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9. 세상에 왜 왔니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9. 세상에 왜 왔니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4.2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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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듯이
아이는 힘차게 울며 고추 자랑 잠지자랑을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햇살과 바람과 별빛과 달빛을 먹으며 자란 잎이 녹음이 짙어지듯
사람도 계급장 같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타 버리고 말
관안에에 옷 한 벌 얻어 입으려 참 고단한 삶을 이어 간다.
 







#작가의 변
사람 사는 일은 늘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거의 없다. 강물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살이 세고 굽은 곳을 때리면서 가니 강물에 깎여 나간 강줄기는 세월이 갈수록 바르게 가려고도 하다가 또 굽이쳐 흐르고 다시 똑바로 가려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대부분 강물의 발원지를 보면 “애게”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발원지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샘이 거나 호수 밑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이 대분이다. 중국의 대륙을 굽이쳐 흐르는 장강의 길고 거친 물줄기도 사실은 티베트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다.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돌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굽이쳐 흐르는 메콩강도 사실은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이 된 아주 작은 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발생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밤과 낮을 있으라 하니 밤낮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그대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구의 시작 아니 우주의 시작은 빅뱅설과 원자보다 작은 원소에 의한 결합과 팽창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팽창으로 인해 별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곳도 있다. 우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은 사실은 가스 불보다 더 강력하고 높은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폭발 중인 기체인 것도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실감 나는 것은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댈 수 없는 상황과 비행기 날개에 달걀을 깨서 두었더니 계란후라이가 되었던 과거의 실험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별이 생겨나듯이 지구가 생겨나고 달이 생겨나고 태양이 수억 년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로 많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등의 신비한 자연의 세계는 누가 말로 생기라 하니 생기는 그런 간단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남자들아, 여래가 연설한 경전들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혹은 나의 몸을 말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며, 혹은 나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며, 혹 은 나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실제(實際)와 같이 3계의 모양을 알고 보나니, 나고 죽고, 물러가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세상에 사는 이도 없고 열반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지견(知見)하여 3계의 사람이 3계를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을 알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평행 이론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주의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연속되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뿌린 업을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뿌린 업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착하기만 살았는데 왜 늘 남들보다 힘들어야 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하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에 반항해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와 분노이다. 화와 분노는 행복의 반대이다. 지금 시간도 어느 별에서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지나간 역사에서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의 삶과 똑같이 닮았을 수도 있다.

씨앗이 나고 성장하고 한 해를 살고 죽기도 하고 수십 년을 살기도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사실 나고 성장하고 살았던 순간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플갱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 주기 위해 모든 나쁜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생명체인데도 말이다. 부모가 돈을 물려주는 그 순간만 기다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고 유산 상속이 끝나고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햇빛과 별빛과 달빛과 바람, 그리고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통해 살아간다.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햇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단 몇 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듯이 우리의 주변에는 말없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많은 유기물과 생명체들의 연기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늘 걱정하고 근심하고 심장을 졸이고 실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집 때문에 사기를 맞아서 등등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의 시간이 있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네 탓을 앞세우지 않고 도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서로가 네 탓을 하다 보면 믿음이 깨지고 미래가 무너져 내리고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지금은 서양화되어 병원에서 국화로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놓고 장례를 치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고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상여를 보관했는데 아버지는 상여의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 때로는 상여 위에 올라가서 요령을 흔들면서 구슬프게 떠난 망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 같은 소리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후렴을 하고는 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족이나 사위가 돈을 상여 앞에 놓아야 상여가 출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사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끈으로 매서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주는 건을 쓰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와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에서 바지를 고정하는 각 반을 찼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 입고 사모제까지 수시로 곡을 해대니 목은 쉬고 잠도 못 자니 온몸이 지쳐 있었다. 슬픔을 몸을 학대해서 잊는 방법 같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손님 받고 차로 이동해서 화장하고 장지에 모시면 끝나지만 과거에 힘들게 곡하고 전통을 지키던 시절도 있었다.

