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4. 같고도 다른 아기처럼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4. 같고도 다른 아기처럼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7.31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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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통이 심하면 아빠 머리채를 잡는 드라마처럼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제왕 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아이
수술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
병실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긴 터널

따뜻한 물 떠와라
가위를 준비해라
삼신할미 같은 산파의 명령에 안절부절하던
아버지 모습처럼 나도 아버지가 되었지
병실에서 버스 운전기사 앞에 걸어 놓은 기도 사진처럼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처럼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잘못을 여물 되새기듯 되새기며
제발 남들처럼 아무 일 없기를

산모 고통이 내 잘못인 것 같고
아이 아픔이 내 업인 것처럼
빚 진자의 애원처럼
이번만 봐주면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갚겠다고

보지도 못한 내 어릴 적 얼굴이 이랬다며
아이 탄생으로 나를 봤다
창조주가 그랬으려니
내 모습처럼 눈 코 입 손발이 닮은 아이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아빠 얼굴

많이 먹고 잘 먹고 잘 자면 좀 좋아
조금 먹고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잠이 부족해 부스스하던 날들도 가고
내 키보다 큰아들 모습에도 근심은 떠날 길 없고.


#작가의 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세상엔 이쁘고 잘생긴 아기들이 많지만, 엄마 마음엔 늘 자신의 아기가 가장 소중하다. 과학적으로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만나 그 결합으로 아기가 태어났고,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씨도둑질 못 한다고 나의 복사판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식물에 암수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사랑을 나르고 이 꽃 저곳을 우편배달부처럼 사랑 배달을 하듯이 아이도 그렇게 사랑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달콤한 꿀처럼 사랑만 먹고 자라야 하지만 엄마 젖을 먹지도 못하고 소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자다가 눈도 뜨지 못하고 따뜻한 물에 분유를 타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시간에 아이 몸에서 나는 우유 냄새에 취해 똥을 싸고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빨고 빨랫감이 빨랫줄에 세상이 하얗게 변하도록 널어도 뽀송뽀송한 기저귀 냄새조차 좋았지.

그 볼에 얼굴을 비비는 그 시간엔 몰랐을 아빠 엄마는 아이가 웃는 모습에도, 아이가 기지개하는 모습에도 모든 게 좋았다. 뒤집고 기고, 짚고 일어서고, 걷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 모습에 앞으로 있을 고통스러운 순간은 상상도 못 한다.

세상엔 이미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고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아이는 안 그럴 거라며 혼자만의 믿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볼 수 없어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아이를 지옥으로 내몰면서도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더욱 채찍을 휘두른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낮과 밤으로 나누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후에 창조주는 자신을 닮은 인간 남자를 흙으로 창조하고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 갈빗대를 빼서 짝인 여자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면 창조주인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으로 자식인 인간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인간인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사탄을 만들고 선악과를 만들어 삶에 함정을 아주 많이도 파 놓았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로 사탄인 뱀의 꼬임에 넘어가 어리숙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든 원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창조주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알고 설계하고 창조했을 터인데 세상은 늘 고통 속에 살고 살아 있는 지옥 같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놓고 사랑보다는 미움과 다툼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배고픔에 고통받는 인류, 뻔한 앞도 내다보지 못해 지하 차도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이태원 길거리에서 생떼 같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 중동에서 끝없는 전쟁으로 수없는 생명이 목숨을 잃고, 더위에, 홍수에, 산불에 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있는 일이라면 사랑의 하느님은 죽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돈이 사람 목숨보다 귀한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 목숨을 곤충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세상을 만든 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없는 게 낫다. 약한 자를 위해 법을 만들고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부를 만들었지만, 왕정 시대처럼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명품 가방과 명품 양복, 페라리 같은 명품 차가 인간을 보는 가치가 된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동학 혁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종교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인내천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계급 사회는 원숭이 사회와 같고, 오랑우탄처럼 인간을 인간이 서로가 죽이고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낀다. 남의 불행을 보고 불안해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박수하는 사탄이 사람 속에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보는 불교에서도 돈을 가진 자, 공양을 많이 하는 자가 대접 받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버림받아 미국인, 스웨덴인으로 자란 아이들이 정체성에 괴로워하듯이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양된 백인 아이가 백인이어서 다른 외모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다.

