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0. 비어 버린 마음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0. 비어 버린 마음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2.13 10: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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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가슴이

배가 고파서 인줄 알았어

먹어도 먹어도 배만 나올 뿐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작가의 변
느닷없이 300만 원을 보내 달라는 제천 동생한테서 온 카톡 문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생은 나보다 4살 어리고 삼십 년을 넘게 한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9월 26일부터 일하다 뇌경색 증세를 보여 상해보험 신청을 하고 일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상해보험 신청이 아직도 결정 보류 상태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고, 기다리다 상해보험 관계자의 말대로 실업 보험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 실업 보험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한 달 한 달 월세를 내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생이 갑자기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해서 전화해, 왜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했는지 물었다. 동생은 처음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 죽고 싶어.” 그런다. 왜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 죽고 싶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얼마 전 좋은 조건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해서 돌려막기해서 2천5백만 원을 빌린 돈까지 보냈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자가 집이긴 해도 집을 담보로 융자도 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중고등학교 학생인 아들들을 보살피고 있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에서 살기 힘든 나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면서 야속하기도 하다.

동생은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냥 죽으면 편하겠냐, 죽고 나서도 인연의 법칙이 이어지고 물론 모두 지옥을 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환생을 보더라도 지옥을 갔다고 벌레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죽고 나서 축생으로 태어나던지, 벌레로 태어나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냐고 한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그냥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비록 개미 쳇바퀴 돌듯 끝없는 고통 속에 살지라도 운명을 거슬리는 모험을 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빨려드는 수렁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후회는 있다.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에 대한 후회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 캐나다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삶과는 또 다른 선택이었다.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물론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도 나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당장 나만을 쳐다보는 새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는 자녀와 아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민지인 밴쿠버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은 떠나가고 고국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거나 매년 고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민하기 전까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관광조차 못 한 상태에서 이민을 왔고 지금까지 그 에 관광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참 살려도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가끔씩 동생이 전화해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돈을 보내달라고 하거나, 술 마시고 하소연을 하거나 할 때면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능력 밖일 때 많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면 동물과 사람이 다를 게 무어냐고 말하면서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더니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서 뭐 하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방 죽을 것처럼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돈이 있어 돈을 보내주면 그것이 동생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오기 전에도 서울에서 열 번이 넘게 독서실과 쪽방인 자취방 이사를 하면서 살았다.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돈 없이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병든 몸과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는 아들, 돈 보내 달라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고 싶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다 사람 구실하고 살지는 않는다. 자린고비처럼 쓸 데 쓰지 못하는 돈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삶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 진 운명대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쳇바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를 남긴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작은 왕국처럼 기업주의 횡포가 난무한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도 민주주의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카르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사회 구조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이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하면 죄가 되고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변상하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하지만 대리인 직원이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아버지의 대가성 뇌물로 보기 힘들다는 판결이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냥 개미굴에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 죽어 간다.

부처님은 공 사상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없을수록 많은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가난하면 할수록 걱정하고 근심이 많은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이번 글로 <불교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100회를 맞았다. 작은 욕심처럼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 마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왕과 왕 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성에서 살면서 온갖 사치와 풍요를 누리고 산다. 많은 서민은 오히려 승려들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심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꽃을 공양하고 음식을 공양하면서 신심을 다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그 마음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깨우치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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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가슴이

배가 고파서 인줄 알았어

먹어도 먹어도 배만 나올 뿐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작가의 변
느닷없이 300만 원을 보내 달라는 제천 동생한테서 온 카톡 문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생은 나보다 4살 어리고 삼십 년을 넘게 한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9월 26일부터 일하다 뇌경색 증세를 보여 상해보험 신청을 하고 일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상해보험 신청이 아직도 결정 보류 상태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고, 기다리다 상해보험 관계자의 말대로 실업 보험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 실업 보험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한 달 한 달 월세를 내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생이 갑자기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해서 전화해, 왜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했는지 물었다. 동생은 처음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 죽고 싶어.” 그런다. 왜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 죽고 싶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얼마 전 좋은 조건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해서 돌려막기해서 2천5백만 원을 빌린 돈까지 보냈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자가 집이긴 해도 집을 담보로 융자도 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중고등학교 학생인 아들들을 보살피고 있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에서 살기 힘든 나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면서 야속하기도 하다.

