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3. 캐나다 한가위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3. 캐나다 한가위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10.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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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왜 그리도 밝은지
차례로 만나던 조상도 만나지 못하고
달빛을 제대로 쳐다 볼 용기도 없다
밝은 달이 돌아 가신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아
마음으로 기침하며 마당에 나간 아버지와
쪼그려 한 잠자고 제수 음식 준비하던
코고는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을 뿐

어제는 한국 추석날
오늘은 캐나다 추석날
어제 중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오니
그사이 아이들이 주문한 피자 몇 쪽으로
저녁을 먹으며 추석날 문울 연 식당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 살이 생각.


#작가의 변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던 내겐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다른 애들은 다 오는데 너는 얼마나 돈을 번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오냐”고 원망을 쏟아 냈다. 차를 못 가진 애들도 고향에 갈 때는 차를 빌려서 고향을 간다. 그래서 나 성공했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늘 명절이 지나고 잠시 고향 집에 다녀오거나 아예 가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가 들어 이제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려나 싶었는데 뚱딴지처럼 외국으로 이민한다고 훌쩍 떠나서, 어머니는 평생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엌일에 손을 놓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늘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국에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좋아할 때 내가 고국에 뭘 보내지 못하니, 나도 못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딸 친구 부모가 선물하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초콜릿 한 상자라도 선물해야 하니 사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쁜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못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이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그냥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지만 캐나다에서는 생일에도 선물은 못 해도 카드는 줘야 하는 문화가 있어서 짧은 글귀를 쓰는 그 카드를 그렇게 비싸게 사서 줘야 마을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월계수 나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 의해 다 까발려진 사실인 달. 그렇게 우주복으로 싸매고 달에 도착한 그 흑백 사진의 장면은 지구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보지 못하고 동경하던 세상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순간이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소설로 그리는 세상이나 시로 구상하는 세상은 분명 더욱 슬프고 애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글자를 글자로만 보지 않고 독자마다 자신들의 상상을 그곳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벗어 나지 못하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 가면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어 주인공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하니 독자는 작가의 그 시점과 자신의 상상을 더 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 아이였을 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서울에 산다 내 동생 자가용이 있다 내 동생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서울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 이미지는 분명 가난하고 헐벗은 골방이나 독서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가기엔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을 줄 곳조차 없었다. 그러니 군대 동기가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던 날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서글펐던 추석은 명절에도 시골에 못 가고 새벽에 일하고 돌아와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라면을 끓여서 먹던 날과 추석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명절이라고 입원환자 대부분 친지가 찾아오고 방문자들이 많아 떠들썩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병원 창밖을 바라보던 때인 것 같다.







시골에는 늘 명절마다 일이 바빠서 못 오나 보다 하고 있길 바랐고 맹장 수술했다고 올라오실 것 같지 않아 서운해질 마음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만 어머니가 참석하고 그 후로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한 번도 부모님이 참석한 적은 없다. 때론 졸업식에 부모님이 와서 짜장면 먹으러 간다던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달을 보면 분명 과학적으로는 그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영혼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에 사는 영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은 최소한 명절에라도 부모 형제가 만나서 조상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차례라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은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만나는 자리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석이든 설이든 서민들에겐 제수용품 사는 것조차 한숨이었다. 좋은 것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조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조상이 도와준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차례상을 차리던 어머니 그곳에선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빌며 차례상 앞에 앉아 새 양말을 신으면서 두루마기를 입던 아버지와 통나무 향을 깎아서 향을 사르고 수저를 옮기면서 조상에게 빌던 그 마음을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다. 이제는 명절도 명절이 아닌 캐나다에서 살면서 문명의 발달에 점점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삶이 박제되어 가슴에서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달빛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달맞이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피자나 핫도그를 몰라도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고 솔잎을 깔아 내가 만든 못생긴 송편을 찌고 그 송편을 찾아 먹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 거린 다.

떡메로 찰떡을 치던 동네잔치의 모습이나 앞산에 메아리 되어 오던 잔치 날 돼지 잡던 모습들도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떠오른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명품 신발을 못 신어 본 사람에게 명품 신발도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 명품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 없는 집시에게 집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집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학교 운동장을 걸으니 정말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든다. 비에 젖어 앉을 곳도 없고 발도 시리다.

