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81. 물과 종교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81. 물과 종교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10.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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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물방울 보석처럼
햇살에 빛나지만
햇빛에 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순간이 올 줄 모르고 행복했었네, 그 순간.

이슬로 서리로 샘물로 빗방울로 세상에 와서
똥물 빨래 물 다 받아주고 흐르다 보니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때론 잊고 지난 고향처럼
때론 잊고 살아온 어머니 품처럼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거칠고 날카로움조차 사라져 강돌이 되고
바닷가 모래가 될 때까지 하지 못한 말 가슴에 품고.

소 장수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오기로 한날
누렁이 소는 콩깍지로 당겨까지 많이 타서
영양죽 보다 맛나게 만들어준 소 죽을
냄새만 킁킁댈 뿐 전혀 먹지를 않았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입 언저리에 솥에서 김처럼 피어 오르고
크지만 맑은 눈동자에 내 그림자가 비추고
얼핏 얼핏 보이는 눈가의 눈물은.
 







#작가의 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뿜으며 소리를 지르던 검둥이는 온몸을 뒤틀었다.

마루 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알 수 없는 울부짖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쳐다보는 일. 그날 오후 아버지는 양지바른 언덕에 검둥이를 묻어주고, 다음날 난 동네 형들에게서 검둥이 파내서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서, 내다본 안방엔 아버지의 한 쪽 팔을 문지방에 올려져 있고 아무도 안 보였다.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 팔을 꺾는다고 하면서 궁시렁 하고 있고, 아버지는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옆의 동생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지금 나가서 물어 뜯기라도 할 것이냐, 아님 그냥 숨죽이고 있을 거냐 생각 중이다.

내가 나가면 동생이 따라 나올 텐데, 누나와 엄마 어디 갔을까?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동네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민수 아빠가 와서 누나가 자기네 집에 있다고 하고, 엄마는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니 목이 빨갛다. 힘이 없어 보인다. 말도 잘 못한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와 이모부, 이모, 고모, 친척들이 보이고 엄마랑 아버진 시내 병원으로 갔다. 작은집에서 할머니도 왔다. 동생하고 난 할머니 소맷자락 붙들고 두레박 우물가까지 따라갔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몰라 유”

할머니의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이마로 뽀족 한 돌을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날, 손으로 이마를 막아선 누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밖에 볼 수 없는데 하늘엔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틈이 없이 까맣게 모여들어 까악까악을 외치던 그때보다, 집으로 와서 누운 내 구멍 난 이마에 된장을 가져다 붙인 엄마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서울 올라와 직장생활 몇 해 만에 다시 그 오래돼 누렇게 뜬 벽지 같은 기억이 나를 못살게 굴어 제기동 어디 쯤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그 일에 누이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실한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누이도 충격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헐값에 집을 넘기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쓰라린 내 유년 시절은 그 후도 잊어 버릴 만 하면 다시 찾아와 날 괴롭혔다.

이젠 잊혀 질 만도 한, 이젠 잊었으면 하는 그 기억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먼 길 떠난 마당에 다시금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수천이 할머니를 두드려 패는 패륜을 보고 요강 비우러 나갔던 엄마는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한마디 하게 됐고 말달리듯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조르 더 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후회로 밀려왔다. 문구멍으로 아버지가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세월이 지나도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청주법원에 친척이 있다는 수천이 아버진 교도소도 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생활을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도 그 사람과 술 마시고 모임을 하고 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난 그저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동네 이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난 일찍부터 고향을 뜨려고 했다. 아니 초등학교 때 작두로 아버지 검지손가락을 자른 게 밥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집을 떠나려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객지로 떠돈 내게 고향에 정착해 살라는 아버지, 정말 싫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순간 난 작두를 내리고 아버지 손가락이 핏기 없이 하얗게 뒹굴고 그걸 주워서 수건으로 손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아버진 아예 한마디를 더 잘라 봉합하고 돌아왔다.

