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4. 2014년 남북공동 만해축전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4. 2014년 남북공동 만해축전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2.13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해 선사를 다시 부르다”

북측은 역대 고승에 대해 혁명성・투쟁성・사상성을 통해 평가한다. 휴정・유정・처영 대사의 투쟁과 사상성을 높이 평가하고,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에 진영을 모시고 추모한다. 근세기에는 육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 “불교인들 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1 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 승(僧)이었는데, 조선 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당했을 때도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가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통을 들어 내동댕이치며. 이 더러운 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고 고함을 쳤다.”라고 그의 투쟁과 사상 그리고 혁명성을 크게 평가했다. 이 글은 만해 한용운의 막내 손녀 한명심이 《통일신보》(2001.12.29.)에 기고한 〈추억의 붓을 들고〉을 통해 다시 알려졌다.

이후 최승희・리쾌대・박태원 등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해방 후, 북녘에서 활동한 무용가 최승희는 《조선중앙TV》(2003.2.10.)에서 문학가 한설야・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인민배우 최승희 녀사가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됐다.”라고 보도해 실제로 복권되었음을 알렸다. 《통일신보》(2020.7.26.)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삶을 꽃피운 재능있는 민족 무용가’라는 제목으로 그녀를 조명했다. 이보다 앞서 1995년 5월 중국 심양의 노산미술학교가 처음 개최한 ‘조선현대미술작품전’을 시작으로, 당시 월북작가들의 재평가에서도 화가 리쾌대는 가장 붐을 탄 인물이다. 월북한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 재조명했다. 《통일신보》(2020.2.29.)에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재능있는 작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문학이 소개됐다.

북측이 2000년대에 들어와 고승과 문학・예술인들을 소환한 것은 관례와 전례에 따른 것이다. 전통적 규범의 측면인 관례와 달리 전례는 이전의 관련 사례를 말한다. 남북교류를 통해 드러난 공동 행사는 전례적 결론이었지만, 그 속에는 역사적 과정을 담고 있다. 60년 만에 남북공동 행사로 치러진 만해축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때 남북불교 교류의 주요한 내용 등 그 패러다임을 다시 살펴본다.

만해 한용운 선사(1929.12.21.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표 사진복원본). 사진=무명의 더쿠(2020.10.27.)





만해 한용운 선사 초상화(러시아 모스크바 부기크대학 S.Y. 또까레프 교수가 2013년에 그린 작품)





평양직할시에 살던 한보국 선생과 그의 가족들(1994.10.). 사진=월간 말(1996년 1월호)



만해 선사의 북녘 후손들

해방 후, 북조선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재미교포 작가인 홍정자(2016.7.1. 별세) 여사에 의해서다. 그녀가 평양에 들어가 만해 한용운의 후손들을 수소문하고, 취재한 내용은 월간 《말》(1996년 1월호)에 실려 43년 만에 알려졌다. 그간 남측에서는 6·25 전쟁 후, 한보국 선생의 생사를 몰랐었다. 고 홍동근 목사의 부인 홍정자 조국통일북미주협회 민족문화위원장은 1994년 10월 평양에서 취재하고, 한보국의 딸들과 처음 만난 계기는 남측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부탁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04년 만해 한용운의 아들로 태어난 한보국은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1950년 9.28 서울수복 때 의용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이후 1953년 전쟁 때 자강도 강계로 갔다가 평안도 영원 읍내로 자리를 옮겨 4개월 동안을 지내다가 가족들과 소식이 단절됐다. 그 후 황해도 영예 전사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 중 깨어나서 가족 상봉을 노동당에 건의함으로써 평안남도 덕천군 제사공장에 근무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상봉했다. 그때 몸을 심하게 다친 한보국에 대해 노동당에서 그에게 평양시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에 아파트를 한 채 주어 소일하게 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로동신문》에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존재를 알리게 됐다는 것이다. 다섯 딸은 평양 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과 결혼해 약 30여 명의 자손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홍정자 작가는 기록했다. 한보국의 큰딸 명숙이 충남 홍성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는 홍정자 씨와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 가지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남긴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한보국은 슬하에 아들(이름 미상)과 딸 다섯(홍성 태생의 명숙・명계・명자・명세, 평양 태생의 명심)을 두었다. 그의 막내딸 한명심이 2001년 12월 《통일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할아버지는 아들의 이름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나라를 한 몸 바쳐 보위하라는 뜻에서 ‘보국’이라고 지었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해 주었다. … 남쪽에서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에서 받은 고문의 후과로 몸이 허약해 북에 들어와서 장기간의 입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가 생의 말년까지 여러 기관의 책임 일꾼의 직책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1964년 12월 21일. 이날은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생일 60돐을 맞는 아버지에게 생일상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살고있는 딸 한명심의 기록에서 한보국은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임종 때 자녀들에게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 남북통일이 되면, 내 대신에 너희들이 조상님들께 성묘하라.”고 전했다. 이를 통해 한보국 선생의 출생일과 기일을 짐작할 수 있다.

