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도올 김용옥 "도올, 만해를 부른다"
[전문] 도올 김용옥 "도올, 만해를 부른다"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4.06.1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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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만해한용운 선사 서거 80주기 기념 대강연




 

만해한용운선생 서거80주기기념대강연
도올, 만해를 부른다

緖言

만해 한용운은 20세기의 聖人이다. 聖人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성인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만해를 너무 모른다. 聖人을 바라보는 성인스러운 견식과 소양에 너무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산 이 예순여섯 해의 시간은 우리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중첩되었으며, 선악의 가치가 가장 극렬하게 대비되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삶의 순간 속에 무한대의 곡선을 그리는 그런 역사였다. 이 역사 속에 만해는 기적같이 나타났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 두 사건을 연결하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삶의 역정을 수놓는 사건들은 세인들의 평론으로 결코 명료하게 정론화될 수 없다. 만해 자신이 만해의 삶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도 정밀한 기억이 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만해를 성스럽게 만드는 유니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한 거국적 사태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민족아이덴티티를 지킨 지식인이요, 시인이며, 종교인이며, 학자이며, 독립투쟁가이며, 사회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적 활동가라는 이 사실, 다시 말해서 이 다면적 사회기능을 한몸으로 구현하면서도 일제와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는 기적 같은, 아니 신비롭기까지 한 이 사실이다. 이 유니크한 사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의 사견이나, 조직의 이해나, 오만이나 과시를 시각에 깔고 보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우리민족사의 모든 굴절의 비극은 오직 만해의 지조가 있기에, 『한용운전집』이라는 방대한 삶의 궤적이 남아있기에,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해에게 감사의 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를 산 의식 있는 지성이라면 그러한 가슴을 지나간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만해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지나 만해전집간행추진회가 결성되었다(崔凡述, 朴洸, 朴暎熙, 朴根燮, 金法麟, 金寂音, 許永鎬, 張道煥, 金觀鎬, 朴允進, 金龍潭). 그러나 이 추진회의 노력(1948년 5월)은 6·25동란으로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가라앉고 서울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趙芝薰 선생의 주도로 구체적인 편집을 입안하여 1973년 6월 30일 국학출판의 본거지였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의 숙원을 달성한다.

2. 趙芝薰(1920~1968)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최고의 안목을 갖춘 지성이며 시인이다(광복 후 시단의 전통을 집대성한 청록파의 한 사람). 조지훈이 한용운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용운에 대한 정통적 평어라 할 수 있다(“民族主義者 韓龍雲”).

만해(萬海) 한 용운(韓龍雲)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 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사(志士)로서의 선생의 강직하던 기개(氣慨), 고고한 절조(節操)는 불교의 온축(蘊蓄)과 문학 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 쌍수(禪敎雙修)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 운동과 서정시(抒情詩)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一體化)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지조가 한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 항쟁(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임제선(臨濟禪)의 종풍(宗風)을 방불케 하는 것이요, 선생의 불교가 또한 우원(迂遠)한 법문(法門)이 아니고 현실에 즉(卽)한 불교였던 것도 호국 불교(護國佛敎)·대중 불교(大衆佛敎)가 그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학은 주로 비분 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 관조(自然觀照)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분 강개는 지조(志操)에서, 자연 관조는 선(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것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학은 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一體化) ─ 이것이 한 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兩者)를 저변(低邊)으로 한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

3. 한용운의 삶의 역정에서 평론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그의 漢學의 수준과 깊이에 관한 오석誤釋 내지는 무지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현대문학계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해의 한학(유교경전에 통달함)의 수준을 파악하기 힘들고, 특히 불교철학 내부의 사정에 어둡게 마련이다. 만해의 漢詩에 관한 문장들을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25살 연하 제자인 崔凡述(1804~1979. 만해전집간행위원회 대표, 국민대 이사장 역임)이 일본 大正大學을 졸업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써준 글씨가 있는데 아무도 이 서도글씨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磨杵絶葦.” 여기 “마저磨杵”라는 것은 “마저성침磨杵成針”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데, 그토록 오래 갈고닦아 학문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태백의 어린 시절의 공부를 가리키어 이른 말이다. “절위絶葦”는 “갈대를 끊는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만해가 위 자에 초두 변을 잘못 얹어 생긴 오류이다. “절위絶韋”는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공자가 『역』을 하도 많이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이다. “마저절위” 하듯이 열심히 공부하여 大成하라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4. 한용운의 한학 실력의 수준을 가늠하질 못하기 때문에 한용운의 출생환경에 관해서 헛소리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만해의 가계를 아전 정도의 中人출신으로 폄하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데, 만해의 한학실력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의 벼슬이 어떠했든지간에 격조 높은(최소한 안목이 고귀한) 사족집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시골아전 집안에서 한용운의 한학이 나올 수 없다. 홍성의 문화수준(10년 후에는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다)과 더불어, 만해는 어려서부터 한학의 기초소양을 단단히 다졌다. 성곡리城谷里의 신동으로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을 해독하였으며 『서경書經』을 통달하였고, 『대학』의 정자程子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칠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정이천은 『대학』에 주를 달지 않았다. 주자가 정이천을 인용한 곳은 있다). 이것은 모두 만해 소년시절의 학문의 깊이에 대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만해는 14세 때 天安全氏, 정숙貞淑과 혼인한다. 그리고 19세 때 출가한다. 그리고 1905년, 27세 때 온전한 스님이 된다. 19세로부터 31세까지 10여 년간 만해는 막강한 유교경전의 실력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불경공부에 전념했다. 『기신론』, 『능가경』, 『원각경』, 『화엄경』, 『반야경』 등을 훌륭한 선사들로부터 전수받아, 불교의 기본요의를 착실하게 터득했다. 만해는 10대에 유가경전을 암송하고 20대에 불교경전을 터득한다. 조선지성사의 양대산맥의 정수리에 오른 그는 “한글”을 새롭게 발견한다. 만해의 “한글사랑”은 그의 실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제일(祭日)

데이·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이 글은 1926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인데, “가갸날”은 “한글날”의 의미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는 주시경이 제안했던(1906)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글날”로 명명했다. 만해는 한글로 번역된 목판본 불경 원판의 발견·수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글이 제일 먼저 응용된 분야가 불경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6. 『님의 침묵』 속에 있는 시 한 수를 읊어보자!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塔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러한 시의 표현에는 한문투의 냄새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한글은 그의 내면의 감성의 如如로운 표현이요 폭발이었다.

10대의 한문수업. 유교적 문·사·철. 시적 함축성. 무主述

한글의 재발견

20대의 불경수업. 불교적 경·논·율. 산문적 논리. 유主述







 

10대의 유교적 경전과의 해후, 20대의 불교경전과의 만남, 윤리적 엄격성과 초윤리적 자유의 대면을 거쳐 만해의 정신세계는 한글을 발견한다.

만해의 詩는 전통과 모더니즘의 대결이 빚어낸 세계문명의 신테제Synthese였다. 漢學과 한글이 각기 최정상을 달리면서 융합된 새로운 백두대간이었다. 우리민족사에서 결코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신테제가 아니었다.

8. 만해에게 한글은 해방이요, 維新이요, 자유요, 신문명이었다. 십삼경과 팔만대장경이 융합된 자리에서 터져나온 포효가 그가 쓴 『朝鮮佛敎維新論』이었다.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것은 1910년(32세) 12월 8일, 백담사에서였다. 이 『유신론』은 1913년(35세)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간된다. 그러니까 『유신론』은 그의 생애에서 제일 먼저 공중에게 발간된 저술이다. 그가 출가하여 정식 스님이 된 지 불과 5년 만에 불교계 전체에게 물의를 일으키는 방대한 서물을 저작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적이며 아나키스트적 파괴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고 5년의 체험으로 불교 전체의 제도적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신론』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제목만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은 李元燮이 하였다).

1) 序

2) 緖論

3) 論佛敎之性質

4) 論佛敎之主義

5)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 論僧侶之敎育

7) 論參禪

8) 論廢佛堂

9) 論布敎

10) 論寺院位置

11) 論佛家崇拜之塑繪

12) 論佛家之各種儀式

13) 論僧侶之克服人權必自生利始

14) 論佛敎之前道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15) 論寺院主職選擧法

16) 論僧侶之團體

17) 論寺院統轄

18) 結論

9. 제5장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라는 글의 冒頭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신(維新)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比例)의 학문에 있어서 추리(推理)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좀더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좀더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 파괴가 느린 사람은 유신도 느리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빠르며,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큰 것이니,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正比例)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대야 하는 것은 파괴임이 확실하다.

이 문장의 내용을 살펴볼 때 만해는 조선의 불교전통이 지니는 장점이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鮮末의 불교가 내부적으로 곪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해는 그 현상을 총체적으로 형량하여 개선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도 熱血兒였다. 만해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래디칼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조선불교는 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생각을 그대로 구김없이 썼다는 것이 만해라는 실존체의 위대함이다.

10. 『유신론』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 즉 사회여론을 비등시킨 것은 제14장의 승니僧尼 가취嫁娶 여부문제였다. 만해는 스님이 꼭 독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중불교는 평등을 지향하는 보통사람의 불교이고, 보통사람의 삶 속에서 깨닫는 불교였다. 만해의 결혼허용 주장은 그의 불교철학 체계 내에서의 필연적·이론정합적 주장이었다. 그것은 왜색불교의 “대처승” 문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테마였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일본불교가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의 한국불교 자체의 성찰에서 나온 自內的 테마였다.

그런데 하필 그의 승니가취주장이 일제강점의 合邦 當年에 나왔다는 사실은 만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비방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할뿐더러, 해방이후의 “정화운동”에 있어서도 고결한 위치에서의 만해의 이미지는 정당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정화”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는 것과도 같은 필연적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론의 폭력성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해의 철학은 정화과정에 있어서도 “淨”의 자리에 있었지 “濁”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11. 만해는 너무 젊었고, 너무 혈기가 왕성했고, 정의감이 투철했고, 실천력이 직절直截하였다.