어둠에선 상대도 나도 같이 잘 안 보인다. 아니 어둠에 오래 있던 사람이 밝은 데서 나온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본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감으면 어머니가 보인다. 눈감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눈감으면 갑자기 중학교 급우가 내 목을 졸라 끝없이 떨어지던 그 구렁텅이 같은 끝없이 긴 어두운 소가 보인다. 그리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왔던 길이 양탄자 깐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지난 길이라 가슴을 후벼 파는 정도인데 눈감으면 다가오는 미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다. 수학 시간 시작종이 울리듯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아직 저 앞에 있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전재민)

물방울

물방울 보석처럼
햇살에 빛나지만
햇빛에 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순간이 올 줄 모르고 행복했었네, 그 순간.

이슬로 서리로 샘물로 빗방울로 세상에 와서
똥물 빨래 물 다 받아주고 흐르다 보니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때론 잊고 지난 고향처럼
때론 잊고 살아온 어머니 품처럼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거칠고 날카로움조차 사라져 강돌이 되고
바닷가 모래가 될 때까지 하지 못한 말 가슴에 품고.

소 장수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오기로 한날
누렁이 소는 콩깍지로 당겨까지 많이 타서
영양죽 보다 맛나게 만들어준 소 죽을
냄새만 킁킁댈 뿐 전혀 먹지를 않았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입 언저리에 솥에서 김처럼 피어 오르고
크지만 맑은 눈동자에 내 그림자가 비추고
얼핏 얼핏 보이는 눈가의 눈물은.
 





물방울

물방울 보석처럼
햇살에 빛나지만
햇빛에 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순간이 올 줄 모르고 행복했었네, 그 순간.

이슬로 서리로 샘물로 빗방울로 세상에 와서
똥물 빨래 물 다 받아주고 흐르다 보니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때론 잊고 지난 고향처럼
때론 잊고 살아온 어머니 품처럼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거칠고 날카로움조차 사라져 강돌이 되고
바닷가 모래가 될 때까지 하지 못한 말 가슴에 품고.

소 장수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오기로 한날
누렁이 소는 콩깍지로 당겨까지 많이 타서
영양죽 보다 맛나게 만들어준 소 죽을
냄새만 킁킁댈 뿐 전혀 먹지를 않았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입 언저리에 솥에서 김처럼 피어 오르고
크지만 맑은 눈동자에 내 그림자가 비추고
얼핏 얼핏 보이는 눈가의 눈물은.
 







#작가의 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뿜으며 소리를 지르던 검둥이는 온몸을 뒤틀었다.

마루 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알 수 없는 울부짖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쳐다보는 일. 그날 오후 아버지는 양지바른 언덕에 검둥이를 묻어주고, 다음날 난 동네 형들에게서 검둥이 파내서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서, 내다본 안방엔 아버지의 한 쪽 팔을 문지방에 올려져 있고 아무도 안 보였다.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 팔을 꺾는다고 하면서 궁시렁 하고 있고, 아버지는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옆의 동생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지금 나가서 물어 뜯기라도 할 것이냐, 아님 그냥 숨죽이고 있을 거냐 생각 중이다.

내가 나가면 동생이 따라 나올 텐데, 누나와 엄마 어디 갔을까?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동네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민수 아빠가 와서 누나가 자기네 집에 있다고 하고, 엄마는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니 목이 빨갛다. 힘이 없어 보인다. 말도 잘 못한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와 이모부, 이모, 고모, 친척들이 보이고 엄마랑 아버진 시내 병원으로 갔다. 작은집에서 할머니도 왔다. 동생하고 난 할머니 소맷자락 붙들고 두레박 우물가까지 따라갔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몰라 유”

할머니의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이마로 뽀족 한 돌을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날, 손으로 이마를 막아선 누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밖에 볼 수 없는데 하늘엔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틈이 없이 까맣게 모여들어 까악까악을 외치던 그때보다, 집으로 와서 누운 내 구멍 난 이마에 된장을 가져다 붙인 엄마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서울 올라와 직장생활 몇 해 만에 다시 그 오래돼 누렇게 뜬 벽지 같은 기억이 나를 못살게 굴어 제기동 어디 쯤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그 일에 누이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실한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누이도 충격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헐값에 집을 넘기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쓰라린 내 유년 시절은 그 후도 잊어 버릴 만 하면 다시 찾아와 날 괴롭혔다.

