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1. 생지옥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1. 생지옥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7.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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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집

무거운 집 짊어지고 평생 다니는 달팽이
무거운 지게 지고 평생 농사 짓던 아버지

알버츠포드 산동네 부산 쪽방촌 집들처럼
다닥다닥 짐을 가슴에 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

흙벽돌 집이 대리석 고성보다 단단해 보이던 시절
석회마감 깨진 한쪽벽 내장처럼
드러내 보이던 흙벽돌처럼

피흘리듯 공사장 인부 땀들이
달팽이가 흘린 점액질같이 스며들고

청개구리 내 손등 앉았을때처럼 부드러운 촉감사이로
아스팔트같은 고층아파트 암벽같은 날에.
 







 

#작가의 변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고 외면해서 잊고 있었을 뿐 생지옥이 존재한다.
좋은 말로는 먹이사슬이라고도 부르고, 천적이라고도 부르지만, 늘 두려움에 떠는 삶은 분명 생지옥이 분명하다. 잠자리 유충은 올챙이를 잡아먹고 산다. 그리고 유충의 껍질을 벗고 세상을 날아다닐 날개를 어깨에 달았 을때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한 개구리에게 한 끼 식사가 된다.

개구리와 쥐 등은 뱀의 한 끼 식사가 된다. 물론 토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토끼보다도 가벼운 작은 동물인 몽구스는 코브라를 사냥한다. 작은 동물이건 큰 동물까지 통째로 먹어 치우는 코브라가 아주 조그맣고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 몽구스의 사냥감이 된다. 보통 다른 동물은 코브라의 독의 공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거나 신경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몽구스는 코브라의 독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공격하여 결국엔 코브라를 한 끼 식사 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다른 뱀들은 당연히 몽구스의 쉬운 식사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 뱀은 자신보다 작거나 약한 뱀을 잡아먹는다. 귀여워서 집에서 기르기도 하는 햄스터나 거미, 사마귀도 동족을 잡아먹는다. 거미와 사마귀는 교미 후 수컷을 암놈이 잡아먹는다.

또 바닷속에서도 상어와 망둥어, 새우, 오징어 문어 등은 같은 동족을 잡아먹는다. 우리가 쥐포로 즐기는 쥐치는 해안가에서 문제가 되는 해파리는 물론 불가사리는 물론 갑각류 등을 먹어 치우는데, 사람들이 쥐치를 많이 먹어서인지 해파리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바다 수온의 변화라고도 말하지만, 천적이 줄어들어서는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아주 즐기는 생선이 있다. 아귀는 많은 사람이 즐긴다. 그런데 난 늘 아귀찜을 먹을 때마다 아귀는 잘 안 보이고 콩나물과 미더덕만 보인 기억이 있다. 느낌이 마치 미더덕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아귀가 우리가 늘 말하는 아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아귀는 불경에서 그 모습을 목구멍은 가늘고 배는 커서 늘 배고프지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보다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목구멍이 작고 뱃고래가 크다고 해도 식욕을 잃고 먹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습의 기괴함보다는 그 마음의 기괴함이 더 큰 것이다. 끊없는 욕심이 결국은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원숭이나 고릴라는 사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이 사람과 다른 것은 동족을 먹는 모습과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동족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기근과 배고픔에 약한 사람을 죽여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배어 가서 코 무덤과 귀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존유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동족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고, 현재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들은 원숭이 사냥을 해서 잡아먹는데 그것이 마치 동족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지구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닌 살아 있는 이곳이 지옥이다.

