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선종 창종, 일제강점기 불교사 가장 ‘획기적 사건’
조선불교선종 창종, 일제강점기 불교사 가장 ‘획기적 사건’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3.05.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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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인선우회 창립과 활동

부인선우회는 재가 여성을 선 수행 대중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대화의 한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16 부인선우회의 결성은 그간의 여성들의 불교 신앙이 기복중심의 주술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선 수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서 여성들의 불교 신앙생활 위상이 강화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17 이러한 정황은 1935년에 발간된 《선원(禪苑)》의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에 이렇게 나타난다.

그리하야 부인게 유지들의 무량의 노력과 김적음 화상의 일단 심월이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상조하얏슴으로 드듸어 그들이 뎨출한 회비로써 서울의 부장에 때업시 동경하든 그네의 복음 자리가 건립되게 되엿스니 곳 안국동 사십일번지에서 잇는 청·황·적·백 오색을 영롱하게 단청한 반양제 이층 가옥이다. 오랫동안 그리웁던 그 선원에서 벌서 한 철을 지나게 되엿스니 부인선우회원들의 기뿜과 김적음 화상의 기뿜이야 말 할 수 업슬 것이다.18

1931년 김적음 화상이 선학원을 인수하여 경영하기 시작하였을 때까지 활동 상황이 부진하였던 부인선우회는 수행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갖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혹은 선학원 한켠에 방을 얻어서 수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하고 이제 2층의 가옥을 얻어 여성 전용 선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선우회원들은 매월 정기적으로 조실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었고, 수행 과정을 점검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불교라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부인들의 불교 신앙이 혼몽한 꿈을 깨고 참다운 불교 교리인 선리(禪理)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禪學院日記抄要(禪苑 창간호).



부인선우회는 참선 수행과 병행하여 기도 수행을 진행하였다. 탄옹 화상은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해설하였으며, 동시에 일주일 미륵기도를 하기도 하였으며, 동안거 결제 전에는 지장기도를, 1932년 2월에는 관음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 기도 중 매일 저녁 백용성 화상은 여성 수행자들을 위하여 달마(達摩) 스님이 도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달마이입사행론(達摩二入四行論)》을 강론하였다. 이처럼 여성 수행자들도 비구승 못지않게 용맹정진 수행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인선우회라는 명칭뿐만 아니라 여성수행 공간을 선원이라고 부르면서 여성들의 수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알 수 있다.19

부인선우회의 창립은 선과 부인의 만남을 통하여 여성 수행자들이 참다운 불교 교리를 만나게 되는 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인선우회의 운영은 회원 입회금과 회의 기부금 그 외 각 신도들의 기부금으로써 유지한다. 그런 까닭에 제반 사업이 착착 진행되는 듯하며 장래 진취에 가능성이 풍부하여 조선부인선우를 위하여 영원히 축하한다고 하였다.20 이러한 현상은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부각됨에 따라서 불교를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각 또한 근대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21

1932년에 집계된 전국 선원과 수행 납자들의 수를 살펴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전국 19개 선원에서 1932년 동안거 동안 수행하는 납자의 수는 276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로 보자면 선 수행 승려들은 아주 적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승려의 전체 수를 7,000여 명22으로 산정할 때23 이 숫자는 약 4%에 달하는 아주 적은 것이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전국 19개 선원에서 1932년 동안거 동안 수행하는 납자의 수는 276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로 보자면 선 수행 승려들은 아주 적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승려의 전체 수를 7000여 명으로 산정할 때24 이 숫자는 약 4%에 달하는 아주 미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행납자의 수는 250명이었지만 정원을 넘어서는 276명이 수행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숫자는 적었을지라도 열기는 대단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 전선수좌대회 개최와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성립