이젠 잊혀 질 만도 한, 이젠 잊었으면 하는 그 기억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먼 길 떠난 마당에 다시금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수천이 할머니를 두드려 패는 패륜을 보고 요강 비우러 나갔던 엄마는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한마디 하게 됐고 말달리듯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조르 더 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후회로 밀려왔다. 문구멍으로 아버지가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세월이 지나도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청주법원에 친척이 있다는 수천이 아버진 교도소도 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생활을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도 그 사람과 술 마시고 모임을 하고 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난 그저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동네 이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난 일찍부터 고향을 뜨려고 했다. 아니 초등학교 때 작두로 아버지 검지손가락을 자른 게 밥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집을 떠나려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객지로 떠돈 내게 고향에 정착해 살라는 아버지, 정말 싫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순간 난 작두를 내리고 아버지 손가락이 핏기 없이 하얗게 뒹굴고 그걸 주워서 수건으로 손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아버진 아예 한마디를 더 잘라 봉합하고 돌아왔다.

어둠에선 상대도 나도 같이 잘 안 보인다. 아니 어둠에 오래 있던 사람이 밝은 데서 나온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본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감으면 어머니가 보인다. 눈감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눈감으면 갑자기 중학교 급우가 내 목을 졸라 끝없이 떨어지던 그 구렁텅이 같은 끝없이 긴 어두운 소가 보인다. 그리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왔던 길이 양탄자 깐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지난 길이라 가슴을 후벼 파는 정도인데 눈감으면 다가오는 미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다. 수학 시간 시작종이 울리듯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아직 저 앞에 있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전재민)

#작가의 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뿜으며 소리를 지르던 검둥이는 온몸을 뒤틀었다.

마루 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알 수 없는 울부짖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쳐다보는 일. 그날 오후 아버지는 양지바른 언덕에 검둥이를 묻어주고, 다음날 난 동네 형들에게서 검둥이 파내서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서, 내다본 안방엔 아버지의 한 쪽 팔을 문지방에 올려져 있고 아무도 안 보였다.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 팔을 꺾는다고 하면서 궁시렁 하고 있고, 아버지는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옆의 동생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지금 나가서 물어 뜯기라도 할 것이냐, 아님 그냥 숨죽이고 있을 거냐 생각 중이다.

내가 나가면 동생이 따라 나올 텐데, 누나와 엄마 어디 갔을까?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동네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민수 아빠가 와서 누나가 자기네 집에 있다고 하고, 엄마는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니 목이 빨갛다. 힘이 없어 보인다. 말도 잘 못한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와 이모부, 이모, 고모, 친척들이 보이고 엄마랑 아버진 시내 병원으로 갔다. 작은집에서 할머니도 왔다. 동생하고 난 할머니 소맷자락 붙들고 두레박 우물가까지 따라갔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몰라 유”

할머니의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이마로 뽀족 한 돌을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날, 손으로 이마를 막아선 누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밖에 볼 수 없는데 하늘엔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틈이 없이 까맣게 모여들어 까악까악을 외치던 그때보다, 집으로 와서 누운 내 구멍 난 이마에 된장을 가져다 붙인 엄마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물방울

물방울 보석처럼
햇살에 빛나지만
햇빛에 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순간이 올 줄 모르고 행복했었네, 그 순간.

이슬로 서리로 샘물로 빗방울로 세상에 와서
똥물 빨래 물 다 받아주고 흐르다 보니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때론 잊고 지난 고향처럼
때론 잊고 살아온 어머니 품처럼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거칠고 날카로움조차 사라져 강돌이 되고
바닷가 모래가 될 때까지 하지 못한 말 가슴에 품고.

