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자만 누리는 호사
여유로움이라 쓰고
잠시 먼 산을 보며 멀리 보는 연습을 한다
나는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내 어깨가 피 빠진 스테이크처럼 굳어져 있나 보다
옮겨 심은 화초처럼 늘 새로운 땅에 뿌리 내리는 일은 어렵다
새로운 땅 같은 주방에서 주방 도구를 찾는 일도
재료를 찾는 일도 새로운 곳에서 낯설음은
늘 시간에 쫓기는 사슴처럼
온몸에 깃털을 세우고 사주 경계하는 새처럼
여유로워지라고 마음에서 말해도 여유보다 두려움과 낯섬
토끼장에 갇힌 토끼가 귀를 세우고 빨간 눈으로
가끔씩 철조망 밖을 바라보다 맴돌듯
쫓아 오는 시간에 줄행랑치면 칠수록
거리는 가까이 좁혀지듯이
땅 위 주인이 아닌 잡초로 사는 일은
늘 버겁다.
#작가의 변
어려서 집에 토끼를 기른 적이 있다. 토끼는 아무 잡초나 먹지 않는다고 해서 누에도 좋아하는 뽕잎을 따다가 먹여 길렀다. 새끼를 정말로 많이 낳았는데, 다음 날 보니 새끼가 한 마리도 없었다. 엄마는 부정을 타면 새끼를 잡아먹는다더라고 말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엄마가 먹을 수가 있지 그것도 풀만 먹는 토끼가?
소여물을 벨 때는 웬만한 것은 다 먹는 소이기 때문에 논두렁이나 개울 근처에 풀을 베어 다 주면 잘 먹는다. 그런데 논 과에 농약을 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산에 가서 소먹이인 꼴을 베어 왔다. 겨울엔 농약을 주고 기른 볏짚을 썰어 콩깍지와 함께 소 죽을 쑤어 주었다.
농약이 주 농산물인 벼와 고추, 배추, 감자, 보리 등을 벌레나 나쁜 균으로부터 지켜주지만, 집에 농약이 가까이 있으니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벼농사를 예로 들면 벼를 심어 놓고 물 위에 뜨는 벼를 다시심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라면 풀을 뽑아서 잡초로 가는 영양분을 벼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한다. 피라고 부르는 잡초가 논에는 유난히 많다. 그런데 오래전엔 피를 벼 대신 심었다고 들었다. 당시엔 피가 주산물이었는데, 벼를 심으면서 피는 잡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각종 살충제와 살균제를 뿌리고 비료도 주면서 벼가 자라는데 그렇게 농약을 주면서 가을걷이때 그 많던 메뚜기도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논에 살던 미꾸라지 등 다른 물고기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요즘은 무농약 무공해 유기농으로 벼를 기르는 곳엔 다시 메뚜기도 뛰고 미꾸라지도 살아 있고 봄엔 개구리알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배탈이 나면 늘 먹던 익모초는 배앓이의 만병통치약이었다. 그 쓰디쓴 익모초를 짓 이겨 삼베 보자기에 꼭 짜서 약을 먹는 사발에 주면서 쭉 들이키라고 한다. 한약보다 쓴 것이 익모초이다. 그리고 앞 산 나무에 상처를 내고 나무 수액을 받아서 약이라고 파는 것을 보았고 좀 먹어보니 물과 다름이 없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두레박 샘물은 오염이 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샘물로 성수처럼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는 했다. 여름엔 개울로 나가서 세수하면서 물 위에서 피어 나는 아지랑이를 보기도 하고 풀잎에 맺힌 이슬이 정말 보석처럼 빛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먹는 것을 걱정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가게에 가도 ‘라면땅’이나 ‘자야’같은 과자밖에 없었고 돈이 없어 자주 사 먹는 것이 아니었으니 늘 산과 들에서 우리의 간식을 해결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먹지 않았다. 열매도 잘못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슴이나 산양 등이 산에서 살아가지만, 독초를 먹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심에 때로는 독초를 산나물이나 약초로 알고 먹는 경우가 있어 죽는 일도 있다. 독버섯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우리가 아는 버섯들은 싸리버섯,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밤나무 버섯 등인데 땅에서 올라오는 버섯들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유혹한다. 그렇다고 땅에서 올라오는 버섯이 다 나쁜 독버섯은 아니다. 송이버섯은 비싸기도 하고 모습도 잘생겼다. 더덕이나 산삼은 약초로 산 사람들에게는 늘 꿈에 그리는 약초이기도 하다. 그 이외에도 산수유나 버찌, 산초 등 산에는 수없이 많은 약초가 나온다. 하지만 모르면 다 잡초일 뿐이다. 취나물을 만들어 먹는 취도 모르면 한낮 잡초로 보일 뿐이다.