아들이 오래전 학교에서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부모님과 산다”고 했더니 “아직도 부모와 사느냐”고 놀렸다고 한다. “그럼, 혼자서 산다고 그러지” 하니 “엄마,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그랬잖아.”라고 반박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줬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세상은 딱 바보 취급하기 좋다.

세컨더리 때 친구가 몇 학년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맞고 있어서 아들이 그 상급 학생을 때렸다.

처음엔 왜 내 친구 괴롭히고 때리냐고 항의했고, 그는 네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귀가 안 들렸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그 증세가 있었다. 화가 난 아들이 주먹을 휘둘렀고 아들한테 맞고 코피까지 흘린 그 상급생은 다른 학생들이 교무실에 알려 선생님이 나왔을 땐 맞은 피해자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아들만 친구를 외면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부모를 오라고 해서 경고를 주었다. 당사자조차 괴롭혀도 가만히 있는데 3자가 왜 폭력을 썼냐는 거였다. 선생님에게 그냥 고자질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들 백인 친구였다.

아들은 부모님이 가르친 게 틀렸다고 말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보단 비겁함을 가르친다. 모두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바라지만 사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다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가르친다. 학급에서 짱먹는 아이 몇 명이 수십 명의 학급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명이 소수의 그 학생에게 복종할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맞서라고 가르치지만, 불의에 맞설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사람들은 소금에 절어 숨죽은 배추처럼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민주주의 세상은 분명 절대 왕조나 전체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맞지만 서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왕조시대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지배층은 대를 물려 부의 대물림을 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끔은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남모를 눈물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피죽도 먹지 못한 양민들이 세도 양반가의 가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듯이 오늘날에도 너도나도 자영업을 하지만 번듯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명절에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장가가라, 시집가라, 그래 어디에 다니느냐는 등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아 고향에 방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끼리도 명절에 모여서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부탄처럼 지리적으로 폐쇄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고층아파트조차 하나 없는 그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은 아직도 왕정 속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사는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늘 높다. 그것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잘사는 사람도 양반도 양민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면 행복감이 늘어 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삶은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행복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면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도 마주하면 고통이 덜해진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쫓아 오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득도를 위해 출가하신 것이다. 날마다 걸식하고 없으면 굶고 욕심을 놓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거다.

한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가 출가 다큐를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산사에서도 살면서 지킬 산내 규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회에 살면서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오기 전 호텔 주방에서도 주류에 줄 서고 아부하고 해야 진급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싫었다. 능력만 있으면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이민 온 캐나다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학연, 지연이 힘이 되는 세상인데 지인도 학연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오면서 혼자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오고는 했다. 나도 부자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도 부자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자녀에게 부자들처럼 도우미가 되어 아빠 찬스를 팍팍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가난한 아버지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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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왜 그리도 밝은지
차례로 만나던 조상도 만나지 못하고
달빛을 제대로 쳐다 볼 용기도 없다
밝은 달이 돌아 가신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아
마음으로 기침하며 마당에 나간 아버지와
쪼그려 한 잠자고 제수 음식 준비하던
코고는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을 뿐

어제는 한국 추석날
오늘은 캐나다 추석날
어제 중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오니
그사이 아이들이 주문한 피자 몇 쪽으로
저녁을 먹으며 추석날 문울 연 식당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 살이 생각.

#작가의 변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던 내겐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다른 애들은 다 오는데 너는 얼마나 돈을 번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오냐”고 원망을 쏟아 냈다. 차를 못 가진 애들도 고향에 갈 때는 차를 빌려서 고향을 간다. 그래서 나 성공했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늘 명절이 지나고 잠시 고향 집에 다녀오거나 아예 가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가 들어 이제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려나 싶었는데 뚱딴지처럼 외국으로 이민한다고 훌쩍 떠나서, 어머니는 평생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엌일에 손을 놓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늘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국에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좋아할 때 내가 고국에 뭘 보내지 못하니, 나도 못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딸 친구 부모가 선물하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초콜릿 한 상자라도 선물해야 하니 사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쁜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못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이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그냥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지만 캐나다에서는 생일에도 선물은 못 해도 카드는 줘야 하는 문화가 있어서 짧은 글귀를 쓰는 그 카드를 그렇게 비싸게 사서 줘야 마을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월계수 나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 의해 다 까발려진 사실인 달. 그렇게 우주복으로 싸매고 달에 도착한 그 흑백 사진의 장면은 지구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보지 못하고 동경하던 세상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순간이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소설로 그리는 세상이나 시로 구상하는 세상은 분명 더욱 슬프고 애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글자를 글자로만 보지 않고 독자마다 자신들의 상상을 그곳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벗어 나지 못하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 가면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어 주인공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하니 독자는 작가의 그 시점과 자신의 상상을 더 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 아이였을 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서울에 산다 내 동생 자가용이 있다 내 동생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서울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 이미지는 분명 가난하고 헐벗은 골방이나 독서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가기엔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을 줄 곳조차 없었다. 그러니 군대 동기가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던 날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서글펐던 추석은 명절에도 시골에 못 가고 새벽에 일하고 돌아와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라면을 끓여서 먹던 날과 추석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명절이라고 입원환자 대부분 친지가 찾아오고 방문자들이 많아 떠들썩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병원 창밖을 바라보던 때인 것 같다.





