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1.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1.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2.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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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반을 넘긴 동생이
한국에서 카톡을 보냈다

형,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묘지가 지척인데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엄마한테 ‘엄마 나왔어’ 하라고 말했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없는 엄마가 보고 싶다
 

#작가의 변
잊고 살던 수없이 많은 날, 어찌 잊고 살았을까? 어제는 불현듯 외할머니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에 무릎뼈만 크게 보이던 그 다리를 주물러 주던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얼굴 없는 얼굴처럼 어둠이 뭉친 기억처럼 느낌만 기억 사슬을 끊고 툭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둘째 아들이 맘 쓰게 한다던 동생도 이젠 희미하게 지워진 뭉개진 기억처럼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딸아이의 아파트를 페인트칠해야 한다고 해서 페인트 사러 나갔다가 공항 맞은편 트레일을 잠시 쩔뚝거리며 지팡이 짚고 걷다가 추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날은 추워야 정상이지만 막상 추워지니 싫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 앞에서 아들일 뿐인 존재가 사람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구순의 엄마와 칠순 아들의 이야기도 자주 본다. 어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아들을 걱정하는 말만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엄마에게 그런 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홀로 몸을 지키기도 바쁘고 혼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아들을 향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이들은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보채고 울 경우가 많다. 그럼 잠결에 아이를 달래고 잠을 재우는 것도 어머니의 모성은 아주 능숙하게 그렇게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피와 살을 뽑아서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어머니들에게서 늘 함께 따라다니는 뼛속이 텅텅 비어버린 골다공증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부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도 결혼해서 애를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야 ‘우리 엄마도 나를 낳아서 이렇게 길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어른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른 취급을 하지 않았던 그 옛날 어른들의 지혜가 부모가 되어 보고 나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것은 실제 그와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지난 9월 엘리베이터 사고 후에 산재 보험을 신청하고 빨리 치료하고 ‘크리스마스 이전엔 회사에 복귀하겠지’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직도 산재 보험은 보류인 상태로 보험금이 2달 이상 나오지 않으니 생활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치료를 할 수 없어 더욱 힘들다. CT, MRI 등 각종 검사장비를 동원해서 검사했지만, 전문의는 뇌경색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정의는 처음 전문의가 아무런 이상 증상을 찾지 못했다고 했을 때 ‘언제 회사로 돌아가 일하겠냐’고 물었다. 해서 나는 ‘전문의가 이상 소견을 발견 못했다고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인데 어떻게 일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가정의는 물리 치료를 해보라고 했는데 물리 치료하러 갔더니 물리 치료에서 도와줄 정도가 아니고 한방의 침술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증세가 완화된 후에 와야 자기가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의원을 찾았지만 믿을 만한 한의원을 찾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캐나다에서 배운 한의원보다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의를 하던 분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주로 다니던 한의원이 한국 방문하러 간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의사가 12월 중순에나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보험금이 안 나와서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상해 보험이 보류 상태라 물리 치료도 한방 치료도 내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보험이 결정되면 영수증으로 청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다.