한보국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이 살고있는 북측에서 만해 한용운에 관한 평가는 지속적으로 호평됐다. 198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용운의 작품을 널리 발굴하라.”는 특별지침이 하달된 후, 1992년 2월 ‘제2의 문학예술혁명’ 총노선을 통해 대중성을 표방함에 따라 한용운을 소개하라는 지침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불련 중앙위원회에서도 1996년 6월 〈애국렬사 한보국에 관하여〉란 별도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에 관한 북측에서 평가는 한보국과 그의 딸, 사위 등의 존재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라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만해 선사 자료와 행적만큼이나 한보국에 대한 재해석과 다양한 자료도 함께 수집・정리돼야 할 부문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우리 사회와 불교 운동사에 역사의 복원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보국의 삶에 관한 객관적 연구와 복권작업을 선행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2014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행한 즉흥 연설로 널리 알려진 오준 UN주재 한국대표부 대사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겨우 수백 km 떨어진 곳에 우리의 동포가 있다는 걸 안다. … 먼 훗날 오늘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볼 때, 우리와 똑같이 인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고 말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보다도 더 민족적이고 불교적인 관계망을 가졌던 만해 한용운 선사와 그 후손을 재조명하는 일은 이제, 남은 후손들의 과제이다.



만해선사 열반 70돌 남북불교도 법회(2014.6.29. 금강산 신계사). 사진=대한불교청년회 홈페이지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913주기 열반 다례재(2014.11.26.). 사진=금강신문(2014.11.27.)



남북이 만해축전을 열다

남북은 사후 70년 만에 만해 한용운 선사를 소환했다. 2014년 6월 29일 오후 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만해 스님 열반 70돐 북남불교도 법회’가 열렸다.

북측 조선불교도련맹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가 공동 주관한 그날의 합동 다례재(제사 형식)는 만해 선사 열반일을 기해 열렸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비롯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 범각 전남 대흥사 주지, 전준호 대한불교청년회장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조불련 리규룡 부위원장・차금철 서기장・리영호 책임부원, 진각 신계사 주지, 청학 표훈사 주지,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전영희 평양시 신도회 지도위원 등 사부대중 50여 명이 참가했다.

혜안 리영호 조불련 책임부원의 사회로 진행된 신계사 남북합동 다례재는 삼귀의・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대웅전 서쪽에 마련한 제단을 향해 다 같이 추모 묵념을 하고, 헌향과 헌화 그리고 술 대신 차(茶)를 올리는 다례를 가졌다.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만해 스님이 염원한 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와 독립이었습니다. 북남불교도들이 만해 스님의 민족자주정신을 계승해 민족통일에 앞장서 나가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은 봉행사에서 “다례재를 계기로 만해 스님이 활발히 왕래한 금강산과 설악산을 오가는 길이 다시 이어져 통일의 길, 평화의 길이 복원될 수 있도록 우리 남북불교도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자.”고 당부했다.

전준호 대불청 회장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공동 발원문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만해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였습니다. 스님이 한 생 간직하고, 실천한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은 오늘 우리 모두를 민족 분열의 비극을 하루빨리 가시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국통일 성업에로 부르고 있습니다. … 우리 민족끼리 이념과 불심 화합으로 우리 겨레, 우리 남과 북의 불교도들이 굳게 손잡고 나아가는 걸음걸음, 행하는 불사 하나하나가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선업이 되도록 무량한 가호와 가피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낭독하며 법회를 마쳤다.

분단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처음 열린 다례재는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이 남측에 새해 인사로 보낸 서신에 이어 조불련과 민추본이 2014년 3월 11~12일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의 실무회담을 통해 구체화했다. △ 불기255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합동 점등법회, △ 만해 스님 70주기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 △ 북녘 어린이 영양개선 지원 등 현안과 불교교류에 대한 공동사업을 논의했다. 이때 보화 조계종 사회부장, 진효 민추본 사무총장 등 남측 대표단 4명은 북측 대표단의 조불련 차금철 서기장・송춘일 책임부원, 한정철 전국신도회 부회장・김석철 전국신도회 신도위원 등 4명과 회동했다.