동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택하고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돈에 의해서 사상에 의해서 동족에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죽어 나간다. 자본은 권력과 신문방송 등을 통해 힘없고 권력의 그늘에 있는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나팔을 분다. 경찰이 노동자를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깨지게 하고도 법을 집행했다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말이다. 자본은 건물주, 지주, 전주, 자본주, 권련가 등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악어가 동족을 삼키듯 뼈까지 삼켜버린다.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고통을 참고 있던 민중은 무기를 들고 항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히 달래서 계속 그 지옥도 안에 가두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 한다. 그곳이 생지옥이다. 부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신도이어야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등값도 천차만별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마음만 바치면 늘 핍박받고 무시받기 쉽다. 결혼식 축의금처럼 헌금 봉투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돈이 없어 햇쌀을 만들어 햇곡식을 수확해서 절로 향하던 시골 아낙들이 설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지옥이다. 소로 태어나서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소가 농사를 다 하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농기계가 농사를 짓고 소는 그저 살을 찌워서 스테이크와 국거리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흙을 밟지 않고 살기도 하며 새들이 지렁이를 먹고 거미가 잠자리를 먹는 그런 모습보다는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가끔 도시에 나타난 너구리가 신호등도 모른 채 가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 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동물만 로드킬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전쟁에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교통사고로 죽어간다.

식물이나 동물은 다들 종족 번식을 가장 큰 생의 목적으로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누리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돈이 없어 못 하고, 종족 번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남자아이를 못 나으면 대를 끊는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환생해서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곤충으로 태어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그 죽음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살아갈 땅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구엔 축생으로 태어나면 점점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도 많아 악귀도 많다. 불은 수시로 숲을 태우고 불지옥을 만든다. 천상세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먼 별들까지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인데 우주의 주인인 창조주나 부처님을 밖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있고 깨닫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생지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만 가져도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고 살인과 전쟁이 생긴다. 지구상엔 전쟁이 끝날 날이 없고 억울한 죽음이 늘 존재한다. 마약을 위해 살아 가는 사람들은 목적이 마약이어서 도둑질은 물론 약탈과 방화 등도 서슴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범죄와 싸우면서 지쳐 가는 세상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의 것인 양 마구 휘둘려 사람들을 더욱더 깊은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서민의 생명을 지키지 않고 염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엔 나라가 위급시에 백성이,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선 예는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천상세계로 이끌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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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집

무거운 집 짊어지고 평생 다니는 달팽이
무거운 지게 지고 평생 농사 짓던 아버지

알버츠포드 산동네 부산 쪽방촌 집들처럼
다닥다닥 짐을 가슴에 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

흙벽돌 집이 대리석 고성보다 단단해 보이던 시절
석회마감 깨진 한쪽벽 내장처럼
드러내 보이던 흙벽돌처럼

피흘리듯 공사장 인부 땀들이
달팽이가 흘린 점액질같이 스며들고

청개구리 내 손등 앉았을때처럼 부드러운 촉감사이로
아스팔트같은 고층아파트 암벽같은 날에.
 





달팽이 집

무거운 집 짊어지고 평생 다니는 달팽이
무거운 지게 지고 평생 농사 짓던 아버지

알버츠포드 산동네 부산 쪽방촌 집들처럼
다닥다닥 짐을 가슴에 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

흙벽돌 집이 대리석 고성보다 단단해 보이던 시절
석회마감 깨진 한쪽벽 내장처럼
드러내 보이던 흙벽돌처럼

피흘리듯 공사장 인부 땀들이
달팽이가 흘린 점액질같이 스며들고

청개구리 내 손등 앉았을때처럼 부드러운 촉감사이로
아스팔트같은 고층아파트 암벽같은 날에.
 







 

#작가의 변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고 외면해서 잊고 있었을 뿐 생지옥이 존재한다.
좋은 말로는 먹이사슬이라고도 부르고, 천적이라고도 부르지만, 늘 두려움에 떠는 삶은 분명 생지옥이 분명하다. 잠자리 유충은 올챙이를 잡아먹고 산다. 그리고 유충의 껍질을 벗고 세상을 날아다닐 날개를 어깨에 달았 을때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한 개구리에게 한 끼 식사가 된다.

