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6. 살아 온 날이 얼만 데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26. 살아 온 날이 얼만 데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8.15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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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이꺼 좀 서러우면 어때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면 되지
까이꺼 좀 아프면 어때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면 되지

살아 온 나이테
소나무처럼 철갑 안에 꼭꼭 감추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허공에 다 소리치면 칠수록
동굴 속 울림처럼 메아리쳐 온다

그땐 그 말뜻을 몰랐다
젊은 게 자신감일 줄은
그땐 그 말뜻 몰랐네
넘어질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
넘어질 때마다 무릎보다
마음이 더 다친다는 것을
한마디 말에도
어린애처럼 상처가 난다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작가의 변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 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1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석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목이 파먹힌 토끼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 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의해 움직인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 19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던,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렌트비가 2,000불에서 3 ,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오래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 베드룸만 신청가능하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목소리 높인다.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즈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있고 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지만 모든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에게 원망을 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 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 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나는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크로즈 업 된다. 알버타 주나 사스케치완 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이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아내는 다 큰 아이들도 아기라면서 먹을 것을 사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 챙겨 주려고 한다. 아빠가 돼서 애들처럼 먹는 것을 애들과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몸에도 안 좋은 빵 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딸이 먹고 싶은 빵 사 오라고 했다고 정말 하나씩 샀다. 내가 저녁에 옥수수와 감자 쪄서 그냥 간단히 먹자고 했지만 나만 그렇게 먹고 나중에 아이들 먹는 식탁을 보니 아이들은 바베큐 폭 중국 마켓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야 하는 것을 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엄마도 시장 갔다고 호빵을 두 개만 사 와서 동생과 나에게만 준 기억이 있다. 속은 배추를 개울에서 씻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 시장에 가서 팔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은 호빵을 가족 전체 숫자에 맞춰 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는 시장에서 사 먹었나보다, 그리 생각했다. 삶은 햇감자 와 옥수수를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삶은 감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는 주지 않은 고기반찬을 따로 챙겨 주는데 감자를 먹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은행에서 은퇴 자금으로 월급에서 떼어 놓았던 RRSP중 일부가 투자를 안 하고 계좌에 그냥 있다고 해서 한인 신용조합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하기를 그쪽으로 옮기면 트랜스퍼 비용이 들고 일부만 옮기게 된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더니 운전면허가 갱신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래서 보험 공사에 갔더니 사람이 인산인해다. 일단 긴 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리니 대기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했냐고 해서 안 했다고 하니 뭣 때문에 왔냐고 했다. 운전면허가 면허 만기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내밀었더니 벌써 몇 달이 됐다면서 왜 이리 늦었냐고 했다. 그동안 아파서 아내가 운전했고 운전면허 갱신 편지도 못 받았다고 했다.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 번호가 전광판에 계속 나오는데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딴전을 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건 내 번호 바로 앞번호가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저쪽 구석에 아이들 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들린다. 아이들 어릴 때 운전면허 딴다고 이론 시험도 몇 번 떨어지고 실기 시험은 4번을 넘게 본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필기시험 보는 사람들을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보였다.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N자 표시를 받아 든 어린 친구를 보면서 운전면허 따고 기뻐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 원래는 아내와 함께 은행 가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점심을 주지 않고 딸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핀잔을 해서 기다리다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은행에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내가 미안해하면서 “옥수수 반 개와 조그만 스낵 하나를 먹으라”고 하고 아들은 “가서 뭐 사먹으라며 카드를 내미는 것을 됐다고 하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스낵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만에 왔는데 다른 노선이라 또 기다리다 은행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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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이꺼 좀 서러우면 어때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면 되지
까이꺼 좀 아프면 어때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면 되지

살아 온 나이테
소나무처럼 철갑 안에 꼭꼭 감추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허공에 다 소리치면 칠수록
동굴 속 울림처럼 메아리쳐 온다

그땐 그 말뜻을 몰랐다
젊은 게 자신감일 줄은
그땐 그 말뜻 몰랐네
넘어질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
넘어질 때마다 무릎보다
마음이 더 다친다는 것을
한마디 말에도
어린애처럼 상처가 난다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그까이꺼 좀 서러우면 어때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면 되지
까이꺼 좀 아프면 어때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면 되지

살아 온 나이테
소나무처럼 철갑 안에 꼭꼭 감추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허공에 다 소리치면 칠수록
동굴 속 울림처럼 메아리쳐 온다