까마귀 사체를 봤다. 살아서는 까마귀가 벌레나 굼벵이 같은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잔디밭을 뒤집어 놓고는 했었는데 죽어서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사람도 죽으면 티베트의 풍장처럼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수백 년 전의의 시체가 미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우리는 흙에서 나는 식물과 음식, 과일들과 풀을 먹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를 거듭한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이나 보호를 받다가 태어나면서 다른 동물처럼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 가다가 죽을 때 수의 한 벌을 얻어 돌아 가지만 그마저도 화장으로 태운다. 그리고 다른 별에서 살아 가는 또 다른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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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듯이
아이는 힘차게 울며 고추 자랑 잠지자랑을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햇살과 바람과 별빛과 달빛을 먹으며 자란 잎이 녹음이 짙어지듯
사람도 계급장 같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타 버리고 말
관안에에 옷 한 벌 얻어 입으려 참 고단한 삶을 이어 간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듯이
아이는 힘차게 울며 고추 자랑 잠지자랑을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햇살과 바람과 별빛과 달빛을 먹으며 자란 잎이 녹음이 짙어지듯
사람도 계급장 같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타 버리고 말
관안에에 옷 한 벌 얻어 입으려 참 고단한 삶을 이어 간다.
 







#작가의 변
사람 사는 일은 늘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거의 없다. 강물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살이 세고 굽은 곳을 때리면서 가니 강물에 깎여 나간 강줄기는 세월이 갈수록 바르게 가려고도 하다가 또 굽이쳐 흐르고 다시 똑바로 가려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대부분 강물의 발원지를 보면 “애게”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발원지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샘이 거나 호수 밑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이 대분이다. 중국의 대륙을 굽이쳐 흐르는 장강의 길고 거친 물줄기도 사실은 티베트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다.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돌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굽이쳐 흐르는 메콩강도 사실은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이 된 아주 작은 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발생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밤과 낮을 있으라 하니 밤낮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그대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구의 시작 아니 우주의 시작은 빅뱅설과 원자보다 작은 원소에 의한 결합과 팽창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팽창으로 인해 별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곳도 있다. 우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은 사실은 가스 불보다 더 강력하고 높은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폭발 중인 기체인 것도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실감 나는 것은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댈 수 없는 상황과 비행기 날개에 달걀을 깨서 두었더니 계란후라이가 되었던 과거의 실험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별이 생겨나듯이 지구가 생겨나고 달이 생겨나고 태양이 수억 년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로 많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등의 신비한 자연의 세계는 누가 말로 생기라 하니 생기는 그런 간단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남자들아, 여래가 연설한 경전들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혹은 나의 몸을 말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며, 혹은 나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며, 혹 은 나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실제(實際)와 같이 3계의 모양을 알고 보나니, 나고 죽고, 물러가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세상에 사는 이도 없고 열반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지견(知見)하여 3계의 사람이 3계를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을 알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평행 이론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주의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연속되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뿌린 업을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뿌린 업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착하기만 살았는데 왜 늘 남들보다 힘들어야 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하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에 반항해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와 분노이다. 화와 분노는 행복의 반대이다. 지금 시간도 어느 별에서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지나간 역사에서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의 삶과 똑같이 닮았을 수도 있다.

씨앗이 나고 성장하고 한 해를 살고 죽기도 하고 수십 년을 살기도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사실 나고 성장하고 살았던 순간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플갱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 주기 위해 모든 나쁜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생명체인데도 말이다. 부모가 돈을 물려주는 그 순간만 기다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고 유산 상속이 끝나고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햇빛과 별빛과 달빛과 바람, 그리고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통해 살아간다.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햇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단 몇 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듯이 우리의 주변에는 말없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많은 유기물과 생명체들의 연기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늘 걱정하고 근심하고 심장을 졸이고 실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집 때문에 사기를 맞아서 등등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의 시간이 있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네 탓을 앞세우지 않고 도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서로가 네 탓을 하다 보면 믿음이 깨지고 미래가 무너져 내리고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지금은 서양화되어 병원에서 국화로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놓고 장례를 치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고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상여를 보관했는데 아버지는 상여의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 때로는 상여 위에 올라가서 요령을 흔들면서 구슬프게 떠난 망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 같은 소리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후렴을 하고는 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족이나 사위가 돈을 상여 앞에 놓아야 상여가 출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사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끈으로 매서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주는 건을 쓰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와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에서 바지를 고정하는 각 반을 찼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 입고 사모제까지 수시로 곡을 해대니 목은 쉬고 잠도 못 자니 온몸이 지쳐 있었다. 슬픔을 몸을 학대해서 잊는 방법 같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손님 받고 차로 이동해서 화장하고 장지에 모시면 끝나지만 과거에 힘들게 곡하고 전통을 지키던 시절도 있었다.