개구리와 쥐 등은 뱀의 한 끼 식사가 된다. 물론 토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토끼보다도 가벼운 작은 동물인 몽구스는 코브라를 사냥한다. 작은 동물이건 큰 동물까지 통째로 먹어 치우는 코브라가 아주 조그맣고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 몽구스의 사냥감이 된다. 보통 다른 동물은 코브라의 독의 공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거나 신경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몽구스는 코브라의 독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공격하여 결국엔 코브라를 한 끼 식사 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다른 뱀들은 당연히 몽구스의 쉬운 식사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 뱀은 자신보다 작거나 약한 뱀을 잡아먹는다. 귀여워서 집에서 기르기도 하는 햄스터나 거미, 사마귀도 동족을 잡아먹는다. 거미와 사마귀는 교미 후 수컷을 암놈이 잡아먹는다.

또 바닷속에서도 상어와 망둥어, 새우, 오징어 문어 등은 같은 동족을 잡아먹는다. 우리가 쥐포로 즐기는 쥐치는 해안가에서 문제가 되는 해파리는 물론 불가사리는 물론 갑각류 등을 먹어 치우는데, 사람들이 쥐치를 많이 먹어서인지 해파리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바다 수온의 변화라고도 말하지만, 천적이 줄어들어서는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아주 즐기는 생선이 있다. 아귀는 많은 사람이 즐긴다. 그런데 난 늘 아귀찜을 먹을 때마다 아귀는 잘 안 보이고 콩나물과 미더덕만 보인 기억이 있다. 느낌이 마치 미더덕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아귀가 우리가 늘 말하는 아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아귀는 불경에서 그 모습을 목구멍은 가늘고 배는 커서 늘 배고프지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보다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목구멍이 작고 뱃고래가 크다고 해도 식욕을 잃고 먹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습의 기괴함보다는 그 마음의 기괴함이 더 큰 것이다. 끊없는 욕심이 결국은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원숭이나 고릴라는 사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이 사람과 다른 것은 동족을 먹는 모습과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동족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기근과 배고픔에 약한 사람을 죽여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배어 가서 코 무덤과 귀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존유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동족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고, 현재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들은 원숭이 사냥을 해서 잡아먹는데 그것이 마치 동족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지구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닌 살아 있는 이곳이 지옥이다.

동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택하고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돈에 의해서 사상에 의해서 동족에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죽어 나간다. 자본은 권력과 신문방송 등을 통해 힘없고 권력의 그늘에 있는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나팔을 분다. 경찰이 노동자를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깨지게 하고도 법을 집행했다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말이다. 자본은 건물주, 지주, 전주, 자본주, 권련가 등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악어가 동족을 삼키듯 뼈까지 삼켜버린다.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고통을 참고 있던 민중은 무기를 들고 항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히 달래서 계속 그 지옥도 안에 가두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 한다. 그곳이 생지옥이다. 부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신도이어야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등값도 천차만별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마음만 바치면 늘 핍박받고 무시받기 쉽다. 결혼식 축의금처럼 헌금 봉투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돈이 없어 햇쌀을 만들어 햇곡식을 수확해서 절로 향하던 시골 아낙들이 설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지옥이다. 소로 태어나서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소가 농사를 다 하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농기계가 농사를 짓고 소는 그저 살을 찌워서 스테이크와 국거리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흙을 밟지 않고 살기도 하며 새들이 지렁이를 먹고 거미가 잠자리를 먹는 그런 모습보다는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가끔 도시에 나타난 너구리가 신호등도 모른 채 가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 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동물만 로드킬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전쟁에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교통사고로 죽어간다.