1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1910)과 관련하여 並論할 가치가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원불교를 개창한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쓴 『조선불교혁신론』이다. 대체로 1920년경 구상된 문헌인데, 그 주장이 만해의 『유신론』과 크게 상통한다. 그러나 박중빈의 논의가 간결하고 추상적이며 포괄적이래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等像佛을 崇拜하는것이 敎理發展에 或必要는잇스나 現在로붙어 未來事를생각하면 必要는姑捨하고 發展에障害가잇슬 것이다 그 証據를들어말하자면 農夫가農事를지여놓고 가을이되고보면 뭇-새를防止하기爲하야 人形허수아비를만드러 몯은새오는곧에세워둔즉 그새들이 그人形허수아비를보고 놀내며 몇일동안은 오지않이하다가 저의들도 또한여러方面으로試驗을보왓는지? 覺醒을얻엇는지? 畢竟에는 달려들어 農作物을作害하며 주서먹다가 그人形허수아비우에 올너앉어 쉬기도하고 或은똥도싸며 遊戱場같이使用하니 이것을본다면 그런無識한새(鳥)즘생도 人形허수아비를 알거든 하물며 最靈한사람으로 저動作이없는 人形等像佛을 近二千年뫼서보왓으니 어찌覺醒이 없으리요

13.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만해의 『유신론』의 근본핵심은 “승려의 교육”에 있었다. 승려의 교육이란 불경을 가르치는 불교 고유의 학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보통학 즉 일반교양학문과 사범학 즉 만인의 모범이 되는 도덕적 소양을 길러주는 도덕형이상학을 포섭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유학이다. 만해는 불교유신을 통해 스님들이 진정한 사회리더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禪은 곧 삶의 선이요, 覺은 곧 삶의 각이다. 만해는 『유신론』을 쓸 때만 해도 사회의 구원이 없이 개인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만해는 말한다: “大聲疾呼於僧侶同胞曰, 沮害敎育者, 必往地獄; 進興敎育者, 當成佛道!”

14. 나 도올은 말한다. 만해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승려결혼의 도입은 근원적인 해탈의 길이었고 기성불교를 혁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한학적 정신세계에 한글이 도입되는 것과도 같은 신선함이었다.

15. 만해는 『유신론』을 쓴 후 곧바로 “승려의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구상에 돌입한다. 만해는 1908년, 30세 때 일본에 유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駒澤大學의 전신인 曹洞宗大學林에서 공부를 했다. 그때 일본에는 이미 淨土眞宗에서 발간한 『불교성전』(난죠오 분유우南條文雄, 1849~1927,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5~1930와 같은 대불교학자에 의함)과 같은 훌륭한 불교경전 다이제스트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극을 받는다. 만해는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을 다이제스트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양산 통도사로 간다. 통도사에는 해인사의 대장경목각판을 인쇄한 서책자 팔만대장경(1,516種 6,815卷,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숫자는 81,352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만해는 우직하게 이 팔만대장경을 다 통독하였다. 만해가 과연 어떻게 이 대장경을 통독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존하는 그의 저서 『佛敎大典』을 볼 때 그가 팔만대장경을 전체를 비교검토하여 조직적으로 그 내용을 분류하는 정독작업을 거친 것은 확실하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유신작업을 『불교대전』이라는 초인적 다이제스트작업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유신이 결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대전』으로 입증한 것이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를 발행소로 하여 출간되었다. 만해의 스님으로서의 입지는 이 방대한 저술로써 확고히 정립된 것이다.

16. 만해는 『불교대전』이 출간된 후 3년이 지나,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근원적인 존재질문을 가슴에 품고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간다(1917년 가을. 이춘성이 시봉). 1915년의 화재로 백담사가 전소되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는 즉시 오세암으로 올라갔다.

오세암에서 1917년 겨울을 난다. 1917년(丁巳年) 12월 3일 밤 10시경, 깊게 좌선하고 있던 중에, 홀연히 강풍이 불어 물체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마음에 품었던 의심의 정서가 갑자기 싹 풀리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하나 얻었다고 했다(坐禪中, 忽聞風打墜物聲, 疑情頓釋, 仍得一詩). 이것이 만해의 삶에서 전하는 유일한 오도송悟道頌이다.

17.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이것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클리쉐를 가지고 쉽게 풀어놓는데 그러기에는 만해의 삶이 너무 고귀하다. 너무도 긴 파란만장한 고뇌를 거쳤다. 19세에 출가하여 이제 39세(1917)! 불혹의 나이다. 20년 동안 밀도 있는 삶을 살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며 용감히 전진하였다.

남아가 이르는 곳, 남아가 발을 디딛는 곳은 모두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이란 궁극적 지향처,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삼수갑산이 모두 해탈의 경지라는 것이다. 존재(Sein) 그 자체의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객수客愁”라는 것은 나그네의 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뇌로 가득한 삶의 여로를 가리킬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의 몇 명이나 나처럼 오랫동안 객수에 머물렀느냐(幾人長在客愁中)! 나처럼 기나긴 고뇌 속에 투쟁하고 방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존재의 확신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소리로 삼천계를 갈파하였다고 했다. 바람에 어떤 물체가 꽝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옮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모든 존재의문이 풀렸다 했다. 그 큰 한 소리(一聲)의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도올도 모르고 만공도 모른다. 만해 홀로 두고두고 되씹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 그 길에서 생겨난 모든 고뇌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상투적인 오도송의 언어가 사족처럼 붙어있다. 눈 속에 복사꽃이 필 때는 아니건만 갑자기 복사꽃이 만발하여 펄펄 흩날리는 모습이 붉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꽃잎은 보이지 않고 붉은 전체가 존재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18. 나는 이 오도송을 중시한다. 이 오도송 속에는 만해의 삶의 모든 굴절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해 후에 만해는 3·1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쓴다.

公約三章

一. 今日吾人의 此擧는 正義ヽ人道ヽ生存ヽ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ㅣ니오 즉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하지말라

一. 最後의 一人지 最後의 一刻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지 光明正大하게하라

“공약삼장”에 관해서도 왈가왈부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으나 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쓴 것이 분명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모님 이은숙李恩淑 여사의 자서전을 보아도 당대에 어디서나 만해가 선언서집필에 관여했다는 설은 보편적 평론이었던 것 같다. 佛·僧·法의 삼보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방관자적인 최남선의 붓끝에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정당한 의미가 있다.

19. 최남선의 “宣言書”와 신채호의 “朝鮮革命宣言”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의 “선언서”에 대한 당대지사들의 비분의 심정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다.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朝鮮革命宣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 내지 작은 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지방세·주초세·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피는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0. 최남선의 선언서는 사실의 긍정 위에서 펼쳐진다. 신채호의 선언은 사실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최남선은 선언을 통해 호소하지만 결국 독립은 수동적 기다림이다. 신채호의 선언은 현실과 실존의 개벽이며 능동적 행동이며 주체적 개척이며 타도이다.

21. 3·1운동의 독립선언은 天命의 大勢의 선포(케리그마)였다. 그러나 선포자들이 대부분 그 선포에 끝까지 매달리지 못했다. 선포의 내용을 끝까지 타협 없이 믿은 사람이 오직 만해 한용운이었다.

22. 만해의 서대문형무소 3년 옥살이는 가장 혹독한 “禪의 수련”이었고, 존재의 그룬트Grund를 파헤치는 “님의 발견”이었다. 1921년 12월 22일, 만해는 출옥한다.

23. 1925년(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한다. 같은 해, 그러니까 몇 달 후 8월 29일 밤 『님의 침묵沈默』을 탈고한다(시를 오세암에서 대부분 썼지만 최종 탈고는 백담사에서 했다).

24. 여태까지 논의된 만해 삶의 사상적·언어적 궤적을 정리해보자!

 

만해한용운선생 서거80주기기념대강연
도올, 만해를 부른다

緖言

만해 한용운은 20세기의 聖人이다. 聖人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성인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만해를 너무 모른다. 聖人을 바라보는 성인스러운 견식과 소양에 너무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산 이 예순여섯 해의 시간은 우리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중첩되었으며, 선악의 가치가 가장 극렬하게 대비되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삶의 순간 속에 무한대의 곡선을 그리는 그런 역사였다. 이 역사 속에 만해는 기적같이 나타났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 두 사건을 연결하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삶의 역정을 수놓는 사건들은 세인들의 평론으로 결코 명료하게 정론화될 수 없다. 만해 자신이 만해의 삶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도 정밀한 기억이 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만해를 성스럽게 만드는 유니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한 거국적 사태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민족아이덴티티를 지킨 지식인이요, 시인이며, 종교인이며, 학자이며, 독립투쟁가이며, 사회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적 활동가라는 이 사실, 다시 말해서 이 다면적 사회기능을 한몸으로 구현하면서도 일제와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는 기적 같은, 아니 신비롭기까지 한 이 사실이다. 이 유니크한 사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의 사견이나, 조직의 이해나, 오만이나 과시를 시각에 깔고 보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우리민족사의 모든 굴절의 비극은 오직 만해의 지조가 있기에, 『한용운전집』이라는 방대한 삶의 궤적이 남아있기에,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해에게 감사의 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를 산 의식 있는 지성이라면 그러한 가슴을 지나간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만해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지나 만해전집간행추진회가 결성되었다(崔凡述, 朴洸, 朴暎熙, 朴根燮, 金法麟, 金寂音, 許永鎬, 張道煥, 金觀鎬, 朴允進, 金龍潭). 그러나 이 추진회의 노력(1948년 5월)은 6·25동란으로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가라앉고 서울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趙芝薰 선생의 주도로 구체적인 편집을 입안하여 1973년 6월 30일 국학출판의 본거지였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의 숙원을 달성한다.

2. 趙芝薰(1920~1968)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최고의 안목을 갖춘 지성이며 시인이다(광복 후 시단의 전통을 집대성한 청록파의 한 사람). 조지훈이 한용운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용운에 대한 정통적 평어라 할 수 있다(“民族主義者 韓龍雲”).