서로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늘 창끝을 들이민다. 사람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아기가 모두 이쁜 것은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녀로 태어나서 미국인으로 살아 성공한 아이들도 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의 미소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주도 인간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인체가 매우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놀라고는 한다. 그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을 이미 인간은 가지고 있다. 물론 흙으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 유전자 복제이지만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공동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내 종교는 맞고 당신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의 생존 경쟁만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원숭이의 한 종이 진화해서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을 믿는다. 하느님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있었으면 초기 인류는 왜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는 미개 문명 속에 살아야 했을까? 선택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은 왜 수백 년을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만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같은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과 기독교 이슬람은 늘 전쟁하고 서로를 사탄이라 칭하고 이단이라고 말할까?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왜 불교에서는 이교도에 밀리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사라지고 한국에서만 천년을 넘게 꽃 피우다 기독교 국가처럼 되어 버렸을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계획한 것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부모인데 하느님은 왜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지도자로 세워 놓았을까? 아가의 얼굴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륵으로 오실 날을 기다려 본다. 우리 부처님은 창조주와는 다르게 자비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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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통이 심하면 아빠 머리채를 잡는 드라마처럼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제왕 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아이
수술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
병실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긴 터널

따뜻한 물 떠와라
가위를 준비해라
삼신할미 같은 산파의 명령에 안절부절하던
아버지 모습처럼 나도 아버지가 되었지
병실에서 버스 운전기사 앞에 걸어 놓은 기도 사진처럼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처럼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잘못을 여물 되새기듯 되새기며
제발 남들처럼 아무 일 없기를

산모 고통이 내 잘못인 것 같고
아이 아픔이 내 업인 것처럼
빚 진자의 애원처럼
이번만 봐주면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갚겠다고

보지도 못한 내 어릴 적 얼굴이 이랬다며
아이 탄생으로 나를 봤다
창조주가 그랬으려니
내 모습처럼 눈 코 입 손발이 닮은 아이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아빠 얼굴

많이 먹고 잘 먹고 잘 자면 좀 좋아
조금 먹고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잠이 부족해 부스스하던 날들도 가고
내 키보다 큰아들 모습에도 근심은 떠날 길 없고.

#작가의 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세상엔 이쁘고 잘생긴 아기들이 많지만, 엄마 마음엔 늘 자신의 아기가 가장 소중하다. 과학적으로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만나 그 결합으로 아기가 태어났고,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씨도둑질 못 한다고 나의 복사판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식물에 암수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사랑을 나르고 이 꽃 저곳을 우편배달부처럼 사랑 배달을 하듯이 아이도 그렇게 사랑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달콤한 꿀처럼 사랑만 먹고 자라야 하지만 엄마 젖을 먹지도 못하고 소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자다가 눈도 뜨지 못하고 따뜻한 물에 분유를 타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시간에 아이 몸에서 나는 우유 냄새에 취해 똥을 싸고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빨고 빨랫감이 빨랫줄에 세상이 하얗게 변하도록 널어도 뽀송뽀송한 기저귀 냄새조차 좋았지.

그 볼에 얼굴을 비비는 그 시간엔 몰랐을 아빠 엄마는 아이가 웃는 모습에도, 아이가 기지개하는 모습에도 모든 게 좋았다. 뒤집고 기고, 짚고 일어서고, 걷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 모습에 앞으로 있을 고통스러운 순간은 상상도 못 한다.