달빛은 왜 그리도 밝은지
차례로 만나던 조상도 만나지 못하고
달빛을 제대로 쳐다 볼 용기도 없다
밝은 달이 돌아 가신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아
마음으로 기침하며 마당에 나간 아버지와
쪼그려 한 잠자고 제수 음식 준비하던
코고는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을 뿐

어제는 한국 추석날
오늘은 캐나다 추석날
어제 중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오니
그사이 아이들이 주문한 피자 몇 쪽으로
저녁을 먹으며 추석날 문울 연 식당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 살이 생각.


#작가의 변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던 내겐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다른 애들은 다 오는데 너는 얼마나 돈을 번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오냐”고 원망을 쏟아 냈다. 차를 못 가진 애들도 고향에 갈 때는 차를 빌려서 고향을 간다. 그래서 나 성공했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늘 명절이 지나고 잠시 고향 집에 다녀오거나 아예 가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가 들어 이제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려나 싶었는데 뚱딴지처럼 외국으로 이민한다고 훌쩍 떠나서, 어머니는 평생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엌일에 손을 놓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늘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국에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좋아할 때 내가 고국에 뭘 보내지 못하니, 나도 못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딸 친구 부모가 선물하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초콜릿 한 상자라도 선물해야 하니 사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쁜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못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이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그냥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지만 캐나다에서는 생일에도 선물은 못 해도 카드는 줘야 하는 문화가 있어서 짧은 글귀를 쓰는 그 카드를 그렇게 비싸게 사서 줘야 마을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월계수 나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 의해 다 까발려진 사실인 달. 그렇게 우주복으로 싸매고 달에 도착한 그 흑백 사진의 장면은 지구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보지 못하고 동경하던 세상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순간이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소설로 그리는 세상이나 시로 구상하는 세상은 분명 더욱 슬프고 애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글자를 글자로만 보지 않고 독자마다 자신들의 상상을 그곳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벗어 나지 못하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 가면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어 주인공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하니 독자는 작가의 그 시점과 자신의 상상을 더 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 아이였을 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서울에 산다 내 동생 자가용이 있다 내 동생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서울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 이미지는 분명 가난하고 헐벗은 골방이나 독서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가기엔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을 줄 곳조차 없었다. 그러니 군대 동기가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던 날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서글펐던 추석은 명절에도 시골에 못 가고 새벽에 일하고 돌아와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라면을 끓여서 먹던 날과 추석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명절이라고 입원환자 대부분 친지가 찾아오고 방문자들이 많아 떠들썩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병원 창밖을 바라보던 때인 것 같다.







시골에는 늘 명절마다 일이 바빠서 못 오나 보다 하고 있길 바랐고 맹장 수술했다고 올라오실 것 같지 않아 서운해질 마음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만 어머니가 참석하고 그 후로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한 번도 부모님이 참석한 적은 없다. 때론 졸업식에 부모님이 와서 짜장면 먹으러 간다던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달을 보면 분명 과학적으로는 그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영혼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에 사는 영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은 최소한 명절에라도 부모 형제가 만나서 조상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차례라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은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만나는 자리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석이든 설이든 서민들에겐 제수용품 사는 것조차 한숨이었다. 좋은 것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조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조상이 도와준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차례상을 차리던 어머니 그곳에선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빌며 차례상 앞에 앉아 새 양말을 신으면서 두루마기를 입던 아버지와 통나무 향을 깎아서 향을 사르고 수저를 옮기면서 조상에게 빌던 그 마음을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다. 이제는 명절도 명절이 아닌 캐나다에서 살면서 문명의 발달에 점점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삶이 박제되어 가슴에서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달빛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달맞이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피자나 핫도그를 몰라도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고 솔잎을 깔아 내가 만든 못생긴 송편을 찌고 그 송편을 찾아 먹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 거린 다.