만해(萬海) 한 용운(韓龍雲)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 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사(志士)로서의 선생의 강직하던 기개(氣慨), 고고한 절조(節操)는 불교의 온축(蘊蓄)과 문학 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 쌍수(禪敎雙修)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 운동과 서정시(抒情詩)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一體化)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지조가 한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 항쟁(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임제선(臨濟禪)의 종풍(宗風)을 방불케 하는 것이요, 선생의 불교가 또한 우원(迂遠)한 법문(法門)이 아니고 현실에 즉(卽)한 불교였던 것도 호국 불교(護國佛敎)·대중 불교(大衆佛敎)가 그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학은 주로 비분 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 관조(自然觀照)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분 강개는 지조(志操)에서, 자연 관조는 선(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것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학은 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一體化) ─ 이것이 한 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兩者)를 저변(低邊)으로 한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

3. 한용운의 삶의 역정에서 평론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그의 漢學의 수준과 깊이에 관한 오석誤釋 내지는 무지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현대문학계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해의 한학(유교경전에 통달함)의 수준을 파악하기 힘들고, 특히 불교철학 내부의 사정에 어둡게 마련이다. 만해의 漢詩에 관한 문장들을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25살 연하 제자인 崔凡述(1804~1979. 만해전집간행위원회 대표, 국민대 이사장 역임)이 일본 大正大學을 졸업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써준 글씨가 있는데 아무도 이 서도글씨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磨杵絶葦.” 여기 “마저磨杵”라는 것은 “마저성침磨杵成針”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데, 그토록 오래 갈고닦아 학문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태백의 어린 시절의 공부를 가리키어 이른 말이다. “절위絶葦”는 “갈대를 끊는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만해가 위 자에 초두 변을 잘못 얹어 생긴 오류이다. “절위絶韋”는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공자가 『역』을 하도 많이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이다. “마저절위” 하듯이 열심히 공부하여 大成하라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4. 한용운의 한학 실력의 수준을 가늠하질 못하기 때문에 한용운의 출생환경에 관해서 헛소리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만해의 가계를 아전 정도의 中人출신으로 폄하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데, 만해의 한학실력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의 벼슬이 어떠했든지간에 격조 높은(최소한 안목이 고귀한) 사족집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시골아전 집안에서 한용운의 한학이 나올 수 없다. 홍성의 문화수준(10년 후에는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다)과 더불어, 만해는 어려서부터 한학의 기초소양을 단단히 다졌다. 성곡리城谷里의 신동으로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을 해독하였으며 『서경書經』을 통달하였고, 『대학』의 정자程子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칠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정이천은 『대학』에 주를 달지 않았다. 주자가 정이천을 인용한 곳은 있다). 이것은 모두 만해 소년시절의 학문의 깊이에 대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만해는 14세 때 天安全氏, 정숙貞淑과 혼인한다. 그리고 19세 때 출가한다. 그리고 1905년, 27세 때 온전한 스님이 된다. 19세로부터 31세까지 10여 년간 만해는 막강한 유교경전의 실력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불경공부에 전념했다. 『기신론』, 『능가경』, 『원각경』, 『화엄경』, 『반야경』 등을 훌륭한 선사들로부터 전수받아, 불교의 기본요의를 착실하게 터득했다. 만해는 10대에 유가경전을 암송하고 20대에 불교경전을 터득한다. 조선지성사의 양대산맥의 정수리에 오른 그는 “한글”을 새롭게 발견한다. 만해의 “한글사랑”은 그의 실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제일(祭日)

데이·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이 글은 1926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인데, “가갸날”은 “한글날”의 의미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는 주시경이 제안했던(1906)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글날”로 명명했다. 만해는 한글로 번역된 목판본 불경 원판의 발견·수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글이 제일 먼저 응용된 분야가 불경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6. 『님의 침묵』 속에 있는 시 한 수를 읊어보자!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塔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러한 시의 표현에는 한문투의 냄새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한글은 그의 내면의 감성의 如如로운 표현이요 폭발이었다.

10대의 한문수업. 유교적 문·사·철. 시적 함축성. 무主述

한글의 재발견

20대의 불경수업. 불교적 경·논·율. 산문적 논리. 유主述





 

만해한용운선생 서거80주기기념대강연
도올, 만해를 부른다

緖言

만해 한용운은 20세기의 聖人이다. 聖人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성인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만해를 너무 모른다. 聖人을 바라보는 성인스러운 견식과 소양에 너무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산 이 예순여섯 해의 시간은 우리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중첩되었으며, 선악의 가치가 가장 극렬하게 대비되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삶의 순간 속에 무한대의 곡선을 그리는 그런 역사였다. 이 역사 속에 만해는 기적같이 나타났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 두 사건을 연결하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삶의 역정을 수놓는 사건들은 세인들의 평론으로 결코 명료하게 정론화될 수 없다. 만해 자신이 만해의 삶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도 정밀한 기억이 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만해를 성스럽게 만드는 유니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한 거국적 사태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민족아이덴티티를 지킨 지식인이요, 시인이며, 종교인이며, 학자이며, 독립투쟁가이며, 사회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적 활동가라는 이 사실, 다시 말해서 이 다면적 사회기능을 한몸으로 구현하면서도 일제와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는 기적 같은, 아니 신비롭기까지 한 이 사실이다. 이 유니크한 사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의 사견이나, 조직의 이해나, 오만이나 과시를 시각에 깔고 보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우리민족사의 모든 굴절의 비극은 오직 만해의 지조가 있기에, 『한용운전집』이라는 방대한 삶의 궤적이 남아있기에,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해에게 감사의 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를 산 의식 있는 지성이라면 그러한 가슴을 지나간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만해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지나 만해전집간행추진회가 결성되었다(崔凡述, 朴洸, 朴暎熙, 朴根燮, 金法麟, 金寂音, 許永鎬, 張道煥, 金觀鎬, 朴允進, 金龍潭). 그러나 이 추진회의 노력(1948년 5월)은 6·25동란으로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가라앉고 서울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趙芝薰 선생의 주도로 구체적인 편집을 입안하여 1973년 6월 30일 국학출판의 본거지였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의 숙원을 달성한다.

2. 趙芝薰(1920~1968)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최고의 안목을 갖춘 지성이며 시인이다(광복 후 시단의 전통을 집대성한 청록파의 한 사람). 조지훈이 한용운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용운에 대한 정통적 평어라 할 수 있다(“民族主義者 韓龍雲”).

만해(萬海) 한 용운(韓龍雲)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 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사(志士)로서의 선생의 강직하던 기개(氣慨), 고고한 절조(節操)는 불교의 온축(蘊蓄)과 문학 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 쌍수(禪敎雙修)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 운동과 서정시(抒情詩)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一體化)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지조가 한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 항쟁(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임제선(臨濟禪)의 종풍(宗風)을 방불케 하는 것이요, 선생의 불교가 또한 우원(迂遠)한 법문(法門)이 아니고 현실에 즉(卽)한 불교였던 것도 호국 불교(護國佛敎)·대중 불교(大衆佛敎)가 그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학은 주로 비분 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 관조(自然觀照)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분 강개는 지조(志操)에서, 자연 관조는 선(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것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학은 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一體化) ─ 이것이 한 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兩者)를 저변(低邊)으로 한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

3. 한용운의 삶의 역정에서 평론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그의 漢學의 수준과 깊이에 관한 오석誤釋 내지는 무지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현대문학계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해의 한학(유교경전에 통달함)의 수준을 파악하기 힘들고, 특히 불교철학 내부의 사정에 어둡게 마련이다. 만해의 漢詩에 관한 문장들을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25살 연하 제자인 崔凡述(1804~1979. 만해전집간행위원회 대표, 국민대 이사장 역임)이 일본 大正大學을 졸업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써준 글씨가 있는데 아무도 이 서도글씨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磨杵絶葦.” 여기 “마저磨杵”라는 것은 “마저성침磨杵成針”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데, 그토록 오래 갈고닦아 학문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태백의 어린 시절의 공부를 가리키어 이른 말이다. “절위絶葦”는 “갈대를 끊는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만해가 위 자에 초두 변을 잘못 얹어 생긴 오류이다. “절위絶韋”는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공자가 『역』을 하도 많이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이다. “마저절위” 하듯이 열심히 공부하여 大成하라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4. 한용운의 한학 실력의 수준을 가늠하질 못하기 때문에 한용운의 출생환경에 관해서 헛소리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만해의 가계를 아전 정도의 中人출신으로 폄하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데, 만해의 한학실력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의 벼슬이 어떠했든지간에 격조 높은(최소한 안목이 고귀한) 사족집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시골아전 집안에서 한용운의 한학이 나올 수 없다. 홍성의 문화수준(10년 후에는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다)과 더불어, 만해는 어려서부터 한학의 기초소양을 단단히 다졌다. 성곡리城谷里의 신동으로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을 해독하였으며 『서경書經』을 통달하였고, 『대학』의 정자程子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칠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정이천은 『대학』에 주를 달지 않았다. 주자가 정이천을 인용한 곳은 있다). 이것은 모두 만해 소년시절의 학문의 깊이에 대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만해는 14세 때 天安全氏, 정숙貞淑과 혼인한다. 그리고 19세 때 출가한다. 그리고 1905년, 27세 때 온전한 스님이 된다. 19세로부터 31세까지 10여 년간 만해는 막강한 유교경전의 실력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불경공부에 전념했다. 『기신론』, 『능가경』, 『원각경』, 『화엄경』, 『반야경』 등을 훌륭한 선사들로부터 전수받아, 불교의 기본요의를 착실하게 터득했다. 만해는 10대에 유가경전을 암송하고 20대에 불교경전을 터득한다. 조선지성사의 양대산맥의 정수리에 오른 그는 “한글”을 새롭게 발견한다. 만해의 “한글사랑”은 그의 실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제일(祭日)

데이·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이 글은 1926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인데, “가갸날”은 “한글날”의 의미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는 주시경이 제안했던(1906)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글날”로 명명했다. 만해는 한글로 번역된 목판본 불경 원판의 발견·수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글이 제일 먼저 응용된 분야가 불경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6. 『님의 침묵』 속에 있는 시 한 수를 읊어보자!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塔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러한 시의 표현에는 한문투의 냄새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한글은 그의 내면의 감성의 如如로운 표현이요 폭발이었다.

10대의 한문수업. 유교적 문·사·철. 시적 함축성. 무主述

한글의 재발견

20대의 불경수업. 불교적 경·논·율. 산문적 논리. 유主述







 

10대의 유교적 경전과의 해후, 20대의 불교경전과의 만남, 윤리적 엄격성과 초윤리적 자유의 대면을 거쳐 만해의 정신세계는 한글을 발견한다.

만해의 詩는 전통과 모더니즘의 대결이 빚어낸 세계문명의 신테제Synthese였다. 漢學과 한글이 각기 최정상을 달리면서 융합된 새로운 백두대간이었다. 우리민족사에서 결코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신테제가 아니었다.

8. 만해에게 한글은 해방이요, 維新이요, 자유요, 신문명이었다. 십삼경과 팔만대장경이 융합된 자리에서 터져나온 포효가 그가 쓴 『朝鮮佛敎維新論』이었다.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것은 1910년(32세) 12월 8일, 백담사에서였다. 이 『유신론』은 1913년(35세)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간된다. 그러니까 『유신론』은 그의 생애에서 제일 먼저 공중에게 발간된 저술이다. 그가 출가하여 정식 스님이 된 지 불과 5년 만에 불교계 전체에게 물의를 일으키는 방대한 서물을 저작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적이며 아나키스트적 파괴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고 5년의 체험으로 불교 전체의 제도적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신론』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제목만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은 李元燮이 하였다).

1) 序

2) 緖論

3) 論佛敎之性質

4) 論佛敎之主義

5)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 論僧侶之敎育

7) 論參禪

8) 論廢佛堂

9) 論布敎

10) 論寺院位置

11) 論佛家崇拜之塑繪

12) 論佛家之各種儀式

13) 論僧侶之克服人權必自生利始

14) 論佛敎之前道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15) 論寺院主職選擧法

16) 論僧侶之團體

17) 論寺院統轄

18) 結論

9. 제5장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라는 글의 冒頭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신(維新)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比例)의 학문에 있어서 추리(推理)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좀더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좀더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 파괴가 느린 사람은 유신도 느리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빠르며,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큰 것이니,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正比例)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대야 하는 것은 파괴임이 확실하다.