까마귀 사체를 봤다. 살아서는 까마귀가 벌레나 굼벵이 같은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잔디밭을 뒤집어 놓고는 했었는데 죽어서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사람도 죽으면 티베트의 풍장처럼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수백 년 전의의 시체가 미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우리는 흙에서 나는 식물과 음식, 과일들과 풀을 먹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를 거듭한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이나 보호를 받다가 태어나면서 다른 동물처럼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 가다가 죽을 때 수의 한 벌을 얻어 돌아 가지만 그마저도 화장으로 태운다. 그리고 다른 별에서 살아 가는 또 다른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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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사람 사는 일은 늘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거의 없다. 강물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살이 세고 굽은 곳을 때리면서 가니 강물에 깎여 나간 강줄기는 세월이 갈수록 바르게 가려고도 하다가 또 굽이쳐 흐르고 다시 똑바로 가려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대부분 강물의 발원지를 보면 “애게”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발원지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샘이 거나 호수 밑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이 대분이다. 중국의 대륙을 굽이쳐 흐르는 장강의 길고 거친 물줄기도 사실은 티베트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다.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돌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굽이쳐 흐르는 메콩강도 사실은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이 된 아주 작은 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발생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밤과 낮을 있으라 하니 밤낮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그대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구의 시작 아니 우주의 시작은 빅뱅설과 원자보다 작은 원소에 의한 결합과 팽창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팽창으로 인해 별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곳도 있다. 우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은 사실은 가스 불보다 더 강력하고 높은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폭발 중인 기체인 것도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실감 나는 것은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댈 수 없는 상황과 비행기 날개에 달걀을 깨서 두었더니 계란후라이가 되었던 과거의 실험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별이 생겨나듯이 지구가 생겨나고 달이 생겨나고 태양이 수억 년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로 많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등의 신비한 자연의 세계는 누가 말로 생기라 하니 생기는 그런 간단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남자들아, 여래가 연설한 경전들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혹은 나의 몸을 말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며, 혹은 나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며, 혹 은 나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실제(實際)와 같이 3계의 모양을 알고 보나니, 나고 죽고, 물러가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세상에 사는 이도 없고 열반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지견(知見)하여 3계의 사람이 3계를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을 알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평행 이론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주의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연속되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뿌린 업을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뿌린 업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착하기만 살았는데 왜 늘 남들보다 힘들어야 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하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에 반항해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와 분노이다. 화와 분노는 행복의 반대이다. 지금 시간도 어느 별에서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지나간 역사에서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의 삶과 똑같이 닮았을 수도 있다.

씨앗이 나고 성장하고 한 해를 살고 죽기도 하고 수십 년을 살기도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사실 나고 성장하고 살았던 순간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듯이
아이는 힘차게 울며 고추 자랑 잠지자랑을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햇살과 바람과 별빛과 달빛을 먹으며 자란 잎이 녹음이 짙어지듯
사람도 계급장 같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타 버리고 말
관안에에 옷 한 벌 얻어 입으려 참 고단한 삶을 이어 간다.
 







#작가의 변
사람 사는 일은 늘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거의 없다. 강물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살이 세고 굽은 곳을 때리면서 가니 강물에 깎여 나간 강줄기는 세월이 갈수록 바르게 가려고도 하다가 또 굽이쳐 흐르고 다시 똑바로 가려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대부분 강물의 발원지를 보면 “애게”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발원지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샘이 거나 호수 밑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이 대분이다. 중국의 대륙을 굽이쳐 흐르는 장강의 길고 거친 물줄기도 사실은 티베트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다.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돌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굽이쳐 흐르는 메콩강도 사실은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이 된 아주 작은 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발생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밤과 낮을 있으라 하니 밤낮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그대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구의 시작 아니 우주의 시작은 빅뱅설과 원자보다 작은 원소에 의한 결합과 팽창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팽창으로 인해 별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곳도 있다. 우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은 사실은 가스 불보다 더 강력하고 높은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폭발 중인 기체인 것도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실감 나는 것은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댈 수 없는 상황과 비행기 날개에 달걀을 깨서 두었더니 계란후라이가 되었던 과거의 실험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별이 생겨나듯이 지구가 생겨나고 달이 생겨나고 태양이 수억 년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로 많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등의 신비한 자연의 세계는 누가 말로 생기라 하니 생기는 그런 간단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남자들아, 여래가 연설한 경전들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혹은 나의 몸을 말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며, 혹은 나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며, 혹 은 나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실제(實際)와 같이 3계의 모양을 알고 보나니, 나고 죽고, 물러가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세상에 사는 이도 없고 열반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지견(知見)하여 3계의 사람이 3계를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을 알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평행 이론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주의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연속되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뿌린 업을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뿌린 업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착하기만 살았는데 왜 늘 남들보다 힘들어야 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하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에 반항해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와 분노이다. 화와 분노는 행복의 반대이다. 지금 시간도 어느 별에서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지나간 역사에서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의 삶과 똑같이 닮았을 수도 있다.