1931년 적음 화상의 노력으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 선학원은 비구 선승들의 수행 풍토를 조성하고 청정 도량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정 자립이 선결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선학원은 1931년부터 몇 차례의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전국 선원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선학원이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렇다.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는 학무국 내에 종교과를 신설하여 종교 문제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이 소유한 부동산일지라도 종교 단체의 재산을 내국 법인으로 허가해 줄 수 있도록 재산관리상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면서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회당, 설교소, 강의소 등이라고 할지라도 “사회 안녕과 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의 행위를 할 경우 사용을 금지할 수도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러한 유화정책에 힘입어 기독교 및 천주교 집단은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여 인가를 받게 되었다.25

이러한 경향은 불교계에도 나타나서 1924년 전국 30본사가 참여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종교계의 재단법인화는 재정 운영의 건전성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지만 이사의 선임과 교체, 해마다 각종 사업과 결산을 행정관청에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26

선학원은 전선수좌대회를 통하여 선승들의 의견을 결집하고 1934년 초에 총독부에 재단법인 설립인가 신청을 한 결과 1934년 12월 5일에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27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인가되자 곧 이사진을 선임하고 이사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사진은 이렇다. 이사장 송만공, 부이사장 방한암, 상무이사 오성월·김남전·김적음 등이었다.28 선학원은 《선원》지에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두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지금까지 전선 사찰에 남어잇는 재산의 대부분도 처음은 수좌, 학인, 신도들 공부하라고 나라와 민간에서 정재를 연출한 것이언만 조선 불교가 퇴패함에 딸아 그 재산의 대부분이 다른 곳에 만이 소비되여 버리고 참으로 참선하는 사람은 도외시하고 돌보지 않는 경향이 농후하야 졌습니다. 멧해 전만 하야도 참선하는 수좌들이 결재시에도 잇을 곳이 업고 양식도 없어 누더기 넙풀거리며 거리와 들노 헤매든 것이 기억됩니다.29

위의 인용문에서 당시 참선하는 수좌들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재단법인이 만들어진 만큼 돈 있는 사람이 어느 목적에 토지와 돈을 쓰라고 기부하는 것을 받아 모아 그 목적에 쓸 수 있는 완전한 법 인격체가 만들어진 것이다.30 1935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에 기부된 재산 목록을 살펴보면 아래 <표 2>와 같다. 선우공제회가 설립될 당시 기부된 토지와 기부금을 중심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의 설립 당시 자본금은 9만 원 정도였으나 그간 수개월간 새로 기부하는 사람이 각 곳에서 나와서 벌써 약 14만 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법인에서 운영하는 선방이 5개소나 된다고 한다.31 선학원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된 직후 1935년 3월 7일부터 8일 양일간에 조선불교수좌대회를 선리참구원 대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선 불교 선종(禪宗)이 창종되었다.







5. 조선불교선종의 창종

1935년 3월 7일부터 선리참구원 대법당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수좌대회는 선종을 창립하고 아울러 종헌(宗憲)과 종규(宗規) 등 각종 법안을 제정하였다. 조선불교선종 종규는 종명(宗名), 종지(宗旨), 본존(本尊), 의식(儀式), 선원(禪院), 승려(僧侶) 및 신도(信徒), 선회(禪會), 종무원(宗務院), 종정(宗正), 선의원회(禪議員會), 재정(財政), 보칙(補則) 등 12장 29조로 구성되었다.32

일제 강점기 불교계에서 선종이 창종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모든 불교 종파가 선종과 교종을 합친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이래 불교계는 제대로 된 종명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는 30본사 체제를 구축하면서 종명에 선교양종을 표방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불교계의 통합 조직체였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선종이라는 종명의 사용은 조선 불교의 독자성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리참구원이 대처식육을 일삼던 대처 집단과는 다른 비구 선승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선종의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는 수행승들의 일상생활과 계율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제1조에 본원의 납자는 무상출입을 금하며 매월 3일과 8일에 목욕을 하며 교외를 산책할 수 있다. 제5조 본 선원은 음주, 식육, 흡연, 가요 등 일체의 혼란을 금지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조항은 승려들의 대처식육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고착되어가던 당시 상황에서 비구승들이 지녀야 할 계율을 명시함으로써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종무원 원규와 규약을 제정하고 종정, 원장, 이사, 선의원(禪議員) 등을 선임하였다. 종무원은 재단법인의 사무를 집행하는 기구였고, 그 집행기구를 운영하는 규정이 원규와 규약이었다. 그리고 선임된 조직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종정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원장 오성월, 부원장 설석우, 이사는 김적음․ 정운봉․ 이올연 등 이었다.