소 장수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오기로 한날
누렁이 소는 콩깍지로 당겨까지 많이 타서
영양죽 보다 맛나게 만들어준 소 죽을
냄새만 킁킁댈 뿐 전혀 먹지를 않았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입 언저리에 솥에서 김처럼 피어 오르고
크지만 맑은 눈동자에 내 그림자가 비추고
얼핏 얼핏 보이는 눈가의 눈물은.
 







#작가의 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뿜으며 소리를 지르던 검둥이는 온몸을 뒤틀었다.

마루 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알 수 없는 울부짖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쳐다보는 일. 그날 오후 아버지는 양지바른 언덕에 검둥이를 묻어주고, 다음날 난 동네 형들에게서 검둥이 파내서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서, 내다본 안방엔 아버지의 한 쪽 팔을 문지방에 올려져 있고 아무도 안 보였다.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 팔을 꺾는다고 하면서 궁시렁 하고 있고, 아버지는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옆의 동생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지금 나가서 물어 뜯기라도 할 것이냐, 아님 그냥 숨죽이고 있을 거냐 생각 중이다.

내가 나가면 동생이 따라 나올 텐데, 누나와 엄마 어디 갔을까?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동네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민수 아빠가 와서 누나가 자기네 집에 있다고 하고, 엄마는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니 목이 빨갛다. 힘이 없어 보인다. 말도 잘 못한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와 이모부, 이모, 고모, 친척들이 보이고 엄마랑 아버진 시내 병원으로 갔다. 작은집에서 할머니도 왔다. 동생하고 난 할머니 소맷자락 붙들고 두레박 우물가까지 따라갔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몰라 유”

할머니의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이마로 뽀족 한 돌을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날, 손으로 이마를 막아선 누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밖에 볼 수 없는데 하늘엔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틈이 없이 까맣게 모여들어 까악까악을 외치던 그때보다, 집으로 와서 누운 내 구멍 난 이마에 된장을 가져다 붙인 엄마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서울 올라와 직장생활 몇 해 만에 다시 그 오래돼 누렇게 뜬 벽지 같은 기억이 나를 못살게 굴어 제기동 어디 쯤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그 일에 누이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실한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누이도 충격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헐값에 집을 넘기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쓰라린 내 유년 시절은 그 후도 잊어 버릴 만 하면 다시 찾아와 날 괴롭혔다.

이젠 잊혀 질 만도 한, 이젠 잊었으면 하는 그 기억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먼 길 떠난 마당에 다시금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수천이 할머니를 두드려 패는 패륜을 보고 요강 비우러 나갔던 엄마는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한마디 하게 됐고 말달리듯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조르 더 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후회로 밀려왔다. 문구멍으로 아버지가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세월이 지나도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청주법원에 친척이 있다는 수천이 아버진 교도소도 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생활을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도 그 사람과 술 마시고 모임을 하고 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난 그저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동네 이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난 일찍부터 고향을 뜨려고 했다. 아니 초등학교 때 작두로 아버지 검지손가락을 자른 게 밥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집을 떠나려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객지로 떠돈 내게 고향에 정착해 살라는 아버지, 정말 싫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순간 난 작두를 내리고 아버지 손가락이 핏기 없이 하얗게 뒹굴고 그걸 주워서 수건으로 손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아버진 아예 한마디를 더 잘라 봉합하고 돌아왔다.

어둠에선 상대도 나도 같이 잘 안 보인다. 아니 어둠에 오래 있던 사람이 밝은 데서 나온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본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감으면 어머니가 보인다. 눈감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눈감으면 갑자기 중학교 급우가 내 목을 졸라 끝없이 떨어지던 그 구렁텅이 같은 끝없이 긴 어두운 소가 보인다. 그리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왔던 길이 양탄자 깐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지난 길이라 가슴을 후벼 파는 정도인데 눈감으면 다가오는 미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다. 수학 시간 시작종이 울리듯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아직 저 앞에 있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전재민)

서울 올라와 직장생활 몇 해 만에 다시 그 오래돼 누렇게 뜬 벽지 같은 기억이 나를 못살게 굴어 제기동 어디 쯤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그 일에 누이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실한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누이도 충격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헐값에 집을 넘기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쓰라린 내 유년 시절은 그 후도 잊어 버릴 만 하면 다시 찾아와 날 괴롭혔다.