동생은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냥 죽으면 편하겠냐, 죽고 나서도 인연의 법칙이 이어지고 물론 모두 지옥을 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환생을 보더라도 지옥을 갔다고 벌레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죽고 나서 축생으로 태어나던지, 벌레로 태어나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냐고 한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그냥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비록 개미 쳇바퀴 돌듯 끝없는 고통 속에 살지라도 운명을 거슬리는 모험을 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빨려드는 수렁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후회는 있다.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에 대한 후회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뻥 뚫린 가슴이

배가 고파서 인줄 알았어

먹어도 먹어도 배만 나올 뿐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작가의 변
느닷없이 300만 원을 보내 달라는 제천 동생한테서 온 카톡 문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생은 나보다 4살 어리고 삼십 년을 넘게 한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9월 26일부터 일하다 뇌경색 증세를 보여 상해보험 신청을 하고 일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상해보험 신청이 아직도 결정 보류 상태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고, 기다리다 상해보험 관계자의 말대로 실업 보험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 실업 보험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한 달 한 달 월세를 내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생이 갑자기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해서 전화해, 왜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했는지 물었다. 동생은 처음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 죽고 싶어.” 그런다. 왜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 죽고 싶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얼마 전 좋은 조건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해서 돌려막기해서 2천5백만 원을 빌린 돈까지 보냈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자가 집이긴 해도 집을 담보로 융자도 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중고등학교 학생인 아들들을 보살피고 있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에서 살기 힘든 나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면서 야속하기도 하다.

동생은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냥 죽으면 편하겠냐, 죽고 나서도 인연의 법칙이 이어지고 물론 모두 지옥을 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환생을 보더라도 지옥을 갔다고 벌레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죽고 나서 축생으로 태어나던지, 벌레로 태어나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냐고 한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그냥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비록 개미 쳇바퀴 돌듯 끝없는 고통 속에 살지라도 운명을 거슬리는 모험을 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빨려드는 수렁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후회는 있다.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에 대한 후회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 캐나다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삶과는 또 다른 선택이었다.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물론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도 나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당장 나만을 쳐다보는 새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는 자녀와 아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민지인 밴쿠버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은 떠나가고 고국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거나 매년 고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민하기 전까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관광조차 못 한 상태에서 이민을 왔고 지금까지 그 에 관광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참 살려도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가끔씩 동생이 전화해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돈을 보내달라고 하거나, 술 마시고 하소연을 하거나 할 때면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능력 밖일 때 많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면 동물과 사람이 다를 게 무어냐고 말하면서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더니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서 뭐 하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방 죽을 것처럼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돈이 있어 돈을 보내주면 그것이 동생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오기 전에도 서울에서 열 번이 넘게 독서실과 쪽방인 자취방 이사를 하면서 살았다.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돈 없이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병든 몸과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는 아들, 돈 보내 달라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고 싶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다 사람 구실하고 살지는 않는다. 자린고비처럼 쓸 데 쓰지 못하는 돈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삶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 진 운명대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쳇바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를 남긴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작은 왕국처럼 기업주의 횡포가 난무한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도 민주주의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카르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사회 구조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이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하면 죄가 되고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변상하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하지만 대리인 직원이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아버지의 대가성 뇌물로 보기 힘들다는 판결이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냥 개미굴에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 죽어 간다.

부처님은 공 사상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없을수록 많은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가난하면 할수록 걱정하고 근심이 많은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이번 글로 <불교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100회를 맞았다. 작은 욕심처럼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 마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왕과 왕 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성에서 살면서 온갖 사치와 풍요를 누리고 산다. 많은 서민은 오히려 승려들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심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꽃을 공양하고 음식을 공양하면서 신심을 다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그 마음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깨우치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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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내가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 캐나다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삶과는 또 다른 선택이었다.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물론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도 나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당장 나만을 쳐다보는 새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는 자녀와 아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민지인 밴쿠버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은 떠나가고 고국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거나 매년 고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민하기 전까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관광조차 못 한 상태에서 이민을 왔고 지금까지 그 에 관광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참 살려도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가끔씩 동생이 전화해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돈을 보내달라고 하거나, 술 마시고 하소연을 하거나 할 때면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능력 밖일 때 많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면 동물과 사람이 다를 게 무어냐고 말하면서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더니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서 뭐 하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방 죽을 것처럼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돈이 있어 돈을 보내주면 그것이 동생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오기 전에도 서울에서 열 번이 넘게 독서실과 쪽방인 자취방 이사를 하면서 살았다.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돈 없이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병든 몸과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는 아들, 돈 보내 달라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고 싶다.