이 문장의 내용을 살펴볼 때 만해는 조선의 불교전통이 지니는 장점이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鮮末의 불교가 내부적으로 곪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해는 그 현상을 총체적으로 형량하여 개선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도 熱血兒였다. 만해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래디칼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조선불교는 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생각을 그대로 구김없이 썼다는 것이 만해라는 실존체의 위대함이다.

10. 『유신론』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 즉 사회여론을 비등시킨 것은 제14장의 승니僧尼 가취嫁娶 여부문제였다. 만해는 스님이 꼭 독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중불교는 평등을 지향하는 보통사람의 불교이고, 보통사람의 삶 속에서 깨닫는 불교였다. 만해의 결혼허용 주장은 그의 불교철학 체계 내에서의 필연적·이론정합적 주장이었다. 그것은 왜색불교의 “대처승” 문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테마였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일본불교가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의 한국불교 자체의 성찰에서 나온 自內的 테마였다.

그런데 하필 그의 승니가취주장이 일제강점의 合邦 當年에 나왔다는 사실은 만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비방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할뿐더러, 해방이후의 “정화운동”에 있어서도 고결한 위치에서의 만해의 이미지는 정당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정화”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는 것과도 같은 필연적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론의 폭력성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해의 철학은 정화과정에 있어서도 “淨”의 자리에 있었지 “濁”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11. 만해는 너무 젊었고, 너무 혈기가 왕성했고, 정의감이 투철했고, 실천력이 직절直截하였다.

1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1910)과 관련하여 並論할 가치가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원불교를 개창한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쓴 『조선불교혁신론』이다. 대체로 1920년경 구상된 문헌인데, 그 주장이 만해의 『유신론』과 크게 상통한다. 그러나 박중빈의 논의가 간결하고 추상적이며 포괄적이래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等像佛을 崇拜하는것이 敎理發展에 或必要는잇스나 現在로붙어 未來事를생각하면 必要는姑捨하고 發展에障害가잇슬 것이다 그 証據를들어말하자면 農夫가農事를지여놓고 가을이되고보면 뭇-새를防止하기爲하야 人形허수아비를만드러 몯은새오는곧에세워둔즉 그새들이 그人形허수아비를보고 놀내며 몇일동안은 오지않이하다가 저의들도 또한여러方面으로試驗을보왓는지? 覺醒을얻엇는지? 畢竟에는 달려들어 農作物을作害하며 주서먹다가 그人形허수아비우에 올너앉어 쉬기도하고 或은똥도싸며 遊戱場같이使用하니 이것을본다면 그런無識한새(鳥)즘생도 人形허수아비를 알거든 하물며 最靈한사람으로 저動作이없는 人形等像佛을 近二千年뫼서보왓으니 어찌覺醒이 없으리요

13.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만해의 『유신론』의 근본핵심은 “승려의 교육”에 있었다. 승려의 교육이란 불경을 가르치는 불교 고유의 학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보통학 즉 일반교양학문과 사범학 즉 만인의 모범이 되는 도덕적 소양을 길러주는 도덕형이상학을 포섭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유학이다. 만해는 불교유신을 통해 스님들이 진정한 사회리더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禪은 곧 삶의 선이요, 覺은 곧 삶의 각이다. 만해는 『유신론』을 쓸 때만 해도 사회의 구원이 없이 개인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만해는 말한다: “大聲疾呼於僧侶同胞曰, 沮害敎育者, 必往地獄; 進興敎育者, 當成佛道!”

14. 나 도올은 말한다. 만해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승려결혼의 도입은 근원적인 해탈의 길이었고 기성불교를 혁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한학적 정신세계에 한글이 도입되는 것과도 같은 신선함이었다.

15. 만해는 『유신론』을 쓴 후 곧바로 “승려의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구상에 돌입한다. 만해는 1908년, 30세 때 일본에 유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駒澤大學의 전신인 曹洞宗大學林에서 공부를 했다. 그때 일본에는 이미 淨土眞宗에서 발간한 『불교성전』(난죠오 분유우南條文雄, 1849~1927,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5~1930와 같은 대불교학자에 의함)과 같은 훌륭한 불교경전 다이제스트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극을 받는다. 만해는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을 다이제스트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양산 통도사로 간다. 통도사에는 해인사의 대장경목각판을 인쇄한 서책자 팔만대장경(1,516種 6,815卷,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숫자는 81,352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만해는 우직하게 이 팔만대장경을 다 통독하였다. 만해가 과연 어떻게 이 대장경을 통독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존하는 그의 저서 『佛敎大典』을 볼 때 그가 팔만대장경을 전체를 비교검토하여 조직적으로 그 내용을 분류하는 정독작업을 거친 것은 확실하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유신작업을 『불교대전』이라는 초인적 다이제스트작업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유신이 결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대전』으로 입증한 것이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를 발행소로 하여 출간되었다. 만해의 스님으로서의 입지는 이 방대한 저술로써 확고히 정립된 것이다.

16. 만해는 『불교대전』이 출간된 후 3년이 지나,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근원적인 존재질문을 가슴에 품고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간다(1917년 가을. 이춘성이 시봉). 1915년의 화재로 백담사가 전소되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는 즉시 오세암으로 올라갔다.

오세암에서 1917년 겨울을 난다. 1917년(丁巳年) 12월 3일 밤 10시경, 깊게 좌선하고 있던 중에, 홀연히 강풍이 불어 물체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마음에 품었던 의심의 정서가 갑자기 싹 풀리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하나 얻었다고 했다(坐禪中, 忽聞風打墜物聲, 疑情頓釋, 仍得一詩). 이것이 만해의 삶에서 전하는 유일한 오도송悟道頌이다.

17.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이것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클리쉐를 가지고 쉽게 풀어놓는데 그러기에는 만해의 삶이 너무 고귀하다. 너무도 긴 파란만장한 고뇌를 거쳤다. 19세에 출가하여 이제 39세(1917)! 불혹의 나이다. 20년 동안 밀도 있는 삶을 살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며 용감히 전진하였다.

남아가 이르는 곳, 남아가 발을 디딛는 곳은 모두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이란 궁극적 지향처,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삼수갑산이 모두 해탈의 경지라는 것이다. 존재(Sein) 그 자체의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객수客愁”라는 것은 나그네의 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뇌로 가득한 삶의 여로를 가리킬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의 몇 명이나 나처럼 오랫동안 객수에 머물렀느냐(幾人長在客愁中)! 나처럼 기나긴 고뇌 속에 투쟁하고 방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존재의 확신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소리로 삼천계를 갈파하였다고 했다. 바람에 어떤 물체가 꽝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옮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모든 존재의문이 풀렸다 했다. 그 큰 한 소리(一聲)의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도올도 모르고 만공도 모른다. 만해 홀로 두고두고 되씹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 그 길에서 생겨난 모든 고뇌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상투적인 오도송의 언어가 사족처럼 붙어있다. 눈 속에 복사꽃이 필 때는 아니건만 갑자기 복사꽃이 만발하여 펄펄 흩날리는 모습이 붉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꽃잎은 보이지 않고 붉은 전체가 존재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18. 나는 이 오도송을 중시한다. 이 오도송 속에는 만해의 삶의 모든 굴절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해 후에 만해는 3·1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쓴다.

公約三章

一. 今日吾人의 此擧는 正義ヽ人道ヽ生存ヽ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ㅣ니오 즉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하지말라

一. 最後의 一人지 最後의 一刻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지 光明正大하게하라

“공약삼장”에 관해서도 왈가왈부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으나 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쓴 것이 분명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모님 이은숙李恩淑 여사의 자서전을 보아도 당대에 어디서나 만해가 선언서집필에 관여했다는 설은 보편적 평론이었던 것 같다. 佛·僧·法의 삼보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방관자적인 최남선의 붓끝에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정당한 의미가 있다.

19. 최남선의 “宣言書”와 신채호의 “朝鮮革命宣言”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의 “선언서”에 대한 당대지사들의 비분의 심정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다.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朝鮮革命宣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 내지 작은 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지방세·주초세·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피는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0. 최남선의 선언서는 사실의 긍정 위에서 펼쳐진다. 신채호의 선언은 사실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최남선은 선언을 통해 호소하지만 결국 독립은 수동적 기다림이다. 신채호의 선언은 현실과 실존의 개벽이며 능동적 행동이며 주체적 개척이며 타도이다.

21. 3·1운동의 독립선언은 天命의 大勢의 선포(케리그마)였다. 그러나 선포자들이 대부분 그 선포에 끝까지 매달리지 못했다. 선포의 내용을 끝까지 타협 없이 믿은 사람이 오직 만해 한용운이었다.

22. 만해의 서대문형무소 3년 옥살이는 가장 혹독한 “禪의 수련”이었고, 존재의 그룬트Grund를 파헤치는 “님의 발견”이었다. 1921년 12월 22일, 만해는 출옥한다.

23. 1925년(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한다. 같은 해, 그러니까 몇 달 후 8월 29일 밤 『님의 침묵沈默』을 탈고한다(시를 오세암에서 대부분 썼지만 최종 탈고는 백담사에서 했다).

24. 여태까지 논의된 만해 삶의 사상적·언어적 궤적을 정리해보자!

 

10대의 유교적 경전과의 해후, 20대의 불교경전과의 만남, 윤리적 엄격성과 초윤리적 자유의 대면을 거쳐 만해의 정신세계는 한글을 발견한다.

만해의 詩는 전통과 모더니즘의 대결이 빚어낸 세계문명의 신테제Synthese였다. 漢學과 한글이 각기 최정상을 달리면서 융합된 새로운 백두대간이었다. 우리민족사에서 결코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신테제가 아니었다.

8. 만해에게 한글은 해방이요, 維新이요, 자유요, 신문명이었다. 십삼경과 팔만대장경이 융합된 자리에서 터져나온 포효가 그가 쓴 『朝鮮佛敎維新論』이었다.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것은 1910년(32세) 12월 8일, 백담사에서였다. 이 『유신론』은 1913년(35세)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간된다. 그러니까 『유신론』은 그의 생애에서 제일 먼저 공중에게 발간된 저술이다. 그가 출가하여 정식 스님이 된 지 불과 5년 만에 불교계 전체에게 물의를 일으키는 방대한 서물을 저작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적이며 아나키스트적 파괴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고 5년의 체험으로 불교 전체의 제도적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신론』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제목만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은 李元燮이 하였다).