세상엔 이미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고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아이는 안 그럴 거라며 혼자만의 믿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볼 수 없어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아이를 지옥으로 내몰면서도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더욱 채찍을 휘두른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낮과 밤으로 나누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후에 창조주는 자신을 닮은 인간 남자를 흙으로 창조하고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 갈빗대를 빼서 짝인 여자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면 창조주인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으로 자식인 인간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인간인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사탄을 만들고 선악과를 만들어 삶에 함정을 아주 많이도 파 놓았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로 사탄인 뱀의 꼬임에 넘어가 어리숙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든 원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창조주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알고 설계하고 창조했을 터인데 세상은 늘 고통 속에 살고 살아 있는 지옥 같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놓고 사랑보다는 미움과 다툼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배고픔에 고통받는 인류, 뻔한 앞도 내다보지 못해 지하 차도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이태원 길거리에서 생떼 같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 중동에서 끝없는 전쟁으로 수없는 생명이 목숨을 잃고, 더위에, 홍수에, 산불에 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있는 일이라면 사랑의 하느님은 죽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돈이 사람 목숨보다 귀한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 목숨을 곤충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세상을 만든 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없는 게 낫다. 약한 자를 위해 법을 만들고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부를 만들었지만, 왕정 시대처럼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명품 가방과 명품 양복, 페라리 같은 명품 차가 인간을 보는 가치가 된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동학 혁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종교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인내천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계급 사회는 원숭이 사회와 같고, 오랑우탄처럼 인간을 인간이 서로가 죽이고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낀다. 남의 불행을 보고 불안해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박수하는 사탄이 사람 속에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보는 불교에서도 돈을 가진 자, 공양을 많이 하는 자가 대접 받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버림받아 미국인, 스웨덴인으로 자란 아이들이 정체성에 괴로워하듯이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양된 백인 아이가 백인이어서 다른 외모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다.

서로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늘 창끝을 들이민다. 사람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아기가 모두 이쁜 것은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녀로 태어나서 미국인으로 살아 성공한 아이들도 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의 미소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주도 인간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산통이 심하면 아빠 머리채를 잡는 드라마처럼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제왕 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아이
수술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
병실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긴 터널

따뜻한 물 떠와라
가위를 준비해라
삼신할미 같은 산파의 명령에 안절부절하던
아버지 모습처럼 나도 아버지가 되었지
병실에서 버스 운전기사 앞에 걸어 놓은 기도 사진처럼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처럼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잘못을 여물 되새기듯 되새기며
제발 남들처럼 아무 일 없기를

산모 고통이 내 잘못인 것 같고
아이 아픔이 내 업인 것처럼
빚 진자의 애원처럼
이번만 봐주면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갚겠다고

보지도 못한 내 어릴 적 얼굴이 이랬다며
아이 탄생으로 나를 봤다
창조주가 그랬으려니
내 모습처럼 눈 코 입 손발이 닮은 아이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아빠 얼굴

많이 먹고 잘 먹고 잘 자면 좀 좋아
조금 먹고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잠이 부족해 부스스하던 날들도 가고
내 키보다 큰아들 모습에도 근심은 떠날 길 없고.


#작가의 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세상엔 이쁘고 잘생긴 아기들이 많지만, 엄마 마음엔 늘 자신의 아기가 가장 소중하다. 과학적으로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만나 그 결합으로 아기가 태어났고,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씨도둑질 못 한다고 나의 복사판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식물에 암수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사랑을 나르고 이 꽃 저곳을 우편배달부처럼 사랑 배달을 하듯이 아이도 그렇게 사랑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달콤한 꿀처럼 사랑만 먹고 자라야 하지만 엄마 젖을 먹지도 못하고 소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자다가 눈도 뜨지 못하고 따뜻한 물에 분유를 타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시간에 아이 몸에서 나는 우유 냄새에 취해 똥을 싸고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빨고 빨랫감이 빨랫줄에 세상이 하얗게 변하도록 널어도 뽀송뽀송한 기저귀 냄새조차 좋았지.

그 볼에 얼굴을 비비는 그 시간엔 몰랐을 아빠 엄마는 아이가 웃는 모습에도, 아이가 기지개하는 모습에도 모든 게 좋았다. 뒤집고 기고, 짚고 일어서고, 걷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 모습에 앞으로 있을 고통스러운 순간은 상상도 못 한다.