뻥 뚫린 가슴이

배가 고파서 인줄 알았어

먹어도 먹어도 배만 나올 뿐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작가의 변
느닷없이 300만 원을 보내 달라는 제천 동생한테서 온 카톡 문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생은 나보다 4살 어리고 삼십 년을 넘게 한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9월 26일부터 일하다 뇌경색 증세를 보여 상해보험 신청을 하고 일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상해보험 신청이 아직도 결정 보류 상태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고, 기다리다 상해보험 관계자의 말대로 실업 보험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 실업 보험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한 달 한 달 월세를 내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생이 갑자기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해서 전화해, 왜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했는지 물었다. 동생은 처음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 죽고 싶어.” 그런다. 왜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 죽고 싶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얼마 전 좋은 조건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해서 돌려막기해서 2천5백만 원을 빌린 돈까지 보냈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자가 집이긴 해도 집을 담보로 융자도 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중고등학교 학생인 아들들을 보살피고 있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에서 살기 힘든 나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면서 야속하기도 하다.

동생은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냥 죽으면 편하겠냐, 죽고 나서도 인연의 법칙이 이어지고 물론 모두 지옥을 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환생을 보더라도 지옥을 갔다고 벌레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죽고 나서 축생으로 태어나던지, 벌레로 태어나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냐고 한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그냥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비록 개미 쳇바퀴 돌듯 끝없는 고통 속에 살지라도 운명을 거슬리는 모험을 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빨려드는 수렁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후회는 있다.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에 대한 후회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 캐나다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삶과는 또 다른 선택이었다.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물론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도 나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당장 나만을 쳐다보는 새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는 자녀와 아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민지인 밴쿠버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은 떠나가고 고국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거나 매년 고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민하기 전까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관광조차 못 한 상태에서 이민을 왔고 지금까지 그 에 관광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참 살려도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가끔씩 동생이 전화해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돈을 보내달라고 하거나, 술 마시고 하소연을 하거나 할 때면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능력 밖일 때 많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면 동물과 사람이 다를 게 무어냐고 말하면서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더니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서 뭐 하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방 죽을 것처럼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돈이 있어 돈을 보내주면 그것이 동생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오기 전에도 서울에서 열 번이 넘게 독서실과 쪽방인 자취방 이사를 하면서 살았다.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돈 없이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병든 몸과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는 아들, 돈 보내 달라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고 싶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다 사람 구실하고 살지는 않는다. 자린고비처럼 쓸 데 쓰지 못하는 돈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삶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 진 운명대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쳇바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를 남긴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작은 왕국처럼 기업주의 횡포가 난무한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도 민주주의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카르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사회 구조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이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하면 죄가 되고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변상하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하지만 대리인 직원이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아버지의 대가성 뇌물로 보기 힘들다는 판결이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냥 개미굴에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 죽어 간다.

부처님은 공 사상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없을수록 많은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가난하면 할수록 걱정하고 근심이 많은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이번 글로 <불교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100회를 맞았다. 작은 욕심처럼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 마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왕과 왕 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성에서 살면서 온갖 사치와 풍요를 누리고 산다. 많은 서민은 오히려 승려들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심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꽃을 공양하고 음식을 공양하면서 신심을 다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그 마음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깨우치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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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다 사람 구실하고 살지는 않는다. 자린고비처럼 쓸 데 쓰지 못하는 돈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삶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 진 운명대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쳇바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를 남긴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작은 왕국처럼 기업주의 횡포가 난무한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도 민주주의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카르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사회 구조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이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하면 죄가 되고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변상하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하지만 대리인 직원이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아버지의 대가성 뇌물로 보기 힘들다는 판결이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냥 개미굴에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 죽어 간다.