씨앗이 나고 성장하고 한 해를 살고 죽기도 하고 수십 년을 살기도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사실 나고 성장하고 살았던 순간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플갱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 주기 위해 모든 나쁜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생명체인데도 말이다. 부모가 돈을 물려주는 그 순간만 기다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고 유산 상속이 끝나고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햇빛과 별빛과 달빛과 바람, 그리고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통해 살아간다.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햇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단 몇 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듯이 우리의 주변에는 말없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많은 유기물과 생명체들의 연기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늘 걱정하고 근심하고 심장을 졸이고 실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집 때문에 사기를 맞아서 등등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의 시간이 있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네 탓을 앞세우지 않고 도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서로가 네 탓을 하다 보면 믿음이 깨지고 미래가 무너져 내리고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지금은 서양화되어 병원에서 국화로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놓고 장례를 치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고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상여를 보관했는데 아버지는 상여의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 때로는 상여 위에 올라가서 요령을 흔들면서 구슬프게 떠난 망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 같은 소리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후렴을 하고는 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족이나 사위가 돈을 상여 앞에 놓아야 상여가 출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사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끈으로 매서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주는 건을 쓰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와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에서 바지를 고정하는 각 반을 찼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 입고 사모제까지 수시로 곡을 해대니 목은 쉬고 잠도 못 자니 온몸이 지쳐 있었다. 슬픔을 몸을 학대해서 잊는 방법 같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손님 받고 차로 이동해서 화장하고 장지에 모시면 끝나지만 과거에 힘들게 곡하고 전통을 지키던 시절도 있었다.

까마귀 사체를 봤다. 살아서는 까마귀가 벌레나 굼벵이 같은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잔디밭을 뒤집어 놓고는 했었는데 죽어서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사람도 죽으면 티베트의 풍장처럼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수백 년 전의의 시체가 미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우리는 흙에서 나는 식물과 음식, 과일들과 풀을 먹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를 거듭한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이나 보호를 받다가 태어나면서 다른 동물처럼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 가다가 죽을 때 수의 한 벌을 얻어 돌아 가지만 그마저도 화장으로 태운다. 그리고 다른 별에서 살아 가는 또 다른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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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플갱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 주기 위해 모든 나쁜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생명체인데도 말이다. 부모가 돈을 물려주는 그 순간만 기다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고 유산 상속이 끝나고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햇빛과 별빛과 달빛과 바람, 그리고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통해 살아간다.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햇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단 몇 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듯이 우리의 주변에는 말없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많은 유기물과 생명체들의 연기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늘 걱정하고 근심하고 심장을 졸이고 실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집 때문에 사기를 맞아서 등등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의 시간이 있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네 탓을 앞세우지 않고 도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서로가 네 탓을 하다 보면 믿음이 깨지고 미래가 무너져 내리고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지금은 서양화되어 병원에서 국화로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놓고 장례를 치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고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상여를 보관했는데 아버지는 상여의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 때로는 상여 위에 올라가서 요령을 흔들면서 구슬프게 떠난 망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 같은 소리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후렴을 하고는 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족이나 사위가 돈을 상여 앞에 놓아야 상여가 출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사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끈으로 매서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주는 건을 쓰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와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에서 바지를 고정하는 각 반을 찼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 입고 사모제까지 수시로 곡을 해대니 목은 쉬고 잠도 못 자니 온몸이 지쳐 있었다. 슬픔을 몸을 학대해서 잊는 방법 같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손님 받고 차로 이동해서 화장하고 장지에 모시면 끝나지만 과거에 힘들게 곡하고 전통을 지키던 시절도 있었다.

까마귀 사체를 봤다. 살아서는 까마귀가 벌레나 굼벵이 같은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잔디밭을 뒤집어 놓고는 했었는데 죽어서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사람도 죽으면 티베트의 풍장처럼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수백 년 전의의 시체가 미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우리는 흙에서 나는 식물과 음식, 과일들과 풀을 먹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를 거듭한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이나 보호를 받다가 태어나면서 다른 동물처럼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 가다가 죽을 때 수의 한 벌을 얻어 돌아 가지만 그마저도 화장으로 태운다. 그리고 다른 별에서 살아 가는 또 다른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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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듯이
아이는 힘차게 울며 고추 자랑 잠지자랑을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햇살과 바람과 별빛과 달빛을 먹으며 자란 잎이 녹음이 짙어지듯
사람도 계급장 같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타 버리고 말
관안에에 옷 한 벌 얻어 입으려 참 고단한 삶을 이어 간다.
 