이젠 잊혀 질 만도 한, 이젠 잊었으면 하는 그 기억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먼 길 떠난 마당에 다시금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수천이 할머니를 두드려 패는 패륜을 보고 요강 비우러 나갔던 엄마는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한마디 하게 됐고 말달리듯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조르 더 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후회로 밀려왔다. 문구멍으로 아버지가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세월이 지나도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청주법원에 친척이 있다는 수천이 아버진 교도소도 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생활을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도 그 사람과 술 마시고 모임을 하고 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난 그저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동네 이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난 일찍부터 고향을 뜨려고 했다. 아니 초등학교 때 작두로 아버지 검지손가락을 자른 게 밥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집을 떠나려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객지로 떠돈 내게 고향에 정착해 살라는 아버지, 정말 싫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순간 난 작두를 내리고 아버지 손가락이 핏기 없이 하얗게 뒹굴고 그걸 주워서 수건으로 손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아버진 아예 한마디를 더 잘라 봉합하고 돌아왔다.

어둠에선 상대도 나도 같이 잘 안 보인다. 아니 어둠에 오래 있던 사람이 밝은 데서 나온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본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감으면 어머니가 보인다. 눈감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눈감으면 갑자기 중학교 급우가 내 목을 졸라 끝없이 떨어지던 그 구렁텅이 같은 끝없이 긴 어두운 소가 보인다. 그리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왔던 길이 양탄자 깐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지난 길이라 가슴을 후벼 파는 정도인데 눈감으면 다가오는 미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다. 수학 시간 시작종이 울리듯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아직 저 앞에 있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전재민)





물방울

물방울 보석처럼
햇살에 빛나지만
햇빛에 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순간이 올 줄 모르고 행복했었네, 그 순간.

이슬로 서리로 샘물로 빗방울로 세상에 와서
똥물 빨래 물 다 받아주고 흐르다 보니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때론 잊고 지난 고향처럼
때론 잊고 살아온 어머니 품처럼

바위가 깨져 조약돌이 되고 거칠고 날카로움조차 사라져 강돌이 되고
바닷가 모래가 될 때까지 하지 못한 말 가슴에 품고.

소 장수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오기로 한날
누렁이 소는 콩깍지로 당겨까지 많이 타서
영양죽 보다 맛나게 만들어준 소 죽을
냄새만 킁킁댈 뿐 전혀 먹지를 않았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입김이 숨을 쉴 때마다
입 언저리에 솥에서 김처럼 피어 오르고
크지만 맑은 눈동자에 내 그림자가 비추고
얼핏 얼핏 보이는 눈가의 눈물은.
 







#작가의 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뿜으며 소리를 지르던 검둥이는 온몸을 뒤틀었다.

마루 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알 수 없는 울부짖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쳐다보는 일. 그날 오후 아버지는 양지바른 언덕에 검둥이를 묻어주고, 다음날 난 동네 형들에게서 검둥이 파내서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서, 내다본 안방엔 아버지의 한 쪽 팔을 문지방에 올려져 있고 아무도 안 보였다.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 팔을 꺾는다고 하면서 궁시렁 하고 있고, 아버지는 반항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옆의 동생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지금 나가서 물어 뜯기라도 할 것이냐, 아님 그냥 숨죽이고 있을 거냐 생각 중이다.

내가 나가면 동생이 따라 나올 텐데, 누나와 엄마 어디 갔을까?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동네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민수 아빠가 와서 누나가 자기네 집에 있다고 하고, 엄마는 이웃집에 있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니 목이 빨갛다. 힘이 없어 보인다. 말도 잘 못한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와 이모부, 이모, 고모, 친척들이 보이고 엄마랑 아버진 시내 병원으로 갔다. 작은집에서 할머니도 왔다. 동생하고 난 할머니 소맷자락 붙들고 두레박 우물가까지 따라갔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몰라 유”

할머니의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이마로 뽀족 한 돌을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날, 손으로 이마를 막아선 누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밖에 볼 수 없는데 하늘엔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틈이 없이 까맣게 모여들어 까악까악을 외치던 그때보다, 집으로 와서 누운 내 구멍 난 이마에 된장을 가져다 붙인 엄마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 “우리 애들은 안 그런대, 얘들은 왜?”