떡메로 찰떡을 치던 동네잔치의 모습이나 앞산에 메아리 되어 오던 잔치 날 돼지 잡던 모습들도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떠오른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명품 신발을 못 신어 본 사람에게 명품 신발도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 명품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 없는 집시에게 집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집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학교 운동장을 걸으니 정말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든다. 비에 젖어 앉을 곳도 없고 발도 시리다.

아들이 오래전 학교에서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부모님과 산다”고 했더니 “아직도 부모와 사느냐”고 놀렸다고 한다. “그럼, 혼자서 산다고 그러지” 하니 “엄마,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그랬잖아.”라고 반박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줬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세상은 딱 바보 취급하기 좋다.

세컨더리 때 친구가 몇 학년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맞고 있어서 아들이 그 상급 학생을 때렸다.

처음엔 왜 내 친구 괴롭히고 때리냐고 항의했고, 그는 네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귀가 안 들렸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그 증세가 있었다. 화가 난 아들이 주먹을 휘둘렀고 아들한테 맞고 코피까지 흘린 그 상급생은 다른 학생들이 교무실에 알려 선생님이 나왔을 땐 맞은 피해자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아들만 친구를 외면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부모를 오라고 해서 경고를 주었다. 당사자조차 괴롭혀도 가만히 있는데 3자가 왜 폭력을 썼냐는 거였다. 선생님에게 그냥 고자질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들 백인 친구였다.

아들은 부모님이 가르친 게 틀렸다고 말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보단 비겁함을 가르친다. 모두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바라지만 사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다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가르친다. 학급에서 짱먹는 아이 몇 명이 수십 명의 학급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명이 소수의 그 학생에게 복종할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맞서라고 가르치지만, 불의에 맞설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사람들은 소금에 절어 숨죽은 배추처럼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민주주의 세상은 분명 절대 왕조나 전체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맞지만 서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왕조시대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지배층은 대를 물려 부의 대물림을 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끔은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남모를 눈물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피죽도 먹지 못한 양민들이 세도 양반가의 가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듯이 오늘날에도 너도나도 자영업을 하지만 번듯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명절에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장가가라, 시집가라, 그래 어디에 다니느냐는 등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아 고향에 방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끼리도 명절에 모여서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부탄처럼 지리적으로 폐쇄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고층아파트조차 하나 없는 그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은 아직도 왕정 속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사는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늘 높다. 그것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잘사는 사람도 양반도 양민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면 행복감이 늘어 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삶은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행복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면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도 마주하면 고통이 덜해진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쫓아 오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득도를 위해 출가하신 것이다. 날마다 걸식하고 없으면 굶고 욕심을 놓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거다.

한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가 출가 다큐를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산사에서도 살면서 지킬 산내 규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회에 살면서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오기 전 호텔 주방에서도 주류에 줄 서고 아부하고 해야 진급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싫었다. 능력만 있으면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이민 온 캐나다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학연, 지연이 힘이 되는 세상인데 지인도 학연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오면서 혼자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오고는 했다. 나도 부자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도 부자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자녀에게 부자들처럼 도우미가 되어 아빠 찬스를 팍팍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가난한 아버지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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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는 늘 명절마다 일이 바빠서 못 오나 보다 하고 있길 바랐고 맹장 수술했다고 올라오실 것 같지 않아 서운해질 마음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만 어머니가 참석하고 그 후로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한 번도 부모님이 참석한 적은 없다. 때론 졸업식에 부모님이 와서 짜장면 먹으러 간다던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달을 보면 분명 과학적으로는 그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영혼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에 사는 영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은 최소한 명절에라도 부모 형제가 만나서 조상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차례라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은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만나는 자리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석이든 설이든 서민들에겐 제수용품 사는 것조차 한숨이었다. 좋은 것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조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조상이 도와준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차례상을 차리던 어머니 그곳에선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빌며 차례상 앞에 앉아 새 양말을 신으면서 두루마기를 입던 아버지와 통나무 향을 깎아서 향을 사르고 수저를 옮기면서 조상에게 빌던 그 마음을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다. 이제는 명절도 명절이 아닌 캐나다에서 살면서 문명의 발달에 점점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삶이 박제되어 가슴에서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달빛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달맞이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피자나 핫도그를 몰라도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고 솔잎을 깔아 내가 만든 못생긴 송편을 찌고 그 송편을 찾아 먹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 거린 다.