#작가의 변
사람 사는 일은 늘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거의 없다. 강물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살이 세고 굽은 곳을 때리면서 가니 강물에 깎여 나간 강줄기는 세월이 갈수록 바르게 가려고도 하다가 또 굽이쳐 흐르고 다시 똑바로 가려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대부분 강물의 발원지를 보면 “애게”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발원지는 너무 보잘 것 없는 샘이 거나 호수 밑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이 대분이다. 중국의 대륙을 굽이쳐 흐르는 장강의 길고 거친 물줄기도 사실은 티베트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다.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를 돌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을 굽이쳐 흐르는 메콩강도 사실은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이 된 아주 작은 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발생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밤과 낮을 있으라 하니 밤낮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그대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구의 시작 아니 우주의 시작은 빅뱅설과 원자보다 작은 원소에 의한 결합과 팽창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팽창으로 인해 별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곳도 있다. 우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은 사실은 가스 불보다 더 강력하고 높은 용광로에서 끊임없이 폭발 중인 기체인 것도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이 실감 나는 것은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 발바닥이 뜨거워서 발을 댈 수 없는 상황과 비행기 날개에 달걀을 깨서 두었더니 계란후라이가 되었던 과거의 실험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서야 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별이 생겨나듯이 지구가 생겨나고 달이 생겨나고 태양이 수억 년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로 많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등의 신비한 자연의 세계는 누가 말로 생기라 하니 생기는 그런 간단한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남자들아, 여래가 연설한 경전들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혹은 나의 몸을 말하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말하며, 혹은 나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몸을 보이며, 혹 은 나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이의 일을 보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실제(實際)와 같이 3계의 모양을 알고 보나니, 나고 죽고, 물러가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세상에 사는 이도 없고 열반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지견(知見)하여 3계의 사람이 3계를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을 알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평행 이론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우주의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연속되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뿌린 업을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뿌린 업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착하기만 살았는데 왜 늘 남들보다 힘들어야 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하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에 반항해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와 분노이다. 화와 분노는 행복의 반대이다. 지금 시간도 어느 별에서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지나간 역사에서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의 삶과 똑같이 닮았을 수도 있다.

씨앗이 나고 성장하고 한 해를 살고 죽기도 하고 수십 년을 살기도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사실 나고 성장하고 살았던 순간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플갱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 주기 위해 모든 나쁜 일을 했다고 변명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생명체인데도 말이다. 부모가 돈을 물려주는 그 순간만 기다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고 유산 상속이 끝나고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햇빛과 별빛과 달빛과 바람, 그리고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통해 살아간다.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햇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단 몇 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듯이 우리의 주변에는 말없이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많은 유기물과 생명체들의 연기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늘 걱정하고 근심하고 심장을 졸이고 실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집 때문에 사기를 맞아서 등등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의 시간이 있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네 탓을 앞세우지 않고 도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서로가 네 탓을 하다 보면 믿음이 깨지고 미래가 무너져 내리고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지금은 서양화되어 병원에서 국화로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놓고 장례를 치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고집’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상여를 보관했는데 아버지는 상여의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 때로는 상여 위에 올라가서 요령을 흔들면서 구슬프게 떠난 망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 같은 소리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후렴을 하고는 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족이나 사위가 돈을 상여 앞에 놓아야 상여가 출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사위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끈으로 매서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주는 건을 쓰고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와 허리띠를 차고 발목 위에서 바지를 고정하는 각 반을 찼다.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주로서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 입고 사모제까지 수시로 곡을 해대니 목은 쉬고 잠도 못 자니 온몸이 지쳐 있었다. 슬픔을 몸을 학대해서 잊는 방법 같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손님 받고 차로 이동해서 화장하고 장지에 모시면 끝나지만 과거에 힘들게 곡하고 전통을 지키던 시절도 있었다.

까마귀 사체를 봤다. 살아서는 까마귀가 벌레나 굼벵이 같은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잔디밭을 뒤집어 놓고는 했었는데 죽어서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사람도 죽으면 티베트의 풍장처럼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수백 년 전의의 시체가 미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우리는 흙에서 나는 식물과 음식, 과일들과 풀을 먹은 동물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를 거듭한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이나 보호를 받다가 태어나면서 다른 동물처럼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 가다가 죽을 때 수의 한 벌을 얻어 돌아 가지만 그마저도 화장으로 태운다. 그리고 다른 별에서 살아 가는 또 다른 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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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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