1) 序

2) 緖論

3) 論佛敎之性質

4) 論佛敎之主義

5)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 論僧侶之敎育

7) 論參禪

8) 論廢佛堂

9) 論布敎

10) 論寺院位置

11) 論佛家崇拜之塑繪

12) 論佛家之各種儀式

13) 論僧侶之克服人權必自生利始

14) 論佛敎之前道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15) 論寺院主職選擧法

16) 論僧侶之團體

17) 論寺院統轄

18) 結論

9. 제5장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라는 글의 冒頭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신(維新)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比例)의 학문에 있어서 추리(推理)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좀더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좀더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 파괴가 느린 사람은 유신도 느리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빠르며,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큰 것이니,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正比例)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대야 하는 것은 파괴임이 확실하다.

이 문장의 내용을 살펴볼 때 만해는 조선의 불교전통이 지니는 장점이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鮮末의 불교가 내부적으로 곪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해는 그 현상을 총체적으로 형량하여 개선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도 熱血兒였다. 만해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래디칼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조선불교는 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생각을 그대로 구김없이 썼다는 것이 만해라는 실존체의 위대함이다.

10. 『유신론』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 즉 사회여론을 비등시킨 것은 제14장의 승니僧尼 가취嫁娶 여부문제였다. 만해는 스님이 꼭 독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중불교는 평등을 지향하는 보통사람의 불교이고, 보통사람의 삶 속에서 깨닫는 불교였다. 만해의 결혼허용 주장은 그의 불교철학 체계 내에서의 필연적·이론정합적 주장이었다. 그것은 왜색불교의 “대처승” 문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테마였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일본불교가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의 한국불교 자체의 성찰에서 나온 自內的 테마였다.

그런데 하필 그의 승니가취주장이 일제강점의 合邦 當年에 나왔다는 사실은 만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비방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할뿐더러, 해방이후의 “정화운동”에 있어서도 고결한 위치에서의 만해의 이미지는 정당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정화”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는 것과도 같은 필연적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론의 폭력성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해의 철학은 정화과정에 있어서도 “淨”의 자리에 있었지 “濁”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11. 만해는 너무 젊었고, 너무 혈기가 왕성했고, 정의감이 투철했고, 실천력이 직절直截하였다.

1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1910)과 관련하여 並論할 가치가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원불교를 개창한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쓴 『조선불교혁신론』이다. 대체로 1920년경 구상된 문헌인데, 그 주장이 만해의 『유신론』과 크게 상통한다. 그러나 박중빈의 논의가 간결하고 추상적이며 포괄적이래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等像佛을 崇拜하는것이 敎理發展에 或必要는잇스나 現在로붙어 未來事를생각하면 必要는姑捨하고 發展에障害가잇슬 것이다 그 証據를들어말하자면 農夫가農事를지여놓고 가을이되고보면 뭇-새를防止하기爲하야 人形허수아비를만드러 몯은새오는곧에세워둔즉 그새들이 그人形허수아비를보고 놀내며 몇일동안은 오지않이하다가 저의들도 또한여러方面으로試驗을보왓는지? 覺醒을얻엇는지? 畢竟에는 달려들어 農作物을作害하며 주서먹다가 그人形허수아비우에 올너앉어 쉬기도하고 或은똥도싸며 遊戱場같이使用하니 이것을본다면 그런無識한새(鳥)즘생도 人形허수아비를 알거든 하물며 最靈한사람으로 저動作이없는 人形等像佛을 近二千年뫼서보왓으니 어찌覺醒이 없으리요

13.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만해의 『유신론』의 근본핵심은 “승려의 교육”에 있었다. 승려의 교육이란 불경을 가르치는 불교 고유의 학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보통학 즉 일반교양학문과 사범학 즉 만인의 모범이 되는 도덕적 소양을 길러주는 도덕형이상학을 포섭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유학이다. 만해는 불교유신을 통해 스님들이 진정한 사회리더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禪은 곧 삶의 선이요, 覺은 곧 삶의 각이다. 만해는 『유신론』을 쓸 때만 해도 사회의 구원이 없이 개인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만해는 말한다: “大聲疾呼於僧侶同胞曰, 沮害敎育者, 必往地獄; 進興敎育者, 當成佛道!”

14. 나 도올은 말한다. 만해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승려결혼의 도입은 근원적인 해탈의 길이었고 기성불교를 혁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한학적 정신세계에 한글이 도입되는 것과도 같은 신선함이었다.

15. 만해는 『유신론』을 쓴 후 곧바로 “승려의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구상에 돌입한다. 만해는 1908년, 30세 때 일본에 유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駒澤大學의 전신인 曹洞宗大學林에서 공부를 했다. 그때 일본에는 이미 淨土眞宗에서 발간한 『불교성전』(난죠오 분유우南條文雄, 1849~1927,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5~1930와 같은 대불교학자에 의함)과 같은 훌륭한 불교경전 다이제스트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극을 받는다. 만해는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을 다이제스트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양산 통도사로 간다. 통도사에는 해인사의 대장경목각판을 인쇄한 서책자 팔만대장경(1,516種 6,815卷,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숫자는 81,352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만해는 우직하게 이 팔만대장경을 다 통독하였다. 만해가 과연 어떻게 이 대장경을 통독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존하는 그의 저서 『佛敎大典』을 볼 때 그가 팔만대장경을 전체를 비교검토하여 조직적으로 그 내용을 분류하는 정독작업을 거친 것은 확실하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유신작업을 『불교대전』이라는 초인적 다이제스트작업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유신이 결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대전』으로 입증한 것이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를 발행소로 하여 출간되었다. 만해의 스님으로서의 입지는 이 방대한 저술로써 확고히 정립된 것이다.

16. 만해는 『불교대전』이 출간된 후 3년이 지나,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근원적인 존재질문을 가슴에 품고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간다(1917년 가을. 이춘성이 시봉). 1915년의 화재로 백담사가 전소되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는 즉시 오세암으로 올라갔다.

오세암에서 1917년 겨울을 난다. 1917년(丁巳年) 12월 3일 밤 10시경, 깊게 좌선하고 있던 중에, 홀연히 강풍이 불어 물체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마음에 품었던 의심의 정서가 갑자기 싹 풀리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하나 얻었다고 했다(坐禪中, 忽聞風打墜物聲, 疑情頓釋, 仍得一詩). 이것이 만해의 삶에서 전하는 유일한 오도송悟道頌이다.

17.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이것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클리쉐를 가지고 쉽게 풀어놓는데 그러기에는 만해의 삶이 너무 고귀하다. 너무도 긴 파란만장한 고뇌를 거쳤다. 19세에 출가하여 이제 39세(1917)! 불혹의 나이다. 20년 동안 밀도 있는 삶을 살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며 용감히 전진하였다.

남아가 이르는 곳, 남아가 발을 디딛는 곳은 모두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이란 궁극적 지향처,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삼수갑산이 모두 해탈의 경지라는 것이다. 존재(Sein) 그 자체의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객수客愁”라는 것은 나그네의 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뇌로 가득한 삶의 여로를 가리킬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의 몇 명이나 나처럼 오랫동안 객수에 머물렀느냐(幾人長在客愁中)! 나처럼 기나긴 고뇌 속에 투쟁하고 방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존재의 확신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소리로 삼천계를 갈파하였다고 했다. 바람에 어떤 물체가 꽝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옮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모든 존재의문이 풀렸다 했다. 그 큰 한 소리(一聲)의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도올도 모르고 만공도 모른다. 만해 홀로 두고두고 되씹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 그 길에서 생겨난 모든 고뇌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상투적인 오도송의 언어가 사족처럼 붙어있다. 눈 속에 복사꽃이 필 때는 아니건만 갑자기 복사꽃이 만발하여 펄펄 흩날리는 모습이 붉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꽃잎은 보이지 않고 붉은 전체가 존재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18. 나는 이 오도송을 중시한다. 이 오도송 속에는 만해의 삶의 모든 굴절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해 후에 만해는 3·1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쓴다.

公約三章

一. 今日吾人의 此擧는 正義ヽ人道ヽ生存ヽ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ㅣ니오 즉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하지말라

一. 最後의 一人지 最後의 一刻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지 光明正大하게하라

“공약삼장”에 관해서도 왈가왈부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으나 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쓴 것이 분명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모님 이은숙李恩淑 여사의 자서전을 보아도 당대에 어디서나 만해가 선언서집필에 관여했다는 설은 보편적 평론이었던 것 같다. 佛·僧·法의 삼보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방관자적인 최남선의 붓끝에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정당한 의미가 있다.

19. 최남선의 “宣言書”와 신채호의 “朝鮮革命宣言”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의 “선언서”에 대한 당대지사들의 비분의 심정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다.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朝鮮革命宣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 내지 작은 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지방세·주초세·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피는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0. 최남선의 선언서는 사실의 긍정 위에서 펼쳐진다. 신채호의 선언은 사실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최남선은 선언을 통해 호소하지만 결국 독립은 수동적 기다림이다. 신채호의 선언은 현실과 실존의 개벽이며 능동적 행동이며 주체적 개척이며 타도이다.

21. 3·1운동의 독립선언은 天命의 大勢의 선포(케리그마)였다. 그러나 선포자들이 대부분 그 선포에 끝까지 매달리지 못했다. 선포의 내용을 끝까지 타협 없이 믿은 사람이 오직 만해 한용운이었다.

22. 만해의 서대문형무소 3년 옥살이는 가장 혹독한 “禪의 수련”이었고, 존재의 그룬트Grund를 파헤치는 “님의 발견”이었다. 1921년 12월 22일, 만해는 출옥한다.

23. 1925년(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한다. 같은 해, 그러니까 몇 달 후 8월 29일 밤 『님의 침묵沈默』을 탈고한다(시를 오세암에서 대부분 썼지만 최종 탈고는 백담사에서 했다).

24. 여태까지 논의된 만해 삶의 사상적·언어적 궤적을 정리해보자!