그땐 그 말뜻을 몰랐다
젊은 게 자신감일 줄은
그땐 그 말뜻 몰랐네
넘어질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
넘어질 때마다 무릎보다
마음이 더 다친다는 것을
한마디 말에도
어린애처럼 상처가 난다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작가의 변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 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1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석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목이 파먹힌 토끼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 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의해 움직인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 19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던,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렌트비가 2,000불에서 3 ,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오래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 베드룸만 신청가능하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목소리 높인다.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즈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있고 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지만 모든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에게 원망을 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 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 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나는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크로즈 업 된다. 알버타 주나 사스케치완 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이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아내는 다 큰 아이들도 아기라면서 먹을 것을 사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 챙겨 주려고 한다. 아빠가 돼서 애들처럼 먹는 것을 애들과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몸에도 안 좋은 빵 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딸이 먹고 싶은 빵 사 오라고 했다고 정말 하나씩 샀다. 내가 저녁에 옥수수와 감자 쪄서 그냥 간단히 먹자고 했지만 나만 그렇게 먹고 나중에 아이들 먹는 식탁을 보니 아이들은 바베큐 폭 중국 마켓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야 하는 것을 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엄마도 시장 갔다고 호빵을 두 개만 사 와서 동생과 나에게만 준 기억이 있다. 속은 배추를 개울에서 씻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 시장에 가서 팔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은 호빵을 가족 전체 숫자에 맞춰 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는 시장에서 사 먹었나보다, 그리 생각했다. 삶은 햇감자 와 옥수수를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삶은 감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는 주지 않은 고기반찬을 따로 챙겨 주는데 감자를 먹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은행에서 은퇴 자금으로 월급에서 떼어 놓았던 RRSP중 일부가 투자를 안 하고 계좌에 그냥 있다고 해서 한인 신용조합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하기를 그쪽으로 옮기면 트랜스퍼 비용이 들고 일부만 옮기게 된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더니 운전면허가 갱신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래서 보험 공사에 갔더니 사람이 인산인해다. 일단 긴 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리니 대기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했냐고 해서 안 했다고 하니 뭣 때문에 왔냐고 했다. 운전면허가 면허 만기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내밀었더니 벌써 몇 달이 됐다면서 왜 이리 늦었냐고 했다. 그동안 아파서 아내가 운전했고 운전면허 갱신 편지도 못 받았다고 했다.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 번호가 전광판에 계속 나오는데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딴전을 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건 내 번호 바로 앞번호가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저쪽 구석에 아이들 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들린다. 아이들 어릴 때 운전면허 딴다고 이론 시험도 몇 번 떨어지고 실기 시험은 4번을 넘게 본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필기시험 보는 사람들을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보였다.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N자 표시를 받아 든 어린 친구를 보면서 운전면허 따고 기뻐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 원래는 아내와 함께 은행 가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점심을 주지 않고 딸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핀잔을 해서 기다리다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은행에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내가 미안해하면서 “옥수수 반 개와 조그만 스낵 하나를 먹으라”고 하고 아들은 “가서 뭐 사먹으라며 카드를 내미는 것을 됐다고 하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스낵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만에 왔는데 다른 노선이라 또 기다리다 은행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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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 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1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석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목이 파먹힌 토끼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 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의해 움직인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 19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던,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렌트비가 2,000불에서 3 ,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오래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 베드룸만 신청가능하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목소리 높인다.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즈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있고 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지만 모든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그까이꺼 좀 서러우면 어때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면 되지
까이꺼 좀 아프면 어때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면 되지

살아 온 나이테
소나무처럼 철갑 안에 꼭꼭 감추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허공에 다 소리치면 칠수록
동굴 속 울림처럼 메아리쳐 온다

