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건봉일로(乾峰一路)
신무문관: 건봉일로(乾峰一路)
  • 박영재 명예교수(서강대)
  • 승인 2022.10.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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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58.

성찰배경: 이번 글에서는 그 순서에 따라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의 법을 이은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 선사와 사형사제 사이로, <무문관(無門關)>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48칙의 주인공(主人公)인 월주건봉(越州乾峰, ?-?) 선사와 법계로 조카에 해당하는 조연(助演)인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에 관해 살피고자 합니다. 물론 동시대를 호흡하며 건봉 선사를 흠모했다고 여겨지는 운문 선사는 <무문관>에서 다른 4개의 공안의 주인공이기도 하기 때문에, 운문 선사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월주 선사의 가풍

월주 선사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별로 없으나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 <경덕전등록> 제17권을 통해 월주 선사의 가풍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초불월조(超佛越祖)

“한 승려가 월주 선사께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말씀입니까?[如何是超佛越祖之談]’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선사께서 ‘내가 먼저 그대에게 묻겠다.’라고 응대하셨다. 이에 이 승려가 ‘선사께서는 질문을 거두(시고 먼저 제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월주 선사께서 ‘(자네의 수준을 가늠할) 나의 질문조차 받아넘길 자신이 없으면서,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고준高峻한) 말씀은 물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다그치셨다.”

한편 ‘초불월조’란 선어(禪語)는 운문 선사에 의해 공안으로 두루 활용되었는데, 대표적인 보기로 <운문록(雲門錄)>에 기록되어 있는 두 사례를 다루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례 1: 운문의 호떡[餬餅]
“운문 선사께서 상당(上堂)해 ‘말 한마디[一言]라도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면 모든 차별이 평등해지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미진(微塵)까지도 다 포괄(包括)해 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화방편에 불과한 말일 뿐이다. 만일 수행자[衲僧]라면 어떻게 계합(契合)해야겠는가? 
그런데 만약 이에 대해 불조(佛祖)의 뜻을 머리로만 헤아리려 한다면, 조계(曹溪)의 향상일로(向上一路)는 땅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 자리에 한마디 이를 사람은 있는가? 한마디 이를 수 있다면 내 앞으로 나와 제시해 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 한 승려가 ‘(저는 불조의 뜻은 헤아리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입니까?’하고 여쭈었다. 이에 운문 선사께서 ‘호떡[餬餅]이니라.’라고 응대하셨다. 그러자 이 승려가 앞으로 나아가 ‘그것이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와 무슨 상관[交涉]이 있습니까?’ 이에 운문 선사께서 ‘잘 참작(參酌)해 보라. 분명히 상관이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선사께서는 곧 ‘그대는 알았다고도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조사의 뜻을 말하면 그것을 듣고는 곧바로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부처라 부르며 무엇을 조사라고 부르기에 곧바로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물으려고 하는가?’라고 다그치셨다.”

종달 제창: 종달 선사께서는 그의 저서 <벽암록(碧巖錄)> 제77칙에서 위 문답의 핵심인 ‘초불월조’에 관해 “어떤 승려가 운문 스님에게 부처 냄새가 나는 말도, 조사 냄새가 나는 말에도 진절머리가 나고 있습니다. 부디 불조를 초월한 한마디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여쭙자, 이에 운문 스님께서 ‘호떡 한 개 어때. (내 말에도 불조의 냄새가 나는가?)’라고 응대하셨다.”라고 친절하게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창하고 있습니다. 

