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6. 마음의 눈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6. 마음의 눈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6.0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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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마음엔 황량한 사막뿐이고
꽃을 보고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면
마음엔 상처투성이다.







#작가의 변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능이 없어서 그냥 농사나 짓다가 삶을 마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배움이 좀 더 많았다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남달랐다. 하지만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먹고 사는 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다. 그리고 일본의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것을 평생 외국 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자랑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가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서당도 좀 다니고 초등학교 교육도 조금은 받아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일본 말도 어느 정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보고 듣고 한 견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가 야학에 못 다니게 말린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야학을 가려고 책도 준비해 몇 번 다니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가 야학에 가는 것을 알고는 책 보따리를 우물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 내서 어떻게 말려서 학교를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던 외할머니는 때마다 사탕 한 봉지를 사 오셨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못하다 어쩌다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재미에 어머니가 아무리 외할머니를 나쁘다고 말해도 저렇게 자상한 외할머니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믿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 되어서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든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대학까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 배우는 정도 배우고 남들에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동네 분위기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다.

나도 아이들 공부는 하려고 하면 시켜야지 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시키려 했고 딸은 공항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이 싫다고 회계 공부를 하고 있고 딸은 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대학 전문대를 거쳐서 에밀리카 대학을 졸업했다. 딸은 처음부터 미술 대학인 에밀리카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남들은 미술 대학에 가려고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딸은 혼자 그리던 포트폴리오로 미술 대학에 갔고 에밀리카 편입도 혼자 힘으로 들어갔다. 딸이 에밀리카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었고 기술 대학인 항공 운항과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리포트 쓰는 것 등을 도움을 받고는 따돌림을 해서 아주 힘들어했다. 그 유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공항에 직장도 다들 잘 잡았지만, 딸은 공항 관련 직장을 잡지 않아서 델리 숍 할 때 가르쳐 준 캐셔일로 직장을 잡아 최저임금를 받아 가면서 마트, 베스트바이, 별다방(스타벅스) 등을 다니면서 직장도 아닌 아르바이트도 아닌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했다. 나는 “거봐 미대 나온 것으로 직장 잡는 것이 힘들지. 관련 직장도 대부분 최저임금이잖니.”라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친구 따라 시험을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어 파트타임 3년 넘게 하고 지금은 정직원으로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미술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나 보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쪽도 불황이어서 대부분 계약이 해지 된 상태라 실업자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딸. 먹고 사는 일이 먼저인데 배가 불렀는 핀잔을 늘 듣는다.







 

한국에는 많은 미술 하는 예술가들이 미술 학원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입시 학원도 잘 안된다. 물론 개인 과외는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태권도, 피아노 학원, 그리고 수영 레슨 정도다.

요즘 연예인들의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쓴다. 작품보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지도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딸이 에밀리카 들어가기 전 작품을 판매할 때 액자값도 안 되는 판매가에도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능력이 없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유명인 인지도도 능력이라며.

맞는 말이 긴한데 금손으로 불리는 가수나 배우들의 창작 활동과 오로지 예술 창작만을 하는 많은 예술인은 판로를 걱정하고 생계를 걱정하지만, 비싸게 팔리는 연예인들의 작품이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딸에게 한국에서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들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고 기사도 많이 나온다고 기사를 보여 주니, 작품들을 보더니 아마추어인 것이 표시 나는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두 명의 작품은 괜찮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미대에 들어갈 때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원 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부잣집에서 돈이 있으면 학원 다녀서 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런 스펙을 말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도 사실 그런 식으로 스펙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등등.

딸이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조지 부시 그림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닌 화공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한 신윤복, 김홍도 같은 화가들은 중인 신분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풍속화로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나중에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인가 하면서도 수억 씩 한다는 현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하게 된다. 살아서 작품을 고가에 팔고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죽어서 유명한 것보다 나으니까? 요즘은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재능이 있는데도 예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취미로 예술을 하면서 전문 작가보다 더 높이 인정받는 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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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마음엔 황량한 사막뿐이고
꽃을 보고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면
마음엔 상처투성이다.





