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 운동 실패하자 ‘조선선종’ 종명 사용해 계승
임제종 운동 실패하자 ‘조선선종’ 종명 사용해 계승
  • 선학원백년사간행위원회
  • 승인 2022.08.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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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제종을 계승한 조선 선종

일제의 강압으로 임제종은 더 이상 활동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주요 인물들은 이미 세웠던 포교당과 다른 지역에 세울 포교당에 ‘조선선종(朝鮮禪宗)’이란 종명을 사용하며 임제종을 계승하였다. 선종이라 이름한 것은 임제종과 같이 조선 불교의 전통이 선종에 있다는 인식이었다.

임제종이 1912년 5월 27일 설립한 경성포교당은 1913년 5월까지 중앙포교당이라 하였다.56 이곳은 1913년 8월부터 ‘조선선종포교당’으로 불렸다.57 1914년 8월에서 9월 무렵 ‘조선선교양종중앙포교당’으로 표기되기도 하였으나, 1914년 11월부터 1917년 4월까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불렸다.58

용성 스님.
용성 스님.

1912년 이곳에 개교사장으로 부임한 사람은 용성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보니 경성 전역에 예배당 종소리만 가득하고 불교의 사찰은 각황사 외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포교하여 신도가 3000여 명에 이르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시중에 참선이란 단어가 익숙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분위기를 쇄신하였다. 이때의 의지를 용성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마치 수원(水源)이 완실하여 도도히 흐르는 긴 강이 만 리에 파도치듯이 우리 종교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선종 본사는 청정한 산간에 세워 도인을 길러내고 선종 포교당은 각 도시 가운데 지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59

용성은 이곳에서 《귀원정종(歸源正宗)》과 《팔상록(八相錄)》 두 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불교에 입문하는 불자들을 위한 서적이 없었을 때라 두 책은 불교계 인사들과 일반신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60 그리고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5시에 일반신도를 대상으로 경전을 강습하였다. 청강생이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61 또한 이곳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불교 학생들이 결성한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의 활동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매주 일요일 회원들을 모아 불교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62

이곳에서 포교하던 한용운은 불교 단체를 조성하여 포교의 영역을 확장하려 하였다. 제일 먼저 시도된 것이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 설립이었다. 한용운은 문탁(文鐸), 김호응(金浩應) 등을 비롯한 명사들과 함께 설립을 주도하였다. 조선불교회는 임제종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30본산 속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불교 활동을 추진하는 모임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북부경찰서 고등계로부터 조사를 받으면서 무위로 끝났다.63

한용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불교동맹회(佛敎同盟會) 조직을 시도하였다. 많은 불교인들의 동참을 받아 동소문 밖 청수동에서 은밀하게 협의하던 일이 누설되었다. 이로 인해 북부경찰서 고등계로부터 주의를 받으면서 무위로 끝났다.64

조선 선종은 교세 확장을 위해 지방 포교당 건설도 추진하였다. 기존 임제종이 세웠던 포교당 이외에 가장 빠른 곳은 호남이었다. 1912년 4월 귀암사, 백양사 및 여러 사찰들은 임제종의 진리도덕을 일반에게 보급할 목적으로 호남포교당 건립을 계획하였다. 귀암사 승려 백용규, 불암사 승려 송진섭의 후원65으로 1916년 6월 전주군 전주면 청수동에 조선 선종 호남 포교소(朝鮮禪宗湖南布敎所)가 세워졌다.66

그해 12월부터 호남포교소에서 활동한 사람은 김종래였다.67 그는 임제종 설립 초기부터 활동한 인물이었다. 이곳에서 주변 유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불교 교리에 대한 강독과 설법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었다.68 그 결과 1915년 10월 무렵에는 신도수가 1만 13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를 도와 포교에 힘쓴 독지가는 이성구, 김선기, 최창훈, 강동수 등이었다. 여세를 몰아 원고산군 운동면 신덕리에 ‘호남포교당출장소’까지 설립하고 1915년 음력 9월 15일에 개교식을 하였다.69

이런 활동으로 교세가 커진 조선선종호남포교소는 1915년 10월 명칭을 조선선종호남중앙포교당으로 변경하였다.70 이곳의 위치는 전주시 외진 곳에 치우쳐 있었고, 급히 마련하느라 포교당이 협소하였다. 신도수가 급증하면서 불편함이 가증하자 이전을 고민하였다. 그러자 전주에 사는 박영근이 1916년 5월경 동문 밖 발우봉 아래에 있는 땅 400여 평을 기증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71