“생활난에 쫓겨 천하의 선사(禪寺)들을 돌며 신세를 지고 다니는 주제에, ‘초불월조’란 말은 훌륭하나, 실은 배가 고픈 말이다. 그의 언행에 엉뚱한 데가 훤히 보이는데, 그대들의 눈에도 이 엉뚱한 짓이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운문 스님은 과연 위대하다. 그 엉뚱한 바를 꿰뚫고, 호떡 한 개로 그 틈새에 막아 넣었는데, 호떡이 그 틈새에 가만히 있지 않는구나. 자! 이 호떡에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선승들이 달다느니 쓰다느니, 대의론(大議論)을 퍼뜨리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승려들이다.
사실 이 본칙은 선기(禪機)에 원숙한 운문 스님과 이론 논쟁을 능사(能事)로 하는 한 무명승과의 대담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씨름도 아무것도 아니다. ‘호떡’이나 ‘간시궐(乾屎橛)’이나 마찬가지 얘기다. 운문 스님이 어느 때는 ‘초불월조’에 대해 ‘포주(蒲州)에는 마황(麻黃)이, 익주(益州)에는 부자(附子)가 유명하지.’라고도 대답했다.”

군더더기: 냉정히 살펴보면 머리로만 따져 진리를 알려고 하는 의학도(疑學徒)들이 천하를 행각(行脚)하면서 처음에는 ‘부처’니 ‘조사’니 하는 분별을 일으키며 총림(叢林)을 시끄럽게 했었는데, 그후 시들해지자 한 승려와 건봉 선사의 문답에서 유래한, 좀 더 자극적인 ‘초불월조’ 카드를 꺼내 들고 운문 선사께 참문했다가 ‘호떡’에 말문이 막혔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부처’와 ‘조사’도 제대로 모르는 놈 취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운문 선사의 ‘호떡’에 어떻게 응대하시겠습니까?

사례 2: 공양 시간의 문답
어느 날 운문 선사께서 공양(供養)할 때 (정중히 나이 든) 한 승려에게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부처와 조사를 초월할 만한 한마디가 있습니까?’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이 승려가 ‘있습니다.[有]’라고 아뢰었다. 

이에 운문 선사께서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어디로 갔습니까?’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 이 승려가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있었다. 이에 운문 선사께서 “신라국(新羅國)으로 갔습니다.”라고 대신 말씀하셨다. 또 이어 운문 선사께서 “화상께서는 제가 진실하지 못할까? 하고 염려를 하시는군요.[和尚恐某甲不實]”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운문 선사께서 “밥 먹을 때 그런 말씀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앞의 대답에 보충 설명을 하셨다. 

군더더기: 사실 우리 모두 있는 그 자리에서 순간순간 상속(相續)하며 함께 더불어 하고자 하는 가치 있는 일에 온몸을 던져 몰두할 수 있게 된다면, ‘초불월조의 경지를 드러내는 한 마디가 있다[有]느니 없다[無]느니’를 포함해 일체의 분별에서 늘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 신무문관: 건봉일로(乾峰一路)

본칙(本則): [제1관문], 건봉 선사께 어느 때 한 승려가 “시방의 부처님들께서 오직 이 ‘유일한 길[一路]’을 통해 열반문[無門關]으로 들어가셨는데, 도대체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일러 주십시오.”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건봉 선사께서 주장자를 치켜들어 허공에 가로로 한 획을 그으시고 “이 속에 있느니라!”라고 응답하셨다.

후에 한 승려가 운문 선사께 이 문답을 거론(擧論)하며 가르침을 청했다. [제2관문], 그러자 운문 선사께서 부채를 치켜드시고는 “이 부채가 갑자기 33천으로 뛰어올라 제석천왕의 콧구멍을 찌르는구나.”라고 응답하셨다. [제3관문], 이어 곧 “이 부채로 동해의 잉어[鯉魚]를 한 대 후려치니 물동이를 기울이는 것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구나.”라고 거듭 친절을 베푸셨다.

