아수라, 지옥은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이다. 즉 전해 들은 이야기다라는 말이다.

죽어서 아귀가 되거나 아수라(악령의 세계)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하지만 우리가 더 싫어 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이다. 실제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어도 혼령이라도 고통 받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법화경에 의하면 일체의 사람이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은 생존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원인은 탄생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아기의 탄생이 사실을 늙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던져 지는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생일이라고 축하하고 아기의 탄생을 빌고 아기가 없어 설움 받은 조선의 많은 며느리들은 탄생부터 슬픈 존재인 아기 때문에 또 고통 받는 것이다. 인연의 끈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남의 아이와 내 핏줄에 의한 가족 관계는 아주 중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기를 빨고 아기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내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해서는 어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끊을 래야 끊을 수 업는 관계이다.







석가모니도 욕망과 집착을 끊어 내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실체가 없는 공한 세상이니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욕망을 끊어 내면 업이 소멸되어 윤회에서 해방되고 해탈 열반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즉 태어 나지 않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열반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열반은 산스크리스트어의 비루비나(Zirvana) 즉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을 말한다. 열반에 들면 궁금한 것도 없는 제행무상, 제행무아, 열반적정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과 욕망 그리고 번뇌를 끊어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산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에는 육바라밀(보시와 베품) 지계(계율을 잘 지킴) 인욕( 어렵고 힘든 것을 참아냄) 정진( 끝없는 정진) 선정( 마음을 닦음) 지혜(정견)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초기불고의 팔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염불을 외우고 진언을 하는 것도 불교의 한 방편이다.

해탈은 산스크리스트어 (Vimoksa,moksha,팔리어 vimoksha, vimukti nirvana) 비모크샤, 비무티 즉 해방이라는 뜻으로 자유라는 의미다.속박에서 풀려나다.자신을 자신이 해방시킨다.전지전능한 신의 구원과 같은 타력에 의한 구원과도 다르다.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마음속 구속에서 해방됨으로 얻는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다.

요즘 대통령이 많이 찾는 그런 책임지지 않는 자유가 아니고 욕망과 번뇌를 끊어 내는 자유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 나면서 한 번은 죽는다는 명제를 가지고 태어 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면서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수없이 많은 억 겁의 시간. 즉 일 겁은 천지개벅이 이루어 지고 다음 개벽이 오는 때까지이다. 43억 2천 만년의 긴 시간이다. 160평방 킬로의 커다란 바위 위로 선녀의 날개 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서 달아 없어지는 아주 긴 시간을 말하는데 불경에는 그 겁이 참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꿀같은 달콤한 유혹에 취해 유한하다는 생명의 명제를 잊고 산다.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자식이 잘살아야 하니까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 줘야 한다면서

아내가 친구 중에 부동산이 올라서 밀리온을 벌어 들인 친구가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말하더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아내에게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물으니 “그럼 부자가 되면 부처님의 가피지” 하고 말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에게 빌고 영험이 있다는 갓 바위에 빌어 대학을 가고 그런 것은 사실 장독대에 냉수 떠 놓고 치성을 들여 비는 것 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많은 시주나 헌금을 하면 대접도 틀리고 대우도 받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을 모르고 남들이 절에 가니 따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해탈을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 마음에 이미 부처님이 실존해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하면서 석가모니나 아미타불과 교신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불을 미루고 인간의 교화와 중생의 제도를 위해 힘쓰고 있는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을 두루 살피고 관장하는 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욕망과 번뇌, 집착은 끊었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천수천안 끝없는 보살핌과 손길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탈은 죽은 상태, 불이 꺼진 상태라고 하면서 진짜 영생을 얻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우리의 영생은 산 영생이고 불교의 궁극의 목표인 해탈 열반은 모든 것을 끊어낸 불 꺼진 생명 같은 상태라고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것도 자신이 승려에서 목회자로 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진짜 살아 있는 보살도는 보지도 못하면서.

마치 불교를 나무로 깍은 불상이나, 바위로 조각한 불상을 보고 부처라고 잘 못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보이는 것만 보고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체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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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도 욕망과 집착을 끊어 내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실체가 없는 공한 세상이니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욕망을 끊어 내면 업이 소멸되어 윤회에서 해방되고 해탈 열반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즉 태어 나지 않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열반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열반은 산스크리스트어의 비루비나(Zirvana) 즉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을 말한다. 열반에 들면 궁금한 것도 없는 제행무상, 제행무아, 열반적정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과 욕망 그리고 번뇌를 끊어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산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에는 육바라밀(보시와 베품) 지계(계율을 잘 지킴) 인욕( 어렵고 힘든 것을 참아냄) 정진( 끝없는 정진) 선정( 마음을 닦음) 지혜(정견)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초기불고의 팔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염불을 외우고 진언을 하는 것도 불교의 한 방편이다.

