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따다 준다던 말처럼 사랑 약속은
모래 위에 쓴 약속 같은 것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지듯
결혼식에서 사랑 서약으로 맹세하는 것은
깨어질 것을 염려하는 불안을 채우는 자물쇠/
계약서에 조건처럼
수많은 약속은 욕망 촉수처럼 마음을 흔들지만
남은 것이 없는 임대 계약처럼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너도 나도 오늘 욕망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하지만 알지 못하듯
욕망에 짓눌린 진심은 숨이 막혀 하네
훌훌 벗어 던지면 행복한 것을.
#작가의 변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운다. 말을 하지 못하니 우는 것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다. 오줌이 마려워도 울고, 배가 고파도 울고, 큰 것이 나와도 운다. 울 때마다 엄마가 또는 아빠가 들여다보고 기저귀를 갈아 주고 이쁘다 하고 사랑을 주면 그것이 잘한 것을 알게 되고 다음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다 엄마가 안아 주면 그것이 좋은 것을 알고 바닥에 뉘게 되면 운다. 그러면 안고 흔들어 주게 되는데 그러면 안고 흔들어 달라고 계속 떼를 쓴다. 그러다 또 맛있는 사탕이나, 장난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달라고 아니면 숨겨 둔 것 달라고 털버덕 자리에 앉아 발을 구르거나 누워 사지를 흔들며 사달라 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면서 울면 해결되던 일이 떼쓰면 해결되고 아니면 단식 투쟁을 하면 해결되기도 한다. 요구하는 것도 점점 더 커진다. 다른 애들은 운동화 신고 오는데 나만 검정 고무신을 신고 오니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른다던가, 다른 애들은 도시락 반찬에 어묵을 싸 오거나 볶음 멸치 볶은 걸 싸 오는 데 나는 늘 국물이 흘러 책에까지 번지는 김치를 쌌다고 엄마에게 원망을 풀어 놓게 된다. 즉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나의 불행과 불만이 싹트고 그로 인해 어머니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것은 또한 돈을 잘 못 버는 아버지의 원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세대이다. 우리 동네엔 유치원이 없었고 나는 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누나가 이름 쓰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겨우 한글 이름자를 쓰고 입학하게 되었는데 입학식 전에 비가 많이 와서 학교 운동장이 말 그대로 논바닥처럼 질퍽거렸다. 엄마는 질척이는 운동장을 지나기 위해 나를 업고 그 운동장을 지나갔다. 엄마가 학교를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입학식을 옥상에서 하게 되었다. 1학년 입학하는 아이들만 옥상에 올라가서 입학식을 했는데 한 반에 70명이 넘는 이들이었으니 3개반 21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옥상에서 입학식을 했다. 게다가 부모님들까지 있었으니 옥상이 그야말로 바글바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동네 아이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을 만나면서 특히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요기 넘어오지 말라고 하던 반장을 하던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애가 점심을 싸 온 도시락을 여는 순간 계란 부침이 밥 위에 올려져 있었고 반찬은 늘 먹음직스러운 것으로 바뀌면서 싸왔다. 그리고 그 애는 나처럼 이름만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아니고 책을 줄줄 읽었다. 그것에 자극받아 나는 책 읽고 쓰기에 열심이었고 그 애가 가진 필통과 운동화에도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고 원망도 늘어났지만,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의 기억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눈을 감으라고 하고 책상에 빵 하나와 가져가 컵에 따뜻한 우유 한 잔씩을 나눠주던 것이다. 그때까지 빵도 우유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담임 선생님이 천사처럼 느껴졌다. 담임은 그저 그것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말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에...’, 집에는 가고 싶은데 조바심을 내면 낼수록 외워지지 않는 국민교육헌장,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진짜 집에 못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구구단도 마찬가지다. 처음 전체가 노래처럼 외울 땐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선생님 앞에서 혼자 외우려 들면 까먹고 잊어버리고 하는 것이다.
집에 가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망에 덫을 놓고 그것을 이용한 선생님 당시에는 아주 고통스럽고 비인권적인 교육방식이었지만 덕분에 쓸데없는 국민교육헌장과 구구단을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늘 학교의 부역에 동원되었다. 옥외 화장실에 있는 오물을 퍼서 학교 뒤에 고구마밭과 아주까리밭에 주는 일을 같은 학급 동료와 둘이 하도록 했는데, 통의 오물이 우리 둘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물이 출렁대듯이 흔들리다 튀어 우리 다리에 묻기도 했다.
농사지은 고구마는 정말 머리만 한 커다란 고구마도 있었고 아주까리도 키가 아주 높은 아주까리로 자랐다. 방학 숙제로 퇴비를 베어 오라고 해서 퇴비를 베어 오기도 하고 과제물로 들기름을 박카스병 한 병씩만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져가기도 했는데 학교 마루를 닦는 곳에 사용했다. 그리고 가장 불만이 심했던 것은 앞산을 삽으로 퍼서 세수대야 등 그릇에 담아 운동장에 뿌리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중장비를 동원해서 하면 쉽지만, 그때는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운동장에 흙을 뿌리는 것에 학생들이 동원했고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흙을 퍼날랐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운동회 때는 고싸움도 하고 오재미 던지기라 부르던 프라스틱 바구니 공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표어나 ‘농자천하지대본’ 같은 표어를 넣고 터지게 하는 오재미 던지기, 뜀틀이 있는 장애물 넘기, 당연히 있던 줄다리기와 늘 맨 아래 깔려서 고생한 텀블링 즉 사람으로 탑을 쌓는 놀이 같은 것과 기마전 같은 운동회 놀이들이 이젠 구경조차 하기 힘든 탓인지 기억이 새롭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교사나 회사원 공무원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중에 회사원은 본 적도 없었고 교사인 선생님과 공무원은 그 아이들이 농부의 아들이 우리들 보다 잘사는 것처럼 보이니 그것이 부러워 욕망의 씨앗이 되었는지 모른다. 욕망은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을 내가 가지려는 욕심과 내 양심 사이의 갈등에서 욕망이 이기는 것이다. 욕심을 정당화한다. 법도 내 칼처럼 휘둘러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남의 돈도 내 돈처럼 막 쓰고 그것으로 부동산 투기도 하고 늘 양심과 진심을 말하지만, 진심과 양심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욕망의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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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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