평창(評唱): 무문 선사께서 “한 스승님[건봉]은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흙먼지를 날리고, 또 다른 스승님[운문]은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서서 흰 물결을 일으켜 하늘 가득 넘쳐흐르게 하네. 두 스승님께서 진리를 깊이 통찰하고 이를 함께 더불어 지혜롭게 나누며, 서로 손을 맞잡고 선종(禪宗)의 종지(宗旨)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시는구나. 그런데 이는 마치 두 마리의 낙타[馳子]가 서로 마주 보고 빠르게 치달려 부딪치는 것과 같아서, 세상에 참으로 이 두 분 스승님들께 정면에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나 바른 안목으로 꿰뚫어 보면, 역시 두 스승님들 모두 아직 열반문으로 통하는 그 길을 모르고 있구나!”라고 제창하셨다.

송(頌):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발을 내딛기 전에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고/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진리를 설해 마쳤네./ 설사 마치 바둑을 둘 때처럼 착착 묘수(妙手)를 두어 기선을 제압했다고 할지라도 (즉 아무리 막힘없이 즉문즉답에 능할지라도)/ 모름지기 자만하지 말고 다시 ‘향상의 묘수[向上竅]’가 있음을 알라! [未舉步時先已到 未動舌時先說了. 直饒著著在機先 更須知有向上竅.]

군더더기: 무문혜개 선사께서 자서(自序)에서 <무문관> 48칙을 순서 없이 엮었다고는 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맨 처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종문의 유일한 관문이라고 제창한 제1칙 ‘조주무자(趙州無字)’를 통해 깊은 통찰 체험의 중요성을 일깨우셨습니다. 그리고 제48칙의 게송을 통해 앞의 47칙을 포함해 제1관문과 제2관문 및 제3관문까지 막힘없이 투과했다고 하더라도 향상일로(向上一路)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것을 다그치고 있는데, 이는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鄽垂手)’와 맞닿아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북송 시대의 곽암사원(廓庵師遠) 선사는 수행자들이 단지 수행과정에 불과한 화두 타파에만 몰두하며 일생을 덧없이 보내는 모습을 보고 ‘참나’를 ‘잃어버린 소’에 비유해 소를 찾는 과정을 ‘십우도(十牛圖)’로 그려 이를 일깨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지막 두 단계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제9단계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반본환원(返本還源)’과 제10단계 ‘저자거리에 들어가 더불어 함께 함’을 뜻하는 ‘입전수수(入鄽垂手)’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수행자라면 필연적으로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 즉 1-9단계까지의 통찰(洞察) 체험을 바탕으로 10단계인 나눔[布施] 실천적 삶을 저절로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들 단계는 편의상 나눈 것일 뿐, 비록 아직 ‘나’라는 아집(我執)이 남아 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단계에서조차 누구나 형편 되는대로 유형·무형의 나눔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향상일로’를 잃지 않고 열반문을 향해 곧장 나아갈 수 있겠지요. 

덧붙여 극단적인 보기로 1단계, 아니 1단계에 속한다고도 보기 어려운 하루하루를 구걸해 겨우 연명하는 거지[露宿人]조차 ‘통보불이’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가르침을 펼친, <소리 없는 소리>(시월, 2003년)에 수록된 서암(西庵, 1917-2003) 선사의 다음과 같은 멋진 일화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서암 선사께서 탁발하러 가셨는데, 마을 집으로 향하지 않으시고 마을 어귀 거지촌에 이르시었다. 짚으로 엮은 움막문을 들어 올리고는 요령을 흔들며 염불을 하시는 것이었다. 집안에 있던 거지가 깜짝 놀라서 말문을 열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염불을 마친 스님은 빈 발우를 내밀며 ‘적선(積善)하시오.’라고 하였다. 당황한 거지는 ‘우린 줄 것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 먹다 남은 주먹밥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서암 선사는 ‘그거라도 좋으니 적선하시오.’라고 요청하셨다. 그러자 거지는 한쪽 구석에서 작은 주먹밥 뭉치를 스님께 내밀었다. 스님이 그것을 걸망에 넣고 돌아서는 순간, 그 거지의 얼굴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뒷날 스님께서 회상하시면서 ‘그런 행복한 얼굴을 그 전후로 보기 힘들었다.’고 회상하셨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 차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편저에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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