왼쪽부터 혜월 스님, 만공 스님, 한암 스님.
禪學院日記抄要(禪苑 창간호).

부인선우회는 참선 수행과 병행하여 기도 수행을 진행하였다. 탄옹 화상은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해설하였으며, 동시에 일주일 미륵기도를 하기도 하였으며, 동안거 결제 전에는 지장기도를, 1932년 2월에는 관음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 기도 중 매일 저녁 백용성 화상은 여성 수행자들을 위하여 달마(達摩) 스님이 도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달마이입사행론(達摩二入四行論)》을 강론하였다. 이처럼 여성 수행자들도 비구승 못지않게 용맹정진 수행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인선우회라는 명칭뿐만 아니라 여성수행 공간을 선원이라고 부르면서 여성들의 수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알 수 있다.19

부인선우회의 창립은 선과 부인의 만남을 통하여 여성 수행자들이 참다운 불교 교리를 만나게 되는 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인선우회의 운영은 회원 입회금과 회의 기부금 그 외 각 신도들의 기부금으로써 유지한다. 그런 까닭에 제반 사업이 착착 진행되는 듯하며 장래 진취에 가능성이 풍부하여 조선부인선우를 위하여 영원히 축하한다고 하였다.20 이러한 현상은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부각됨에 따라서 불교를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각 또한 근대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21

1932년에 집계된 전국 선원과 수행 납자들의 수를 살펴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전국 19개 선원에서 1932년 동안거 동안 수행하는 납자의 수는 276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로 보자면 선 수행 승려들은 아주 적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승려의 전체 수를 7,000여 명22으로 산정할 때23 이 숫자는 약 4%에 달하는 아주 적은 것이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전국 19개 선원에서 1932년 동안거 동안 수행하는 납자의 수는 276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로 보자면 선 수행 승려들은 아주 적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승려의 전체 수를 7000여 명으로 산정할 때24 이 숫자는 약 4%에 달하는 아주 미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행납자의 수는 250명이었지만 정원을 넘어서는 276명이 수행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숫자는 적었을지라도 열기는 대단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 전선수좌대회 개최와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성립

1931년 적음 화상의 노력으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 선학원은 비구 선승들의 수행 풍토를 조성하고 청정 도량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정 자립이 선결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선학원은 1931년부터 몇 차례의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전국 선원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선학원이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렇다.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는 학무국 내에 종교과를 신설하여 종교 문제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이 소유한 부동산일지라도 종교 단체의 재산을 내국 법인으로 허가해 줄 수 있도록 재산관리상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면서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회당, 설교소, 강의소 등이라고 할지라도 “사회 안녕과 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의 행위를 할 경우 사용을 금지할 수도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러한 유화정책에 힘입어 기독교 및 천주교 집단은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여 인가를 받게 되었다.25

이러한 경향은 불교계에도 나타나서 1924년 전국 30본사가 참여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종교계의 재단법인화는 재정 운영의 건전성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지만 이사의 선임과 교체, 해마다 각종 사업과 결산을 행정관청에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26

선학원은 전선수좌대회를 통하여 선승들의 의견을 결집하고 1934년 초에 총독부에 재단법인 설립인가 신청을 한 결과 1934년 12월 5일에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27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인가되자 곧 이사진을 선임하고 이사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사진은 이렇다. 이사장 송만공, 부이사장 방한암, 상무이사 오성월·김남전·김적음 등이었다.28 선학원은 《선원》지에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두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지금까지 전선 사찰에 남어잇는 재산의 대부분도 처음은 수좌, 학인, 신도들 공부하라고 나라와 민간에서 정재를 연출한 것이언만 조선 불교가 퇴패함에 딸아 그 재산의 대부분이 다른 곳에 만이 소비되여 버리고 참으로 참선하는 사람은 도외시하고 돌보지 않는 경향이 농후하야 졌습니다. 멧해 전만 하야도 참선하는 수좌들이 결재시에도 잇을 곳이 업고 양식도 없어 누더기 넙풀거리며 거리와 들노 헤매든 것이 기억됩니다.29