특히,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2014년 8월 11~14일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열린 제16회 ‘만해축전’에 축하 전문을 처음 보냈다. 이 전문은 민추본이 조불련에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축하 전문에서 “만해 스님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였습니다. 스님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변절할 때에도 전향서나 반성문이 아닌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드리데. 일제를 아연실색게 했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만해축전을 축하하면서 통일의 상징 금강산과 잇닿은 설악산 자락에서 진행되는 이번 축전의 인연 공덕으로 우리 겨레 얼싸안고, 통일만세 높이 부를 그날이 더욱 앞당겨지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다. 11일자로 보내온 축하 전문은 그해 8월 12일 만해축전 입재식-만해대상 시상식에서 발표됐다.

8.15 광복절 남북 합동법회가 무산된 가운데, 그해 10월 13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신계사 복원 7주년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지난 6월 이후, 4개월여 만에 남북불교도가 재회했다. 이날 법회에는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정묵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정념 총무원장 종책특보단장, 원명 조계사 주지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조불련 리규룡 부위원장・차금철 서기장・리영호 책임부원, 청학 표훈사 주지, 수덕 평양 광법사 주지, 룡산 평양 정릉사 주지, 정각 개성 영통사 부전,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신계사 합동법회는 혜자 108산사순례회 회주와 진각 신계사 주지의 타종을 시작으로 삼귀의・반야심경을 전통식으로 봉독했다. 양측 헌화에 이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이 경과보고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이 개회사를 했다. 연암 리규룡 부위원장은 “신계사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마련한 통일의 도장입니다. 오늘날 북과 남 사이에는 불신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6·15와 10·4 북남공동선언에 따라 신계사를 민족화합, 통일의 도장으로 만들어가자. 법회에 참석한 사부대중 모두가 통일보살로서 사명감을 갖고 남북통일에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의 봉행사에 어어 이진화 전 서울시의원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의 발원문 낭독과 사홍서원 식순으로 진행됐다. 합동법회 후, 신계사 측에서 마련한 곽밥(도시락)으로 함께 점심을 하고, 외금강 옥류동 계곡과 구룡연 폭포를 찾아 관람했다.

한편, 남측 천태종은 2014년 11월 26일 개성 영통사 경선원에서 ‘령통사 복원 9돐 기념 조국통일기원 및 의천 대각국사 913주기 열반다례재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합동법회에 참가한 50여 명은 영통사 경선원에서 대각국사 다례를 봉행하고, 천마산 관음사와 박연폭포, 만월대, 선죽교 등 개성 유적지를 순례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북측은 반일투사・항일운동가로, 남측에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만해 한용운 선사는 오롯이 주인공이었다. 다시 소환한 만해 선사를 통해 남북이 하나됨을 이루었다. 이웃 종교계의 적극적인 전략 전술에서 보면, 조계종 등 불교종단에서의 독립운동사 재정립과 홍보를 위한 첫걸음이 필요한 때이다.

# 다음 편은 ‘2014년 북측의 민족유산보호사업’이 이어집니다.

----------------------------------------------------------------------------------------------
만해 한용운 선사(1929.12.21.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표 사진복원본). 사진=무명의 더쿠(2020.10.27.)
만해 한용운 선사 초상화(러시아 모스크바 부기크대학 S.Y. 또까레프 교수가 2013년에 그린 작품)
만해 한용운 선사 초상화(러시아 모스크바 부기크대학 S.Y. 또까레프 교수가 2013년에 그린 작품)
평양직할시에 살던 한보국 선생과 그의 가족들(1994.10.). 사진=월간 말(1996년 1월호)
평양직할시에 살던 한보국 선생과 그의 가족들(1994.10.). 사진=월간 말(1996년 1월호)