세상엔 이미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고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아이는 안 그럴 거라며 혼자만의 믿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볼 수 없어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아이를 지옥으로 내몰면서도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더욱 채찍을 휘두른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낮과 밤으로 나누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후에 창조주는 자신을 닮은 인간 남자를 흙으로 창조하고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 갈빗대를 빼서 짝인 여자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면 창조주인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으로 자식인 인간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인간인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사탄을 만들고 선악과를 만들어 삶에 함정을 아주 많이도 파 놓았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로 사탄인 뱀의 꼬임에 넘어가 어리숙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든 원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창조주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알고 설계하고 창조했을 터인데 세상은 늘 고통 속에 살고 살아 있는 지옥 같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놓고 사랑보다는 미움과 다툼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배고픔에 고통받는 인류, 뻔한 앞도 내다보지 못해 지하 차도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이태원 길거리에서 생떼 같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 중동에서 끝없는 전쟁으로 수없는 생명이 목숨을 잃고, 더위에, 홍수에, 산불에 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있는 일이라면 사랑의 하느님은 죽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돈이 사람 목숨보다 귀한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 목숨을 곤충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세상을 만든 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없는 게 낫다. 약한 자를 위해 법을 만들고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부를 만들었지만, 왕정 시대처럼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명품 가방과 명품 양복, 페라리 같은 명품 차가 인간을 보는 가치가 된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동학 혁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종교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인내천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계급 사회는 원숭이 사회와 같고, 오랑우탄처럼 인간을 인간이 서로가 죽이고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낀다. 남의 불행을 보고 불안해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박수하는 사탄이 사람 속에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보는 불교에서도 돈을 가진 자, 공양을 많이 하는 자가 대접 받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버림받아 미국인, 스웨덴인으로 자란 아이들이 정체성에 괴로워하듯이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양된 백인 아이가 백인이어서 다른 외모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다.

서로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늘 창끝을 들이민다. 사람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아기가 모두 이쁜 것은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녀로 태어나서 미국인으로 살아 성공한 아이들도 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의 미소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주도 인간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인체가 매우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놀라고는 한다. 그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을 이미 인간은 가지고 있다. 물론 흙으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 유전자 복제이지만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공동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내 종교는 맞고 당신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의 생존 경쟁만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원숭이의 한 종이 진화해서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을 믿는다. 하느님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있었으면 초기 인류는 왜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는 미개 문명 속에 살아야 했을까? 선택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은 왜 수백 년을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만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같은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과 기독교 이슬람은 늘 전쟁하고 서로를 사탄이라 칭하고 이단이라고 말할까?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왜 불교에서는 이교도에 밀리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사라지고 한국에서만 천년을 넘게 꽃 피우다 기독교 국가처럼 되어 버렸을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계획한 것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부모인데 하느님은 왜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지도자로 세워 놓았을까? 아가의 얼굴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륵으로 오실 날을 기다려 본다. 우리 부처님은 창조주와는 다르게 자비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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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인체가 매우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놀라고는 한다. 그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을 이미 인간은 가지고 있다. 물론 흙으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 유전자 복제이지만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공동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내 종교는 맞고 당신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의 생존 경쟁만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원숭이의 한 종이 진화해서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을 믿는다. 하느님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있었으면 초기 인류는 왜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는 미개 문명 속에 살아야 했을까? 선택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은 왜 수백 년을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만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같은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과 기독교 이슬람은 늘 전쟁하고 서로를 사탄이라 칭하고 이단이라고 말할까?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왜 불교에서는 이교도에 밀리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사라지고 한국에서만 천년을 넘게 꽃 피우다 기독교 국가처럼 되어 버렸을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계획한 것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부모인데 하느님은 왜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지도자로 세워 놓았을까? 아가의 얼굴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륵으로 오실 날을 기다려 본다. 우리 부처님은 창조주와는 다르게 자비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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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통이 심하면 아빠 머리채를 잡는 드라마처럼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제왕 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아이
수술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
병실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긴 터널

따뜻한 물 떠와라
가위를 준비해라
삼신할미 같은 산파의 명령에 안절부절하던
아버지 모습처럼 나도 아버지가 되었지
병실에서 버스 운전기사 앞에 걸어 놓은 기도 사진처럼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처럼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잘못을 여물 되새기듯 되새기며
제발 남들처럼 아무 일 없기를

산모 고통이 내 잘못인 것 같고
아이 아픔이 내 업인 것처럼
빚 진자의 애원처럼
이번만 봐주면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갚겠다고

보지도 못한 내 어릴 적 얼굴이 이랬다며
아이 탄생으로 나를 봤다
창조주가 그랬으려니
내 모습처럼 눈 코 입 손발이 닮은 아이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아빠 얼굴

많이 먹고 잘 먹고 잘 자면 좀 좋아
조금 먹고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잠이 부족해 부스스하던 날들도 가고
내 키보다 큰아들 모습에도 근심은 떠날 길 없고.