 

만해한용운선생 서거80주기기념대강연
도올, 만해를 부른다

緖言

만해 한용운은 20세기의 聖人이다. 聖人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성인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만해를 너무 모른다. 聖人을 바라보는 성인스러운 견식과 소양에 너무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산 이 예순여섯 해의 시간은 우리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중첩되었으며, 선악의 가치가 가장 극렬하게 대비되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삶의 순간 속에 무한대의 곡선을 그리는 그런 역사였다. 이 역사 속에 만해는 기적같이 나타났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 두 사건을 연결하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삶의 역정을 수놓는 사건들은 세인들의 평론으로 결코 명료하게 정론화될 수 없다. 만해 자신이 만해의 삶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도 정밀한 기억이 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만해를 성스럽게 만드는 유니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한 거국적 사태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민족아이덴티티를 지킨 지식인이요, 시인이며, 종교인이며, 학자이며, 독립투쟁가이며, 사회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적 활동가라는 이 사실, 다시 말해서 이 다면적 사회기능을 한몸으로 구현하면서도 일제와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는 기적 같은, 아니 신비롭기까지 한 이 사실이다. 이 유니크한 사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의 사견이나, 조직의 이해나, 오만이나 과시를 시각에 깔고 보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우리민족사의 모든 굴절의 비극은 오직 만해의 지조가 있기에, 『한용운전집』이라는 방대한 삶의 궤적이 남아있기에,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해에게 감사의 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를 산 의식 있는 지성이라면 그러한 가슴을 지나간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만해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지나 만해전집간행추진회가 결성되었다(崔凡述, 朴洸, 朴暎熙, 朴根燮, 金法麟, 金寂音, 許永鎬, 張道煥, 金觀鎬, 朴允進, 金龍潭). 그러나 이 추진회의 노력(1948년 5월)은 6·25동란으로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가라앉고 서울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趙芝薰 선생의 주도로 구체적인 편집을 입안하여 1973년 6월 30일 국학출판의 본거지였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의 숙원을 달성한다.

2. 趙芝薰(1920~1968)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최고의 안목을 갖춘 지성이며 시인이다(광복 후 시단의 전통을 집대성한 청록파의 한 사람). 조지훈이 한용운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용운에 대한 정통적 평어라 할 수 있다(“民族主義者 韓龍雲”).

만해(萬海) 한 용운(韓龍雲)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 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사(志士)로서의 선생의 강직하던 기개(氣慨), 고고한 절조(節操)는 불교의 온축(蘊蓄)과 문학 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 쌍수(禪敎雙修)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 운동과 서정시(抒情詩)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一體化)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지조가 한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 항쟁(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임제선(臨濟禪)의 종풍(宗風)을 방불케 하는 것이요, 선생의 불교가 또한 우원(迂遠)한 법문(法門)이 아니고 현실에 즉(卽)한 불교였던 것도 호국 불교(護國佛敎)·대중 불교(大衆佛敎)가 그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학은 주로 비분 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 관조(自然觀照)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분 강개는 지조(志操)에서, 자연 관조는 선(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것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학은 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一體化) ─ 이것이 한 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兩者)를 저변(低邊)으로 한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

3. 한용운의 삶의 역정에서 평론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그의 漢學의 수준과 깊이에 관한 오석誤釋 내지는 무지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현대문학계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해의 한학(유교경전에 통달함)의 수준을 파악하기 힘들고, 특히 불교철학 내부의 사정에 어둡게 마련이다. 만해의 漢詩에 관한 문장들을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25살 연하 제자인 崔凡述(1804~1979. 만해전집간행위원회 대표, 국민대 이사장 역임)이 일본 大正大學을 졸업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써준 글씨가 있는데 아무도 이 서도글씨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磨杵絶葦.” 여기 “마저磨杵”라는 것은 “마저성침磨杵成針”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데, 그토록 오래 갈고닦아 학문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태백의 어린 시절의 공부를 가리키어 이른 말이다. “절위絶葦”는 “갈대를 끊는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만해가 위 자에 초두 변을 잘못 얹어 생긴 오류이다. “절위絶韋”는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공자가 『역』을 하도 많이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이다. “마저절위” 하듯이 열심히 공부하여 大成하라는 뜻으로 써준 것이다.

4. 한용운의 한학 실력의 수준을 가늠하질 못하기 때문에 한용운의 출생환경에 관해서 헛소리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만해의 가계를 아전 정도의 中人출신으로 폄하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데, 만해의 한학실력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의 벼슬이 어떠했든지간에 격조 높은(최소한 안목이 고귀한) 사족집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시골아전 집안에서 한용운의 한학이 나올 수 없다. 홍성의 문화수준(10년 후에는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다)과 더불어, 만해는 어려서부터 한학의 기초소양을 단단히 다졌다. 성곡리城谷里의 신동으로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을 해독하였으며 『서경書經』을 통달하였고, 『대학』의 정자程子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칠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정이천은 『대학』에 주를 달지 않았다. 주자가 정이천을 인용한 곳은 있다). 이것은 모두 만해 소년시절의 학문의 깊이에 대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만해는 14세 때 天安全氏, 정숙貞淑과 혼인한다. 그리고 19세 때 출가한다. 그리고 1905년, 27세 때 온전한 스님이 된다. 19세로부터 31세까지 10여 년간 만해는 막강한 유교경전의 실력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불경공부에 전념했다. 『기신론』, 『능가경』, 『원각경』, 『화엄경』, 『반야경』 등을 훌륭한 선사들로부터 전수받아, 불교의 기본요의를 착실하게 터득했다. 만해는 10대에 유가경전을 암송하고 20대에 불교경전을 터득한다. 조선지성사의 양대산맥의 정수리에 오른 그는 “한글”을 새롭게 발견한다. 만해의 “한글사랑”은 그의 실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제일(祭日)

데이·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이 글은 1926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인데, “가갸날”은 “한글날”의 의미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는 주시경이 제안했던(1906)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글날”로 명명했다. 만해는 한글로 번역된 목판본 불경 원판의 발견·수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글이 제일 먼저 응용된 분야가 불경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6. 『님의 침묵』 속에 있는 시 한 수를 읊어보자!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塔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러한 시의 표현에는 한문투의 냄새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한글은 그의 내면의 감성의 如如로운 표현이요 폭발이었다.

10대의 한문수업. 유교적 문·사·철. 시적 함축성. 무主述

한글의 재발견

20대의 불경수업. 불교적 경·논·율. 산문적 논리. 유主述







 

10대의 유교적 경전과의 해후, 20대의 불교경전과의 만남, 윤리적 엄격성과 초윤리적 자유의 대면을 거쳐 만해의 정신세계는 한글을 발견한다.

만해의 詩는 전통과 모더니즘의 대결이 빚어낸 세계문명의 신테제Synthese였다. 漢學과 한글이 각기 최정상을 달리면서 융합된 새로운 백두대간이었다. 우리민족사에서 결코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신테제가 아니었다.

8. 만해에게 한글은 해방이요, 維新이요, 자유요, 신문명이었다. 십삼경과 팔만대장경이 융합된 자리에서 터져나온 포효가 그가 쓴 『朝鮮佛敎維新論』이었다.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것은 1910년(32세) 12월 8일, 백담사에서였다. 이 『유신론』은 1913년(35세)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간된다. 그러니까 『유신론』은 그의 생애에서 제일 먼저 공중에게 발간된 저술이다. 그가 출가하여 정식 스님이 된 지 불과 5년 만에 불교계 전체에게 물의를 일으키는 방대한 서물을 저작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적이며 아나키스트적 파괴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고 5년의 체험으로 불교 전체의 제도적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신론』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제목만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은 李元燮이 하였다).

1) 序

2) 緖論

3) 論佛敎之性質

4) 論佛敎之主義

5)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 論僧侶之敎育

7) 論參禪

8) 論廢佛堂

9) 論布敎

10) 論寺院位置

11) 論佛家崇拜之塑繪

12) 論佛家之各種儀式

13) 論僧侶之克服人權必自生利始

14) 論佛敎之前道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15) 論寺院主職選擧法

16) 論僧侶之團體

17) 論寺院統轄

18) 結論

9. 제5장 “불교의 유신은 파괴로부터”라는 글의 冒頭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신(維新)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比例)의 학문에 있어서 추리(推理)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좀더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좀더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 파괴가 느린 사람은 유신도 느리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빠르며,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큰 것이니,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正比例)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에 있어서 가장 먼저 손대야 하는 것은 파괴임이 확실하다.

이 문장의 내용을 살펴볼 때 만해는 조선의 불교전통이 지니는 장점이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鮮末의 불교가 내부적으로 곪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해는 그 현상을 총체적으로 형량하여 개선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도 熱血兒였다. 만해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래디칼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조선불교는 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생각을 그대로 구김없이 썼다는 것이 만해라는 실존체의 위대함이다.

10. 『유신론』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 즉 사회여론을 비등시킨 것은 제14장의 승니僧尼 가취嫁娶 여부문제였다. 만해는 스님이 꼭 독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대중불교는 평등을 지향하는 보통사람의 불교이고, 보통사람의 삶 속에서 깨닫는 불교였다. 만해의 결혼허용 주장은 그의 불교철학 체계 내에서의 필연적·이론정합적 주장이었다. 그것은 왜색불교의 “대처승” 문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테마였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일본불교가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의 한국불교 자체의 성찰에서 나온 自內的 테마였다.

그런데 하필 그의 승니가취주장이 일제강점의 合邦 當年에 나왔다는 사실은 만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비방과 인신공격을 정당화할뿐더러, 해방이후의 “정화운동”에 있어서도 고결한 위치에서의 만해의 이미지는 정당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정화”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는 것과도 같은 필연적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론의 폭력성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해의 철학은 정화과정에 있어서도 “淨”의 자리에 있었지 “濁”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11. 만해는 너무 젊었고, 너무 혈기가 왕성했고, 정의감이 투철했고, 실천력이 직절直截하였다.

12.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1910)과 관련하여 並論할 가치가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원불교를 개창한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쓴 『조선불교혁신론』이다. 대체로 1920년경 구상된 문헌인데, 그 주장이 만해의 『유신론』과 크게 상통한다. 그러나 박중빈의 논의가 간결하고 추상적이며 포괄적이래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等像佛을 崇拜하는것이 敎理發展에 或必要는잇스나 現在로붙어 未來事를생각하면 必要는姑捨하고 發展에障害가잇슬 것이다 그 証據를들어말하자면 農夫가農事를지여놓고 가을이되고보면 뭇-새를防止하기爲하야 人形허수아비를만드러 몯은새오는곧에세워둔즉 그새들이 그人形허수아비를보고 놀내며 몇일동안은 오지않이하다가 저의들도 또한여러方面으로試驗을보왓는지? 覺醒을얻엇는지? 畢竟에는 달려들어 農作物을作害하며 주서먹다가 그人形허수아비우에 올너앉어 쉬기도하고 或은똥도싸며 遊戱場같이使用하니 이것을본다면 그런無識한새(鳥)즘생도 人形허수아비를 알거든 하물며 最靈한사람으로 저動作이없는 人形等像佛을 近二千年뫼서보왓으니 어찌覺醒이 없으리요

13.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만해의 『유신론』의 근본핵심은 “승려의 교육”에 있었다. 승려의 교육이란 불경을 가르치는 불교 고유의 학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보통학 즉 일반교양학문과 사범학 즉 만인의 모범이 되는 도덕적 소양을 길러주는 도덕형이상학을 포섭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유학이다. 만해는 불교유신을 통해 스님들이 진정한 사회리더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禪은 곧 삶의 선이요, 覺은 곧 삶의 각이다. 만해는 『유신론』을 쓸 때만 해도 사회의 구원이 없이 개인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만해는 말한다: “大聲疾呼於僧侶同胞曰, 沮害敎育者, 必往地獄; 進興敎育者, 當成佛道!”

