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즈기르에서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장터에서 어느 어린 소녀가 물푸레나무가지인 것 같은 지팡이를 팔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 지팡이 하나만을 팔려고 앉아 있었다. 그 많은 군중에서 필자를 보더니 다가와서 50루피라고 외치면서 꼭 사가기를 바랬다. 우리 돈으로 800원이다. 별 생각 없이 사놓고 숙소에서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가 아주 단단하고 손에 쥐기에도 좋다.
그전까지는 위 사진에서 보듯 대나무 깃발을 손에 쥐고 다니면서 지팡이 겸용으로 썼다. 대나무는 끝이 갈라져서 장기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소녀가 준 나뭇가지는 다르다. 단단하기가 나무 아닌 차돌 같다. 그러면서 아주 가볍다. 그 때 이후 언젠가부터 깃발을 매달아 갖고 다녔다. 지팡이로도 호신용으로도 요긴한 역할을 했다. 그 인연이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예사로운 인연이 아니다

다음날 영축산에서 15km 떨어진 날란다 사원으로 갔다. 순례코스에 있는 곳이다. 갠지즈강 유역은 겨울철 내내 안개가 끼는 편이다. 부처님도 이런 안개길을 걸으셨으리라


날란다 사원은 한 때 1만 명이 넘는 학자와 스님들이 기거했던 대학 캠퍼스다. 유적이 있는 곳만 수십만 평은 족히 되어 보인다. 확인해보니, 당시에는 가로 세로 5km, 11km인 거대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유네스코의 소개에 의하면, '날란다 대승원(大僧院, Nalanda Mahavihara) 유적은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 주에 있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3세기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이자 교육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고고학 유적을 남겼다. 유산은 대형 사리탑(stupa), 부도탑, 비하라(vihara, 거처 또는 교육용 건물), 벽화나 돌 또는 금속의 예술 작품 등을 포함한다. 날란다는 인도 아대륙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교다. 이 대학교는 800년 넘는 세월 동안 중단 없이 연구하여 체계화된 지식을 전승하고 있다. 날란다 대승원은 종교로서 불교의 성장, 승려 및 교육 전통의 번영 등을 보여주는 역사적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날란다왕문경’이라는 불교 경전으로도 잘 알려진 이 사원은 부처님 이후 시대를 넘어 수준이 높기로도 유명했다. 여러 왕조에 걸쳐 지원을 받은 곳이긴 하지만, 당시에 이만한 규모의 조직을 하나의 공간에서 운영하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질적으로도 불교이치를 성숙시킨 장이었다.





라즈기르와 날란다를 뒤로 하고 그 다음 성지인 바이샬리(Vaishali)를 향해 걷는다. 그곳에 이르자면 파트나(Patna)라는 대도시를 거쳐 그에 인접한 갠지즈강을 넘어야 한다.







마침 혼자 걷는 날, 파트나라는 대도시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자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마을의 청소년 네 명이 자전거를 몰면서 다가와서 돈을 구걸한다.
그동안 외국관광객이 많은 비하르지역에 들어와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자주 보았다. 문제는 적선에 길들여진 탓인지 멀쩡하게 보이는 어른들도 구걸행위를 하는 것이다. 잘못된 관행이 습관화된 것이다. 어린 청소년들은 이런 어른들도 보고 자란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필자는 위기를 느꼈다. 혼자 걷고 있는 시골길에서 이런 식의 구걸은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할 수도 있다. 그들은 겁 없는 나이들이다. 잘못하면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필자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때마침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지나가는 오토릭샤(일종의 간이택시)가 있어서 세우고 올라탔다. 그리고 마을을 멀리 돌아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지나고나니 인도 뿐 아니라 필자의 긴 순례 가운데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위기를 벗어난 그곳에서 따끈한 짜이를 마셨다. 가게에서 친해진 동네노인들과 푸근한 시간을 보낸다.

걸어가고 있노라니 '안녕하세요'라는 우리말과 함께 하얀 승용차의 운전자가 창을 열고 인사를 한다. 이 분은 연수차 한국에서 1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토목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단다. 베트남과 태국에 이어 만난 세 번째의 한국체류경험 인사다. 이런 분들이 지구촌 곳곳에 있다. 그들이야말로 현지에서 한국을 알리는 외교관이나 다름없다.


어느 큰 마을에 접어들어서 짜이를 마시고 있는데 호기심에 가득한 청년들이 다가왔다. 한가한 겨울철에 수상한 나그네가 등장한 것이다. 지도현수막을 펴들고 설명하니 새로운 세상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이며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 그들에게 필자가 함께 걷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들 놀란듯 멈칫 한걸음 물러선다. 함께 사진 한 컷.

파트나를 지나 갠지즈강 다리를 건넌다. 건너고 보니 범람원까지 폭이 거의 10 km는 되는 것 같다. 본 다리가 보수공사때문에 차선을 줄여서 운영하는 바람에 부교가 설치되었다.


다리 이음새가 부실하다. 걸으면서 25년 전쯤의 한국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생각났다. 다리가 무너져도 적지 않은 사람이 죽는데 원전사고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내고 있는가? 모든 기계는 수명이 있고 그 과정에서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기계를 머리맡에 두고 사는 인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옹호하는데 열중하는 언론이나 세력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후손을 상대로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는, 양심파괴 행위에 앞장서는 이들을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미워하실 것이다.

날씨가 추운 기간은 짧지만 난방시스템이 없는 이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넘기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모닥불을 쬐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어느 마을을 지나치는데 나그네를 부르는 영어가 들린다. 맨 오른쪽 주부는 영어가 유창할 뿐더러 발음도 표준에 가깝다. 남자들 영어는 힌디어 억양이 섞여서 알아듣기 쉽지 않은데 이 분 영어는 또렷하게 들린다.
인도여성은 고등교육을 받았다할지라도 이렇게 가정에 파묻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일한 계급 안에서도 여성의 신분은 더 낮다. 하지만 시대가 부르고 있다. 장차 지구촌 일꾼으로 활용될 잠재적인 인재들이다.

영국식 기숙학교를 알리는 홍보판이 도처에 있다. 인도도 교육열은 뜨겁다. 계급차별사회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인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교육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어서이다.
물론 아직 차별적 집단체제 속에 살다보니 공공가치에 대한 의사결정 훈련은 잘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쓰레기가 만연한 거리라든가, 무질서한 교통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민주적 선거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고, 교육열이 뒷받침하고 있는 만큼 한두 세대가 지나면 훨씬 나아지리라 생각된다. 그 14억 인구의 잠재력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았다.
/ 이원영 수원대 교수·한국탈핵에너지학회 부회장 leewysu@gmail.com