그땐 그 말뜻을 몰랐다
젊은 게 자신감일 줄은
그땐 그 말뜻 몰랐네
넘어질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
넘어질 때마다 무릎보다
마음이 더 다친다는 것을
한마디 말에도
어린애처럼 상처가 난다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작가의 변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 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1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석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목이 파먹힌 토끼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 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의해 움직인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 19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던,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렌트비가 2,000불에서 3 ,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오래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 베드룸만 신청가능하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목소리 높인다.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즈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있고 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지만 모든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에게 원망을 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 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 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나는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크로즈 업 된다. 알버타 주나 사스케치완 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이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아내는 다 큰 아이들도 아기라면서 먹을 것을 사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 챙겨 주려고 한다. 아빠가 돼서 애들처럼 먹는 것을 애들과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몸에도 안 좋은 빵 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딸이 먹고 싶은 빵 사 오라고 했다고 정말 하나씩 샀다. 내가 저녁에 옥수수와 감자 쪄서 그냥 간단히 먹자고 했지만 나만 그렇게 먹고 나중에 아이들 먹는 식탁을 보니 아이들은 바베큐 폭 중국 마켓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야 하는 것을 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엄마도 시장 갔다고 호빵을 두 개만 사 와서 동생과 나에게만 준 기억이 있다. 속은 배추를 개울에서 씻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 시장에 가서 팔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은 호빵을 가족 전체 숫자에 맞춰 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는 시장에서 사 먹었나보다, 그리 생각했다. 삶은 햇감자 와 옥수수를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삶은 감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는 주지 않은 고기반찬을 따로 챙겨 주는데 감자를 먹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은행에서 은퇴 자금으로 월급에서 떼어 놓았던 RRSP중 일부가 투자를 안 하고 계좌에 그냥 있다고 해서 한인 신용조합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하기를 그쪽으로 옮기면 트랜스퍼 비용이 들고 일부만 옮기게 된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더니 운전면허가 갱신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래서 보험 공사에 갔더니 사람이 인산인해다. 일단 긴 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리니 대기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했냐고 해서 안 했다고 하니 뭣 때문에 왔냐고 했다. 운전면허가 면허 만기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내밀었더니 벌써 몇 달이 됐다면서 왜 이리 늦었냐고 했다. 그동안 아파서 아내가 운전했고 운전면허 갱신 편지도 못 받았다고 했다.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 번호가 전광판에 계속 나오는데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딴전을 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건 내 번호 바로 앞번호가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저쪽 구석에 아이들 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들린다. 아이들 어릴 때 운전면허 딴다고 이론 시험도 몇 번 떨어지고 실기 시험은 4번을 넘게 본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필기시험 보는 사람들을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보였다.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N자 표시를 받아 든 어린 친구를 보면서 운전면허 따고 기뻐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 원래는 아내와 함께 은행 가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점심을 주지 않고 딸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핀잔을 해서 기다리다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은행에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내가 미안해하면서 “옥수수 반 개와 조그만 스낵 하나를 먹으라”고 하고 아들은 “가서 뭐 사먹으라며 카드를 내미는 것을 됐다고 하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스낵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만에 왔는데 다른 노선이라 또 기다리다 은행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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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에게 원망을 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 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 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나는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크로즈 업 된다. 알버타 주나 사스케치완 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이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아내는 다 큰 아이들도 아기라면서 먹을 것을 사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 챙겨 주려고 한다. 아빠가 돼서 애들처럼 먹는 것을 애들과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몸에도 안 좋은 빵 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딸이 먹고 싶은 빵 사 오라고 했다고 정말 하나씩 샀다. 내가 저녁에 옥수수와 감자 쪄서 그냥 간단히 먹자고 했지만 나만 그렇게 먹고 나중에 아이들 먹는 식탁을 보니 아이들은 바베큐 폭 중국 마켓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야 하는 것을 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엄마도 시장 갔다고 호빵을 두 개만 사 와서 동생과 나에게만 준 기억이 있다. 속은 배추를 개울에서 씻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 시장에 가서 팔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은 호빵을 가족 전체 숫자에 맞춰 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는 시장에서 사 먹었나보다, 그리 생각했다. 삶은 햇감자 와 옥수수를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삶은 감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는 주지 않은 고기반찬을 따로 챙겨 주는데 감자를 먹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은행에서 은퇴 자금으로 월급에서 떼어 놓았던 RRSP중 일부가 투자를 안 하고 계좌에 그냥 있다고 해서 한인 신용조합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하기를 그쪽으로 옮기면 트랜스퍼 비용이 들고 일부만 옮기게 된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더니 운전면허가 갱신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래서 보험 공사에 갔더니 사람이 인산인해다. 일단 긴 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리니 대기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했냐고 해서 안 했다고 하니 뭣 때문에 왔냐고 했다. 운전면허가 면허 만기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내밀었더니 벌써 몇 달이 됐다면서 왜 이리 늦었냐고 했다. 그동안 아파서 아내가 운전했고 운전면허 갱신 편지도 못 받았다고 했다.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 번호가 전광판에 계속 나오는데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딴전을 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건 내 번호 바로 앞번호가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저쪽 구석에 아이들 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들린다. 아이들 어릴 때 운전면허 딴다고 이론 시험도 몇 번 떨어지고 실기 시험은 4번을 넘게 본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필기시험 보는 사람들을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보였다.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N자 표시를 받아 든 어린 친구를 보면서 운전면허 따고 기뻐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 원래는 아내와 함께 은행 가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점심을 주지 않고 딸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핀잔을 해서 기다리다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은행에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내가 미안해하면서 “옥수수 반 개와 조그만 스낵 하나를 먹으라”고 하고 아들은 “가서 뭐 사먹으라며 카드를 내미는 것을 됐다고 하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스낵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만에 왔는데 다른 노선이라 또 기다리다 은행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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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이꺼 좀 서러우면 어때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면 되지
까이꺼 좀 아프면 어때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면 되지