교세가 발전한 조선선종호남중앙포교당에 신도가 4000~5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김종래 화상은 1918년 옥구에 출장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곳은 신도가 많아 김종래가 1914년부터 옥구군 은적사에서 포교하면서 교세를 키워온 곳이다.72 그런 여세를 몰아 1918년 6월 옥구출장소를 설립하고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3일간 계속된 법요식에 김종래의 설법과 이강헌, 조동준 두 사람의 찬조 강연이 있었다. 참여한 청중이 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73

대구 역시 조선 선종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구포교당은 임제종 활동 당시 1912년 6월 범어사와 은해사가 함께 대구 남문 밖에 세웠다.74 임제종 활동이 중지되자 곧바로 조선선종대구포교소로 개칭되었다. 이곳 활동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총무 백석기였다. 그는 포교당을 세울 때 거액의 금액을 출연하였으며, 몇 년간 총무 일에 전념하면서 많은 성과를 내었다. 자비를 들여 불교에 관한 환등(幻燈)을 준비하여 경북 각지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에서 설행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75

백석기는 1920년 6월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설립되자 곧바로 대구조선불교청년회를 설립하고 지회로 가입하였다. 발기대회가 대구 선종경북포교소에서 열렸다는 것으로 볼 때 그렇게도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76 조선선종대구포교소는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한 결과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고 열성을 다해 교육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77

영남 지역에 조선 선종 포교당이 건립된 곳은 통영이었다. 이곳에서는 야학교를 설립하여 어려운 가정의 자제를 무료로 교육하였다. 입학자가 80여 명에 이르렀고 교장 겸 교무 박진해, 교사 김창흔, 박세홍 등 3인의 노력이 컸다. 그 외에도 군수 전태흥이 찬성장(贊成長)을 맡았고, 통영 보통학교장과 훈도 그리고 군내 유지들이 찬성원(贊成員)이 되어 협력하였다.78

이런 조선 선종의 활동은 1918년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징적인 표현으로 쓰였을 뿐 처음과 같이 조직적이고 활성화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 역시 총독부의 통제 때문이다. 일제는 1915년 8월 16일부터 총독부령 제83호의 포교 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였다. 전문 19조의 이 법령은 조선에 있는 신도․ 불교․ 기독교 등 주요 종교 이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정한 종교 역시 포교용 건물과 포교종사자는 본인 거주지와 포교소가 있는 소재지의 관할 부군도청(府郡道廳)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세세한 문제까지 감독하였다.79 이와 같은 행정체계를 통해 조선 내 주요 종교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면서 조선 선종의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주] -----
56) <매일신보> 1913. 05. 13.
57) <매일신보> 1913. 08. 01.
58) <매일신보> 1917. 04. 29.
59) 용성, <만일참선결사회 창립기> https://kabc._dongguk.edu/content/view?itemId=ABC_BC&cate=upSeoji&depth=4&upPath=A&dataId=ABC_BC_Y0001_0001_R_001%5E301R
60) <매일신보> 1913. 08. 01.
61) <매일신보> 1913. 10. 01.
62) <매일신보> 1914. 07. 28.
63) <매일신보> 1914. 08. 15.
64) <매일신보> 1914. 09. 05.
65) <매일신보> 1912. 04. 23.
66) <매일신보> 1916. 06. 09.
67) <매일신보> 1911. 02. 02. 김종래는 1911년 2월 초 전남 사찰의 대표들이 증심사에서 특별총회를 열었을 때 참석한 15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때 임제 종문을 일층 확장하고 호남 사찰에 들어오는 학인들을 권면하여 교학을 쇄신하고 신교 자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68) <매일신보> 1912. 12. 04.
69) <매일신보> 1915. 10. 13.
70) <매일신보> 1915. 10. 28.
71) <매일신보> 1916. 06. 09.
72) <매일신보> 1914. 08. 13.
73) <매일신보> 1918. 06. 04.
74) <매일신보> 1912. 06. 06.
75) <매일신보> 1914. 01. 17.
76) 김경집,(2019), <일제하 조선불교청년회 지회결성과 활동>, 《불교학보》 88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209쪽.
77) <매일신보> 1914. 05. 24.
78) <매일신보> 1914. 04. 18.
79) 정광호(1994), 《근대 한일 불교 관계사 연구》, 인하대출판부,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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