 

꽃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마음엔 황량한 사막뿐이고
꽃을 보고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면
마음엔 상처투성이다.







#작가의 변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능이 없어서 그냥 농사나 짓다가 삶을 마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배움이 좀 더 많았다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남달랐다. 하지만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먹고 사는 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다. 그리고 일본의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것을 평생 외국 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자랑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가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서당도 좀 다니고 초등학교 교육도 조금은 받아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일본 말도 어느 정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보고 듣고 한 견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가 야학에 못 다니게 말린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야학을 가려고 책도 준비해 몇 번 다니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가 야학에 가는 것을 알고는 책 보따리를 우물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 내서 어떻게 말려서 학교를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던 외할머니는 때마다 사탕 한 봉지를 사 오셨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못하다 어쩌다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재미에 어머니가 아무리 외할머니를 나쁘다고 말해도 저렇게 자상한 외할머니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믿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 되어서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든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대학까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 배우는 정도 배우고 남들에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동네 분위기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다.

나도 아이들 공부는 하려고 하면 시켜야지 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시키려 했고 딸은 공항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이 싫다고 회계 공부를 하고 있고 딸은 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대학 전문대를 거쳐서 에밀리카 대학을 졸업했다. 딸은 처음부터 미술 대학인 에밀리카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남들은 미술 대학에 가려고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딸은 혼자 그리던 포트폴리오로 미술 대학에 갔고 에밀리카 편입도 혼자 힘으로 들어갔다. 딸이 에밀리카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었고 기술 대학인 항공 운항과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리포트 쓰는 것 등을 도움을 받고는 따돌림을 해서 아주 힘들어했다. 그 유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공항에 직장도 다들 잘 잡았지만, 딸은 공항 관련 직장을 잡지 않아서 델리 숍 할 때 가르쳐 준 캐셔일로 직장을 잡아 최저임금를 받아 가면서 마트, 베스트바이, 별다방(스타벅스) 등을 다니면서 직장도 아닌 아르바이트도 아닌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했다. 나는 “거봐 미대 나온 것으로 직장 잡는 것이 힘들지. 관련 직장도 대부분 최저임금이잖니.”라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친구 따라 시험을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어 파트타임 3년 넘게 하고 지금은 정직원으로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미술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나 보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쪽도 불황이어서 대부분 계약이 해지 된 상태라 실업자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딸. 먹고 사는 일이 먼저인데 배가 불렀는 핀잔을 늘 듣는다.







 

한국에는 많은 미술 하는 예술가들이 미술 학원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입시 학원도 잘 안된다. 물론 개인 과외는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태권도, 피아노 학원, 그리고 수영 레슨 정도다.

요즘 연예인들의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쓴다. 작품보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지도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딸이 에밀리카 들어가기 전 작품을 판매할 때 액자값도 안 되는 판매가에도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능력이 없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유명인 인지도도 능력이라며.

맞는 말이 긴한데 금손으로 불리는 가수나 배우들의 창작 활동과 오로지 예술 창작만을 하는 많은 예술인은 판로를 걱정하고 생계를 걱정하지만, 비싸게 팔리는 연예인들의 작품이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딸에게 한국에서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들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고 기사도 많이 나온다고 기사를 보여 주니, 작품들을 보더니 아마추어인 것이 표시 나는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두 명의 작품은 괜찮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미대에 들어갈 때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원 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부잣집에서 돈이 있으면 학원 다녀서 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런 스펙을 말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도 사실 그런 식으로 스펙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등등.