14. 나 도올은 말한다. 만해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승려결혼의 도입은 근원적인 해탈의 길이었고 기성불교를 혁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한학적 정신세계에 한글이 도입되는 것과도 같은 신선함이었다.

15. 만해는 『유신론』을 쓴 후 곧바로 “승려의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구상에 돌입한다. 만해는 1908년, 30세 때 일본에 유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駒澤大學의 전신인 曹洞宗大學林에서 공부를 했다. 그때 일본에는 이미 淨土眞宗에서 발간한 『불교성전』(난죠오 분유우南條文雄, 1849~1927,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5~1930와 같은 대불교학자에 의함)과 같은 훌륭한 불교경전 다이제스트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극을 받는다. 만해는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을 다이제스트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양산 통도사로 간다. 통도사에는 해인사의 대장경목각판을 인쇄한 서책자 팔만대장경(1,516種 6,815卷,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숫자는 81,352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만해는 우직하게 이 팔만대장경을 다 통독하였다. 만해가 과연 어떻게 이 대장경을 통독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존하는 그의 저서 『佛敎大典』을 볼 때 그가 팔만대장경을 전체를 비교검토하여 조직적으로 그 내용을 분류하는 정독작업을 거친 것은 확실하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의 유신작업을 『불교대전』이라는 초인적 다이제스트작업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유신이 결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불교대전』으로 입증한 것이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를 발행소로 하여 출간되었다. 만해의 스님으로서의 입지는 이 방대한 저술로써 확고히 정립된 것이다.

16. 만해는 『불교대전』이 출간된 후 3년이 지나,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근원적인 존재질문을 가슴에 품고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간다(1917년 가을. 이춘성이 시봉). 1915년의 화재로 백담사가 전소되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는 즉시 오세암으로 올라갔다.

오세암에서 1917년 겨울을 난다. 1917년(丁巳年) 12월 3일 밤 10시경, 깊게 좌선하고 있던 중에, 홀연히 강풍이 불어 물체를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마음에 품었던 의심의 정서가 갑자기 싹 풀리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하나 얻었다고 했다(坐禪中, 忽聞風打墜物聲, 疑情頓釋, 仍得一詩). 이것이 만해의 삶에서 전하는 유일한 오도송悟道頌이다.

17.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이것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클리쉐를 가지고 쉽게 풀어놓는데 그러기에는 만해의 삶이 너무 고귀하다. 너무도 긴 파란만장한 고뇌를 거쳤다. 19세에 출가하여 이제 39세(1917)! 불혹의 나이다. 20년 동안 밀도 있는 삶을 살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며 용감히 전진하였다.

남아가 이르는 곳, 남아가 발을 디딛는 곳은 모두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이란 궁극적 지향처,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삼수갑산이 모두 해탈의 경지라는 것이다. 존재(Sein) 그 자체의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객수客愁”라는 것은 나그네의 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뇌로 가득한 삶의 여로를 가리킬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의 몇 명이나 나처럼 오랫동안 객수에 머물렀느냐(幾人長在客愁中)! 나처럼 기나긴 고뇌 속에 투쟁하고 방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존재의 확신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소리로 삼천계를 갈파하였다고 했다. 바람에 어떤 물체가 꽝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옮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모든 존재의문이 풀렸다 했다. 그 큰 한 소리(一聲)의 내용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도올도 모르고 만공도 모른다. 만해 홀로 두고두고 되씹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 그 길에서 생겨난 모든 고뇌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상투적인 오도송의 언어가 사족처럼 붙어있다. 눈 속에 복사꽃이 필 때는 아니건만 갑자기 복사꽃이 만발하여 펄펄 흩날리는 모습이 붉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꽃잎은 보이지 않고 붉은 전체가 존재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18. 나는 이 오도송을 중시한다. 이 오도송 속에는 만해의 삶의 모든 굴절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해 후에 만해는 3·1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쓴다.

公約三章

一. 今日吾人의 此擧는 正義ヽ人道ヽ生存ヽ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ㅣ니오 즉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하지말라

一. 最後의 一人지 最後의 一刻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지 光明正大하게하라

“공약삼장”에 관해서도 왈가왈부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으나 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쓴 것이 분명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모님 이은숙李恩淑 여사의 자서전을 보아도 당대에 어디서나 만해가 선언서집필에 관여했다는 설은 보편적 평론이었던 것 같다. 佛·僧·法의 삼보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방관자적인 최남선의 붓끝에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정당한 의미가 있다.

19. 최남선의 “宣言書”와 신채호의 “朝鮮革命宣言”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의 “선언서”에 대한 당대지사들의 비분의 심정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다.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朝鮮革命宣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 내지 작은 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지방세·주초세·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피는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0. 최남선의 선언서는 사실의 긍정 위에서 펼쳐진다. 신채호의 선언은 사실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최남선은 선언을 통해 호소하지만 결국 독립은 수동적 기다림이다. 신채호의 선언은 현실과 실존의 개벽이며 능동적 행동이며 주체적 개척이며 타도이다.

21. 3·1운동의 독립선언은 天命의 大勢의 선포(케리그마)였다. 그러나 선포자들이 대부분 그 선포에 끝까지 매달리지 못했다. 선포의 내용을 끝까지 타협 없이 믿은 사람이 오직 만해 한용운이었다.

22. 만해의 서대문형무소 3년 옥살이는 가장 혹독한 “禪의 수련”이었고, 존재의 그룬트Grund를 파헤치는 “님의 발견”이었다. 1921년 12월 22일, 만해는 출옥한다.

23. 1925년(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한다. 같은 해, 그러니까 몇 달 후 8월 29일 밤 『님의 침묵沈默』을 탈고한다(시를 오세암에서 대부분 썼지만 최종 탈고는 백담사에서 했다).

24. 여태까지 논의된 만해 삶의 사상적·언어적 궤적을 정리해보자!

 

25. 『십현담주해』라는 것은 『십현담』에다가 만해가 주해를 달았다는 뜻인데, 『십현담』은 10개의 선시(7글자 8구로 이루어진 律詩)로서 『경덕전등록』 권29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선시는 당나라 동안同安 상찰선사常察禪師(생년월일 미상)가 지은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매월당 김시습이 주를 달았다. 만해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세암에 돌아왔다가 매월당이 바로 오세암에서 『십현담』에 주를 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만해도 『십현담』에 주를 달게 되었다. 10개의 七律 중 그 첫 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心印

問君心印作何顔

心印何人敢授傳

歷劫坦然無異色

呼爲心印早虛言

須知體自虛空性

將喩紅爐火裡蓮

勿謂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이것을 나 도올의 감각으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심인

그대에게 묻노라. 心印은 어떤

얼굴을 짓고 있느냐?

心印을 누가 감히 전해줄 수 있느냐?

여러 겁을 지내어도 한결같아

다른 색깔이 없으니,

心印이라 부르면 그 즉시

헛말이 되고만다.

모름지기 알지니, 몸뚱이는 본시

스스로 허공같은 성질이라.

이글거리는 화로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다.

無心을 일러 道라 하지 말지니,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고 있다.

26. 『십현담』이 만해의 『님의 침묵』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님의 침묵』이라는 88개의 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집필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기에 집약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님의 침묵』이 완성되기 두 달 전에 『십현담주해』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그 관계의 긴밀성을 유추할 수 있다. 첫 율시 「심인」의 내용만 잘 살펴보아도 『님의 침묵』의 근원적인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이 없다든다, 색깔이 없다든가, 인간의 언어로 부를 수 없다든가, 이글거리는 화로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라든가, 무심無心도 심의 관문에 싸여있다든가…… 이 모든 메타포가 만해의 “님”의 근본 情調와 상통한다.

27. 혹자는 『십현담』의 열 개의 律詩의 언어와 『님의 침묵』의 90편(88+군말+讀者에게)의 시를 병렬시켜 그 상응관계를 논하기도 하나 만해의 시를 그렇게 쉐마틱하게,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만해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독적으로 훑어내리는 것이다. 그 주장에 의하면 만해가 『십현담』을 놓고 그 순서대로 『님의 침묵』을 써내려갔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헛소리라 말해야 할 것이다. 만해의 천재성, 가슴에서 수시로 폭발하는 시정, 知天命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쌓인 울분과 좌절과 희망과 달관의 지혜, 불화로 같은 식을 줄 모르는 가슴, 그리고 팔만대장경 전체를 가슴에 담은 지적 통찰력, 이성과 감성을 융합하는 漢詩의 정취…… 이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만해는 『님의 침묵』을 하룻밤에도 써낼 수 있는 詩聖이다. 만해가 常察에게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을지언정, 상찰의 詩格에 맞춰 자기의 시정을 토로할 위인은 아니다.

28. 만해의 시 중에 「타골의 詩(GARDENISTO)를 읽고」라는 시가 있다. 타골이라면 당시 매우 신화적으로 추앙되는 인물일 텐데(Rabindranath Tagore, 1861~1941. 1913년 아시아에서 첫 노벨문학상) 그에 대한 만해의 평가는 높지 않다. 그는 죽음의 피안에 도달했을지는 몰라도 삶의 차안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타골의 초월적 진리는 백골의 향기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다. 타골은 禪을 몰랐다. 정확한 평론이다.

벗이여, 나의 벗이여, 愛人의 무덤 위의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적은 새의 자최도 없는 沙漠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모치는 白骨의 香氣입니다.

그대는 花環을 만들랴고 떨어진 꼿을 줏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줏은 꼿을 헤치고 부르는 絶望인 希望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꼿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읍니다.

눈물을 떨어진 꼿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띠끌에 뿌리서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주검의 香氣가 아모리 좋다 하야도, 白骨의 입설에 입맞출 수는 없읍니다.

그의 무덤을 黃金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서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서요.

그러나 죽은 大地가 詩人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겄읍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29. 만해에게 영향을 준 중요한 불교경전으로서 『유마경』이 있다. 『유마경』은 유마힐維摩詰이라는 재가거사를 중심으로 내세워, 출가중심주의의 형식적이고 소승적인 부파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대승불교의 진의를 드러낸다. 『유마경』은 한마디로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이다. 『유마경』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개인의 구원은 오로지 사회의 구원을 통하여 달성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완성은 개인의 성불成佛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원에 그 근원성을 둔다. 현실의 국토가 불국토라는 것이다.

범어사 무비 스님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만해는 『유마힐소설경강의維摩詰所說經講義』를 심우장을 마련하였을 즈음(1933년)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미완성고. 만해는 20세기 조선의 유마힐이다.