만해 선사의 북녘 후손들

해방 후, 북조선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재미교포 작가인 홍정자(2016.7.1. 별세) 여사에 의해서다. 그녀가 평양에 들어가 만해 한용운의 후손들을 수소문하고, 취재한 내용은 월간 《말》(1996년 1월호)에 실려 43년 만에 알려졌다. 그간 남측에서는 6·25 전쟁 후, 한보국 선생의 생사를 몰랐었다. 고 홍동근 목사의 부인 홍정자 조국통일북미주협회 민족문화위원장은 1994년 10월 평양에서 취재하고, 한보국의 딸들과 처음 만난 계기는 남측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부탁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04년 만해 한용운의 아들로 태어난 한보국은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1950년 9.28 서울수복 때 의용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이후 1953년 전쟁 때 자강도 강계로 갔다가 평안도 영원 읍내로 자리를 옮겨 4개월 동안을 지내다가 가족들과 소식이 단절됐다. 그 후 황해도 영예 전사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 중 깨어나서 가족 상봉을 노동당에 건의함으로써 평안남도 덕천군 제사공장에 근무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상봉했다. 그때 몸을 심하게 다친 한보국에 대해 노동당에서 그에게 평양시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에 아파트를 한 채 주어 소일하게 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로동신문》에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존재를 알리게 됐다는 것이다. 다섯 딸은 평양 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과 결혼해 약 30여 명의 자손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홍정자 작가는 기록했다. 한보국의 큰딸 명숙이 충남 홍성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는 홍정자 씨와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 가지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남긴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한보국은 슬하에 아들(이름 미상)과 딸 다섯(홍성 태생의 명숙・명계・명자・명세, 평양 태생의 명심)을 두었다. 그의 막내딸 한명심이 2001년 12월 《통일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할아버지는 아들의 이름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나라를 한 몸 바쳐 보위하라는 뜻에서 ‘보국’이라고 지었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해 주었다. … 남쪽에서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에서 받은 고문의 후과로 몸이 허약해 북에 들어와서 장기간의 입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가 생의 말년까지 여러 기관의 책임 일꾼의 직책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1964년 12월 21일. 이날은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생일 60돐을 맞는 아버지에게 생일상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살고있는 딸 한명심의 기록에서 한보국은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임종 때 자녀들에게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 남북통일이 되면, 내 대신에 너희들이 조상님들께 성묘하라.”고 전했다. 이를 통해 한보국 선생의 출생일과 기일을 짐작할 수 있다.

한보국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이 살고있는 북측에서 만해 한용운에 관한 평가는 지속적으로 호평됐다. 198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용운의 작품을 널리 발굴하라.”는 특별지침이 하달된 후, 1992년 2월 ‘제2의 문학예술혁명’ 총노선을 통해 대중성을 표방함에 따라 한용운을 소개하라는 지침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불련 중앙위원회에서도 1996년 6월 〈애국렬사 한보국에 관하여〉란 별도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에 관한 북측에서 평가는 한보국과 그의 딸, 사위 등의 존재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라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만해 선사 자료와 행적만큼이나 한보국에 대한 재해석과 다양한 자료도 함께 수집・정리돼야 할 부문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우리 사회와 불교 운동사에 역사의 복원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보국의 삶에 관한 객관적 연구와 복권작업을 선행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2014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행한 즉흥 연설로 널리 알려진 오준 UN주재 한국대표부 대사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겨우 수백 km 떨어진 곳에 우리의 동포가 있다는 걸 안다. … 먼 훗날 오늘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볼 때, 우리와 똑같이 인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고 말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보다도 더 민족적이고 불교적인 관계망을 가졌던 만해 한용운 선사와 그 후손을 재조명하는 일은 이제, 남은 후손들의 과제이다.

만해선사 열반 70돌 남북불교도 법회(2014.6.29. 금강산 신계사). 사진=대한불교청년회 홈페이지
만해선사 열반 70돌 남북불교도 법회(2014.6.29. 금강산 신계사). 사진=대한불교청년회 홈페이지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913주기 열반 다례재(2014.11.26.). 사진=금강신문(2014.11.27.)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913주기 열반 다례재(2014.11.26.). 사진=금강신문(2014.11.27.)

남북이 만해축전을 열다

남북은 사후 70년 만에 만해 한용운 선사를 소환했다. 2014년 6월 29일 오후 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만해 스님 열반 70돐 북남불교도 법회’가 열렸다.

북측 조선불교도련맹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가 공동 주관한 그날의 합동 다례재(제사 형식)는 만해 선사 열반일을 기해 열렸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비롯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 범각 전남 대흥사 주지, 전준호 대한불교청년회장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조불련 리규룡 부위원장・차금철 서기장・리영호 책임부원, 진각 신계사 주지, 청학 표훈사 주지,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전영희 평양시 신도회 지도위원 등 사부대중 50여 명이 참가했다.

혜안 리영호 조불련 책임부원의 사회로 진행된 신계사 남북합동 다례재는 삼귀의・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대웅전 서쪽에 마련한 제단을 향해 다 같이 추모 묵념을 하고, 헌향과 헌화 그리고 술 대신 차(茶)를 올리는 다례를 가졌다.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만해 스님이 염원한 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와 독립이었습니다. 북남불교도들이 만해 스님의 민족자주정신을 계승해 민족통일에 앞장서 나가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은 봉행사에서 “다례재를 계기로 만해 스님이 활발히 왕래한 금강산과 설악산을 오가는 길이 다시 이어져 통일의 길, 평화의 길이 복원될 수 있도록 우리 남북불교도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자.”고 당부했다.