딸이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조지 부시 그림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닌 화공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한 신윤복, 김홍도 같은 화가들은 중인 신분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풍속화로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나중에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인가 하면서도 수억 씩 한다는 현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하게 된다. 살아서 작품을 고가에 팔고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죽어서 유명한 것보다 나으니까? 요즘은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재능이 있는데도 예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취미로 예술을 하면서 전문 작가보다 더 높이 인정받는 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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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능이 없어서 그냥 농사나 짓다가 삶을 마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배움이 좀 더 많았다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남달랐다. 하지만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먹고 사는 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다. 그리고 일본의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것을 평생 외국 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자랑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가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서당도 좀 다니고 초등학교 교육도 조금은 받아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일본 말도 어느 정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보고 듣고 한 견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가 야학에 못 다니게 말린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야학을 가려고 책도 준비해 몇 번 다니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가 야학에 가는 것을 알고는 책 보따리를 우물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 내서 어떻게 말려서 학교를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던 외할머니는 때마다 사탕 한 봉지를 사 오셨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못하다 어쩌다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재미에 어머니가 아무리 외할머니를 나쁘다고 말해도 저렇게 자상한 외할머니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믿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 되어서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든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대학까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 배우는 정도 배우고 남들에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동네 분위기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다.

나도 아이들 공부는 하려고 하면 시켜야지 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시키려 했고 딸은 공항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이 싫다고 회계 공부를 하고 있고 딸은 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대학 전문대를 거쳐서 에밀리카 대학을 졸업했다. 딸은 처음부터 미술 대학인 에밀리카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남들은 미술 대학에 가려고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딸은 혼자 그리던 포트폴리오로 미술 대학에 갔고 에밀리카 편입도 혼자 힘으로 들어갔다. 딸이 에밀리카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었고 기술 대학인 항공 운항과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리포트 쓰는 것 등을 도움을 받고는 따돌림을 해서 아주 힘들어했다. 그 유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공항에 직장도 다들 잘 잡았지만, 딸은 공항 관련 직장을 잡지 않아서 델리 숍 할 때 가르쳐 준 캐셔일로 직장을 잡아 최저임금를 받아 가면서 마트, 베스트바이, 별다방(스타벅스) 등을 다니면서 직장도 아닌 아르바이트도 아닌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했다. 나는 “거봐 미대 나온 것으로 직장 잡는 것이 힘들지. 관련 직장도 대부분 최저임금이잖니.”라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친구 따라 시험을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어 파트타임 3년 넘게 하고 지금은 정직원으로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미술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나 보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쪽도 불황이어서 대부분 계약이 해지 된 상태라 실업자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딸. 먹고 사는 일이 먼저인데 배가 불렀는 핀잔을 늘 듣는다.





 

꽃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마음엔 황량한 사막뿐이고
꽃을 보고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면
마음엔 상처투성이다.







#작가의 변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능이 없어서 그냥 농사나 짓다가 삶을 마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배움이 좀 더 많았다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남달랐다. 하지만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먹고 사는 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다. 그리고 일본의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것을 평생 외국 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자랑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가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서당도 좀 다니고 초등학교 교육도 조금은 받아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일본 말도 어느 정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보고 듣고 한 견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가 야학에 못 다니게 말린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야학을 가려고 책도 준비해 몇 번 다니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가 야학에 가는 것을 알고는 책 보따리를 우물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 내서 어떻게 말려서 학교를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던 외할머니는 때마다 사탕 한 봉지를 사 오셨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못하다 어쩌다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재미에 어머니가 아무리 외할머니를 나쁘다고 말해도 저렇게 자상한 외할머니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믿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 되어서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든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대학까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 배우는 정도 배우고 남들에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동네 분위기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다.