떡메로 찰떡을 치던 동네잔치의 모습이나 앞산에 메아리 되어 오던 잔치 날 돼지 잡던 모습들도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떠오른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명품 신발을 못 신어 본 사람에게 명품 신발도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 명품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 없는 집시에게 집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집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학교 운동장을 걸으니 정말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든다. 비에 젖어 앉을 곳도 없고 발도 시리다.

아들이 오래전 학교에서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부모님과 산다”고 했더니 “아직도 부모와 사느냐”고 놀렸다고 한다. “그럼, 혼자서 산다고 그러지” 하니 “엄마,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그랬잖아.”라고 반박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줬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세상은 딱 바보 취급하기 좋다.

세컨더리 때 친구가 몇 학년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맞고 있어서 아들이 그 상급 학생을 때렸다.

처음엔 왜 내 친구 괴롭히고 때리냐고 항의했고, 그는 네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귀가 안 들렸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그 증세가 있었다. 화가 난 아들이 주먹을 휘둘렀고 아들한테 맞고 코피까지 흘린 그 상급생은 다른 학생들이 교무실에 알려 선생님이 나왔을 땐 맞은 피해자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아들만 친구를 외면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부모를 오라고 해서 경고를 주었다. 당사자조차 괴롭혀도 가만히 있는데 3자가 왜 폭력을 썼냐는 거였다. 선생님에게 그냥 고자질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들 백인 친구였다.

아들은 부모님이 가르친 게 틀렸다고 말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보단 비겁함을 가르친다. 모두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바라지만 사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다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가르친다. 학급에서 짱먹는 아이 몇 명이 수십 명의 학급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명이 소수의 그 학생에게 복종할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맞서라고 가르치지만, 불의에 맞설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사람들은 소금에 절어 숨죽은 배추처럼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민주주의 세상은 분명 절대 왕조나 전체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맞지만 서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왕조시대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지배층은 대를 물려 부의 대물림을 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끔은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남모를 눈물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달빛은 왜 그리도 밝은지
차례로 만나던 조상도 만나지 못하고
달빛을 제대로 쳐다 볼 용기도 없다
밝은 달이 돌아 가신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아
마음으로 기침하며 마당에 나간 아버지와
쪼그려 한 잠자고 제수 음식 준비하던
코고는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을 뿐

어제는 한국 추석날
오늘은 캐나다 추석날
어제 중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오니
그사이 아이들이 주문한 피자 몇 쪽으로
저녁을 먹으며 추석날 문울 연 식당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 살이 생각.


#작가의 변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던 내겐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다른 애들은 다 오는데 너는 얼마나 돈을 번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오냐”고 원망을 쏟아 냈다. 차를 못 가진 애들도 고향에 갈 때는 차를 빌려서 고향을 간다. 그래서 나 성공했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늘 명절이 지나고 잠시 고향 집에 다녀오거나 아예 가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가 들어 이제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려나 싶었는데 뚱딴지처럼 외국으로 이민한다고 훌쩍 떠나서, 어머니는 평생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엌일에 손을 놓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늘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국에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좋아할 때 내가 고국에 뭘 보내지 못하니, 나도 못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딸 친구 부모가 선물하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초콜릿 한 상자라도 선물해야 하니 사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쁜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못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이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그냥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지만 캐나다에서는 생일에도 선물은 못 해도 카드는 줘야 하는 문화가 있어서 짧은 글귀를 쓰는 그 카드를 그렇게 비싸게 사서 줘야 마을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월계수 나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 의해 다 까발려진 사실인 달. 그렇게 우주복으로 싸매고 달에 도착한 그 흑백 사진의 장면은 지구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보지 못하고 동경하던 세상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순간이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소설로 그리는 세상이나 시로 구상하는 세상은 분명 더욱 슬프고 애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글자를 글자로만 보지 않고 독자마다 자신들의 상상을 그곳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벗어 나지 못하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 가면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어 주인공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하니 독자는 작가의 그 시점과 자신의 상상을 더 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 아이였을 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서울에 산다 내 동생 자가용이 있다 내 동생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서울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 이미지는 분명 가난하고 헐벗은 골방이나 독서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가기엔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을 줄 곳조차 없었다. 그러니 군대 동기가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던 날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서글펐던 추석은 명절에도 시골에 못 가고 새벽에 일하고 돌아와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라면을 끓여서 먹던 날과 추석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명절이라고 입원환자 대부분 친지가 찾아오고 방문자들이 많아 떠들썩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병원 창밖을 바라보던 때인 것 같다.