전준호 대불청 회장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공동 발원문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만해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였습니다. 스님이 한 생 간직하고, 실천한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은 오늘 우리 모두를 민족 분열의 비극을 하루빨리 가시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국통일 성업에로 부르고 있습니다. … 우리 민족끼리 이념과 불심 화합으로 우리 겨레, 우리 남과 북의 불교도들이 굳게 손잡고 나아가는 걸음걸음, 행하는 불사 하나하나가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선업이 되도록 무량한 가호와 가피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낭독하며 법회를 마쳤다.

분단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처음 열린 다례재는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이 남측에 새해 인사로 보낸 서신에 이어 조불련과 민추본이 2014년 3월 11~12일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의 실무회담을 통해 구체화했다. △ 불기255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합동 점등법회, △ 만해 스님 70주기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 △ 북녘 어린이 영양개선 지원 등 현안과 불교교류에 대한 공동사업을 논의했다. 이때 보화 조계종 사회부장, 진효 민추본 사무총장 등 남측 대표단 4명은 북측 대표단의 조불련 차금철 서기장・송춘일 책임부원, 한정철 전국신도회 부회장・김석철 전국신도회 신도위원 등 4명과 회동했다.

특히,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2014년 8월 11~14일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열린 제16회 ‘만해축전’에 축하 전문을 처음 보냈다. 이 전문은 민추본이 조불련에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축하 전문에서 “만해 스님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였습니다. 스님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변절할 때에도 전향서나 반성문이 아닌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드리데. 일제를 아연실색게 했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만해축전을 축하하면서 통일의 상징 금강산과 잇닿은 설악산 자락에서 진행되는 이번 축전의 인연 공덕으로 우리 겨레 얼싸안고, 통일만세 높이 부를 그날이 더욱 앞당겨지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다. 11일자로 보내온 축하 전문은 그해 8월 12일 만해축전 입재식-만해대상 시상식에서 발표됐다.

8.15 광복절 남북 합동법회가 무산된 가운데, 그해 10월 13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신계사 복원 7주년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지난 6월 이후, 4개월여 만에 남북불교도가 재회했다. 이날 법회에는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정묵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정념 총무원장 종책특보단장, 원명 조계사 주지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조불련 리규룡 부위원장・차금철 서기장・리영호 책임부원, 청학 표훈사 주지, 수덕 평양 광법사 주지, 룡산 평양 정릉사 주지, 정각 개성 영통사 부전,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신계사 합동법회는 혜자 108산사순례회 회주와 진각 신계사 주지의 타종을 시작으로 삼귀의・반야심경을 전통식으로 봉독했다. 양측 헌화에 이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이 경과보고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이 개회사를 했다. 연암 리규룡 부위원장은 “신계사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마련한 통일의 도장입니다. 오늘날 북과 남 사이에는 불신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6·15와 10·4 북남공동선언에 따라 신계사를 민족화합, 통일의 도장으로 만들어가자. 법회에 참석한 사부대중 모두가 통일보살로서 사명감을 갖고 남북통일에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의 봉행사에 어어 이진화 전 서울시의원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의 발원문 낭독과 사홍서원 식순으로 진행됐다. 합동법회 후, 신계사 측에서 마련한 곽밥(도시락)으로 함께 점심을 하고, 외금강 옥류동 계곡과 구룡연 폭포를 찾아 관람했다.

한편, 남측 천태종은 2014년 11월 26일 개성 영통사 경선원에서 ‘령통사 복원 9돐 기념 조국통일기원 및 의천 대각국사 913주기 열반다례재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합동법회에 참가한 50여 명은 영통사 경선원에서 대각국사 다례를 봉행하고, 천마산 관음사와 박연폭포, 만월대, 선죽교 등 개성 유적지를 순례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북측은 반일투사・항일운동가로, 남측에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만해 한용운 선사는 오롯이 주인공이었다. 다시 소환한 만해 선사를 통해 남북이 하나됨을 이루었다. 이웃 종교계의 적극적인 전략 전술에서 보면, 조계종 등 불교종단에서의 독립운동사 재정립과 홍보를 위한 첫걸음이 필요한 때이다.

# 다음 편은 ‘2014년 북측의 민족유산보호사업’이 이어집니다.

----------------------------------------------------------------------------------------------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