위의 인용문에서 당시 참선하는 수좌들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재단법인이 만들어진 만큼 돈 있는 사람이 어느 목적에 토지와 돈을 쓰라고 기부하는 것을 받아 모아 그 목적에 쓸 수 있는 완전한 법 인격체가 만들어진 것이다.30 1935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에 기부된 재산 목록을 살펴보면 아래 <표 2>와 같다. 선우공제회가 설립될 당시 기부된 토지와 기부금을 중심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의 설립 당시 자본금은 9만 원 정도였으나 그간 수개월간 새로 기부하는 사람이 각 곳에서 나와서 벌써 약 14만 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법인에서 운영하는 선방이 5개소나 된다고 한다.31 선학원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된 직후 1935년 3월 7일부터 8일 양일간에 조선불교수좌대회를 선리참구원 대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선 불교 선종(禪宗)이 창종되었다.

5. 조선불교선종의 창종

1935년 3월 7일부터 선리참구원 대법당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수좌대회는 선종을 창립하고 아울러 종헌(宗憲)과 종규(宗規) 등 각종 법안을 제정하였다. 조선불교선종 종규는 종명(宗名), 종지(宗旨), 본존(本尊), 의식(儀式), 선원(禪院), 승려(僧侶) 및 신도(信徒), 선회(禪會), 종무원(宗務院), 종정(宗正), 선의원회(禪議員會), 재정(財政), 보칙(補則) 등 12장 29조로 구성되었다.32

일제 강점기 불교계에서 선종이 창종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모든 불교 종파가 선종과 교종을 합친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이래 불교계는 제대로 된 종명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는 30본사 체제를 구축하면서 종명에 선교양종을 표방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불교계의 통합 조직체였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선종이라는 종명의 사용은 조선 불교의 독자성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리참구원이 대처식육을 일삼던 대처 집단과는 다른 비구 선승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선종의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는 수행승들의 일상생활과 계율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제1조에 본원의 납자는 무상출입을 금하며 매월 3일과 8일에 목욕을 하며 교외를 산책할 수 있다. 제5조 본 선원은 음주, 식육, 흡연, 가요 등 일체의 혼란을 금지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조항은 승려들의 대처식육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고착되어가던 당시 상황에서 비구승들이 지녀야 할 계율을 명시함으로써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종무원 원규와 규약을 제정하고 종정, 원장, 이사, 선의원(禪議員) 등을 선임하였다. 종무원은 재단법인의 사무를 집행하는 기구였고, 그 집행기구를 운영하는 규정이 원규와 규약이었다. 그리고 선임된 조직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종정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원장 오성월, 부원장 설석우, 이사는 김적음․ 정운봉․ 이올연 등 이었다.

왼쪽부터 혜월 스님, 만공 스님, 한암 스님.
왼쪽부터 혜월 스님, 만공 스님, 한암 스님.

종정은 상징적인 존재로 임기를 정하지 않은 종신제였고, 고승들로 종정회를 구성하였다. 종정회는 종무원 임원 즉 이사 및 원장․ 부원장과 이와 같은 수의 선의회 전형원(銓衡員)으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전형하여 선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하였다.33 선의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종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석호, 하용택, 황용금 외 12인이 선출되어 명실상부한 조직을 갖추었다.