식물이나 동물은 다들 종족 번식을 가장 큰 생의 목적으로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누리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돈이 없어 못 하고, 종족 번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남자아이를 못 나으면 대를 끊는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환생해서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곤충으로 태어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그 죽음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살아갈 땅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구엔 축생으로 태어나면 점점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도 많아 악귀도 많다. 불은 수시로 숲을 태우고 불지옥을 만든다. 천상세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먼 별들까지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인데 우주의 주인인 창조주나 부처님을 밖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있고 깨닫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생지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만 가져도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고 살인과 전쟁이 생긴다. 지구상엔 전쟁이 끝날 날이 없고 억울한 죽음이 늘 존재한다. 마약을 위해 살아 가는 사람들은 목적이 마약이어서 도둑질은 물론 약탈과 방화 등도 서슴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범죄와 싸우면서 지쳐 가는 세상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의 것인 양 마구 휘둘려 사람들을 더욱더 깊은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서민의 생명을 지키지 않고 염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엔 나라가 위급시에 백성이,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선 예는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천상세계로 이끌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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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고 외면해서 잊고 있었을 뿐 생지옥이 존재한다.
좋은 말로는 먹이사슬이라고도 부르고, 천적이라고도 부르지만, 늘 두려움에 떠는 삶은 분명 생지옥이 분명하다. 잠자리 유충은 올챙이를 잡아먹고 산다. 그리고 유충의 껍질을 벗고 세상을 날아다닐 날개를 어깨에 달았 을때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한 개구리에게 한 끼 식사가 된다.

개구리와 쥐 등은 뱀의 한 끼 식사가 된다. 물론 토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토끼보다도 가벼운 작은 동물인 몽구스는 코브라를 사냥한다. 작은 동물이건 큰 동물까지 통째로 먹어 치우는 코브라가 아주 조그맣고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 몽구스의 사냥감이 된다. 보통 다른 동물은 코브라의 독의 공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거나 신경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몽구스는 코브라의 독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공격하여 결국엔 코브라를 한 끼 식사 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다른 뱀들은 당연히 몽구스의 쉬운 식사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 뱀은 자신보다 작거나 약한 뱀을 잡아먹는다. 귀여워서 집에서 기르기도 하는 햄스터나 거미, 사마귀도 동족을 잡아먹는다. 거미와 사마귀는 교미 후 수컷을 암놈이 잡아먹는다.

또 바닷속에서도 상어와 망둥어, 새우, 오징어 문어 등은 같은 동족을 잡아먹는다. 우리가 쥐포로 즐기는 쥐치는 해안가에서 문제가 되는 해파리는 물론 불가사리는 물론 갑각류 등을 먹어 치우는데, 사람들이 쥐치를 많이 먹어서인지 해파리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바다 수온의 변화라고도 말하지만, 천적이 줄어들어서는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아주 즐기는 생선이 있다. 아귀는 많은 사람이 즐긴다. 그런데 난 늘 아귀찜을 먹을 때마다 아귀는 잘 안 보이고 콩나물과 미더덕만 보인 기억이 있다. 느낌이 마치 미더덕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아귀가 우리가 늘 말하는 아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아귀는 불경에서 그 모습을 목구멍은 가늘고 배는 커서 늘 배고프지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보다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목구멍이 작고 뱃고래가 크다고 해도 식욕을 잃고 먹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습의 기괴함보다는 그 마음의 기괴함이 더 큰 것이다. 끊없는 욕심이 결국은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원숭이나 고릴라는 사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이 사람과 다른 것은 동족을 먹는 모습과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동족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기근과 배고픔에 약한 사람을 죽여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배어 가서 코 무덤과 귀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존유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동족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고, 현재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들은 원숭이 사냥을 해서 잡아먹는데 그것이 마치 동족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지구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닌 살아 있는 이곳이 지옥이다.