잡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요즘은 우리가 모르던 잡초에서 약 성분을 추출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독초도 마찬가지다. 독초와 약초의 차이는 얼마나 양을 조절해서 환자에게 쓰느냐는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독사의 독도 병 치료를 위해서 약으로 개발되고 있다. 옛날엔 독사에 물리면 병원에 가기 전에 이미 손을 쓸 수 없이 퍼져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캐나다에서는 몇 년 전부터 마리화나를 불법에서 합법으로 바꾸어 마리화나 판매하는 가게도 있다.
마리화나는, 잡초, 화초, 마약, 잔디. 대마초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약의 다르게 불리는 이름이다. 그것을 피우거나, 파이핑하거나, 마시거나, 먹을 수도 있다. 대부분 사람은 즐거움과 오락을 위해 마리화나를 사용한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의사가 특정한 의학적 상태와 증상을 위해 그것을 처방한다. 마리화나는 뇌와 몸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을 변화시키는 화합물 작용을 한다. 그것은 중독성을 일으키기도 하고, 일부 사람들의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마리화나를 사용하면 여러 가지 작용을 일으킨다.
붕붕 떠다니는 몽롱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대부분 사람이 마리화나를 시도하는 이유다. 주요 정신 활성 성분인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Tetrahydrocannabinol)는 음식과 섹스와 같이 즐거움에 반응하는 뇌의 일부분을 자극한다. 그것은 도파민이라는 화학물질을 방출하는데, 이것은 당신에게 행복감과 편안한 느낌을 만들어 준다.
마리화나를 피운다면,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은 몇 초 혹은 몇 분 안에 최고치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게 여러분의 피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 수치는 보통 30분 이내 최고조에 달하며, 그 효과는 1~3시간 내 사라질 수 있다. 술을 마셨을 때 완전히 깨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락용 마리화나가 얼마나 강력한지 항상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의료용 마리화나에도 적용된다.
마리화나는 환자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마리화나에 대한 경험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거나, 편집증적으로 만들 수 있다.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것은 임상적 우울증의 가능성을 높이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정신 질환의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과학자들은 아직 정확한 이유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고용량의 경우, 그것은 당신을 편집증적으로 만들거나 현실과의 접촉을 잃게 해서 현실에 없는 것들을 듣거나 볼 수 있다. 생각이 왜곡되고 감각과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마리화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어떻게 복용했는지 그리고 과거 얼마나 오래 많이 복용했었는지 등에 따라 효과는 달라지기도 한다. 감각을 높이고 시간 감각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마리화나는 운동계통을 손상하고 운전을 위험하게 만들고 위험한 성관계를 가지려는 욕망을 가지거나 억지력이 낮아질 수도 있다. 중독을 일으켜서 직업, 건강, 재정 등에 해를 끼쳐도 멈추지 못하게 된다. 중독되면 뇌와 폐에 영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솔잎을 정제해서 약을 만들고 엉겅퀴를 정제해서 간 기능 강화제를 만들기도 한다.
된장도 탈지 대두에 핵산을 넣어 만든 가짜를 만들어 팔고 발효하지 않은 산분해 간장을 만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콩을 쑤고 메주를 발로 밟아서 걸어 두었다가 발효가 된 다음에 재래된장 간장을 만들던 것이 당연하던 시대와 다르다. 소금에 절여 쌀겨 속에 숙성시켜 쭈글쭈글한 단무지 대신 각종 조미료 범벅에 첨가물과 색소 인산으로 만들어 탱탱하고 보기 좋은 단무지로 김밥을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기 좋고 탱탱하고 색깔이 좋은 것을 원하지 벌레 먹고 쭈글쭈글하고 못생긴 것은 외면한다.
어물과 게살 없는 게맛살은 향유와 색소, 유화제 보존료, 인산염, 카라키난(혀변, 염증원인) 등의 각종 화학물질로 만들다. 돈이 없는 이들이 주로 먹는 라면은 첨가물 범벅이다. 이름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화학물 투성이다. 명란젓에도 색을 예쁘게 하기 위해 아질산나트륨이란 화학물질을 넣는다.
어려서 어머니가 설탕을 힘없을 때 먹는 영양제로 따뜻한 물에 타서 준 적이 있다. 그 달콤함이 중독을 일으키고 현대인 만병의 근원이다. 그 설탕이 나쁘다고 하니까 아스파탐, 사카린, 등 감미료와 식품 첨가물을 대체해서 주스를 만들고 밀가루와 섞어 과자를 만든다. 탄산음료도 마찬가지다. 달콤함에 중독된 사람들이 바삭함에 중독된 사람들이 좋아하면 할수록 점점 음식도 과자도 음료수도 첨가물과 감미료로 만든 독약을 먹고 있다.
사람도 인공화학물처럼 변화되고 달콤함에 빠져서 편리함에 중독이 되어 가짜 세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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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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