살아 온 나이테
소나무처럼 철갑 안에 꼭꼭 감추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살만하다고
허공에 다 소리치면 칠수록
동굴 속 울림처럼 메아리쳐 온다

그땐 그 말뜻을 몰랐다
젊은 게 자신감일 줄은
그땐 그 말뜻 몰랐네
넘어질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지
넘어질 때마다 무릎보다
마음이 더 다친다는 것을
한마디 말에도
어린애처럼 상처가 난다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작가의 변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 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1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석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목이 파먹힌 토끼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 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의해 움직인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 19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던,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을 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렌트비가 2,000불에서 3 ,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오래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 베드룸만 신청가능하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목소리 높인다.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즈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있고 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지만 모든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에게 원망을 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 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 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나는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크로즈 업 된다. 알버타 주나 사스케치완 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이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아내는 다 큰 아이들도 아기라면서 먹을 것을 사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고 챙겨 주려고 한다. 아빠가 돼서 애들처럼 먹는 것을 애들과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몸에도 안 좋은 빵 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딸이 먹고 싶은 빵 사 오라고 했다고 정말 하나씩 샀다. 내가 저녁에 옥수수와 감자 쪄서 그냥 간단히 먹자고 했지만 나만 그렇게 먹고 나중에 아이들 먹는 식탁을 보니 아이들은 바베큐 폭 중국 마켓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야 하는 것을 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엄마도 시장 갔다고 호빵을 두 개만 사 와서 동생과 나에게만 준 기억이 있다. 속은 배추를 개울에서 씻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 시장에 가서 팔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은 호빵을 가족 전체 숫자에 맞춰 사는 게 버거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엄마는 시장에서 사 먹었나보다, 그리 생각했다. 삶은 햇감자 와 옥수수를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삶은 감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는 주지 않은 고기반찬을 따로 챙겨 주는데 감자를 먹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은행에서 은퇴 자금으로 월급에서 떼어 놓았던 RRSP중 일부가 투자를 안 하고 계좌에 그냥 있다고 해서 한인 신용조합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하기를 그쪽으로 옮기면 트랜스퍼 비용이 들고 일부만 옮기게 된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더니 운전면허가 갱신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래서 보험 공사에 갔더니 사람이 인산인해다. 일단 긴 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리니 대기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했냐고 해서 안 했다고 하니 뭣 때문에 왔냐고 했다. 운전면허가 면허 만기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내밀었더니 벌써 몇 달이 됐다면서 왜 이리 늦었냐고 했다. 그동안 아파서 아내가 운전했고 운전면허 갱신 편지도 못 받았다고 했다.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기 번호가 전광판에 계속 나오는데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딴전을 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건 내 번호 바로 앞번호가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저쪽 구석에 아이들 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들린다. 아이들 어릴 때 운전면허 딴다고 이론 시험도 몇 번 떨어지고 실기 시험은 4번을 넘게 본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필기시험 보는 사람들을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보였다.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N자 표시를 받아 든 어린 친구를 보면서 운전면허 따고 기뻐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늘 원래는 아내와 함께 은행 가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점심을 주지 않고 딸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핀잔을 해서 기다리다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은행에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내가 미안해하면서 “옥수수 반 개와 조그만 스낵 하나를 먹으라”고 하고 아들은 “가서 뭐 사먹으라며 카드를 내미는 것을 됐다고 하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스낵을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만에 왔는데 다른 노선이라 또 기다리다 은행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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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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