어제도 상해 보험에 전화했더니 콜센터에서는 모른다면서 담당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 담당자가 전화를 받고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어 전화를 받은 것인 줄 모르다가 내가 누구고 보험 보류가 언제 결정 나는지 알고 싶어 전화했더니 다짜고짜 ‘왜 여기로 전화했냐’고 했다. 콜센터에서 이 전화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 했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기로 전화하지 마라 콜센터로 전화해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슬러 호텔 다니는 지인이 얼마 전에 허리 때문에 상해 보험 받은 적이 있어 이야길 했더니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따지라고 했다. 그래서 콜센터에 다시 전화해서 전화하라고 준 전화로 전화했더니 화내고 무례하게 답하면서 콜센터로 전화하라고 하더라. 매니저를 바꿔달라 했는데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그런 일이 있어 유감이다. 자기가 리포트를 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혹시 불리하게 결정될 수도 있으니 매니저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빨리 치료받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데 현재 상태로는 올해 안에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회사 인사부 슈퍼바이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메일로 보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보냈는데, 그런 일은 상해 보험하고 상담해라, 너는 지금 상해 보험으로 회사에서는 일하고 있지 않으니 회사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투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상태로는 나아도 회사에 돌아가서 노동 강도가 심한 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내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마장이 안 오는데 설렁설렁 기도하니 하는 일마다 안 풀린다고 나의 기도 탓을 한다. 사고를 당한 것도 보험 신청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기도를 잘못해서라니,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부탁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마음의 짐이 포개어져 아버지의 지게에 짐처럼 높이 쌓은 짐이 아버지의 마음을 비워 치매에 걸리고 다리를 붓게 한 것처럼 나 또한 길을 걸을 때마다 지팡이를 짚어도 한쪽으로 쏠리는 걸음걸이처럼 흔들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을 보고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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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반을 넘긴 동생이
한국에서 카톡을 보냈다

형,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묘지가 지척인데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엄마한테 ‘엄마 나왔어’ 하라고 말했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없는 엄마가 보고 싶다
 

#작가의 변
잊고 살던 수없이 많은 날, 어찌 잊고 살았을까? 어제는 불현듯 외할머니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에 무릎뼈만 크게 보이던 그 다리를 주물러 주던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얼굴 없는 얼굴처럼 어둠이 뭉친 기억처럼 느낌만 기억 사슬을 끊고 툭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둘째 아들이 맘 쓰게 한다던 동생도 이젠 희미하게 지워진 뭉개진 기억처럼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딸아이의 아파트를 페인트칠해야 한다고 해서 페인트 사러 나갔다가 공항 맞은편 트레일을 잠시 쩔뚝거리며 지팡이 짚고 걷다가 추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날은 추워야 정상이지만 막상 추워지니 싫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 앞에서 아들일 뿐인 존재가 사람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구순의 엄마와 칠순 아들의 이야기도 자주 본다. 어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아들을 걱정하는 말만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엄마에게 그런 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홀로 몸을 지키기도 바쁘고 혼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아들을 향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이들은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보채고 울 경우가 많다. 그럼 잠결에 아이를 달래고 잠을 재우는 것도 어머니의 모성은 아주 능숙하게 그렇게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피와 살을 뽑아서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어머니들에게서 늘 함께 따라다니는 뼛속이 텅텅 비어버린 골다공증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부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도 결혼해서 애를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야 ‘우리 엄마도 나를 낳아서 이렇게 길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어른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른 취급을 하지 않았던 그 옛날 어른들의 지혜가 부모가 되어 보고 나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것은 실제 그와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다.





 

오십 중반을 넘긴 동생이
한국에서 카톡을 보냈다

형,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묘지가 지척인데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엄마한테 ‘엄마 나왔어’ 하라고 말했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없는 엄마가 보고 싶다
 