시골에는 늘 명절마다 일이 바빠서 못 오나 보다 하고 있길 바랐고 맹장 수술했다고 올라오실 것 같지 않아 서운해질 마음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만 어머니가 참석하고 그 후로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한 번도 부모님이 참석한 적은 없다. 때론 졸업식에 부모님이 와서 짜장면 먹으러 간다던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달을 보면 분명 과학적으로는 그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영혼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에 사는 영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은 최소한 명절에라도 부모 형제가 만나서 조상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차례라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은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만나는 자리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석이든 설이든 서민들에겐 제수용품 사는 것조차 한숨이었다. 좋은 것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조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조상이 도와준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차례상을 차리던 어머니 그곳에선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빌며 차례상 앞에 앉아 새 양말을 신으면서 두루마기를 입던 아버지와 통나무 향을 깎아서 향을 사르고 수저를 옮기면서 조상에게 빌던 그 마음을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다. 이제는 명절도 명절이 아닌 캐나다에서 살면서 문명의 발달에 점점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삶이 박제되어 가슴에서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달빛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달맞이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피자나 핫도그를 몰라도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고 솔잎을 깔아 내가 만든 못생긴 송편을 찌고 그 송편을 찾아 먹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 거린 다.

떡메로 찰떡을 치던 동네잔치의 모습이나 앞산에 메아리 되어 오던 잔치 날 돼지 잡던 모습들도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떠오른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명품 신발을 못 신어 본 사람에게 명품 신발도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 명품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 없는 집시에게 집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집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학교 운동장을 걸으니 정말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든다. 비에 젖어 앉을 곳도 없고 발도 시리다.

아들이 오래전 학교에서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부모님과 산다”고 했더니 “아직도 부모와 사느냐”고 놀렸다고 한다. “그럼, 혼자서 산다고 그러지” 하니 “엄마,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그랬잖아.”라고 반박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줬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세상은 딱 바보 취급하기 좋다.

세컨더리 때 친구가 몇 학년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맞고 있어서 아들이 그 상급 학생을 때렸다.

처음엔 왜 내 친구 괴롭히고 때리냐고 항의했고, 그는 네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귀가 안 들렸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그 증세가 있었다. 화가 난 아들이 주먹을 휘둘렀고 아들한테 맞고 코피까지 흘린 그 상급생은 다른 학생들이 교무실에 알려 선생님이 나왔을 땐 맞은 피해자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아들만 친구를 외면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부모를 오라고 해서 경고를 주었다. 당사자조차 괴롭혀도 가만히 있는데 3자가 왜 폭력을 썼냐는 거였다. 선생님에게 그냥 고자질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들 백인 친구였다.

아들은 부모님이 가르친 게 틀렸다고 말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보단 비겁함을 가르친다. 모두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바라지만 사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다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가르친다. 학급에서 짱먹는 아이 몇 명이 수십 명의 학급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명이 소수의 그 학생에게 복종할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맞서라고 가르치지만, 불의에 맞설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사람들은 소금에 절어 숨죽은 배추처럼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민주주의 세상은 분명 절대 왕조나 전체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맞지만 서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왕조시대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지배층은 대를 물려 부의 대물림을 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끔은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남모를 눈물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피죽도 먹지 못한 양민들이 세도 양반가의 가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듯이 오늘날에도 너도나도 자영업을 하지만 번듯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명절에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장가가라, 시집가라, 그래 어디에 다니느냐는 등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아 고향에 방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끼리도 명절에 모여서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부탄처럼 지리적으로 폐쇄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고층아파트조차 하나 없는 그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은 아직도 왕정 속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사는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늘 높다. 그것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잘사는 사람도 양반도 양민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면 행복감이 늘어 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삶은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행복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면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도 마주하면 고통이 덜해진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쫓아 오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득도를 위해 출가하신 것이다. 날마다 걸식하고 없으면 굶고 욕심을 놓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거다.