해탈은 산스크리스트어 (Vimoksa,moksha,팔리어 vimoksha, vimukti nirvana) 비모크샤, 비무티 즉 해방이라는 뜻으로 자유라는 의미다.속박에서 풀려나다.자신을 자신이 해방시킨다.전지전능한 신의 구원과 같은 타력에 의한 구원과도 다르다.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마음속 구속에서 해방됨으로 얻는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다.

요즘 대통령이 많이 찾는 그런 책임지지 않는 자유가 아니고 욕망과 번뇌를 끊어 내는 자유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 나면서 한 번은 죽는다는 명제를 가지고 태어 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면서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수없이 많은 억 겁의 시간. 즉 일 겁은 천지개벅이 이루어 지고 다음 개벽이 오는 때까지이다. 43억 2천 만년의 긴 시간이다. 160평방 킬로의 커다란 바위 위로 선녀의 날개 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서 달아 없어지는 아주 긴 시간을 말하는데 불경에는 그 겁이 참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꿀같은 달콤한 유혹에 취해 유한하다는 생명의 명제를 잊고 산다.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자식이 잘살아야 하니까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 줘야 한다면서

아내가 친구 중에 부동산이 올라서 밀리온을 벌어 들인 친구가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말하더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아내에게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물으니 “그럼 부자가 되면 부처님의 가피지” 하고 말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에게 빌고 영험이 있다는 갓 바위에 빌어 대학을 가고 그런 것은 사실 장독대에 냉수 떠 놓고 치성을 들여 비는 것 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많은 시주나 헌금을 하면 대접도 틀리고 대우도 받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을 모르고 남들이 절에 가니 따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해탈을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 마음에 이미 부처님이 실존해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하면서 석가모니나 아미타불과 교신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불을 미루고 인간의 교화와 중생의 제도를 위해 힘쓰고 있는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을 두루 살피고 관장하는 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욕망과 번뇌, 집착은 끊었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천수천안 끝없는 보살핌과 손길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탈은 죽은 상태, 불이 꺼진 상태라고 하면서 진짜 영생을 얻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우리의 영생은 산 영생이고 불교의 궁극의 목표인 해탈 열반은 모든 것을 끊어낸 불 꺼진 생명 같은 상태라고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것도 자신이 승려에서 목회자로 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진짜 살아 있는 보살도는 보지도 못하면서.

마치 불교를 나무로 깍은 불상이나, 바위로 조각한 불상을 보고 부처라고 잘 못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보이는 것만 보고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체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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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줄도 모르던
자라길 바라지도 않던 손톱이
어느 날 불편해지면 자란 손톱과 이별해야 할 순간
자라는 줄도 모르던 수염은 까칠하게 밤송이처럼 날을 세우고
어느 사이 숨기고 싶은 사연처럼 숨죽이고 멀어져 버린 머리는
마음 뿐인 마음 닦음처럼 자라지 않네.

#작가의변
손톱과 머리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라는데 마음을 쓰고 노력해도 자라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천상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천상계는 아주 멀까? 밴쿠버에 이민을 와서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이민 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법당에 조상을 모시고 명절 때도 스님이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얼마 전 분명 그 아파트 지을 때 기초 공사를 하면서 많은 지하수가 나와서 물 구덩이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하고 아내도 "그러네.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은 것을 알면 못살 거야"라고 했던 아내가

“저기 저 아파트 인터넷에 광고를 봤는데 2베드룸이 1밀리언 35만불이래.” 했더니

“나한테 아파트 아 자도 꺼내지 마”한다.

“있는 아파트도 날려 먹고 평생 죽을 때까지 지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도 못 가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면서 입도 뻥 끗 하지 못하게 했다.

이민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잘하려고 더 많이 벌려고 욕심부터 사업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도 팔고 나니 계속 올라 배 이상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처음부터 없으면 몰라도 있던 아파트를 팔고 계속 오르는 렌트비에 아파트 매니저의 횡포 일테면 집에 물건이 너무 많으니 줄여라 여기는 통로 이니 물건을 놓으면 안된다 등등 간섭을 해대니 아내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파서 도움을 주지 못하니 아내 혼자 낑낑 거리면서 가재 도구를 옮기고 다음 주에 다시 검사하려 온다는 매니저의 말에 스트레스 만 땅일 것이다.

이젠 나이 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직장에서 직장 생활 할 수 있는 나이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이리라 생각이 된다.돈도 없는데 나이도 먹어 이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 집에 아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내가 좋아 하는 순위인데 그 순위가 남편인 나는 가장 후 순위이다. 아들, 딸 그리고 남편.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일 때는 그것이 그렇게 티를 내지 않다가 지금 아파서 일도 못하고 심지어 운전도 아내가 운전해야 어딜 움직이게 된 상황이니 늘 꼴 보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그래서 지인에게 카톡으로 나 이렇게 당해 그러면 그 형 말이 다 똑같아. 숫 사자처럼 쫓겨 나지 않는 것 만도 다행이지 하면서 위로한다. 다른 생각 말구 얼른 몸을 추스려서 등산도 함께하고 직장도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그래야지.