#작가의 변
잊고 살던 수없이 많은 날, 어찌 잊고 살았을까? 어제는 불현듯 외할머니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에 무릎뼈만 크게 보이던 그 다리를 주물러 주던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얼굴 없는 얼굴처럼 어둠이 뭉친 기억처럼 느낌만 기억 사슬을 끊고 툭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둘째 아들이 맘 쓰게 한다던 동생도 이젠 희미하게 지워진 뭉개진 기억처럼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딸아이의 아파트를 페인트칠해야 한다고 해서 페인트 사러 나갔다가 공항 맞은편 트레일을 잠시 쩔뚝거리며 지팡이 짚고 걷다가 추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날은 추워야 정상이지만 막상 추워지니 싫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 앞에서 아들일 뿐인 존재가 사람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구순의 엄마와 칠순 아들의 이야기도 자주 본다. 어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아들을 걱정하는 말만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엄마에게 그런 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홀로 몸을 지키기도 바쁘고 혼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아들을 향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이들은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보채고 울 경우가 많다. 그럼 잠결에 아이를 달래고 잠을 재우는 것도 어머니의 모성은 아주 능숙하게 그렇게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피와 살을 뽑아서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어머니들에게서 늘 함께 따라다니는 뼛속이 텅텅 비어버린 골다공증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부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도 결혼해서 애를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야 ‘우리 엄마도 나를 낳아서 이렇게 길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어른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른 취급을 하지 않았던 그 옛날 어른들의 지혜가 부모가 되어 보고 나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것은 실제 그와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지난 9월 엘리베이터 사고 후에 산재 보험을 신청하고 빨리 치료하고 ‘크리스마스 이전엔 회사에 복귀하겠지’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직도 산재 보험은 보류인 상태로 보험금이 2달 이상 나오지 않으니 생활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치료를 할 수 없어 더욱 힘들다. CT, MRI 등 각종 검사장비를 동원해서 검사했지만, 전문의는 뇌경색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정의는 처음 전문의가 아무런 이상 증상을 찾지 못했다고 했을 때 ‘언제 회사로 돌아가 일하겠냐’고 물었다. 해서 나는 ‘전문의가 이상 소견을 발견 못했다고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인데 어떻게 일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가정의는 물리 치료를 해보라고 했는데 물리 치료하러 갔더니 물리 치료에서 도와줄 정도가 아니고 한방의 침술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증세가 완화된 후에 와야 자기가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의원을 찾았지만 믿을 만한 한의원을 찾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캐나다에서 배운 한의원보다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의를 하던 분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주로 다니던 한의원이 한국 방문하러 간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의사가 12월 중순에나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보험금이 안 나와서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상해 보험이 보류 상태라 물리 치료도 한방 치료도 내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보험이 결정되면 영수증으로 청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다.

어제도 상해 보험에 전화했더니 콜센터에서는 모른다면서 담당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 담당자가 전화를 받고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어 전화를 받은 것인 줄 모르다가 내가 누구고 보험 보류가 언제 결정 나는지 알고 싶어 전화했더니 다짜고짜 ‘왜 여기로 전화했냐’고 했다. 콜센터에서 이 전화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 했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기로 전화하지 마라 콜센터로 전화해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슬러 호텔 다니는 지인이 얼마 전에 허리 때문에 상해 보험 받은 적이 있어 이야길 했더니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따지라고 했다. 그래서 콜센터에 다시 전화해서 전화하라고 준 전화로 전화했더니 화내고 무례하게 답하면서 콜센터로 전화하라고 하더라. 매니저를 바꿔달라 했는데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그런 일이 있어 유감이다. 자기가 리포트를 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혹시 불리하게 결정될 수도 있으니 매니저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빨리 치료받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데 현재 상태로는 올해 안에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회사 인사부 슈퍼바이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메일로 보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보냈는데, 그런 일은 상해 보험하고 상담해라, 너는 지금 상해 보험으로 회사에서는 일하고 있지 않으니 회사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투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상태로는 나아도 회사에 돌아가서 노동 강도가 심한 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내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마장이 안 오는데 설렁설렁 기도하니 하는 일마다 안 풀린다고 나의 기도 탓을 한다. 사고를 당한 것도 보험 신청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기도를 잘못해서라니,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부탁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마음의 짐이 포개어져 아버지의 지게에 짐처럼 높이 쌓은 짐이 아버지의 마음을 비워 치매에 걸리고 다리를 붓게 한 것처럼 나 또한 길을 걸을 때마다 지팡이를 짚어도 한쪽으로 쏠리는 걸음걸이처럼 흔들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을 보고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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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지난 9월 엘리베이터 사고 후에 산재 보험을 신청하고 빨리 치료하고 ‘크리스마스 이전엔 회사에 복귀하겠지’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직도 산재 보험은 보류인 상태로 보험금이 2달 이상 나오지 않으니 생활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치료를 할 수 없어 더욱 힘들다. CT, MRI 등 각종 검사장비를 동원해서 검사했지만, 전문의는 뇌경색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정의는 처음 전문의가 아무런 이상 증상을 찾지 못했다고 했을 때 ‘언제 회사로 돌아가 일하겠냐’고 물었다. 해서 나는 ‘전문의가 이상 소견을 발견 못했다고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인데 어떻게 일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가정의는 물리 치료를 해보라고 했는데 물리 치료하러 갔더니 물리 치료에서 도와줄 정도가 아니고 한방의 침술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증세가 완화된 후에 와야 자기가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의원을 찾았지만 믿을 만한 한의원을 찾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캐나다에서 배운 한의원보다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의를 하던 분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주로 다니던 한의원이 한국 방문하러 간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의사가 12월 중순에나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보험금이 안 나와서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상해 보험이 보류 상태라 물리 치료도 한방 치료도 내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보험이 결정되면 영수증으로 청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다.