나도 아이들 공부는 하려고 하면 시켜야지 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시키려 했고 딸은 공항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이 싫다고 회계 공부를 하고 있고 딸은 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대학 전문대를 거쳐서 에밀리카 대학을 졸업했다. 딸은 처음부터 미술 대학인 에밀리카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남들은 미술 대학에 가려고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딸은 혼자 그리던 포트폴리오로 미술 대학에 갔고 에밀리카 편입도 혼자 힘으로 들어갔다. 딸이 에밀리카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었고 기술 대학인 항공 운항과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리포트 쓰는 것 등을 도움을 받고는 따돌림을 해서 아주 힘들어했다. 그 유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공항에 직장도 다들 잘 잡았지만, 딸은 공항 관련 직장을 잡지 않아서 델리 숍 할 때 가르쳐 준 캐셔일로 직장을 잡아 최저임금를 받아 가면서 마트, 베스트바이, 별다방(스타벅스) 등을 다니면서 직장도 아닌 아르바이트도 아닌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했다. 나는 “거봐 미대 나온 것으로 직장 잡는 것이 힘들지. 관련 직장도 대부분 최저임금이잖니.”라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친구 따라 시험을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어 파트타임 3년 넘게 하고 지금은 정직원으로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미술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나 보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쪽도 불황이어서 대부분 계약이 해지 된 상태라 실업자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딸. 먹고 사는 일이 먼저인데 배가 불렀는 핀잔을 늘 듣는다.







 

한국에는 많은 미술 하는 예술가들이 미술 학원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입시 학원도 잘 안된다. 물론 개인 과외는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태권도, 피아노 학원, 그리고 수영 레슨 정도다.

요즘 연예인들의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쓴다. 작품보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지도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딸이 에밀리카 들어가기 전 작품을 판매할 때 액자값도 안 되는 판매가에도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능력이 없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유명인 인지도도 능력이라며.

맞는 말이 긴한데 금손으로 불리는 가수나 배우들의 창작 활동과 오로지 예술 창작만을 하는 많은 예술인은 판로를 걱정하고 생계를 걱정하지만, 비싸게 팔리는 연예인들의 작품이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딸에게 한국에서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들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고 기사도 많이 나온다고 기사를 보여 주니, 작품들을 보더니 아마추어인 것이 표시 나는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두 명의 작품은 괜찮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미대에 들어갈 때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원 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부잣집에서 돈이 있으면 학원 다녀서 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런 스펙을 말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도 사실 그런 식으로 스펙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등등.

딸이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조지 부시 그림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닌 화공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한 신윤복, 김홍도 같은 화가들은 중인 신분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풍속화로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나중에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인가 하면서도 수억 씩 한다는 현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하게 된다. 살아서 작품을 고가에 팔고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죽어서 유명한 것보다 나으니까? 요즘은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재능이 있는데도 예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취미로 예술을 하면서 전문 작가보다 더 높이 인정받는 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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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많은 미술 하는 예술가들이 미술 학원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입시 학원도 잘 안된다. 물론 개인 과외는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태권도, 피아노 학원, 그리고 수영 레슨 정도다.

요즘 연예인들의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쓴다. 작품보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지도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딸이 에밀리카 들어가기 전 작품을 판매할 때 액자값도 안 되는 판매가에도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능력이 없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유명인 인지도도 능력이라며.

맞는 말이 긴한데 금손으로 불리는 가수나 배우들의 창작 활동과 오로지 예술 창작만을 하는 많은 예술인은 판로를 걱정하고 생계를 걱정하지만, 비싸게 팔리는 연예인들의 작품이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딸에게 한국에서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들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고 기사도 많이 나온다고 기사를 보여 주니, 작품들을 보더니 아마추어인 것이 표시 나는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두 명의 작품은 괜찮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미대에 들어갈 때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원 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부잣집에서 돈이 있으면 학원 다녀서 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런 스펙을 말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도 사실 그런 식으로 스펙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등등.

딸이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조지 부시 그림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닌 화공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한 신윤복, 김홍도 같은 화가들은 중인 신분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풍속화로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나중에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인가 하면서도 수억 씩 한다는 현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하게 된다. 살아서 작품을 고가에 팔고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죽어서 유명한 것보다 나으니까? 요즘은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재능이 있는데도 예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취미로 예술을 하면서 전문 작가보다 더 높이 인정받는 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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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마음엔 황량한 사막뿐이고
꽃을 보고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면
마음엔 상처투성이다.