동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택하고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돈에 의해서 사상에 의해서 동족에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죽어 나간다. 자본은 권력과 신문방송 등을 통해 힘없고 권력의 그늘에 있는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나팔을 분다. 경찰이 노동자를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깨지게 하고도 법을 집행했다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말이다. 자본은 건물주, 지주, 전주, 자본주, 권련가 등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악어가 동족을 삼키듯 뼈까지 삼켜버린다.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고통을 참고 있던 민중은 무기를 들고 항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히 달래서 계속 그 지옥도 안에 가두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 한다. 그곳이 생지옥이다. 부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신도이어야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등값도 천차만별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마음만 바치면 늘 핍박받고 무시받기 쉽다. 결혼식 축의금처럼 헌금 봉투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돈이 없어 햇쌀을 만들어 햇곡식을 수확해서 절로 향하던 시골 아낙들이 설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지옥이다. 소로 태어나서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소가 농사를 다 하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농기계가 농사를 짓고 소는 그저 살을 찌워서 스테이크와 국거리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흙을 밟지 않고 살기도 하며 새들이 지렁이를 먹고 거미가 잠자리를 먹는 그런 모습보다는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가끔 도시에 나타난 너구리가 신호등도 모른 채 가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 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동물만 로드킬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전쟁에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교통사고로 죽어간다.

식물이나 동물은 다들 종족 번식을 가장 큰 생의 목적으로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누리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돈이 없어 못 하고, 종족 번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남자아이를 못 나으면 대를 끊는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환생해서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곤충으로 태어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그 죽음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살아갈 땅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구엔 축생으로 태어나면 점점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도 많아 악귀도 많다. 불은 수시로 숲을 태우고 불지옥을 만든다. 천상세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먼 별들까지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인데 우주의 주인인 창조주나 부처님을 밖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있고 깨닫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생지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만 가져도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고 살인과 전쟁이 생긴다. 지구상엔 전쟁이 끝날 날이 없고 억울한 죽음이 늘 존재한다. 마약을 위해 살아 가는 사람들은 목적이 마약이어서 도둑질은 물론 약탈과 방화 등도 서슴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범죄와 싸우면서 지쳐 가는 세상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의 것인 양 마구 휘둘려 사람들을 더욱더 깊은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서민의 생명을 지키지 않고 염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엔 나라가 위급시에 백성이,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선 예는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천상세계로 이끌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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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집

무거운 집 짊어지고 평생 다니는 달팽이
무거운 지게 지고 평생 농사 짓던 아버지

알버츠포드 산동네 부산 쪽방촌 집들처럼
다닥다닥 짐을 가슴에 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

흙벽돌 집이 대리석 고성보다 단단해 보이던 시절
석회마감 깨진 한쪽벽 내장처럼
드러내 보이던 흙벽돌처럼

피흘리듯 공사장 인부 땀들이
달팽이가 흘린 점액질같이 스며들고

청개구리 내 손등 앉았을때처럼 부드러운 촉감사이로
아스팔트같은 고층아파트 암벽같은 날에.
 







 

#작가의 변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고 외면해서 잊고 있었을 뿐 생지옥이 존재한다.
좋은 말로는 먹이사슬이라고도 부르고, 천적이라고도 부르지만, 늘 두려움에 떠는 삶은 분명 생지옥이 분명하다. 잠자리 유충은 올챙이를 잡아먹고 산다. 그리고 유충의 껍질을 벗고 세상을 날아다닐 날개를 어깨에 달았 을때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한 개구리에게 한 끼 식사가 된다.

개구리와 쥐 등은 뱀의 한 끼 식사가 된다. 물론 토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토끼보다도 가벼운 작은 동물인 몽구스는 코브라를 사냥한다. 작은 동물이건 큰 동물까지 통째로 먹어 치우는 코브라가 아주 조그맣고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 몽구스의 사냥감이 된다. 보통 다른 동물은 코브라의 독의 공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거나 신경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몽구스는 코브라의 독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공격하여 결국엔 코브라를 한 끼 식사 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다른 뱀들은 당연히 몽구스의 쉬운 식사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 뱀은 자신보다 작거나 약한 뱀을 잡아먹는다. 귀여워서 집에서 기르기도 하는 햄스터나 거미, 사마귀도 동족을 잡아먹는다. 거미와 사마귀는 교미 후 수컷을 암놈이 잡아먹는다.