서울 올라와 직장생활 몇 해 만에 다시 그 오래돼 누렇게 뜬 벽지 같은 기억이 나를 못살게 굴어 제기동 어디 쯤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그 일에 누이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실한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누이도 충격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헐값에 집을 넘기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쓰라린 내 유년 시절은 그 후도 잊어 버릴 만 하면 다시 찾아와 날 괴롭혔다.

이젠 잊혀 질 만도 한, 이젠 잊었으면 하는 그 기억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먼 길 떠난 마당에 다시금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수천이 할머니를 두드려 패는 패륜을 보고 요강 비우러 나갔던 엄마는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한마디 하게 됐고 말달리듯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조르 더 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후회로 밀려왔다. 문구멍으로 아버지가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에 세월이 지나도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청주법원에 친척이 있다는 수천이 아버진 교도소도 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생활을 했고, 몇 년이 흐른 후 아버지도 그 사람과 술 마시고 모임을 하고 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난 그저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동네 이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난 일찍부터 고향을 뜨려고 했다. 아니 초등학교 때 작두로 아버지 검지손가락을 자른 게 밥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집을 떠나려 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객지로 떠돈 내게 고향에 정착해 살라는 아버지, 정말 싫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순간 난 작두를 내리고 아버지 손가락이 핏기 없이 하얗게 뒹굴고 그걸 주워서 수건으로 손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아버진 아예 한마디를 더 잘라 봉합하고 돌아왔다.

어둠에선 상대도 나도 같이 잘 안 보인다. 아니 어둠에 오래 있던 사람이 밝은 데서 나온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본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감으면 어머니가 보인다. 눈감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눈감으면 갑자기 중학교 급우가 내 목을 졸라 끝없이 떨어지던 그 구렁텅이 같은 끝없이 긴 어두운 소가 보인다. 그리고 불안하다. 이제까지 왔던 길이 양탄자 깐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지난 길이라 가슴을 후벼 파는 정도인데 눈감으면 다가오는 미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다. 수학 시간 시작종이 울리듯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는 아직 저 앞에 있다.”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 (전재민)

비가 나뭇잎에 보석처럼 박혔다. 하늘에 별들이 땅으로 내려온 듯하다. 풀잎마다 이슬이 맺힌 것이 보석처럼 빛난다.

날마다 외출할 때마다 먹을 물 한 병을 들고 나간다. 목마름은 배고픈 고통보다 참기 힘들다. 세상은 목마름을 안고 살아 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사막에서 가뭄이 든 지역에서. 목마름은 자연적인 생리현상이다. 목마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지구별에 살고 있다. 세상은 점점 혼자서는 삶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집도 허가를 받고 도면대로 지으려면 혼자는 힘든 일이다. 새들처럼 나뭇가지를 모아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아 가는 허가된 집은 전기 전문가, 목수, 타일 전문가, 페인트 전문가 등 여러 가지 기술이 모여야 가능하다. 화장실은 환경문제를 더해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어야 한다. 현대의 화장실은 많은 문제가 있다. 물로 사람의 인분을 씻어 낸다는 것은 그만큼 지구의 물이 오염된다는 것을 말한다. 정화한다고 해도 말이다. 물은 세상을 돌고 돈다. 수증기가 되어 올라 갔다가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고, 우리는 그 물을 마시고 빨래하고, 씻고, 화장실 정화용으로 사용한다. 인도의 갠지스강의 물은 성수라고 해서 힌두교도들은 그 물로 씻고, 화장(火葬)하고, 빨래하고, 마시기도 한다. 우리는 가축 분뇨 때문에 개울물이 오염되고 지하수가 오염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람의 분뇨도 심각하게 강물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다. 세계는 지금처럼 수세식 화장실을 많이 사용한 적이 없다. 강물은 점점 더 오염되는 중이다.