어제도 상해 보험에 전화했더니 콜센터에서는 모른다면서 담당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 담당자가 전화를 받고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어 전화를 받은 것인 줄 모르다가 내가 누구고 보험 보류가 언제 결정 나는지 알고 싶어 전화했더니 다짜고짜 ‘왜 여기로 전화했냐’고 했다. 콜센터에서 이 전화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 했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기로 전화하지 마라 콜센터로 전화해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슬러 호텔 다니는 지인이 얼마 전에 허리 때문에 상해 보험 받은 적이 있어 이야길 했더니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따지라고 했다. 그래서 콜센터에 다시 전화해서 전화하라고 준 전화로 전화했더니 화내고 무례하게 답하면서 콜센터로 전화하라고 하더라. 매니저를 바꿔달라 했는데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그런 일이 있어 유감이다. 자기가 리포트를 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혹시 불리하게 결정될 수도 있으니 매니저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빨리 치료받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데 현재 상태로는 올해 안에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회사 인사부 슈퍼바이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메일로 보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보냈는데, 그런 일은 상해 보험하고 상담해라, 너는 지금 상해 보험으로 회사에서는 일하고 있지 않으니 회사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투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상태로는 나아도 회사에 돌아가서 노동 강도가 심한 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내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마장이 안 오는데 설렁설렁 기도하니 하는 일마다 안 풀린다고 나의 기도 탓을 한다. 사고를 당한 것도 보험 신청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기도를 잘못해서라니,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부탁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마음의 짐이 포개어져 아버지의 지게에 짐처럼 높이 쌓은 짐이 아버지의 마음을 비워 치매에 걸리고 다리를 붓게 한 것처럼 나 또한 길을 걸을 때마다 지팡이를 짚어도 한쪽으로 쏠리는 걸음걸이처럼 흔들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을 보고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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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반을 넘긴 동생이
한국에서 카톡을 보냈다

형,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묘지가 지척인데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엄마한테 ‘엄마 나왔어’ 하라고 말했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없는 엄마가 보고 싶다
 