선회의 조직과 권한을 규정한 선회법은 총 11장 27조인데 조직, 의장, 서기 및 사제(司祭), 선회원 선거 및 임기, 선회의 권한, 위원회, 심사위원, 회의, 휴회, 폐회, 정회, 해산, 징계, 보별(補別) 등으로 구성되었다.34

이렇게 조직을 정비하고 나서 선학원 명칭을 ‘중앙선원’으로 바꾸었고, 조선불교부인선원도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부인선원이 전국에 걸쳐 설립되었는데 선학원에서 이를 총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조선불교선종이 당시 주류 집단이었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대처승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선학원은 해방 이후 비구승들의 중심 사찰로서 소위 ‘정화불사’를 통해 비구 승단을 세울 수 있었던 모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총독부는 중앙선리참구원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면서 감시와 통제의 시선을 놓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2년 조선 불교 총본사였던 태고사를 인가하면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 잘 알 수 있다.

총독부에서는 작년 4월 사찰령의 개정과 동시에 조선 불교도의 총의에 따라 선(禪)과 교(敎)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태고사(太古寺)를 만들고 전선(全鮮) 31본산의 총본산으로 하여 전선 불교의 중앙지도 기관으로 했다. … 여기서 남은 문제는 존립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중앙선리참구원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선리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 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다.35

비구 선승들이 대처식육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불교계와 달리 청정 계율을 수호하고 정법을 깨치기 위한 선 수행을 주장하고 나서자 총독부로서는 부담스러운 단체가 된 것이다. 총독부는 지금까지 그들의 통치정책에 순응하는 31본사 주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중심으로 불교계를 운영하여 왔다. 그런데 전시 상황에서 통치정책에 저항의 색채를 띤 선리참구원이 설립한 선종은 그 존재 자체를 암적인 존재로 인식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총독부는 선리참구원을 통제하고자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였고 통제하고자 하는 방침을 명확히 하였다.36

조선불교선종의 창립은 일본 불교의 유입으로 대처식육 현상이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청정계율을 수호하고 바른 깨침을 얻고자 노력하는 비구 선승들의 의지 표명이었다. 비구 선승들은 자신의 한 몸조차 간수하기 힘들었던 처지에서 자립자애하는 방편으로 선우공제회를 조직하였다. 이 선우공제회를 근간으로 적음이라는 중흥조를 만나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재단법인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총독부의 가혹한 외압이 가해지는 속에서도 모든 수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재단법인의 조직을 만들고 함께 수행하면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불교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조선불교선종의 출범은 총독부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 불교계의 독자성을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불교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주] ----

16) 조승미(2006), <근대 한국불교의 여성수행문화 - 婦人禪友會와 婦人禪苑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34, 한국사상문화학회, 384쪽.

17) 조승미, 앞의 논문, 387쪽.

18) 선학원(1935),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 《禪苑》 제4호, 10, 32~34쪽.

19) 조승미, 앞의 논문, 396쪽.

20) 위와 같음.

21) 조승미, 앞의 논문, 387쪽.

22) 朝鮮佛敎中央敎務院(1928), 《朝鮮佛敎一覽表》, 56쪽. 이 일람표에 따르면 전국의 사찰 수는 1,363이고, 僧의 수는 6,334명이며, 니(尼)의 수는 864명으로 집계된다.

23)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2001), 《조계종사: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192쪽.

24)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2001), 《조계종사: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192쪽.

25) 윤선자(2002), 《한국근대사와 종교》, 국학자료원, 25~27쪽.

26) 김순석(2003),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경인문화사, 120~130쪽.

27) 선학원(2003), <우리 각 긔관의 활동 상황>, 《禪苑》 제4호, 10, 29~31쪽.

28) <재단법인 선리참구원 인가>, 《불교시보》, 창간호, 1935. 8. 3.

29) 앞의 글, <우리 각 긔관의 활동 상황>, 30쪽.

30) 위와 같음.

31) 위와 같음

32) 法眞 편(2007), <朝鮮佛敎禪宗宗規>, 《選佛場》, 한국불교선리연구원, 154~157쪽.

33) 김순석(2006),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선문화연구》 창간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330쪽.

34) 위와 같음.

35) <불교서도 內鮮一體로 종교보국에 新機軸>, 《매일신보》 1942. 8. 6.

36) 위와 같음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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