어릴 적 논이나 밭 가장자리에 샘물이 있으면 돌 두 개를 놓고 그곳에 무릎을 대고 엎드려 샘물을 마셨다. 샘물엔 빨갛고 작은 지렁이도 살고 물 위를 뛰어다니는 곤충은 물론 청개구리도 보이던 시절이었지만 그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믿을 수 있던 들판이던 지하수 든 물은 우리가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물이었다. 두레박으로 샘물을 퍼서 벌컥 벌컥 들이켜던 그 시절엔 병에 든 생수는 없었다. 비가 내려도 그냥 맞고, 비를 맞는 것도 기분을 좋게 하는 한 수단이었다. 요즘 누구도 비를 날 것으로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산성비가 내린다면서, 비를 맞으면 대머리가 된다면서 말이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생수 건, 부뚜막에 올리는 칠성님 전에 올리는 생수 건, 제사상에 올리는 생수 건, 우리는 생수 한 잔이 마음을 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수로 이마를 씻으면 세례와 축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물은 성스러움의 대표였다. 언제부터인가 물은 더럽고 썩는 물로 변하고 있다. 세상의 지도엔 물이 넘쳐나던 강물이 말라 물이 하나도 흐르지 않는 강물이 되고, 바다라는 이름을 가졌던 지역도 물이 사라져 모래바람만 날리는 곳으로 변하기도 한다. 홍수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많은 집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차들도 떠내려 가는 모습을 본다.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도 해마다 우린 태풍과 허리케인으로 많은 생명을 잃고 재산을 잃는다. 산불로 나무가 새카맣게 타서 숲의 흔적만 남기도 한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졌다.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집터를 잡을 때 근처에 물이 있는지 알아 보고는 했다. 농사지을 때도 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곳에 없는 게 문제다. 어느 지역에 어느 시기엔 넘쳐나고 어느 지역엔 없는 것이 문제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일은 아주 커다란 보시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은 곧 생명이다. 물조차 사고파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마음을 나누는 물 한 잔의 나눔도 쉽게 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음식 재료가 투자의 대상으로 변하고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기본조차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 집이 없어 독서실, 고시원, 반지하, 옥탑방에서 살면서 “밥은 먹고 사니”라는 인사말처럼, 밥도 먹지 못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수없이 많은 젊은 영혼이 대도시에 넘쳐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굶어 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다. 배가 고프면 지식도 기술도 종교도 다 소용이 없다. 밥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실 물도 없는데 수세식 화장실은 언감생심인 곳도 많다. 몽골 유목민의 삶에서는 양들의 똥이 좋은 땔감이 된다. 햇빛과 지열의 차로 물을 만들어 먹는 생존의 법도 있듯이 인류는 지구에 물이 있어서 생존했듯이 다른 별을 찾을 때도 물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과 먹을 것 그리고 추위가 심하지 않고 더위가 심하지 않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화학약품과 방사능 등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종교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써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사람이 있어야 종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람이 살아 가는 것과 별개의 지역이나 별개의 단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와 국가는 사람이 살아 가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 미친 듯이 집값이 올라가면 돈을 버는 사람도 있겠지만 희망을 잃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람도 많다. 종교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감싸고 보살피는 일이지 돈을 많이 시주하고 기부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시주를 못 하고 헌금을 내지 못하면 죄인 취급하는 상황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돌고 돌듯이 돈도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게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가난한 집에도 아기들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세상이 될 수 있다. 부동산 값의 폭등은 댐으로 물을 가두는 것과 같다. 그 결과 혼자서 먹고 사는 것도 해결 못 하는데 어찌 결혼하고 아기를 낳을 생각을 할 것인가? 그 길의 끝은 소멸이다. 세계의 대도시에 사람들이 없어지면 고층아파트는 그대로 있을까? 농촌의 농가가 사람이 살지 않으면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집을 부수듯이 그렇게 자연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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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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