#작가의 변
잊고 살던 수없이 많은 날, 어찌 잊고 살았을까? 어제는 불현듯 외할머니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에 무릎뼈만 크게 보이던 그 다리를 주물러 주던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얼굴 없는 얼굴처럼 어둠이 뭉친 기억처럼 느낌만 기억 사슬을 끊고 툭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둘째 아들이 맘 쓰게 한다던 동생도 이젠 희미하게 지워진 뭉개진 기억처럼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딸아이의 아파트를 페인트칠해야 한다고 해서 페인트 사러 나갔다가 공항 맞은편 트레일을 잠시 쩔뚝거리며 지팡이 짚고 걷다가 추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날은 추워야 정상이지만 막상 추워지니 싫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 앞에서 아들일 뿐인 존재가 사람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구순의 엄마와 칠순 아들의 이야기도 자주 본다. 어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아들을 걱정하는 말만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엄마에게 그런 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홀로 몸을 지키기도 바쁘고 혼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아들을 향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이들은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보채고 울 경우가 많다. 그럼 잠결에 아이를 달래고 잠을 재우는 것도 어머니의 모성은 아주 능숙하게 그렇게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피와 살을 뽑아서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어머니들에게서 늘 함께 따라다니는 뼛속이 텅텅 비어버린 골다공증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부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도 결혼해서 애를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야 ‘우리 엄마도 나를 낳아서 이렇게 길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어른의 마음, 부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른 취급을 하지 않았던 그 옛날 어른들의 지혜가 부모가 되어 보고 나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것은 실제 그와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지난 9월 엘리베이터 사고 후에 산재 보험을 신청하고 빨리 치료하고 ‘크리스마스 이전엔 회사에 복귀하겠지’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직도 산재 보험은 보류인 상태로 보험금이 2달 이상 나오지 않으니 생활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치료를 할 수 없어 더욱 힘들다. CT, MRI 등 각종 검사장비를 동원해서 검사했지만, 전문의는 뇌경색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정의는 처음 전문의가 아무런 이상 증상을 찾지 못했다고 했을 때 ‘언제 회사로 돌아가 일하겠냐’고 물었다. 해서 나는 ‘전문의가 이상 소견을 발견 못했다고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인데 어떻게 일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가정의는 물리 치료를 해보라고 했는데 물리 치료하러 갔더니 물리 치료에서 도와줄 정도가 아니고 한방의 침술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증세가 완화된 후에 와야 자기가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의원을 찾았지만 믿을 만한 한의원을 찾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캐나다에서 배운 한의원보다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의를 하던 분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주로 다니던 한의원이 한국 방문하러 간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의사가 12월 중순에나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보험금이 안 나와서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상해 보험이 보류 상태라 물리 치료도 한방 치료도 내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보험이 결정되면 영수증으로 청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다.

어제도 상해 보험에 전화했더니 콜센터에서는 모른다면서 담당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 담당자가 전화를 받고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어 전화를 받은 것인 줄 모르다가 내가 누구고 보험 보류가 언제 결정 나는지 알고 싶어 전화했더니 다짜고짜 ‘왜 여기로 전화했냐’고 했다. 콜센터에서 이 전화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 했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기로 전화하지 마라 콜센터로 전화해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슬러 호텔 다니는 지인이 얼마 전에 허리 때문에 상해 보험 받은 적이 있어 이야길 했더니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따지라고 했다. 그래서 콜센터에 다시 전화해서 전화하라고 준 전화로 전화했더니 화내고 무례하게 답하면서 콜센터로 전화하라고 하더라. 매니저를 바꿔달라 했는데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그런 일이 있어 유감이다. 자기가 리포트를 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혹시 불리하게 결정될 수도 있으니 매니저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빨리 치료받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데 현재 상태로는 올해 안에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회사 인사부 슈퍼바이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메일로 보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보냈는데, 그런 일은 상해 보험하고 상담해라, 너는 지금 상해 보험으로 회사에서는 일하고 있지 않으니 회사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투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상태로는 나아도 회사에 돌아가서 노동 강도가 심한 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내는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마장이 안 오는데 설렁설렁 기도하니 하는 일마다 안 풀린다고 나의 기도 탓을 한다. 사고를 당한 것도 보험 신청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기도를 잘못해서라니,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부탁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마음의 짐이 포개어져 아버지의 지게에 짐처럼 높이 쌓은 짐이 아버지의 마음을 비워 치매에 걸리고 다리를 붓게 한 것처럼 나 또한 길을 걸을 때마다 지팡이를 짚어도 한쪽으로 쏠리는 걸음걸이처럼 흔들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을 보고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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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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