한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가 출가 다큐를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산사에서도 살면서 지킬 산내 규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회에 살면서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오기 전 호텔 주방에서도 주류에 줄 서고 아부하고 해야 진급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싫었다. 능력만 있으면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이민 온 캐나다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학연, 지연이 힘이 되는 세상인데 지인도 학연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오면서 혼자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오고는 했다. 나도 부자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도 부자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자녀에게 부자들처럼 도우미가 되어 아빠 찬스를 팍팍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가난한 아버지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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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피죽도 먹지 못한 양민들이 세도 양반가의 가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듯이 오늘날에도 너도나도 자영업을 하지만 번듯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명절에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장가가라, 시집가라, 그래 어디에 다니느냐는 등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아 고향에 방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끼리도 명절에 모여서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부탄처럼 지리적으로 폐쇄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고층아파트조차 하나 없는 그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은 아직도 왕정 속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사는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늘 높다. 그것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잘사는 사람도 양반도 양민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면 행복감이 늘어 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삶은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행복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면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도 마주하면 고통이 덜해진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쫓아 오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득도를 위해 출가하신 것이다. 날마다 걸식하고 없으면 굶고 욕심을 놓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거다.

한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가 출가 다큐를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산사에서도 살면서 지킬 산내 규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회에 살면서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오기 전 호텔 주방에서도 주류에 줄 서고 아부하고 해야 진급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싫었다. 능력만 있으면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이민 온 캐나다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학연, 지연이 힘이 되는 세상인데 지인도 학연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오면서 혼자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오고는 했다. 나도 부자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도 부자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자녀에게 부자들처럼 도우미가 되어 아빠 찬스를 팍팍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가난한 아버지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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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왜 그리도 밝은지
차례로 만나던 조상도 만나지 못하고
달빛을 제대로 쳐다 볼 용기도 없다
밝은 달이 돌아 가신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아
마음으로 기침하며 마당에 나간 아버지와
쪼그려 한 잠자고 제수 음식 준비하던
코고는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을 뿐

어제는 한국 추석날
오늘은 캐나다 추석날
어제 중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오니
그사이 아이들이 주문한 피자 몇 쪽으로
저녁을 먹으며 추석날 문울 연 식당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 살이 생각.


#작가의 변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던 내겐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다른 애들은 다 오는데 너는 얼마나 돈을 번다고 명절에 집에도 못 오냐”고 원망을 쏟아 냈다. 차를 못 가진 애들도 고향에 갈 때는 차를 빌려서 고향을 간다. 그래서 나 성공했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 늘 명절이 지나고 잠시 고향 집에 다녀오거나 아예 가지 못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가 들어 이제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려나 싶었는데 뚱딴지처럼 외국으로 이민한다고 훌쩍 떠나서, 어머니는 평생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엌일에 손을 놓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늘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국에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좋아할 때 내가 고국에 뭘 보내지 못하니, 나도 못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딸 친구 부모가 선물하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초콜릿 한 상자라도 선물해야 하니 사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쁜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받으면 돌려주어야 하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못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이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그냥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됐지만 캐나다에서는 생일에도 선물은 못 해도 카드는 줘야 하는 문화가 있어서 짧은 글귀를 쓰는 그 카드를 그렇게 비싸게 사서 줘야 마을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월계수 나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 의해 다 까발려진 사실인 달. 그렇게 우주복으로 싸매고 달에 도착한 그 흑백 사진의 장면은 지구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보지 못하고 동경하던 세상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순간이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소설로 그리는 세상이나 시로 구상하는 세상은 분명 더욱 슬프고 애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글자를 글자로만 보지 않고 독자마다 자신들의 상상을 그곳에 덧붙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벗어 나지 못하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 가면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어 주인공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하니 독자는 작가의 그 시점과 자신의 상상을 더 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 아이였을 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서울에 산다 내 동생 자가용이 있다 내 동생하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서울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 이미지는 분명 가난하고 헐벗은 골방이나 독서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가기엔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을 줄 곳조차 없었다. 그러니 군대 동기가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던 날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서글펐던 추석은 명절에도 시골에 못 가고 새벽에 일하고 돌아와 문을 연 식당이 없어 라면을 끓여서 먹던 날과 추석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명절이라고 입원환자 대부분 친지가 찾아오고 방문자들이 많아 떠들썩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병원 창밖을 바라보던 때인 것 같다.