맞는 말이다.그럼에도 서럽다.우울증 상태도 심해서 약을 먹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날도 많다. 그런데 거기다 이제 일 못하고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억울한 느낌 마져 든다.

천상계에서는 9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지고 향기로운 꽃들이 정원이 곳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은 참 좋겠다. 싶다 가도 백 년을 사는 것도 힘겨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상계에서 900년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천상 세계가 다를까? 같을까 하는 궁금증도 가져본다. 만약에 창조주가 있고 하느님이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라면 결국은 천상 세계는 하나가 아닐까? 유대교와, 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은 하느님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온 종교이니 당연히 천상세계에 하느님은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옥황상제도 같은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면 대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와 인간계 축생계. 그리고 아귀계와 아수라, 지옥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계와 축생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니까 당연히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귀계( 귀신의 고통)와 아수라, 지옥은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이다. 즉 전해 들은 이야기다라는 말이다.

죽어서 아귀가 되거나 아수라(악령의 세계)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하지만 우리가 더 싫어 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이다. 실제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어도 혼령이라도 고통 받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법화경에 의하면 일체의 사람이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은 생존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원인은 탄생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아기의 탄생이 사실을 늙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던져 지는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생일이라고 축하하고 아기의 탄생을 빌고 아기가 없어 설움 받은 조선의 많은 며느리들은 탄생부터 슬픈 존재인 아기 때문에 또 고통 받는 것이다. 인연의 끈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남의 아이와 내 핏줄에 의한 가족 관계는 아주 중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기를 빨고 아기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내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해서는 어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와 자식의 관계는 아주 끊을 래야 끊을 수 업는 관계이다.







석가모니도 욕망과 집착을 끊어 내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실체가 없는 공한 세상이니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욕망을 끊어 내면 업이 소멸되어 윤회에서 해방되고 해탈 열반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즉 태어 나지 않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열반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열반은 산스크리스트어의 비루비나(Zirvana) 즉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을 말한다. 열반에 들면 궁금한 것도 없는 제행무상, 제행무아, 열반적정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과 욕망 그리고 번뇌를 끊어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산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에는 육바라밀(보시와 베품) 지계(계율을 잘 지킴) 인욕( 어렵고 힘든 것을 참아냄) 정진( 끝없는 정진) 선정( 마음을 닦음) 지혜(정견)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초기불고의 팔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염불을 외우고 진언을 하는 것도 불교의 한 방편이다.

해탈은 산스크리스트어 (Vimoksa,moksha,팔리어 vimoksha, vimukti nirvana) 비모크샤, 비무티 즉 해방이라는 뜻으로 자유라는 의미다.속박에서 풀려나다.자신을 자신이 해방시킨다.전지전능한 신의 구원과 같은 타력에 의한 구원과도 다르다.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마음속 구속에서 해방됨으로 얻는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다.

요즘 대통령이 많이 찾는 그런 책임지지 않는 자유가 아니고 욕망과 번뇌를 끊어 내는 자유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 나면서 한 번은 죽는다는 명제를 가지고 태어 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면서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수없이 많은 억 겁의 시간. 즉 일 겁은 천지개벅이 이루어 지고 다음 개벽이 오는 때까지이다. 43억 2천 만년의 긴 시간이다. 160평방 킬로의 커다란 바위 위로 선녀의 날개 옷을 입은 선녀가 3년에 한 번씩 스쳐서 달아 없어지는 아주 긴 시간을 말하는데 불경에는 그 겁이 참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꿀같은 달콤한 유혹에 취해 유한하다는 생명의 명제를 잊고 산다.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자식이 잘살아야 하니까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 줘야 한다면서

아내가 친구 중에 부동산이 올라서 밀리온을 벌어 들인 친구가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말하더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아내에게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물으니 “그럼 부자가 되면 부처님의 가피지” 하고 말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에게 빌고 영험이 있다는 갓 바위에 빌어 대학을 가고 그런 것은 사실 장독대에 냉수 떠 놓고 치성을 들여 비는 것 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많은 시주나 헌금을 하면 대접도 틀리고 대우도 받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을 모르고 남들이 절에 가니 따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해탈을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 마음에 이미 부처님이 실존해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하면서 석가모니나 아미타불과 교신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불을 미루고 인간의 교화와 중생의 제도를 위해 힘쓰고 있는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을 두루 살피고 관장하는 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욕망과 번뇌, 집착은 끊었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천수천안 끝없는 보살핌과 손길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탈은 죽은 상태, 불이 꺼진 상태라고 하면서 진짜 영생을 얻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우리의 영생은 산 영생이고 불교의 궁극의 목표인 해탈 열반은 모든 것을 끊어낸 불 꺼진 생명 같은 상태라고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것도 자신이 승려에서 목회자로 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진짜 살아 있는 보살도는 보지도 못하면서.

마치 불교를 나무로 깍은 불상이나, 바위로 조각한 불상을 보고 부처라고 잘 못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보이는 것만 보고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체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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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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