또 바닷속에서도 상어와 망둥어, 새우, 오징어 문어 등은 같은 동족을 잡아먹는다. 우리가 쥐포로 즐기는 쥐치는 해안가에서 문제가 되는 해파리는 물론 불가사리는 물론 갑각류 등을 먹어 치우는데, 사람들이 쥐치를 많이 먹어서인지 해파리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바다 수온의 변화라고도 말하지만, 천적이 줄어들어서는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아주 즐기는 생선이 있다. 아귀는 많은 사람이 즐긴다. 그런데 난 늘 아귀찜을 먹을 때마다 아귀는 잘 안 보이고 콩나물과 미더덕만 보인 기억이 있다. 느낌이 마치 미더덕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아귀가 우리가 늘 말하는 아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아귀는 불경에서 그 모습을 목구멍은 가늘고 배는 커서 늘 배고프지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보다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목구멍이 작고 뱃고래가 크다고 해도 식욕을 잃고 먹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습의 기괴함보다는 그 마음의 기괴함이 더 큰 것이다. 끊없는 욕심이 결국은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원숭이나 고릴라는 사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이 사람과 다른 것은 동족을 먹는 모습과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동족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기근과 배고픔에 약한 사람을 죽여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배어 가서 코 무덤과 귀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존유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동족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고, 현재도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들은 원숭이 사냥을 해서 잡아먹는데 그것이 마치 동족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지구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닌 살아 있는 이곳이 지옥이다.

동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택하고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돈에 의해서 사상에 의해서 동족에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고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죽어 나간다. 자본은 권력과 신문방송 등을 통해 힘없고 권력의 그늘에 있는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나팔을 분다. 경찰이 노동자를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깨지게 하고도 법을 집행했다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말이다. 자본은 건물주, 지주, 전주, 자본주, 권련가 등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악어가 동족을 삼키듯 뼈까지 삼켜버린다.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고통을 참고 있던 민중은 무기를 들고 항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히 달래서 계속 그 지옥도 안에 가두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 한다. 그곳이 생지옥이다. 부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신도이어야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등값도 천차만별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마음만 바치면 늘 핍박받고 무시받기 쉽다. 결혼식 축의금처럼 헌금 봉투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돈이 없어 햇쌀을 만들어 햇곡식을 수확해서 절로 향하던 시골 아낙들이 설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지옥이다. 소로 태어나서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소가 농사를 다 하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농기계가 농사를 짓고 소는 그저 살을 찌워서 스테이크와 국거리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흙을 밟지 않고 살기도 하며 새들이 지렁이를 먹고 거미가 잠자리를 먹는 그런 모습보다는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가끔 도시에 나타난 너구리가 신호등도 모른 채 가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 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동물만 로드킬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전쟁에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교통사고로 죽어간다.

식물이나 동물은 다들 종족 번식을 가장 큰 생의 목적으로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누리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돈이 없어 못 하고, 종족 번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남자아이를 못 나으면 대를 끊는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환생해서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곤충으로 태어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그 죽음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살아갈 땅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구엔 축생으로 태어나면 점점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도 많아 악귀도 많다. 불은 수시로 숲을 태우고 불지옥을 만든다. 천상세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먼 별들까지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인데 우주의 주인인 창조주나 부처님을 밖에서 찾으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있고 깨닫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생지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만 가져도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고 살인과 전쟁이 생긴다. 지구상엔 전쟁이 끝날 날이 없고 억울한 죽음이 늘 존재한다. 마약을 위해 살아 가는 사람들은 목적이 마약이어서 도둑질은 물론 약탈과 방화 등도 서슴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범죄와 싸우면서 지쳐 가는 세상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의 것인 양 마구 휘둘려 사람들을 더욱더 깊은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서민의 생명을 지키지 않고 염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엔 나라가 위급시에 백성이,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선 예는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천상세계로 이끌어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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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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