부처님은 공 사상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없을수록 많은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가난하면 할수록 걱정하고 근심이 많은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이번 글로 <불교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100회를 맞았다. 작은 욕심처럼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 마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왕과 왕 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성에서 살면서 온갖 사치와 풍요를 누리고 산다. 많은 서민은 오히려 승려들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심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꽃을 공양하고 음식을 공양하면서 신심을 다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그 마음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깨우치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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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가슴이

배가 고파서 인줄 알았어

먹어도 먹어도 배만 나올 뿐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작가의 변
느닷없이 300만 원을 보내 달라는 제천 동생한테서 온 카톡 문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생은 나보다 4살 어리고 삼십 년을 넘게 한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지난해 9월 26일부터 일하다 뇌경색 증세를 보여 상해보험 신청을 하고 일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상해보험 신청이 아직도 결정 보류 상태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고, 기다리다 상해보험 관계자의 말대로 실업 보험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 실업 보험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한 달 한 달 월세를 내고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생이 갑자기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해서 전화해, 왜 300만 원을 보내 달라고 했는지 물었다. 동생은 처음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 죽고 싶어.” 그런다. 왜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 죽고 싶다고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얼마 전 좋은 조건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해서 돌려막기해서 2천5백만 원을 빌린 돈까지 보냈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 자가 집이긴 해도 집을 담보로 융자도 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중고등학교 학생인 아들들을 보살피고 있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에서 살기 힘든 나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을 보면서 야속하기도 하다.

동생은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냥 죽으면 편하겠냐, 죽고 나서도 인연의 법칙이 이어지고 물론 모두 지옥을 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환생을 보더라도 지옥을 갔다고 벌레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죽고 나서 축생으로 태어나던지, 벌레로 태어나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냐고 한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그냥 넋 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비록 개미 쳇바퀴 돌듯 끝없는 고통 속에 살지라도 운명을 거슬리는 모험을 한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빨려드는 수렁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후회는 있다.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결정에 대한 후회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 캐나다 이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삶과는 또 다른 선택이었다.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물론 시골에 부모님과 동생도 나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당장 나만을 쳐다보는 새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입만 벌리고 있는 자녀와 아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민지인 밴쿠버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은 떠나가고 고국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거나 매년 고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민하기 전까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경주나 제주도 관광조차 못 한 상태에서 이민을 왔고 지금까지 그 에 관광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참 살려도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가끔씩 동생이 전화해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돈을 보내달라고 하거나, 술 마시고 하소연을 하거나 할 때면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능력 밖일 때 많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면 동물과 사람이 다를 게 무어냐고 말하면서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더니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서 뭐 하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방 죽을 것처럼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라도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다. 돈이 있어 돈을 보내주면 그것이 동생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오기 전에도 서울에서 열 번이 넘게 독서실과 쪽방인 자취방 이사를 하면서 살았다. 시골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돈 없이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병든 몸과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는 아들, 돈 보내 달라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고 싶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다 사람 구실하고 살지는 않는다. 자린고비처럼 쓸 데 쓰지 못하는 돈 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삶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 진 운명대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쳇바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를 남긴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작은 왕국처럼 기업주의 횡포가 난무한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도 민주주의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카르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사회 구조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이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하면 죄가 되고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변상하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하지만 대리인 직원이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도 아버지의 대가성 뇌물로 보기 힘들다는 판결이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냥 개미굴에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 죽어 간다.

부처님은 공 사상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없을수록 많은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가난하면 할수록 걱정하고 근심이 많은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이번 글로 <불교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100회를 맞았다. 작은 욕심처럼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 마음에는 점점 더 많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왕과 왕 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성에서 살면서 온갖 사치와 풍요를 누리고 산다. 많은 서민은 오히려 승려들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심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꽃을 공양하고 음식을 공양하면서 신심을 다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그 마음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깨우치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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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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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인님께 2023-02-13 12:50:16
시 잘 읽었고 , 더불어 작가의 변도 잘 읽었습니다
힘든시기 지혜롭게 아름답게 잘 넘기시는 모습 , 읽는이들이 표현 하지 않아도
선한 영향력으로 다가오기에 문득 불교방송에서 문광스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올 라요
여러분들이 바로 진짜 애국자요, 진정한 한류 라고요
문광스님이 미국가서 해외동포 불자님들에게 한말이지요
여튼 건강 잘 다스리면서 이국땅에서 꿈 을 꼭 이루십시요
시 질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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