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불광출판사에서 향봉 스님의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이라는 책을 내더니 불광미디어에서는 유튜브에 향봉 스님의 설법을 지속적으로 업로드하고 있다. 경전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기초상식에도 맞지 않는 향봉 스님의 설법은 불자들과 비불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동안 양질의 불교 서적을 꾸준히 출판해온 불광출판사에서 윤회를 부정하는 설법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누가 어떤 말을 해서라도 책만 잘 팔리고 돈만 잘 벌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인가? 불광출판사는 불광(佛光)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불광(佛光)을 꺼뜨리는 짓을 하고 있다. 또한 향봉 스님을 모셔다가 법석을 만들어 드리는 상도동 보문사 스님도 제대로 된 불교관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 여러 면에서 향봉 스님의 설법은 지금의 한국불교 수준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은 아래처럼 명쾌하게 윤회를 설명한다.
“欲知前生事(욕지전생사) :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今生受者是(금생수자시) : 금생에 겪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欲知來生事(욕지내생사) :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今生作者是(금생작자시) : 금생에 짓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
앙굿따라 경우 경(A5:57)에서는 설명이 더욱 자상하다.
“나의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내가 선업을 짓건 악업을 짓건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위 게송들처럼 전생과 내생은 업의 흐름임을 설하고 계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인과응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전생과 금생과 내생이 업의 흐름임을 설하는 부처님께 대항하여 향봉 스님은 전생과 내생이 없다, 윤회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향봉 스님은 윤회설은 인도 〈리그베다〉에서 비롯된 조령제(祖靈祭)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학자가 윤회는 힌두교 사상이고 부처님이 잠시 방편설로 이용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오부 니까야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았다면 윤회가 다른 교리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부처님의 생존 시기에 5도 윤회설만 등장하고 육도 윤회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육도 윤회설은 후대에 만들어 진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런데 부처님이 성도 후 3~4년째 웨살리에서 설해진 보배경에는 4가지 악처라는 단어가 나온다.
“통찰지를 구족하여 세 가지 족쇄를 버린 이들은 네 가지 악처에서(Catūhapāyehi) 벗어나고 여섯 가지 악행을 범하지 않네. 승가 안에 이 으뜸가는 보배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모두 행복하기를!”
여기서 네 가지 악처란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에 태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미 보배경에서 네 가지 세계를 악처로 표현하고 인간과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선처(善處)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육도윤회는 부처님 당시에도 사용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봉 스님은 승가의 범위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이라고 설명한다. 현 한글 삼귀의가 “스님들께”만 귀의한다고 되어 있으니 불만이 많겠다. 경전의 인용도 어긋나있다.
왓차곳따 불 경(M72)에서 부처님은 타고 있는 불이 꺼졌다면 그 불이 어디로 갔다고 말하지 못하듯이 아라한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을 향봉 스님은 사람이 죽으면 윤회하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윤회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아라한이나 부처님처럼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 자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비유이다. ‘무아’와 ‘윤회’를 일직선상에 놓고 서로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치한 발상이다. 비유하자면 눈 뜨고 있는 상태가 무아라면 눈 감고 있는 상태는 윤회의 상태이다. 눈 뜬 상태와 눈 감은 상태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은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눈 감고 있느냐’라는 질문처럼 성립하지 않은 질문이다. 중생은 무아를 모르기에 윤회하는 것이고 아라한은 무아를 깨쳤기에 윤회하지 않는다. 무아를 모르는 자는 ‘나의 것’이라는 갈애와 ‘나’라는 자만과 ‘나의 자아’라는 무지를 갖고 살아간다.
향봉 스님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서 아이가 생기는데 쌍둥이가 생기지 않고 하나의 아이가 생긴다면 영혼이 두 개가 만나서 하나의 영혼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은 인과법칙으로도 맞지 않다고 말한다. 남자 여자는 각각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이 만나야 하나의 생명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향봉 스님은 정자와 난자를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로 보고 있다. 이렇게 일반상식에도 못 미치는 논리로 윤회를 부정하는 것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향봉 스님은 연기법칙을 인정하면서도 태어남을 있게 한 원인과 조건은 부정한다. 부처님은 태어남에는 원인(hetu)과 조건(paccaya)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태어나게(jāti) 된 것은 업(bhava)을 지었기 때문이고, 업(bhava)은 취착(upādāna)이 있기 때문이고, 취착(upādāna)은 갈애(taṇhā)때문에 생긴다. 이것을 간단하게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향봉 스님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는 연기 공식은 인정하면서도 태어남(jāti)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 향봉이라는 존재가 어떤 원인도 조건도 없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조주가 지구를 만들고 나서 삼일 뒤에 별들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이야기보다 더 황당하지 않은가?(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고 은하계의 나이가 136억 년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지구를 만들기 91억 년 전에 이미 은하계 별들이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향봉 스님의 말처럼 죽으면 모든 게 단절되는 게 인생이라면 과연 향봉 스님이 250계의 비구계를 받고 출가수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즐기고 오히려 욕망을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내생이 없는데 어떻게 살다가 죽은 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연기법은 인정하지만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주장은 스스로 모순을 만든다. 나는 남자지만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격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 경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른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고 팔정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문 생활의 결실인 해탈 열반을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사후세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향봉 스님처럼 가사를 수하고 평생 부처님의 품 안에 머물렀으면서 경전에 나와 있는 스승의 말씀을 함부로 부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런 주장을 이용하여 책을 내고 동영상을 만들어 돈벌이로 활용하는 것은 불자들이 실천해야할 삶의 방법이 아니다. 향봉 스님 이전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많아서 “윤회를 증거하는 경전들(https://whoami555.tistory.com/13742594)” 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부처님이 윤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구체적인 내용을 보려면 이 글을 참조하시라.
https://www.youtube.com/watch?v=E0lCkYX-tzg&t=140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