시골에는 늘 명절마다 일이 바빠서 못 오나 보다 하고 있길 바랐고 맹장 수술했다고 올라오실 것 같지 않아 서운해질 마음을 미리 차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만 어머니가 참석하고 그 후로는 입학식도 졸업식도 한 번도 부모님이 참석한 적은 없다. 때론 졸업식에 부모님이 와서 짜장면 먹으러 간다던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달을 보면 분명 과학적으로는 그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영혼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에 사는 영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은 최소한 명절에라도 부모 형제가 만나서 조상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차례라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은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만나는 자리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석이든 설이든 서민들에겐 제수용품 사는 것조차 한숨이었다. 좋은 것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조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조상이 도와준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차례상을 차리던 어머니 그곳에선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빌며 차례상 앞에 앉아 새 양말을 신으면서 두루마기를 입던 아버지와 통나무 향을 깎아서 향을 사르고 수저를 옮기면서 조상에게 빌던 그 마음을 지금도 가슴에 담고 있다. 이제는 명절도 명절이 아닌 캐나다에서 살면서 문명의 발달에 점점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삶이 박제되어 가슴에서 가끔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달빛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달맞이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좀 더 나은 삶이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피자나 핫도그를 몰라도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고 솔잎을 깔아 내가 만든 못생긴 송편을 찌고 그 송편을 찾아 먹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 거린 다.

떡메로 찰떡을 치던 동네잔치의 모습이나 앞산에 메아리 되어 오던 잔치 날 돼지 잡던 모습들도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떠오른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명품 신발을 못 신어 본 사람에게 명품 신발도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 명품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 없는 집시에게 집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집시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학교 운동장을 걸으니 정말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든다. 비에 젖어 앉을 곳도 없고 발도 시리다.

아들이 오래전 학교에서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부모님과 산다”고 했더니 “아직도 부모와 사느냐”고 놀렸다고 한다. “그럼, 혼자서 산다고 그러지” 하니 “엄마,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그랬잖아.”라고 반박했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줬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세상은 딱 바보 취급하기 좋다.

세컨더리 때 친구가 몇 학년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맞고 있어서 아들이 그 상급 학생을 때렸다.

처음엔 왜 내 친구 괴롭히고 때리냐고 항의했고, 그는 네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날려 순간 귀가 안 들렸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그 증세가 있었다. 화가 난 아들이 주먹을 휘둘렀고 아들한테 맞고 코피까지 흘린 그 상급생은 다른 학생들이 교무실에 알려 선생님이 나왔을 땐 맞은 피해자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아들만 친구를 외면하지 못했고 학교에선 부모를 오라고 해서 경고를 주었다. 당사자조차 괴롭혀도 가만히 있는데 3자가 왜 폭력을 썼냐는 거였다. 선생님에게 그냥 고자질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들 백인 친구였다.

아들은 부모님이 가르친 게 틀렸다고 말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보단 비겁함을 가르친다. 모두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바라지만 사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다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을 가르친다. 학급에서 짱먹는 아이 몇 명이 수십 명의 학급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명이 소수의 그 학생에게 복종할 걸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맞서라고 가르치지만, 불의에 맞설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사람들은 소금에 절어 숨죽은 배추처럼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민주주의 세상은 분명 절대 왕조나 전체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맞지만 서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팍팍하다. 왕조시대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지배층은 대를 물려 부의 대물림을 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끔은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만이 다가 아닌 남모를 눈물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피죽도 먹지 못한 양민들이 세도 양반가의 가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듯이 오늘날에도 너도나도 자영업을 하지만 번듯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는 추석이나 명절에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장가가라, 시집가라, 그래 어디에 다니느냐는 등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아 고향에 방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끼리도 명절에 모여서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부탄처럼 지리적으로 폐쇄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고층아파트조차 하나 없는 그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은 아직도 왕정 속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사는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늘 높다. 그것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잘사는 사람도 양반도 양민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면 행복감이 늘어 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삶은 대부분이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행복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기면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도 마주하면 고통이 덜해진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쫓아 오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득도를 위해 출가하신 것이다. 날마다 걸식하고 없으면 굶고 욕심을 놓고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거다.

한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가 출가 다큐를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산사에서도 살면서 지킬 산내 규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회에 살면서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오기 전 호텔 주방에서도 주류에 줄 서고 아부하고 해야 진급도 하고 자리를 잡는 것이 싫었다. 능력만 있으면 되고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이민 온 캐나다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학연, 지연이 힘이 되는 세상인데 지인도 학연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오면서 혼자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오고는 했다. 나도 부자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도 부자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자녀에게 부자들처럼 도우미가 되어 아빠 찬스를 팍팍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가난한 아버지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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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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