#작가의 변
세상엔 재능이 있어도 재능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능이 없어서 그냥 농사나 짓다가 삶을 마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배움이 좀 더 많았다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남달랐다. 하지만 환경이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먹고 사는 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다. 그리고 일본의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것을 평생 외국 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자랑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가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서당도 좀 다니고 초등학교 교육도 조금은 받아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일본 말도 어느 정도 하셨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보고 듣고 한 견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가 야학에 못 다니게 말린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야학을 가려고 책도 준비해 몇 번 다니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가 야학에 가는 것을 알고는 책 보따리를 우물에 빠뜨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 내서 어떻게 말려서 학교를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릴 때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던 외할머니는 때마다 사탕 한 봉지를 사 오셨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못하다 어쩌다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달콤한 사탕을 먹는 재미에 어머니가 아무리 외할머니를 나쁘다고 말해도 저렇게 자상한 외할머니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믿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 되어서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든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대학까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 배우는 정도 배우고 남들에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동네 분위기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다.

나도 아이들 공부는 하려고 하면 시켜야지 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시키려 했고 딸은 공항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이 싫다고 회계 공부를 하고 있고 딸은 기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대학 전문대를 거쳐서 에밀리카 대학을 졸업했다. 딸은 처음부터 미술 대학인 에밀리카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술을 하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밥 빌어먹기 딱 좋다고 못 하게 했다. 결국은 남들은 미술 대학에 가려고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딸은 혼자 그리던 포트폴리오로 미술 대학에 갔고 에밀리카 편입도 혼자 힘으로 들어갔다. 딸이 에밀리카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었고 기술 대학인 항공 운항과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리포트 쓰는 것 등을 도움을 받고는 따돌림을 해서 아주 힘들어했다. 그 유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공항에 직장도 다들 잘 잡았지만, 딸은 공항 관련 직장을 잡지 않아서 델리 숍 할 때 가르쳐 준 캐셔일로 직장을 잡아 최저임금를 받아 가면서 마트, 베스트바이, 별다방(스타벅스) 등을 다니면서 직장도 아닌 아르바이트도 아닌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했다. 나는 “거봐 미대 나온 것으로 직장 잡는 것이 힘들지. 관련 직장도 대부분 최저임금이잖니.”라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친구 따라 시험을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어 파트타임 3년 넘게 하고 지금은 정직원으로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미술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나 보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쪽도 불황이어서 대부분 계약이 해지 된 상태라 실업자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딸. 먹고 사는 일이 먼저인데 배가 불렀는 핀잔을 늘 듣는다.







 

한국에는 많은 미술 하는 예술가들이 미술 학원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입시 학원도 잘 안된다. 물론 개인 과외는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태권도, 피아노 학원, 그리고 수영 레슨 정도다.

요즘 연예인들의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쓴다. 작품보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지도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딸이 에밀리카 들어가기 전 작품을 판매할 때 액자값도 안 되는 판매가에도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능력이 없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유명인 인지도도 능력이라며.

맞는 말이 긴한데 금손으로 불리는 가수나 배우들의 창작 활동과 오로지 예술 창작만을 하는 많은 예술인은 판로를 걱정하고 생계를 걱정하지만, 비싸게 팔리는 연예인들의 작품이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딸에게 한국에서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들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고 기사도 많이 나온다고 기사를 보여 주니, 작품들을 보더니 아마추어인 것이 표시 나는 작품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두 명의 작품은 괜찮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미대에 들어갈 때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원 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부잣집에서 돈이 있으면 학원 다녀서 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런 스펙을 말하는 것이다.

외국 유학도 사실 그런 식으로 스펙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제적 형편이 안 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등등.

딸이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조지 부시 그림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닌 화공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한 신윤복, 김홍도 같은 화가들은 중인 신분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풍속화로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나중에 빛을 보기도 하는 것인가 하면서도 수억 씩 한다는 현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하게 된다. 살아서 작품을 고가에 팔고 부자로 살 수 있다면 죽어서 유명한 것보다 나으니까? 요즘은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재능이 있는데도 예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취미로 예술을 하면서 전문 작가보다 더 높이 인정받는 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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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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