30. 『님의 침묵』은 한국문학사에 기적과 같이 등장한 단행본 시집이다. 일체 문단의 여론의 여과나 동인지의 간섭이나 패거리의식의 소속감이 없이, 그냥 無의 언어바다에서 솟은 독보적인 詩語이다. 『님의 침묵』이 발간된 1926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시집은 8권밖에 없었다. 최초의 개인 창작시집으로서는 김억(金億, 1896~납북: 岸曙, 김소월의 오산학교 스승)의 『해파리의 노래』(1923)를 들 수 있다. 김억은 번역시와 함께 1920년대 시적언어의 문체와 율격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나, 만해의 시적세계는 이러한 문단의 정황과는 관계가 없다. 내가 생각키에 이 시대의 시라고 하면 민족서정을 그냥 정직하게 현대시의 범주의 구속이 없이 읊어댄 김소월金素月(1902~1934, 본명 金廷湜)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월의 시에 대하여 그의 선생 김억이 “너무 詩魂이 얕다” “내부적 깊이를 가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평한 것도 일리가 있다(1923년 12월 『개벽』). 이에 대하여 소월은 반발한다: “같은 한 사람의 詩魂 자체가 같은 한 사람의 詩作에서 금시에 얕아졌다 깊어졌다 할 수 없다”라고 되친다. 시인에게 시혼이라는 것은 고유한 것이라서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31. 과연 우리는 이러한 논의의 구렁텅이에서 우리의 문학사를 평론해야 할까? 과연 자기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도 그 문서에 싸인하지 않은 최남선이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신체시의 첫 작품이라고 말해야 할까?(1908년, 그의 나이 19살 때의 작품). 구질구질한 언어를 쏟아놓을 생각이 없다. 최남선, 소월, 만해의 대표작을 여기 나열한다.

<海에게서 少年에게>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모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님의 沈默>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빗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읍니다.

黃金의 꽃 같이 굳고 빛나든 옛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날어갔읍니다.

날카로운 첫「키쓰」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 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읍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32. 과연 이 삼자를 동차원에서 동일문학사 지평 위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관하여 나의 논의를 비켜놓고 전문가의 고견을 들어보자! 염무웅은 말한다:

실제 작품 발표에 있어서도 만해는 <창조(創造)>(一九一九)의 동인들보다 앞서고 있다. 그는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유심(惟心)>(一九一八, 九, 통권 三호 발간)에 <님의 침묵>의 것들과 유사한 두세 편의 작품들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만해가 한국 최초의 근대시인이라는 사실은 이런 단순한 연대적 선후 관계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남의 나라 식민지로 떨어진 민족적 현실을 진실로 뼈아프게 체험하고 그 아픔을 처음으로 근대적인 시형태 속에 구체화했다는 데 이유가 있다.

우리가 만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허다하게 많지만, 그중에는 그가 이처럼 소위 문단적 시인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문단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병리적(病理的) 현상들은 이미 신문학 초창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문단형성 과정의 식민지적인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문단은 육당과 춘원의 이른바 二인 시대를 거쳐 <창조> <폐허(廢墟)> <백조(白潮)> 등의 동인지가 나오고 상징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 등속의 서구적 문예사조가 들어옴으로써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그래도 「조선인에게는 정신적 생활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반민족적 독선이 섞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름의 일정한 문화계몽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나, 一九二○년대 이후의 소위 문화정치를 거치는 동안 그것마저 희미해지고 말았다. ……

이러한 문학적 표현과 종교적 신앙 가운데에서 만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및 그 수단으로서의 군국주의가 하나의 역사적 유물임을 통찰하고 누구보다 열렬하고 전투적인 평화의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암담한 식민지적 현실에 있어서 그 현실이 허용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그 현실의 질곡을 갈파하고 앞으로 도래할 참된 현실의 질서를 노래하는 최초의 시인이 되었으며, 또한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대치되거나 분해될 수 없는 절대적 유일자(唯一者), 저 이름없는 일체 중생(一切衆生)·일체 제법(一切諸法)으로부터 생명을 넣어 호출해낸 진여(眞如)·진제(眞諦)로서의 님, 우리 문학사상 가장 빛나는 예술적 형상(刑象)의 창조자가 되었다.

33. 나는 처음에 만해강연의 청탁을 당위적으로 수용하였다. 곧바로 한용운의 방대한 정신세계를 대면하게 되면서 나는 20세기 우리민족의 정신사적 대맥을 발견한 느낌에 온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중국사와 한국사를 비교하면 “주권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중국은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만청으로부터 한족 주권을 회복하였고 중일전쟁의 전화 속에서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진 않았다. 그리고 공산혁명의 주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식민지 36년 체험은, 36년에 머물지 않는 식민지멘탈리티를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주권을 상실한 나라에서 주체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이 난감한 과제를 민족정신 혜맥의 저장소로 승화시킨 만해의 삶의 역정이야말로, 21세기 조선민족의 미래적 이데아를 형성하고 있다.

34. 『한용운전집』 전체를 통독하면서 그 전체구조를 발견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정신세계는 『님의 침묵』 한 권으로 집약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만해의 사유세계는 화엄의 화장세계라 말할 수 있다.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다. 『님의 침묵』의 一字는 화장세계 전체의 化現이다.

35. “님”이란 무엇인가? 「군말」에 만해의 해설이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釋迦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戀愛가 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自由에 알뜰한 拘束을 받지 않너냐.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羊이 기루어서 이 詩를 쓴다.

“기루다”는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는 것”이다. 님은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님화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님”은 이미 최수운에게서 “天主”로 규정된 바 있다. 하늘을 님화한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님은 “부모님”이요, “하느님”이다. 만해가 부르는 “님”은 일차적으로 조국이다. 그리고 그 조국은 이상화된 조국이다. 자유, 평등, 博愛, 互濟의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조국은 이상화된 보편이며,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이데가 후기사상의 “존재”(Sein)와 상통한다. 그에게 조국은 타자화되어 있다. 나와 조국이 분열되어 있는 한 해탈은 없다. 조국이 돌아오지 않는 한 해탈은 있을 수 없다. 한용운은 죽을 때까지 님의 회귀를 믿었다. 그래서 타협이 없었다.

36. 만해의 논리(『전집』2, 363)

선(禪)은 선이라고 하면 곧 선이 아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을 여의고는 별로 선이 없는 것이다. 선이면서 곧 선이 아니오, 선이 아니면서 곧 선이 되는 것이 이른바 선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 모래 위의 갈매기냐.

37. 사랑의 궁극적 의미. 禪의 경지

禪師의 說法

나는 禪師의 說法을 들었읍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실에 묶여서 苦痛을 받지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질거우리라」고 禪師는 큰 소리로 말하얐읍니다.

그 禪師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束縛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버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읍니다.

38. 첫 키스

마서요 제발 마서요

보면서 못보는체 마서요

마서요 제발 마서요

입설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서요

마서요 제발 마서요

뜨거운 사랑에 웃으면서 차디찬 잔 부끄럼에 울지 마서요

마서요 제발 마서요

世界의 꼿을 혼저 따면서 항분(亢奮)에 넘쳐서 떨지 마서요

마서요 제발 마서요

微笑는 나의 運命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서요.

39. 情天恨海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情하늘을 따를소냐

봄바다가 깊다기로

恨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情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어서

오르지못하고

깊고 깊은 恨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쩔러서

건느지못한다

손이 자래서 오를 수만 있으면

情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늘수만 있으면

恨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情하늘이 무너지고 恨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情天에 떨어지고 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情하늘이 높은줄만 알었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恨바다가 깊은 줄만 알었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옅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쩌르든지

情하늘에 오르고 恨바다를 건느랴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40. 이별은 美의 創造

이별은 美의 創造입니다.

이별의 美는 아츰의 바탕(質)에 없는 黃金과, 밤의 올(糸) 없는 검은 비단과, 주검없는 永遠의 生命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꼿에서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어날 수가 없읍니다. 오오 이별이여.

美는 이별의 創造입니다.

41.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여을)이나 건너 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이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어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 알어요.

42. 님의 얼골

님의 얼골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人間사람의 얼골에 대한 말이요, 님은 人間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自然은 어찌하야 그렇게 어여쁜 님을 人間으로 보냈는지, 아모리 생각하야도 알 수가 없읍니다.

알겄읍니다. 自然의 가온대에는 님의 짝이 될만한 무엇이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입설 같은 연꼿이 어데 있어요. 님의 살빛 같은 白玉이 어데 있어요.

봄 湖水에서 님의 눈결 같은 잔 물결을 보았읍니까. 아츰 볏에서 님의 微笑 같은 芳香을 들었읍니까.

天國의 音樂은 님의 노래의 反響입니다. 아름다운 별들은 님의 눈빗의 化現입니다.

아아 나는 님의 그림자여요.

님은 님의 그림자 밖에는 비길만한 것이 없읍니다.

님의 얼골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43. 오서요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얏어요, 어서 오서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서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요.

나는 나비가 되야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겄읍니다.

그러면 좇어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일) 수는 없읍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얐습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품에로 오서요, 나의 품에는 보드러운 가슴이 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입시요.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 같이 보드러웁지마는, 당신의 危險을 위하야는 黃金의 칼도 되고, 鋼鐵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落花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읍니다.

그러면 좇어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대일 수는 없읍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얐읍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주검 속으로 오서요, 주검은 당신을 위하야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야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주검의 뒤에 서십시요.

주검은 虛無와 萬能이 하나입니다.

주검의 사랑은 無限인 동시에 無窮입니다.

주검의 앞에는 軍艦과 砲臺가 띠끌이 됩니다.

주검의 앞에는 强者와 弱者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좇어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읍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얏읍니다, 어서 오서요.

44. 사랑의 끝판

녜 녜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랴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읍니다 그려. 저를 어쩌나, 저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럼을 듣기로 무엇이 싫겄읍니까. 다만 님의 거문곳줄이 緩急을 잃을까 저퍼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름나무 그늘을 지어버리는 것은 달빗이 아니라 새는 빗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녜 녜 가요, 이제 곧 가요.

미제종강未濟終講

萬海一滴皆覺緖

白頭兩虎相咆哮

一喝三千白衣白

天主大享舞全爻

일만 바다의 한 물방울도

모두 깨달음의 실마리,

백두대간에서 두 호랑이 서로 포효하네.

두 호랑이 삼천세계를 향해 대갈하니,

백의민족이 모두 하얗게 제 색깔로 돌아간다.

하느님께서 큰 제사를 흠향하시니

전 우주가 음양착종의 춤을 추는도다

檮杌呼萬海 下平聲肴韻
檮杌作
2024년 5월 23일 저녁 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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