#작가의 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세상엔 이쁘고 잘생긴 아기들이 많지만, 엄마 마음엔 늘 자신의 아기가 가장 소중하다. 과학적으로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가 만나 그 결합으로 아기가 태어났고,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씨도둑질 못 한다고 나의 복사판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식물에 암수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사랑을 나르고 이 꽃 저곳을 우편배달부처럼 사랑 배달을 하듯이 아이도 그렇게 사랑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달콤한 꿀처럼 사랑만 먹고 자라야 하지만 엄마 젖을 먹지도 못하고 소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자다가 눈도 뜨지 못하고 따뜻한 물에 분유를 타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시간에 아이 몸에서 나는 우유 냄새에 취해 똥을 싸고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빨고 빨랫감이 빨랫줄에 세상이 하얗게 변하도록 널어도 뽀송뽀송한 기저귀 냄새조차 좋았지.

그 볼에 얼굴을 비비는 그 시간엔 몰랐을 아빠 엄마는 아이가 웃는 모습에도, 아이가 기지개하는 모습에도 모든 게 좋았다. 뒤집고 기고, 짚고 일어서고, 걷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 모습에 앞으로 있을 고통스러운 순간은 상상도 못 한다.

세상엔 이미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고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아이는 안 그럴 거라며 혼자만의 믿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볼 수 없어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아이를 지옥으로 내몰면서도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더욱 채찍을 휘두른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낮과 밤으로 나누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후에 창조주는 자신을 닮은 인간 남자를 흙으로 창조하고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 갈빗대를 빼서 짝인 여자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면 창조주인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으로 자식인 인간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인간인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사탄을 만들고 선악과를 만들어 삶에 함정을 아주 많이도 파 놓았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로 사탄인 뱀의 꼬임에 넘어가 어리숙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든 원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창조주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알고 설계하고 창조했을 터인데 세상은 늘 고통 속에 살고 살아 있는 지옥 같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놓고 사랑보다는 미움과 다툼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배고픔에 고통받는 인류, 뻔한 앞도 내다보지 못해 지하 차도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이태원 길거리에서 생떼 같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 중동에서 끝없는 전쟁으로 수없는 생명이 목숨을 잃고, 더위에, 홍수에, 산불에 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있는 일이라면 사랑의 하느님은 죽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돈이 사람 목숨보다 귀한 세상을 만들어서 사람 목숨을 곤충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세상을 만든 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없는 게 낫다. 약한 자를 위해 법을 만들고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부를 만들었지만, 왕정 시대처럼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명품 가방과 명품 양복, 페라리 같은 명품 차가 인간을 보는 가치가 된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죽었다.

동학 혁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종교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인내천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계급 사회는 원숭이 사회와 같고, 오랑우탄처럼 인간을 인간이 서로가 죽이고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낀다. 남의 불행을 보고 불안해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박수하는 사탄이 사람 속에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보는 불교에서도 돈을 가진 자, 공양을 많이 하는 자가 대접 받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버림받아 미국인, 스웨덴인으로 자란 아이들이 정체성에 괴로워하듯이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양된 백인 아이가 백인이어서 다른 외모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다.

서로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늘 창끝을 들이민다. 사람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아기가 모두 이쁜 것은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녀로 태어나서 미국인으로 살아 성공한 아이들도 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의 미소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주도 인간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인체가 매우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놀라고는 한다. 그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을 이미 인간은 가지고 있다. 물론 흙으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 유전자 복제이지만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공동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내 종교는 맞고 당신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의 생존 경쟁만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원숭이의 한 종이 진화해서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을 믿는다. 하느님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있었으면 초기 인류는 왜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는 미개 문명 속에 살아야 했을까? 선택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은 왜 수백 년을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만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같은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과 기독교 이슬람은 늘 전쟁하고 서로를 사탄이라 칭하고 이단이라고 말할까?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왜 불교에서는 이교도에 밀리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사라지고 한국에서만 천년을 넘게 꽃 피우다 기독교 국가처럼 되어 버렸을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계획한 것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부모인데 하느님은 왜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지도자로 세워 놓았을까? 아가의 얼굴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륵으로 오실 날을 기다려 본다. 우리 부처님은 창조주와는 다르게 자비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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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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